순환선(循環線) 4.
- 달빛의 진혼곡 -
[road 8. 비밀의 화원]
" 이보게, 자네. 자네도 한잔 들지 그래. "
주위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푸른 하늘은 맑기만 하다.
그는 그곳에 식탁을 펴고 느긋하게 차를 따라 마셨다.
" 왜 그러는가. 차가 맛이 없는가? 분명 자네가 좋아하는 홍차란 말일세, 한모금만 마셔 봐. "
그러나 마주앉은 곰인형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더이상... 웃지 않았다.
*
" 오늘의 숙소는 어디야? "
벌써 봄인가? 푸른 들판, 화사한 꽃밭, 향긋한 꽃내음. 이 모든것들은
한여름의 계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야말로 산뜻한 봄의 신호였다.
일레이는 남은 돈을 세어보며 닐에게 물었지만, 닐은 대답이 없었다.
" 글쎄...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새삼 주위를 둘러봤다. 온통 꽃밭 뿐이다. 사람은 없다.
" 뭐야, 이런데 와서 대체 뭘 어쩌자는거야? "
일레이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닐은 심각한 얼굴로 여전히 멈춰서있었다.
" 실은... "
" 실은? "
일레이도 걸음을 멈추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길을 잃은것 같아. "
열심히 지폐를 세던 그녀의 손놀림이 일순간에 정지했다.
닐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 그래도... 꽤 괜찮은곳 같지? "
그러나 먹을것도, 잘곳도, 심지어는 시간을 떼울만한 것도 없는 이 적막한 장소는
일레이에게 전혀 맞는 곳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길을 잃었다는 것.
" 괜찮긴 뭐가 괜찮아! "
일레이는 돈을 집어넣고, 다짜고짜 그에게 다가가서 소리쳤다.
이번만큼은 닐도 아무런 할말이 없었다. 그저 입 꾹 다물고, 그녀의 심기가 풀릴때까지
가만히 있을수밖에 없다.
" 이보게! 좀 조용히 할 수 없는가? 내 친구가 차를 못마시겠다잖아! "
이건 또 뭔 소리람? 분명 아무도 없는줄 알았는데.
그러고보니 저 앞에 왠 늙은이가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는것은 보인다.
그들은 곧장 그 노인에게 향했다.
" 저어, 실례지만... "
일레이는 말을 하려다가 이상한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은 혼자서 홍차를 따라 마시고 있었던게 아니라, 소꿉놀이를 하고있는것 같았다.
자기가 먼저 한잔 따라마시고, 상대방인 곰돌이 인형에게 한잔 따라주고.
그리고 한모금 마시고 나서, 디저트로 과자 한조각.
노인은 기뻐하며 밝게 웃음을 터뜨리고, 곰돌이는 말이 없다.
이게 그들이 목격한 이상한 광경의 전부였다.
" 거 참, 젊은이들이 귀가 막혔나? 내가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여기서 뭣들 하는거요? "
그들은 노인의 질문에 한순간 대답을 할수 없었다.
*
" 저기... 이 목걸이 말예요... "
소녀는 어젯밤을 설칠정도로 긴 고민끝에 클레드에게 겨우 질문을 꺼냈다.
식사중이던 클레드가 소녀를 바라봤다.
" 이 보석, 무슨 보석이죠? 볼수록 너무 예뻐서요... "
클레드는 잠시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 블러드. 전설의 보석이지. "
" 아... "
그러나 소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루비나 사파이어면 몰라도, 블러드라니?
그런 보석이름은 처음 들어본다. 그래도 전설의 보석이라니, 꽤 값비싼 것임은
틀림없을것 같다. 이런 귀한걸 자신한테 주다니, 소녀는 클레드의 깊은 마음에
감동하여 그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말없이 스프를 떠먹었다.
" 너한테 아주 잘 어울리는 목걸이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
소녀는 새삼 목걸이를 들여다봤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마음에 들었다.
생전 처음보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목걸이. 어제일은 단순한 꿈이었으리라
생각하며 소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 하하, 제가 묻고싶은 질문을 먼저 하시네요. 저흰... 길을 잃었어요. "
노인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그들을 천천히 바라봤다.
" 내 집에 잘 왔소. 어쨌든 손님들이니 오늘은 일단 여기서 머물다 가도록 해요. "
집… 이라고? 그래봤자 겨우 꽃밭 뿐인 이곳이 어떻게 집이 될수있지?
황당하지만, 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이는 물론 절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 그럼 일단 앉으시오. 내 차를 끓여 올테니. "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고급스러운 사기 주전자를 들고 저 멀리 사라졌다.
" 이런곳에 머물러서 뭘 어쩔 생각이야. "
" 그냥. 어차피 잘곳도 없는데 경찰한테 쫓길 위험도 없고 좋잖아? "
그래도 일레이는 역시 불만 투성이다. 무심코 담배를 입에물고 라이터로 불을 막 붙이려는 순간,
금새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노인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 안돼! " 하고 소리쳤다.
일레이는 순간 불은 껐지만, 저렇게까지 황급히 막을 필욘 없다고 생각하며 달려오는 노인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노인은 주전자를 들고 급히 달려오다가, 결국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 이런... 애꿎은 꽃들만 죽었구나. "
노인은 자신으로 인해 망그러진 꽃 몇송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옷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주전자를 들여다보니, 결국 물은 다 쏟아져버리고 없었다.
" 아, 괜찮아요. 저흰 차 생각 없어요. "
닐이 노인을 도와주며 말했다.
" 그럼 이 늙은이를 놀린건가? "
노인은 도리어 닐에게 투덜거리며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 요즘 젊은이들은... " 대충 이런식의 말이었다.
" 보아하니 여행자들이구만. 어때, 내 말이 맞지? "
" 아... 뭐, 그렇다고 할수 있죠. "
노인은 의자에, 닐과 일레이는 꽃밭에 앉았다.
" 그래, 이름이 뭐요? "
" 제 이름은... "
" 저쪽 이름은 칼, 내 이름은 칼리. "
닐이 말하려는 순간, 그의 옆에서 칼로 손톱을 다듬고있던 일레이가 말했다.
닐은 못말린다는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아주 단순하군. 칼질하다 떠오른 이름이 칼이라니. 칼리는 또 뭐람? "
닐의 속마음은 이랬지만, 차마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 그렇다면 혹시 남매인가? "
" 이봐요, 어차피 남남인데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알아봤자 뭐 좋을게 있다고. "
일레이가 또다시 끼어들며 투덜거렸다. 노인은 껄껄 웃으며 더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 그러는 할아버지는 이런 곳에서 뭐하고 계셨어요? "
" 아까 보지 못했느냐! 친구한테 차 대접을 하고있었건만, 너희들이 방해를 했잖아! "
닐은 힐끗 맞은편 의자에 놓여있는 곰돌이 인형을 쳐다봤다.
" 아주... 멋진 친구를 뒀군요. "
닐이 내뱉은 말이다. 그러자 옆에서 열심히 칼질하던(손톱다듬는 칼이아니라
신변보호용 단검이었다) 일레이가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노인은 역시 기분좋은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 그런데 정말 혼자서... 아니, 저 곰돌이 친구하고만 여기서 주욱 지내셨나요? "
" 그래. 그래봤자 겨우 10년이야. 그 애를 기다린 세월치고는 참 짧은세월이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만큼 지냈는데…. "
" 그 애? "
노인의 말에 또다시 궁금증이 돋은 닐이 되물었다.
노인은 한동안 과거를 회상하는듯 말이 없다가 한참후에 겨우 입을열었다.
" 내 딸아이지. 10년전에 헤어진 내 딸... 참으로 가엾은 아이야. "
노인은 씁쓸한듯, 결국 부질없다고 생각되는 마음에 웃었다.
" 잘 지내고 있을까... 그래, 그 애는 분명 잘 지낼거야. 난 그렇게 믿고싶네... "
그러고보니 왠일로 일레이가 조용하다 했다. 옆으로 고갤 돌려보니 그녀는 이미
온몸을 쭉 펴고 편안하게 누워서 자고있었다. 이렇게 날씨 좋고, 포근하고, 편안한 곳에서
잠이 안온다면 이상한거겠지. 그럼 난 이상한건가?
" 이 화원은 그 아이가 조금씩 가꾸던 꽃밭이었어. 집이 무너지고, 마을이 불타버렸을때
여기있던 모든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어. 다 그 <악마>의 짓이었지.
결국 그때 그 일로인해 가엾은 그 애 부모도 몰살당했고, 다행히 휘노 혼자만 살아남았어.
기적이었지. 그래, 그건 기적이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떠났어. 그 후로 난 그 아이의
사라져버린 꽃밭을 다시 키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온 마을 전체에 꽃이 퍼지게 됬지.
그 아이가 언젠가 돌아오면 보여주려고 이렇게 지키고 있는거야.
그 아이가 오면… 그동안 내가 너의 비밀의 화원을 지키고 있었노라고 말해주려고.
모든것이… 사라져버린건 아니라고 말해주려고… 그리고 10년이 흘렀지. "
휘노… 그립기만 한 이름 휘노. 벌써 10년, 아니 겨우 10년.
그동안 쌓인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세월일 뿐이다.
이렇게나마 그 아이의 일부를 지켜줄수 있다는게 행복하다.
그리고 이 꽃들이 그가 살아가는 유일한 인생의 낙이었다.
" 휘노…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
닐은 미세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살피려고 애를썼다. 분명 얼굴이 기억난다.
그 아이가 했던 행동들도. 이제야 조금씩 기억이 날듯하다.
" 날 죽이란 말야! 왜, 이정도면 사형감 아냐? "
" 돌아가. 너의 무죄는 이미 입증됐어. "
" 야 이 나쁜놈들아! 너희들이 그러고도 신전 요원이야? 날 죽여, 죽이란말야! "
" 이런데서 소동피우면 다친다. 가서 애들이랑 놀아. "
" 당신들... 원래 사람들 잘 죽이잖아. 그때도 그랬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잖아!
백성들을 위한다느니 어쩌면서 우리 마을을 박살내고, 악마를 물리친답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죽인... 그러고도 이렇게 당당한 살인마들이잖아! "
맞아. 이젠 뚜렷히 기억난다. 날 붙잡으며 제발 죽여달라고 소리치던 소녀.
결국은 신전 입구에서 요원들을 욕하다가 쫓겨나버린 조금은 어렸던 소녀.
그리고 그 소녀를 아직까지 기억할수 있었던건… 분명 며칠전 그 소녀의 사진이 실린
포스터를 봤기 때문이었다. 현상수배자 포스터에 실린 휘노라는 소녀를.
"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갈 길이 멀거든요. "
닐이 일레이를 깨우며 일어섰다. 겨우 졸린눈을 비비며 일어난 일레이는
벌써 가냐며 아까와는 정 반대로 투덜거렸다.
" 아, 그런가... 근다면 말리진 않겠네만 조금 아쉽군. 모처럼 만난 좋은 얘기상대였는데 말야. "
"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그땐 제 모험담을 들려드리죠. "
" 그거 좋지. "
닐과 일레이는 얼른 가던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면서 점이 되어가는 그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
지난번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발언으로 그의 관심을 끌었던 피에르.
그는 모든 피에르들을 다시 불러모아 적당히 위엄있고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 후손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녀와 힘을 합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에겐 샤아츠님이 계십니다. 정녕 그분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지금 가장 시급한건, 분노하신 샤아츠님의 마음을 풀어드리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
그나마 피에르들중 머리가 잘 돌아가는 피에르인것 같다.
다른 곳에서 나섰다면 젊은 영웅으로 인정받을만한 좋은 인재라고 생각했다.
" 한심한것들. "
그렇지만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호했다.
샤아츠 따위가 뭘 어떻게 할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철저히 샤아츠를 믿지 않았기에,
피에르들처럼 망상같은 헛것따위에 속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그였기에,
그 젊은 피에르의 말조차 한심하게 들린것이 당연했다.
그는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혼잣말로 나직하게 말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신전같은 곳은 따분해서 오래 있을곳이 못된다. 성스러운 신의 힘이 어쩌고 하며
떠들어대긴 하지만 다른건 없다. 단지 유별나게 깨끗하고, 철저하게 엄격한 경비와
지긋지긋할 정도로 똑같은 길과 건물들. 그게 다였다.
그래도 그가 이곳 신전을 찾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샤아츠의 부름을 받아서도, 신전에서 일하고있기 때문도 아니다.
마치 그녀의 마법에 빠져 헤어나올수 없게 홀린것처럼 저도 모르게 찾게된다.
꼭 하루에 한번이라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는것처럼.
정말이다. 애써 오지 않으려고 해도 그럼 그 날 만큼은 최악이다.
악몽의 연속이다. 결국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서는 살아갈수 없는
지독한 저주에 걸린 꼴이 된 셈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잠들어있지만 아직 살아있고,
살아있기에 그 힘이 아직도 강력하다는 것이다.
가에나. 그녀는 살아있음 그 자체가 화근이 되는 존재이다.
그는 천천히 계속해서 걸었다. 이윽고 하나의 방이 나타났다.
그 방 문을 활짝 열었을때 너무도 강력한 빛이 새어나온 탓에
그는 저절로 두 눈을 가려야했다. 뚫려있는것처럼 투명하고 큰 유리창이
밝은 햇살을 담아내어 눈부신 빛을 발한것이다. 그는 문을 닫고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높은 천장, 넒은 내부공간에는 넓게 트인 창문과 몇칸의 책꽂이가 있었다.
밑바닥에는 고급스러운 카펫이 깔려있었고, 그가 앉은 책상 또한 어느 귀족집
못지않게 무척 고급스러웠다. 긴 의자. 마치 저 높은 천장에게 대적하려는듯이
높은 긴 의자 등받이가 그의 위엄을 더욱 살려주는것 같다.
테이블 위에는 마침 주사위 두개가 놓여있었다. 이미 게임은 시작되려 하고있고
그걸 시작할 사람은 바로 그였다. 지금이 그 때인가.
" 인간, 사람. 그리고 그 최후의 결말… "
그는 주사위를 손에 담아 손을 높이 올린 뒤, 말끝을 흘리며
주사위 두개를 힘있게 던졌다.
" 악마. "
3과 1. 주사위가 뜻하는 숫자는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걸로서
게임이 시작됬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
" 당신 말대로 차라리 거기서 하루 지내고 가는게 더 나았을텐데... "
일레이가 아쉽다는듯 아까부터 한숨만 푹 내쉰다.
" 왜 말을 바꾸는거야? 그런 따분한 곳은 싫다며. "
" 하지만 지금 우리 상황이 그런걸 따질 처지가 아니잖아. 찬밥 더운밥 가릴때야?
그것도 어쩌면 기회인데. 모처럼 두다리 뻗고 잘수있는 편안한 기회말야. "
닐은 어쩔수 없다는듯 말을 말았다. 알수없는 어느 마을 거리를 천천히 걷고있었다.
평범하다. 그냥 마을이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한 소녀가 급히 달려오더니
닐과 일레이 사이에 부딪쳤다. 덕분에 그들은 나란히 고통을 느낄수 있었다.
" 뭐야! "
일레이가 소리쳤다. 하지만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칼, 그리고 팔뚝에 화상흉터.
닐은 문득 깨달았다. 방금 놓친 소녀가 휘노라는 것을.
게다가 그들은 유일한 전재산이 담긴 가방을 도둑맞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빠른 속도로 소녀를 뒤쫓았다. 물론 일레이도 함께.
*
" 이건 담배, 라이터, 낙서장, 쓰레기... 뭐야! 왜 돈이 없는거냐고! "
소녀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하나같이 쓸모없는 물건들을 내팽개쳤다.
그런데 그때 무슨 종이 하나가 섞여서 빠져나왔다.
" 현상수배범 포스터잖아. 어디보자... 1억?! "
닐의 포스터. 거기에 어마어마한 액수 1억.
그렇지만 S.J요원을 생포하는데는 좀 무리일것 같았다.
1억이라니, 조금 아쉽고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지만 하는수 없다. 소녀는 그것마저 바닥에 던지고,
다시 가방을 뒤적거렸다. 가방 맨 구석에는 소녀가 그토록 바라던 빳빳한 푸른 지폐들이
보란듯이 가방 맨밑에 자리하고있었다.
" 그렇지! 바로 이거야! "
소녀는 모처럼 만져보는 지폐의 촉감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소녀의 뒤통수에 무언가를 들이댔다.
느낌이 이상하다. 꼭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것 같은 느낌.
" 살고싶음 어서 그 가방 내놔. 그 돈들도 곱게 넣어서 말야. "
일레이였다. 소녀의 머리통에 다짜고짜 총부터 겨누는 그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신세다보니 돈이 소중할수밖에 없는 그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만큼 돈에 집착하고 또 집착했다.
역시 이 세상은 돈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고, 사람은 돈이 없으면 죽으니까.
돈이 사람을 살리고, 죽일수도 있는거다.
그 옆에, 닐은 일레이의 무책임한 행동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그러다 진짜 죽이면 어쩔거야? "
"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은 내 돈이 우선이야. "
하여간 못말린다, 저 여자는. 돈만 보면 환장을 하는 사람인데 오죽할까.
할수 없다는듯이 골목길에 놓여있는 낡아빠진 박스위에 걸터앉았다.
소녀는 가만히 쭈그려앉은 채로 두 손을 든 채 항복을 표현했다.
일레이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짐들을 챙겨서 가방을 념겨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말하며 소녀를 강요했다.
소녀는 그렇게 순순히 일어나는가 싶더니, 일어나는 동시에 일레이를 넘어뜨리면서
그녀가 떨어뜨린 권총을 얼른 손에 쥐었다.
" 야! 너 그거 이리 안내놔? 얼른 내놔! "
일레이는 당황하며 한발짝 물러섰다.
소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닐을 보자마자 움직이던 시선을 멈췄다.
" 아아ㅡ 그쪽이 거액의 현상범인 모양이군. 죽고싶지 않다면 나랑 동행해 줘야겠어. "
점점 닐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소녀가 총으로 협박했다.
하지만 닐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지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 살고싶어졌나? "
가만히 앉아있던 닐이 무심코 말했다.
순간 소녀는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고, 총을 겨누는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 무, 무슨 말이야! "
" 죽고싶다고 했지 않았던가. 죽여달라고 했잖아. 그새 잊었어? "
권총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게 느껴진다.
소녀는 당황한듯 식은땀을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겨눈 총을 거두지 않았다.
" 날 죽일게 아니라면, 그걸로 널 죽일게 아니라면, 내려놔라. 그건 너같은 어린애가
갖고 놀 장난감이 아냐. 어서 내려놔, 휘노. "
그러나 소녀는 닐의 말을 들을것 같지 않았다.
소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방아쇠를 천천히, 그리고 망설임없이 당겼다.
*
그것은 마치 무엇을 경고하는 환상의 꿈처럼 순간적으로 가끔씩 나타났다.
절대로 깨고싶지 않은, 잊고싶지 않은 그 느낌, 그 기분.
내 귓가를 간지럽히며 내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그 목소리, 그 노래.
그녀는 또다시 내게 주문을 걸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조금은 어두운 신전 가운데서 넓다란 창너머로 비치는 달빛을 받으며
하얀 원피스를 동그랗게 휘날리며 아름답게 춤을 춘다.
춤을 춘다.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달빛의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 피… 그것은 끊이지 않는 피의 향연, 달빛을 받은 피의 향연… "
주문을 걸고있다. 나풀거리는 한마리 나비처럼 아름답고 우아하게 춤을 추며,
그녀에게 속삭이듯 거부할수 없는 목소리로 주문을 걸어온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요동치고 있다. 소녀는 그녀의 주문소리를 듣고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잠옷차림으로 일어섰다. 동공은 이미 풀려있다.
누군가 소녀를 부르고있다. 소녀는 그것을 거부할수 없었다.
그것은 차마 피할수 없는 유혹이었다.
" 붉은 피, 붉은 달, 붉은 힘… 이것이 바로 달빛의 축제… "
가야 해, 가야 해… 그 무엇도 날 막을순 없어. 난 그녀를 만나야 해.
마치 숙명처럼 소녀는 강하게 느꼈다. 목에 걸린 소녀의 붉은 목걸이는
금방이라도 깨질듯 밝은 빛을 발하며 뜨겁게 열이 올라있었다.
" 가에나... "
그녀를 부르듯 소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 어서 오거라… 가엾은 영혼이여, 내 사랑스러운 딸이여…! "
그녀는 계속해서 소녀를 부르며 춤을 추고있다. 달빛을 즐기듯이, 이 모든것을 즐기듯이
입가엔 엷은 미소가 담겨있었다. 생각만 해도 소녀에게 전해지듯, 그녀는 입을
뻥긋거리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소녀를 부르고 재촉하고 있었다.
" 어서… 오거라… 가니엘이여… 달빛의… 축제를… "
그러나 그녀의 말은 끝까지 소녀에게 전해지지 않은 채, 소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달이 유난히 밝은 밤거리를 해매이며 그녀를 찾고 있었는데,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누워있었고, 이제 막잠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분명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는데… 분명 가에나라는…
" 가에나… 라니? 그게 누구지? "
모른다. 소녀는 가에나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었고, 그렇지만 분명 꿈에서는
가에나 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소녀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는데….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다.
*
" 허튼소리 집어쳐. 난 당신을 죽일거야. "
휘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듯 그를 노려보며 아직도 총을 겨누고있었다.
다행히 소녀가 쏜 총알은 닐을 빗나가 옆의 벽면에 맞았다.
" 지금은 너 스스로 죽을수 없으니까 괜히 내 탓으로 돌리는건가?
그때 내가 널 죽였으면 니가 지금 이렇게 비참한 꼴로 남아있지 않을거란 생각에? "
닐의 그 한마디가 소녀의 정곡을 찌른건지 소녀는 또다시 흠칫 놀라며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소녀의 두 눈동자는 쉴새없이 움직이며 떨리고 있었다.
" 죽일거라고! … 했잖아. 왜… 왜 피하지 않는거야! 왜 두려워하지 않는거야?! "
" 그 총으로 날 쏠거라면 늦지않았어. 지금이라도 어서 쏴. 도망자 신세도 이젠 지쳤어. "
닐은 두손을 높이 들며 어서 쏘라고 소녀를 재촉했다.
소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총을 겨눴지만, 결국 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주저앉은 채 가만히 있더니 결국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 난… 모든것을 잃었어. 죽고싶어, 정말 죽고싶다구. 살아갈 이유가 없어.
이렇게 사는것도 더이상 못견딜것 같아. 미쳐버릴것 같단말야! "
그리운 집이 없다는게, 돌아갈 곳이 없다는게… 얼마나 슬픈일인지.
더이상 웃으며 날 반겨줄 사람이 없다는게, 무언가 지켜야할게 없다는게… 얼마나 슬픈일인지.
소녀는 그동안 그 고통과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며 힘겹게 살아왔다.
죽고싶었지만 죽을수 없기에 살아가고 있긴 했지만, 사는게 아니었다.
죽지 못해 살고있는것 뿐.
" 어서 돌아가. 너의 소중한 보물이 있는 곳으로. 너의 집으로 말야. "
소중한 보물…? 그런게 있을리가 없잖아. 소녀는 말도안돼는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믿지 않으려했다. 믿을수 없기에 믿지 않으려 했지만, 그것은 결국
부정이었다.
" 보물? "
소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보물… 그것은 소녀가 정성껏 가꾸어왔던 꽃밭이었다.
이 꽃이 꽃씨를 날려 이곳저곳 온 마을에 퍼지는 그날까지 열심히 키우겠다고,
부모님과 굳게 약속했었다.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결국 없다. 온 마을로 퍼지는건 무리였어도, 지금은 단 한송이조차 남아있지 않아.
" 꽃밭의 파수꾼… 보고싶지 않아? 만나보고싶지 않아? "
후각을 자극하는 향긋한 꽃내음이 풍겨오고, 주위엔 아름다운 꽃밭이 펼쳐져있어.
그리고 그 꽃밭 한가운데에 지어진 조그마한 집이 하나 있는거야. 빨간지붕의 집 말이야.
문을 열고 들어가면 웃으며 날 반겨주는 부모님들이 계시고,
나풀나풀 마치 하늘과 하나가 되어 구름처럼 날아다니는 나비는 날 찾아와 인사하지.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그러고도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건 왜지?
" 꽃밭의 파수꾼…. "
그 말이 한번 더 메아리쳐 들려온다. 파수꾼이라, 파수꾼이라면...
" 휘노야! "
" 할아버지! "
할아버지는 내가 없을때 나 대신 꽃밭에 물을 주고 계셨고, 내가 찾아가면
언제나 자상하게 웃으시며 날 반겨주셨지.
항상 내 곁에 있어주었고, 항상 날 지켜주었고, 항상 내게 귀찮을만큼 잔소리를
해댔지만, 그래도 늘 친구같았고, 부모님보다도 더 날 위해주셨던 분….
할아버지는… 언제나 꽃밭을 찾아가면 계셨어. 꽃들을 지키며… 마치 파수꾼처럼.
" 하, 할아버지... "
그 아름다웠던 기억을 가득 담아내며 떨어지는 한방울 눈물.
내가 울때면 항상 할아버지께선 말씀하셨지.
" 울지마라, 휘노야. 니가 울면… 이 꽃들도 운단다. "
할아버지는 언제나 내 곁에 계셔서 있으나 없으나 그게 너무나 당연하게만 느껴졌었다.
항상 내 곁에서 보디가드처럼 오직 나만을 지켜주고, 나만 바라보며 웃어줘야 하는…
그땐 그게 너무나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부모님들에 내게 베푸는 은혜가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처럼.
*
" 할아버지! "
그곳에 갔을때, 할아버지는 여전히 꽃들에게 물을 주고 계셨고, 날 보며 조금은 놀라셨지만
이내 다시 웃으시며 날 맞아주었다. 언제나처럼… 할아버지는 웃고계셨다.
" 미안해요. 제가 좀 늦었죠? "
휘노는 복받쳐오르는 울음을 참느라 목이 막혔지만,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흐르는 눈물을 막을수는 없었다.
할아버지의 입가엔 한없이 자상하고 부드럽고, 밑도 끝도 없는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오직 할아버지만의 웃음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그 웃음이…
내게는 그 어떤것보다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내 소중한 보물은… 내가 울면 같이 운다고 했었다.
할아버지의 눈망울은 이미 눈물때문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젠 내가 지켜주리라. 반드시 내 소중한 보물을 내 힘으로 지키리라.
나는 다시한번 굳게 다짐했다.
*
" 뭐야. 결국 노숙해야 하는거야? "
일레이는 여전히 불평 불만들을 늘어놓으며 계속해서 닐만 닥달했다.
" 아마도. "
" 참 천하태평이구만. 당신 원래 노숙자였던거 아냐?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을수가 있지? "
정말 신기한건지 일레이가 새삼 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말이 없었지만 결국 얼굴에 써있는 대답은 이거였다.
" 오늘도 될대로 되겠지. "
그 얼굴을 보면 일레이는 언제나처럼 한숨을 푸욱 내쉴 뿐이다.
" 그런데 이렇게 꾸물거려도 되는건가? 그 소녀 말야. "
" 소녀… 가니엘…. "
오랜만에 곱씹어보는 이름이다. 그동안 머리속으로 수십번도 넘게 떠올려보기는 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입에 담는 이름이라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믿기지 않는다고, 그때 그렇게 보내는게 아니었다. 믿기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을 피할수 있는건 아니니까. 닐은 한심하게 모든걸 부정하려고 소녀를 제 스스로
내쫓은 셈이었다. 이제야 느껴지는 후회가 뼈에 사무칠 정도다.
" 내 짐작대로라면 말야… 아마도 거기 있을걸? "
기억을 더듬으며 일레이가 곰곰히 말했다.
" 어디? "
" 어둠의 도시랄까. 이 마을을 벗어나면 금방이야. "
오늘따라 유난히 달이 밝다. 꼭 그때처럼.
" 달이 유난히 밝네. 요즘따라 왜이리 보름달이 자주뜨는지. "
괜히 떠도는 이상한 소문탓인지 불어오는 바람마저 괜시리 쌀쌀하게만 느껴진다.
일레이는 저 밤하늘에 뜬 보름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소름이 팍 끼쳤다.
" 보름달이 뜨는 밤, 피는 그것을 빨아들이며 부활을 꿈꿀 것이다.
그리고 보름달이 뜨는 날 밤, 그것은 잠에서 깨어난다. "
아직 기억속에 남아있는 그 점쟁이가 했던 말이다.
닐은 가만히 그 말을 다시금 곱씹으며, 아직도 그 말을 믿고있는 자신을
비웃듯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일레이는 그 말이 무슨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것 같았다.
" 무슨말이야? "
" 오늘처럼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가 있어. "
닐은 잠시 걸음을 멈추며 저 새까만 밤하늘 가운데 밝은 빛을 발하며 떠있는
푸른 보름달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달빛의 진혼곡. "
죽은이의 넋을 기리는 달빛의 노래. 그 노래가 저 멀리에서 들려오듯,
유난히 밝은 달이 오늘따라 유난히 구슬프게만 느껴진다.
순환선 5편에서 계속.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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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번 4편은 왠지 이상한것 같은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든다는...
갈수록 제 모자란 실력이 느껴집니다 ㅠㅠ
지금은 7편 쓰고있는데, 아직 6편이 수정이 덜돼서...
되는데로 6편하고 같이 7편 올리겠습니다! (7편에 너무 신경을 쓰고있어서 좀 오래걸릴지도..)
*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요즘 비상하고 순환선 전체 수정작업 들어갔걸랑요;;
그래서 어색한부분 있어도 넓으신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만간(꽤 오래걸릴듯 싶지만) 소설 다시 수정해서 올릴테니깐요!
(이번 후기는 여러가지 공지를 겸해서 쬐끔 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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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s9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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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순환선(循環線) 4. - 달빛의 진혼곡 -
무아[無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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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2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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