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 구름 타고
1.
구름은 높은 산도 넘고, 넓은 강도 건너간다. 도무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냥 넘고 또 건너간다. 그런 구름에 뜻을 실어 서쪽으로 가 본다. 때때로 내가 타고 다니는 구름을 ‘뜻 구름’이라 불러 본다.
난주행 비행기 안이다. ‘뜻 구름’에 올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보니 즐겁다. 그러다가 까닭 없이 가슴이 답답하다. 옆 사람을 보니 즐거운 듯, 편안한 듯하다. 왜 나만? 하하. 그놈의 담배 때문이다. 얼마 간 담배를 피울 수 없으니 담배 대용 파스를 붙인 게 잘못이었다. 더위와 긴장 때문에 너무 많은 양의 니코틴이 몸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당장 떼버렸다. 물 한 잔 마시고 몇 발짝 움직이니 살만하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담배 연기를 왜 뿜어댈까? 무슨 말을 하든 변명이지만 기대고 싶은 생각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지할 것이 없으면 공연히 외로워진다. 외로움을 잊으려 술에 의지하고, 담배에 의지하고 또 잠시 아픔을 잊게 해주는 타이레놀에 의지하고, 그리고 늙어가는 육신에 의지한다. 의지하고 있는 이러한 것들은 모두 ‘몸’을 중심으로 한 삶 때문이 아닌가. ‘몸’ 중심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어 ‘뜻 구름’을 타 본다.
난주에서 무위로 간다. 한 여름에도 난주는 시원하다. 비가 내린 뒤라 시원하다 못해 춥다. 바람막이를 꺼내 입으니 따스함이 참 좋다. 버스에서 흔들리며 해발 삼천 미터가 넘는 오초령을 넘는다. 휴게소에 잠시 내려 볼 일을 보고 돌아서니 한 겨울 날씨다. 잠시 몸을 추스른 뒤 무위로 향한다.
2.
늦은 밤에 숙소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니 무위란다. 해장사로 간다. 길은 포장이 된 듯 안 된 듯 먼지가 일고, 수양버드나무 아래는 온통 오토바이 주차장이다. 가게 앞 평상엔 사람들이 둘러앉아 시끌벅적하고, 오가는 사람들로 길이 비좁다. 중국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다. 한 참 걸어가니 고색창연한 건물 앞에 선다. 해장사다. 가이드가 ‘해장’에 대해 설명하지만 안내서 외워 하는 이야기라 앞뒤가 맞지 않다. 이름에 ‘해’자나 ‘장’자가 들어가면 화엄경과 관계가 있다. 화엄경은 인도의 용수 보살이 용궁에서 가지고 왔다고 전해진다. 그 용궁이란 ‘마음’을 뜻한다. 마음은 깊고 커서 바다에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해인사의 ‘해’자가 바로 화엄경의 도리를 뜻하는 것이다.
대승불교 사상의 중심은 법화경과 화엄경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형식은 법화경을 따랐고 내용은 화엄경을 따랐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방대한 화엄경을 이백 열 자로 요약한 것이 ‘법성게’다. 절에서 천도재를 올리거나 사십구재를 지낼 때 마지막으로 독송하는 것이 법성게다. 영가가 최고의 법문인 법성게를 듣고 왕생극락하라는 의미다. 그래서 화엄경은 우리와 가깝다.
당시 불교의 중심지였던 무위에 해장사와 같은 큰 사찰이 건립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멀리 신라까지 전해온 대승불교의 큰 물줄기기 여기를 지났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숙연해진다.
한말 고승 경허스님의 게송 하나 소개한다.
得其志也 街中閑談 常轉法輪 失於言也 龍宮寶藏 一場寐語
뜻을 얻는다면 거리에 오고가는 잡담도 거룩한 법문이지만
말만 따라가면 화엄경의 귀한 말씀도 한 낱 잠꼬대일 뿐이다.
오늘 우리가 무리지어 여기 온 것도 화엄이 일으키는 파도다. ‘해장’을 마음으로 볼까? 눈으로 볼까? 어떻게 보든 또 하나의 ‘해장’이 일으키는 한 조각 파도다.
해장사 종각에 올라 종을 살펴보고 천년을 울려 퍼졌던 종소리를 들으며 장액으로 간다.
3.
장액 대불사다. 와불이 계신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처가 누워있다고 와불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잠자는 부처 즉 ‘수불’이라고 한다. ‘수불전’ 주련이 눈길을 끈다.
睡佛非佛睡 只是我不醒
잠자는 부처는 부처가 잠자는 것이 아니니,
내가 아직 잠을 깨지 못한 탓이다.
대불은 큰 불상이 아니라 지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은 해인사 대적광전 주불이 비로자나불이다. 대적광전 또는 적광전이라는 전각에 모셔진 부처가 비로자나불이자 바로 대불이다. 대불사의 의미도 짐작이 간다.
왜 불상을 크게 만들려고 할까?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닌데.....
상견중생(相見衆生)이란 말이 있다. 비슷한 말로 견물생심(見物生心)도 있다. 중생은 구체적인 모습을 봐야 겨우 생각이 난다는 뜻이다. ‘부처’라고 하면 얼른 감이 오지 않기 때문에 형상을 통해 그 뜻을 알리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불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불상의 크기가 뜻의 크기가 아닌 바에야 크기에 집착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정성들여 크게 만들어 두고 위안을 삼으려는지도 모르겠다.
‘잠자는 부처’를 다시 생각해 본다. 위의 게송에서 보듯 부처가 잠자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의 부처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잠자는 부처’라고 한다. 실크로드로 온갖 물건들이 오고 가고 또 온갖 생각들이 오고 간다. 오고 가는 그 생각들 가운데 ‘잠자는 부처’를 깨우는 소리도 실려 온다. 그 소리가 열매를 맺은 것 가운데 하나가 석굴암에 모셔진 부처님이다. ‘뜻 구름’을 타고 경주 석굴암에 갔다가 다시 장액 대불사로 와 본다. 장액의 ‘잠자는 부처’와 석굴암의 앉아서 미소 짓는 부처님과 무엇이 같고 또 무엇이 다를까?
4.
가욕관이다. 만리장성의 끝자락인지 시작되는 곳인지 모르겠다. 이쪽 끝이 가욕관이라면 저쪽 끝은 산해관이다. 중국 사람들은 산해관과 가욕관을 잇는 만리장성 남쪽을 관내라고 하고 바깥쪽을 관외라고 부른다. 관에는 관문이 있다. 우리나라의 성은 성문이 하나 밖에 없는데 가욕관의 성문은 세 겹으로 돼 있다. 그만큼 관문은 통과하기가 어렵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 흔히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삼악도를 면한다.”라는 말을 한다. 유면한 선방이 있는 곳에 가면 억지로 마루에 올라가 문고리를 잡고 서서 이젠 삼악도에 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미소 짓는다. 그 문고리를 잡았다고 해서 삼악도를 면할 수야 있겠는가. 삼악도란 지옥의 길, 아귀의 길, 축생의 길을 말한다. 지옥이란 조금도 틈도 여유도 없는 곳이다. 삶에서 여유가 없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의 삶인 것이다. 아귀란 굶어 죽은 귀신이다. 축생이란 짐승처럼 사는 것이다. 오직 육망이 부추기는 대로 사는 것이 축생이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려면 선방의 문고리라도 잡아야 한다. 문고리를 잡았다면 문이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설사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문고리를 잡지 못했으니 열 수가 없다. 가욕관 관문에서 별 이상한 생각을 하며 서쪽을 바라본다. 저 멀리서 양떼가 몰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말 탄 군인들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문이란 참 묘하다. 문을 열면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니 그 문은 빠져나가 멀리멀리 달려가고 싶다.
5.
뜨겁다. 땅도 바람도 뜨겁다. 그런데 그늘 아래는 시원하다. 길섶에 차를 세우고 얼기설기 만든 천막 아래서 하미과와 수박을 사 먹는다. 달고 맛있고 시원하다. 이 맛에 여행을 즐기는가 보다. 기련산맥의 흰눈이 곧장 여기로 올 것 같다. 메마른 땅은 눈을 기다리겠지만 흰 눈은 성큼 발길을 내딛기 어려운 갑다. 드문드문 보이는 백양나무 숲이 싱그럽다. 풀도 자라기 어려운 땅에서 그래도 자리를 잘 잡아 녹색향기를 뿜으며 잘도 자란다. 지금은 그럭저럭 포장이 된 길에 버스 타고 달리지만 옛 사람들은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까? 아마도 뜨거운 모래 바람에 생각들이 모두 타버렸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타 버린 자리엔 별빛이 반짝거렸을 것이다. 그 별빛을 낙타 등에 가득 싣고 방울 소리 울리며 갔을 것이다. 또 왔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뿌리고 간 내음을 맡으려고 대구에서 여기까지 왔나 보다. ‘뜻 구름’ 타고.
6.
돈황이다. 꿈에 그리던 돈황이다. 전에도 와 봤지만 새롭다. 돈황이란 말은 고등학교 때 들었다. 어느 교수님이 고서점에서 옛 문서를 구입했는데 집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돈황 문서였단다. 60년대 중반에 시가 2억 원이 넘는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처음 거래할 때는 사는 사람도 몰랐고 파는 사람도 몰랐다. 돌려 달라, 못 돌려준다, 송사는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도대체 돈황이 무엇인지, 또 돈황문서는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돈황본 육조단경’이 나왔다. 육조단경은 여러 판본이 있어 조금씩 다르다. 후세에 여러 종파에게 가필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돈황에서 육조단경이 발견 됐다. 천년 동안 모레 속에 파묻혀 있다가 빛을 보게 돼 후세 사람들에 의한 가필이 거의 없어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성철 스님께서 정리해 출판하니 어느 덧 육조단경의 표준이 됐다.
돈황에 대한 궁금증은 날로 더해 가기만 했다. 어느 사찰에서 돈황으로 성지 순례 간단다. 생각할 틈도 없이 합류했다. 여기저기 다니다 새벽에 돈황으로 갔다. 사막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돈황으로 갔다. 명사산에서 낙타를 탔다. 낙타 잔등에서 대장암으로 먼저 저쪽으로 간 동생을 찾았다. 동생은 운명하기 전 낙타 타고 놀러갔다 왔다고 했다. 환상이었던 모양이다. 모래 우는 명사산에서 낙타 타고 동생을 찾아봤으나 더 멀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내가 타고 다니는 ‘뜻 구름’이 바쁘게 가로로 세로로 내닫는다. 이번엔 대낮에 돈황으로 들어간다. 명사산으로 먼저 간다. 중국 사람들이 그런대로 관광지답게 꾸며 놓았지만 처음 볼 때의 감흥과는 사뭇 다르다.
월아천. 사막 가운데 있는 조그만 연못이다. 초승달을 닮아 ‘월아천’이라 부른단다. 기후 변화 탓인지 월아천의 물이 조금씩 줄어들어 월아천도 머지않아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고요하고 적막한 월아천을 생각했는데 여행객들로 붐비니 신비감도 슬며시 사라진다.
돈황의 밤. 늦게 야시장으로 갔다. 매콤한 양꼬지에 시원한 맥주 한 잔 하고 일어서는데 바가지가 지갑 위로 씌워진다. 좀 찝찝하다. 그러려니 하고 쓴 웃음 지으며 숙소로 돌아온다.
이른 아침에 막고굴로 간다. 막고굴은 중국의 자존심이란다. 일본의 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의 ‘돈황’을 읽었다. 서하의 이원호가 거느린 군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막고굴에 불경을 감추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중국 드라마 ‘대돈황’은 여러 번 봤다. 재미있는 드라마였다.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돈황의 가치를 알고 지키려는 사람들, 유물을 빼내 돈을 벌려는 사람들, 문화와 유적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관리들 모두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전에는 자유롭게 막고굴 앞까지는 자유롭게 드나들었는데 여권까지 확인해가며 들어가라고 한다. 어렵사리 막고굴까지 왔다. 보고 싶은 것 마음대로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돈황을 알고 막고굴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나 문화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턱없이 부족한 내 지식으로는 어두운 막고굴 안 이나 똑 같다.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온다. 뭘 보기 위해 온 것일까? 나도 비행기 타고, 버스 타고 여러 날 고생해가며 왔지만 ‘내가 왜 여기 서 있나?’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수백 년에 걸쳐 사람들이 굴을 만들고 불상을 모시고 벽에 그림을 그렸다. 그토록 힘든 일을 왜 했을까? 죽음의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을 건너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위로하기 위해 석굴을 만들고 불보살을 그렸을까? 정성을 다해 만들어진 불보살이 그들을 보호해줬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 의문이 다른 날 또 다시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뜻 구름’ 타고 와야지. 비행기는 감숙의 하늘을 나른다. 아래는 적갈색 땅만 아득하다. 뜻 구름에서 내릴 때가 다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