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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수필선 [오늘의 한국 대표수필 100인선]의 뒤표지(좌)와 앞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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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 대표수필 100인선]
윤채천 엮음/김종 그림 / 문학관book(2013.03.30) / 값 3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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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소나무
강돈묵
어느 산에 가든 소나무가 있다. 산밑 숲정이에 모인 활엽수와 같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는 소나무도 있고, 산허리에 덜렁 주저앉아 산새들과 산바람의 대화를 엿듣는 소나무도 있고, 벼랑 돌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기품을 뽐내는 소나무도 있다. 소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뒤엉키어 살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무리지어 살기도 한다. 소나무는 사계를 두고 변하는 다른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호사를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푸른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늘 정성을 다하고 있다.
밤나무, 오리나무들과 뒤엉키어 사는 소나무는 키가 크지 않다. 주위의 친구들과 키를 맞추어 도란거리며 산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월등히 키기 크지 않은 대신 가지를 길게 뻗어 어깨동무하며 산다. 옆에 있는 다른 친구들의 처지를 감안하여 알맞게 자라고 같이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절대 옆의 친구를 외면하거나 질시하지 않는다. 늘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같이 즐기기를 소망한다. 꽃 피는 봄날에는 풀꽃에 친구 해주고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날에는 옆의 친구와 어깨를 비비며 견뎌낸다. 아람 버는 가을이면 밤나무의 경사에 박수를 보내고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밤에는 오리나무의 알몸에 몰아치는 추위를 온몸으로 막아준다.
그에 비해 저희들끼리 모여 사는 소나무들은 키가 크고, 별로 가지를 뻗지 않는다. 몸매가 단조로우면서도 날씬하고 훤칠한 저희들끼리만 어울린다. 다른 나무들과의 대화보다는 저희들끼리의 대화가 더 즐겁기 때문이다. 저희들끼리 모이면 다른 주위의 것들에 대해서는 아랑곳없다. 다른 나무들이 같이 놀자 손을 뻗쳐도 무시해버리고 큰 키만을 자랑한다. 오히려 다른 나무들을 업신여기고 키만 키우고 팔을 벌려 주지 않는다. 심한 경우 모여 사는 소나무들은 제 주위의 다른 나무들을 내몰아버린다. 작은 풀꽃까지도 내몰아 그 밑에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키가 비슷한 저희들끼리 어울리면서 혼자 사는 소나무를 비웃고 손가락질한다. 혼자 떨어져 사는 친구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나무들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소나무를 비웃는다. 그래서 모여 사는 소나무들은 모양도 비슷하고 개성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냥 어울려 맑은 날의 햇볕을 즐기고 달밤의 우수를 같이 즐긴다.
어떠한 재난이 몰려온다 해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함께 힘을 모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병충해가 밀려와도 함께 저항하면 되는 것이다. 여간해서 이들에게는 병충해도 오지 않는다. 힘을 합쳐 밀어내기 때문이다. 따사로운 햇볕이 비치고, 산바람이 시원히 불면 산새들과 어울려 무조건 즐기다가도 삶의 조건이 나빠지면 생식에 힘쓴다. 공해가 밀려오면 다음 세대를 위해 솔방울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변두리에 사는 소나무들은 시커멓게 솔방울을 달고 있다.
자주 지나가는 들판 한가운데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언제나 그렇듯 이 소나무는 내 눈에 쉽게 들어온다. 들판을 지날 때마다 이것은 들판의 다른 어떤 모습보다도 확실한 이미지를 가지고 서 있다. 논배미가 끝나는 둑에 뿌리를 내리고 섰다. 굵은 줄기가 옆으로 드러누운 듯이 비스듬히 뻗어 있으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 줄기에 켜켜이 붙어 있는 껍질의 층은 인고의 날을 말하는 듯하였으나 잎은 여전히 푸르다.
들판의 소나무는 혼자 서 있다. 그래서 더욱 나의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옆에 친구도 없이 외롭게 살아간다. 산에 있는 소나무들이 친구들과 다정히 대화를 나눌 때, 들판의 소나무는 외로움을 이기는 연습도 하고 자신의 내면의 성숙을 꾀한다. 들판이 사계를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 것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를 되씹는다.
산에 사는 소나무들이 개성 없이 친구들과 닮아가지만 들판의 소나무는 그렇지 않다. 소나무의 체신을 간직하려 노력한다. 혼자 체신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산의 소나무들은 되는 대로 살아가도 옆의 친구들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들판에 홀로 선 소나무는 모든 것을 저 혼자 해결해야 한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고풍스런 자신의 자태를 간직해야 한다. 서로의 힘을 합해 견디어 내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혼자 이겨내야 한다. 설혹 산의 나무들이야 가지가 부러져도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들판에 홀로 선 소나무는 가지 하나 부러지면 많은 이들에게 흉물로 드러난다. 조그마한 흠집이라도 많은 이들의 시선에 띄고 입에 오르내리기에 들판의 소나무는 그만큼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기가 힘이 든다.
고고한 정취는 그래도 들판의 소나무에서 맛볼 수 있다. 다른 것들과 똑같은 잎과 줄기를 가지고 자신의 모습을 꾸미더라도 들판의 소나무는 다른 모습이다. 균형 없이 주위의 나무들과 어울리는 숲정이의 소나무와도 다르고, 짧은 팔을 가지고 담합하는 무리 진 소나무와도 다르다. 주위의 여건을 감안하여 가장 멋스럽고 고고한 모습을 간직한 채 소나무의 진수를 말하는 들판의 소나무. 그 가지 끝에 학(鶴)부부라도 앉으면 더없이 멋스러움을 자아내는 소나무. 이것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기에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날에도 내색함이 없이 꿋꿋하게 살아간다.
나는 산에 오르고 들에 나가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산 숲정잉를 지나면서 옆의 다른 나무들과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소나무의 지혜를 배운다. 그들은 베풀면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내게 일러준다.
저희들끼리 모여 사는 소나무 숲을 지날 때면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라 강요한다. 그러나 나는 그 숲에 들어섰던 것을 이내 후회한다. 견딜 수 없는 이기에 밀려나오고야 만다.
들판의 소나무 밑에 서면 진정 나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되씹게 된다. 누가 뭐라해도 자신의 모습을 꿋꿋하게 간직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정 나의 갈 길이 무엇인가를 터득한다.
벌써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산과 들은 많은 말씀을 가지고 나를 맞는다. 오늘 따라 들판의 소나무가 대견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녹음의 생명력
김영중
이제 세상은 온통 푸르름으로 물들어 그 성그러움을 분수처럼 뿜어낸다. 여름의 상징인 녹음, 그 푸른 기상이 당당하기 이를 데 없다.
온 대지의 열기를 하늘로 뿜어 올려 푸른 불꽃을 이룬다. 젊고 씩씩해 거칠 것이 없이 내닫는 젊은이의 숨결을 녹음 속에서 느끼게 한다.
공해 속에 나타나 지평선을 가득 채우는 저 푸른 생명, 아무리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눈에 시원함을 줄 뿐만 아니라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니 그 싱그러움이 내 몸속으로 스며들며 생기를 돌게 한다. 감사하는 마음 또한 솟아오른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저토록 푸른 푸르름으로 나타났는가. 신비스럽고 경탄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것도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저 푸르름 또한 무수히 많은 것을 인내한 열매로 푸르름을 갖게 된 것이리라. 몰아치는 폭풍을 이겨내야 하고 뜨거운 뙤약볕을 견디어 내야 한다.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높이만큼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캄캄한 어둠을 더듬어 수맥을 찾아가야 한다. 그 노고와 아픔, 또 그 고독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자연은 말이 없으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며 배움을 준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고단하고 쓸쓸할 때가 참으로 많다. 서러움과 외로움을 느낀 적도 적지 않다. 때론 흔들리며 발밑이 무너져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절망감, 실의에 빠지기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나 혼자만이 소외된 것 같고 불행한 것 같아 죽고 싶은 자학의 시간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의 녹음을 보면서 외롭고 고단하고 절망을 느낀 것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 본질 속에는 고독, 절망이 내재하여 있음을 알게 된다. 어느 생명인들 목숨을 부지하는 데 수월함이 있겠는가. 행복의 절정에는 불행의 그림자도 동반되고 즐거움 속에도 슬픔의 씨앗이 숨겨져 있음이다.
분주하고 부산한 여름날의 한가운데서 짙푸른 녹음은 최선을 다하여 절정의 삶을 사는 생명이다. 시간에는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가 있다. 현재의 이 순간이 다음엔 과거가 되며 미래는 곧 다음 순간 현재가 된다. 지금 이 순간 뜨겁게 사는 열정 없이는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또한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여름날의 녹음은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사는 삶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그 푸르름 앞에 서면 권태나 나태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새로운 삶의 개안을 실감하는 순간이 되어 함부로 자기를 낭비할 수 없다는 결의가 생긴다. 실로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이 여름 최선을 다하며 삶에 흔적을 남기는 일에 임하여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음음음음 음음음
오차숙
내가 노래하는 무대에는 조명등이 희미해 생명의 싹이 움트지 않소 꽹과리를 두드리고 장구를 내려쳐도 푸른 감흥이 일어나질 않소 영혼의 날개마저 거세당한 탁인지 관객의 그 깊은 수군거림과 무대의 퀭한 종소리도 오래도록 들리지 않소 버선발로 뛰쳐나가 뱅그르르르 뒹굴어 볼까 하얀 적삼 걸치고 나가 관객석을 배회해 볼까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뭐여라 그으래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오 생은 한 판 그래픽 소설이라고 생은 한 판 춤사위라고 한 판의 춤사위는 천 개의 단어를 조립한 말장난보다 느낌을 줄 때가 때로는 있다오 남사당패들의 외줄타기 외로움처럼 아슬아슬하게 마음의 행로를 걸어가더라도 호오 탕한 춤사위는 삶을 지탱시켜 주는 이유가 되거든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아니야 웬일인지 난蘭한 송이 키우기가 힘들어졌소 바람도 모르게 비틀거리고 있소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숨어 있어 묘한 그 실체를 응시하고 있소 오호라 취화선 속의 그 남자가 불꽃으로 환생하여 피 묻은 영혼을 소생시키고 있소 피카소의 손놀림 간딘스키의 발놀림 백남준의 영혼 놀림으로 걸음걸음의 춤판을 벌리고 있소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이럴 수가 숨통이 막힐 줄이야 심통이 막힐 줄이야 별 수 없이 카멜레온의 지킬 박사와 야누스의 옷깃으로 가면축제를 열며 자정이 넘은 달밤을 휘휘휘휘 배회할 수밖에 없소 인생은 한 판의 춤사위와 다르지 않기에 늘 푸른 광대가 될 수밖에 없소 고요하고 기기묘묘한 무대 위에서 난蘭 한 그루를 키우기 힘들어졌기 때문이오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잠시 눈길을 멈추면 시름시름 죽어가는 난蘭 이제 그 난이 커튼 속 무대에서 훌쩍 인다 해도 한계가 꿈틀 거려 무대 저만치 진땀의 물살 권태의 물살이 콸콸 밀려 오오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고 바람도 모르는 새 고독 속에서 호호 탕탕 신음을 하는 그 실체로 인해 구토를 심하게 아 아니 무슨 말씀 경배할 이유가 생기고 말았소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보시오 때로는 용서할 순 없소 그 광명에 춤의 극치를 외면하는 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서 목구멍이 타들어가도록 경멸의 물살이 밀려오오 오호라 글쎄 내 인생은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나보오 사랑과 예술이 그와 다르지 않기에 이들은 무대 위에서 양심도 가책도 없이 투쟁을 하오 내 전부를 부수려고 밤낮 없이 요동을 치오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꽃샘추위로 인해 신열이 끓어도 영혼의 혼란으로 인해 피범벅이 되어도 지독한 그 실체들은 생애 전부를 삼키려고 하오 그래서 춤꾼이 되기를 서원했나 보우 자유다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피에로 중의 피에로가 되었나 보우 그래 맞소 폭풍의 언덕을 휘 가르며 빨간 토슈즈 파란 토슈즈를 수 십 켤레씩 만들던 춤꾼이었나보우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오호라 그래 저만치 모딜리아니 연인 잔느의 슬픈 눈빛이 속세에 찌든 나를 응시하고 있소 무대 위에서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 비익조처럼 날아 보라구 하오 오호 그래 토마스 하디의『테스』의 그 남자가 생생초生生草를 안고 달려들고 있소『닥터 지바고』에서 ‘라라’의 그 남자도 흑갈색 영혼을 수술하려고 달려들고 있다오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오호라 맞소 난蘭 한 그루를 키우기 위해 한 판의 춤을 추어보세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구 오호라 웬걸 미안하오 난 한 그루를 키우다 보니 권태로 인해 힘들어졌소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고 오호라 여전히 암 말 마소 난 한 그루 생生하기 위해 한 판의 춤을 추어보세 바람과 구름은 남사당패로세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구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구름 카페
윤재천
나에겐 오랜 꿈이 있다.
여행 중에 어느 서방西方의 골목길에서 본 적이 있거나, 추억어린 영화나 책 속에서 언뜻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 카페를 하나 갖는 일이다.
그곳에는 구름을 좇는 몽상가들이 모여들어도 좋고, 구름을 따라 떠도는 역마살 낀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도 좋다. 구름 낀 가슴으로 찾아들어 차 한 잔으로 마음을 씻고, 먹구름뿐인 현실에서 잠시 비켜 앉아 머리를 식혀도 좋다.
꿈에 부푼 사람은 옆자리의 모르는 이에게 희망을 넣어주기도 하고,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런 사람을 바라보며 꿈을 되찾을 수 있는 곳-‘구름카페’는 상상 속에서 늘 나에게 따뜻한 풍경으로 다가오곤 한다.
넓은 창과 촛불, 길게 드리운 커튼, 고갱의 그림이 원시의 향수를 부르고, 무딘 첼로의 음률이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곳에서 나는 인간의 짙은 향기에 취하고 싶다.
눈만 뜨면 서둘러 달려와 책장을 뒤적이고, 사람을 만나는 조그만 연구실이 있는 곳은 서초동 꽃마을이다. 2,30년 전부터 그렇게 불렀으니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지금은 정치 1번지니, 강남의 요지니 하는 요란한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나이 든 사슴의 뿔처럼 실속도 없이 교통만 혼잡하고 하늘을 향해 치솟는 고층건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꽃마을은 꽃을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풀더미 같은 땅을 거름삼아 하루하루를 살던 곳인데, 지금은 문화와 잔리의 요람, 예술과 학문의 메카다. ‘예술의 전당’과 ‘국악 연구원’,‘국립중앙도서관’과 ‘학술원’,‘예술원’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꽃과 문화는 생존이 해결되고 난 후에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요소이고 보면 서초동과 문화적 여건은 필연인 것도 같다.
집을 떠나 ‘문화의 거리’라 일컫는 서초대로를 지나 연구실에 이르는 동안, ‘구름카페’에 대한 동경심은 가로수가 늘어선 길목에 눈길을 머물게 한다. 플라타너스가 손에 잡힐 듯한 길목 찻집을 지나면서, 은은한 조명에 깊은 의자가 편히 놓여 있는 찻집 앞을 지나면서, ‘구름카페’가 현실로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진다.
프랑스의 ‘되마고 카페문학상’은 상장과 메달만 수여한다. 작가들은 그 상을 받기 위해 창작에 열중한다.
이 상의 권위는 주최측이 작품과 작가 선정에 엄격하여, 오해의 소지를 제거함으로써 객관성을 대외에 과시한다.
‘되마고 카페’에서 수여되는 문학상과 정情을 나눌 수 있는 카페가 많다.
만약 내가 한 묶음의 장미꽃을 상품으로 수여하는 상을 만들 수 있다면 시상식 장소는 ‘구름카페’가 제격일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은 장미꽃 한 송이씩 들고 와 수상자에게 마음을 함께 전함으로써 상금을 대신하는 ‘구름카페 문학상’을 만들어 상을 받은 사람과, 시상하는 주최측이 자랑스러움에 벅찰 수 있는 문학상을 뿌리내리고 싶다.
‘구름카페’ - 천장과 벽에는 여러 나라의 풍물이 담긴 종을 매달아 문이 열리거나 바람이 불 때면 신비한 소리가 들려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워주고,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의 파이프와 민속품을 진열해 구름처럼 어디론가 흘러가야 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싶다.
그 장소가 마련되면 한 시대를 함께 지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원히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향기 짙은 차를 마시며 비 내리는 날엔 비를, 눈 내리는 날엔 눈발에 마음을 씻으며 함께 보내고 싶다.
‘구름카페’는 나의 생전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어도 괜찮다.
아니면 그곳은 숱하게 피었다가 스러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구름이 작은 물방울의 결집채이듯, 이러한 현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더 아득하고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나는 꿈으로 산다.
그리움으로 산다.
가능성으로 산다.
오늘도 나는 ‘구름카페’를 그리는 것 같은 미숙한 습성으로, 문학의 길과 생활 속의 레일을 걸어가고 있다.♣
풍죽風竹을 그리며
이병남
방안에 동매冬梅가 벙그는 오후, 풍죽風竹을 그려 놓고 길동이의 퉁소 소리를 듣는다. 길동이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사내요, 지금까지도 못 잊어 그리는 사내다. 대숲에 이는 바람이 유난히도 스산하던 겨울날 길동이와 나는 외갓집에서 첫 상면을 했다.
그 무렵 잠시 아버지와 헤어져 살게 된 어머니를 따라 나도 외갓집에서 살고 있었다. 길동이란 이름은 외할아버지께서 지어 부르신 이름이고, 그 청년의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 이름뿐만 아니다. 그 청년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떠나갔는지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길동이를 만났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 애절한 퉁소의 가락을 잊지 못한다. 길동이는 고향도 모르고 부모도 없다고 한다. 부모가 없으니 이름도 성도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길동이는 본시 뱃사람인데 바다에서 풍랑에 쫓겨 잠시 포구에 들렀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혼자 남게 된 것이 거짓 아닌 사실이노라고 힘주어 말하곤 했지만, 어인 까닭인지 외할아버지는 길동이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
길동이란 이름도, 집도 절도 없는 놈이지만 그래도 부르는 이름 석 자는 있어야 할 게 아니냐며 외할아버지께서 최길동이라 부르신 것이다. 물론 외갓집 성이 최씨였다.
시절이 2차 대전의 막바지로 농촌에 장정이 없었던 때라 길동이는 외갓집 머슴으로 눌러 살기로 약조를 했다. 길동이의 거동을 지켜보신 외할아버지께서는 “저 놈은 아무리 보아도 농사일을 하던 놈은 아니다.” 하셨을 뿐, 서투른 노동 일에는 역정을 내지 않으셨는데 번번이 길동이가 걱정을 듣는 것은 대를 베는 일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낚싯대 하나를 주십사고 조석으로 문안을 드려도 허락지 않고, 손수 돌보며 기르시는 대나무를 길동이가 마음대로 베어내어 외할아버지의 꾸중을 듣곤 하는 것이다.
길동이가 대나무 밭에 가는 날은 먼저 숫돌에 낫을 갈았다. 그리고 살살 대나무 밭으로 가서 이리 제치고 저리 제치다가 마땅한 것을 골라 싹둑 잘라서는 마디마디의 잔가지를 정성들여 다듬는다.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불에 달군 쇠꼬치로 구멍을 뚫은 다음 창칼로 마지막 손질을 하면 하나의 퉁소가 만들어진다. 길동이는 이것을 신들린 사람처럼 불어댔다.
모닥불 사위어가는 여름밤, 댓돌 위에 부서지는 달빛 속으로 파고들던 길동이의 퉁소 소리는 가을밤이면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와 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산촌의 정적을 깨고, 겨울밤에 부는 길동이의 퉁소 소리는 눈 내리는 밤 사랑방 창살에 비치는 그림자로 그 운치를 돋우었다.
특히 달 밝은 밤이면 어머니는 “길동아 퉁소나 불어라” 하셨는데 생이별의 아픔을 어머니는 퉁소 소리로 달래려 하심을 어린 나이로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길동이가 외갓집을 떠난 것은 보리타작 날을 잡아 놓은 햇볕 뜨거운 유월이었다. 들밭으로 보릿단을 지러 갔던 길동이가 지게만 벗어 놓고 떠나가 버린 것이다. 길동이가 아주 떠나간 것을 안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나서 보리밭 길을 달리며 길동이를 불렀다.
“길동아, 길동아-어디 갔니?”
엄마에게 매를 맞으면 이제 길동이도 없고 누가 나를 업어주느냐고 목 놓아 울며 찾아 헤매던 날을 지금도 나는 생생힐 기억한다. 길동이는 나를 울리고 떠나버린 첫 번째 사내가 된 것이다. 그날 이후 도리깨 소리 드높은 보리타작 마당에서는 모두들 길동이가 수상한 놈이라고 본 대로 말을 했다. 길동이는 산에 가도 나무는 하지 않고 바다가 보이는 바위에 앉아 퉁소만 불더란다. 누구는 지난 번 주재소 유리창이 왕창 깨진 것은 바람 탓이 아니고, 길동이가 돌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 순사가 없었기 망정이지 알았으면 길동이는 잡혀갔을 것이란다. 그래서 그러는지 길동이는 길을 가다가도 순사와 마주치게 되면 숨고 주재소 근처에는 얼씬도 한 했다.
아래채에서 새끼 꼬고 짚신 삼던 일꾼들은 길동이가 삼국지를 읽어 주던 솜씨로 보아 글공부 깨나 한 놈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나무꾼들은 길동이가 산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고도 말했다.
길동이는 품앗이 일을 간다 하고 집을 나가서는 논두렁에 앉아 애꿎은 퉁소만 불어댔다. 그러니 정작 보리타작 하는 날에는 일하러 올 일꾼이 없다. 꾸중이 두려워 삼십육계 줄행랑를 쳤을 것이라는 아낙들의 입방아에도 외할아버지는 한 마디 말씀이 없으셨다.
황혼이 처마 끝에 깃들자 “길동이가 무사해야 할텐데” 하시며 외할아버지께서는 불안한 표정으로 늦도록 마당을 거니셨다. 집안 사람들에게는 혹 누가 길동이를 찾거든 심부름 보낸 것으로 말하라 하셨다.
이 나라의 청년들이 강제징병으로 명목 없이 죽어야 했던 일제 말기. 정처 없이 왔다가 잠시 머물고 퉁소 하나만을 들고 말 못하고 떠난 사나이. 그 사나이가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퉁소 소리에 맺혔을 시대의 한恨 때문이리라.
안으로 결코 굴할 수 없는 지조를 지니고도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쫓기는 몸으로, 목숨을 아껴서가 아니라 그대로는 죽을 수가 없어서 때를 기다리며 한을 달래던 일제하의 젊은이. 그들을 생각하는 날이면 나는 언제나 길동이가 그리워진다.
어느 해 봄날 목포를 가던 길에 영산강 유역에 보리밭과 조화를 이룬 유채꽃 언덕을 보았다. 그 순간 길동이는 퉁소를 불며 남으로 가고, 지금은 유복한 할아버지가 되어 어디엔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잠시 길동이를 잊은 듯했는데, 오늘 다시 내 손으로 풍죽風竹을 그려놓고 길동이의 퉁소 소리를 듣는다.
먹을 갈고 붓을 드는 마음이야 한 점의 그림에 제호를 붙이고 낙관이 소원이다. 비록 내 평생에 낙관 한 번 해보지 못할지라도 서두르지 않고 풍죽을 그리며 먹을 갈리라.
어느 날, 누가 나에게 한 많은 날들을 어찌 지냈느냐고 물으면,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는 매화를 그리기 전에, 풍죽을 그려 놓고 길동이의 퉁소 소리를 듣고, 붓끝으로 댓잎을 날려 바람소리를 들으며 문방사우文房四友와 벗하는 하루해는 짧더라고 대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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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함께 성장하기 위한 시도
― 100인 선집選集 출간의 의미
윤재천(한국수필학회 회장)
곡식도 땀과 공을 들여 싹을 틔우고 햇살과 양분을 공급해 몸집과 키가 불어나게 되면 그 열매가 맺혀 수확하게 된다.
그 후, 이 결과물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보면 실한 것과 쭉정이가 약속이나 한 듯 천차만별로 섞여 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실한 것을 고르기 위해 이것저것 뒤적이며 갈라놓다 보면 어느 쪽의 것은 결과에 만족하게 되지만, 다른 한쪽은 껍질만 있을 뿐 알맹이가 없어 한쪽에 모아두었다가 다른 용도로 쓰거나 버리게 된다.
이것은 절대적 기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주관적 판단에 의한 선별일 수밖에 없어 상대적 분류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차 판단력을 의심하며 재분류 작업에 들어가 실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서 잘못 갈라놓은 것이 없나 한 후, 버리려고 했던 것 중에서 다시 일부를 골라 다른 쪽으로 옮겨놓으며 선택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농부의 모습이다.
이것이 절대적 평가의 결과라고는 누구도 확신할 수가 없다.
논이나 밭에서 거둬들인 수확물만 아니라 작가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작품선정은 저마다 관점이 다르고 그때마다 동일대상에 관한 판단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곡식 고르는 일보다 몇 배 더 어려운 일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나 주관에 불과할 뿐, 객관이라는 이름으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이 책을 발간하면서도 열두 명의 선자選者가 그 과정을 거치면서 수작秀作을 고르려고 노력했으므로 작업을 하는 동안 자리를 바꾸어놓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다.
일반적 의미의 ‘모범模範’은, 본받아 배울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대상을 이르는 것인 만큼 옥석을 가리는 일은 누구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종 순간엔 용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뜻이 실종되어 어떤 결실도 맺지 못하게 된다. 예의 ‘주물러 터트린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이 아닌가. 이것이 우리 수필인 모두가 한마음으로 무장해 절차탁마하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글은 말과 달라 사람의 길이 되기도 하고 난관을 헤치고 우뚝 서게 하는 신비의 명약이 되기도 한다. ‘위대한 걸작’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요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어서 품는 이의 태도에 따라 작품의 높낮이가 결정되고 효과가 확산된다.
선자選者와 많은 이들이 책을 발간하는 데 혼신을 다한 결과,『오늘의 한국대표수필100인선』은 괄목할만한 문화적 업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므로, 앞으로 수필문학의 길잡이가 되는 데 제 몫을 하리라 믿는다.
이번 선집은 ‘성찰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복음서’라고 할 만큼 작가나 작품들이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수필가는 뚜벅뚜벅 걸으며 음지를 양지로 바꿔가는 것이 본분이다.
인간은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얼마나 자중해야 하며 남과 자신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수필을 통해 일러준다.
『오늘의 한국대표수필100인선』이 모든 수필가에게 직감과 예지를 충전시켜 그들이 문학인으로서 레이스 위를 달리는 마라토너가 되는 데 디딤돌이 되어주길 바라며, 한편으론 한국수필문학의 격을 한 단계 성숙시키는 데 중추적인 그림자로 남아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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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강돈묵 들판의 소나무
∙ 강범우 삽당령의 홍洪씨 영감님
∙ 강석호 가을의 사유思惟
∙ 강호형 돼지가 웃은 이야기
∙ 고동주 동백의 씨
∙ 고임순 골목길
∙ 구양근 마지막 수업
∙ 구 활 연꽃 필 때 들리는 소리
∙ 권남희 꽃 춤
∙ 권대근 폐인
∙ 권현옥 말린 것에 대한 찬사
∙ 김가영 세월은 강물처럼
∙ 김규련 숨어서 피는 꽃
∙ 김병권 육필원고肉筆原稿
∙ 김선화 포클레인과 패랭이꽃
[ 중략 ]
∙ 최민자 거미
∙ 최병호 어떤 혼례
∙ 최순희 그 집은 그곳에 없다
∙ 최승범 매화기
∙ 최 운 장화
∙ 최원현 어머니의 눈길
∙ 최이안 장난 아닌 낙서
∙ 최중호 단재丹齋 선생과 연鳶
∙ 하길남 보은報恩
∙ 하정아 외로울 때는
∙ 한상렬 차茶와 술
∙ 허창옥 섬
∙ 홍미숙 담쟁이의 덩굴손
∙ 홍억선 화령별곡花嶺別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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