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선사들이 거목을 형성
선종 아래 벽안 수행자들 배출
3월 초순, 학교가 개강하였다. 개강 전부터 어떤 이미지로 학생들을 만나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현 시대에 ‘가르치는 사람과 학생과의 진실함이 존재할까?’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작은 언행이 어떤 학생에게는 인생의 길을 제시해줄 수 있음을 상기할 때, 마음에 담금질을 해본다.
활안活眼의 한 승려가 배출되는 데는 여러 선지식들이 존재한다. 그 대표되는 선사가 당대의 임제臨濟(?~866)가 아닐까 싶다. 임제는 스승 황벽을 만나 간명직절簡明直截한 기연機緣으로 깨달음을 이루었다. 또 임제의 대오大悟에 빼놓을 수 없는 선사가 있는데 바로 대우大愚이다. 황벽이 대중에게 법문하는 중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는 대우에 대해 언급했는데, 임제가 이 말을 듣고 대우를 찾아갔다.
그날 밤 임제는 대우 앞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경전 내용을 총동원해 마음껏 발휘했다. 대우는 침묵으로 일관하더니, 다음날 아침 임제에게 말했다.
“멀리서 나를 찾아온 성의를 봐서 어젯밤에 자네의 말을 들어주었네. 그런데 자네는 예의도 모르고 허튼 소리만 계속 지껄이더군.”
그런 뒤 대우는 임제를 몽둥이로 몇 차례 때려 문밖으로 내쫓았다. 임제가 황벽에게 와서 그대로 이실직고하니, 황벽이 말했다.
“대우는 자네에게 훌륭한 선지식이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게.”
임제가 또 대우를 찾아갔는데, 이번에도 대우는 “염치도 모르고 또 왔네.”라고 하면서 몽둥이를 내리쳤다. 임제가 도망 나왔고, 다시 대우를 찾아가 세 번째 몽둥이세례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 이야기가 <조당집>에 전한다.
임제의 선지식 가운데 또 한분이 있는데, 진주鎭州 보화普化(860~874)이다. 보화는 마조의 제자인 반산盤山 보적寶積의 제자이다. 일본 선학자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은 임제의 사상을 알려면 보화를 염두에 두고 <임제록>을 읽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이다. 보화의 풍광風狂이 담긴 행동과 언어는 임제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보화가 먼저 열반에 들기까지 선사는 임제의 스승이자, 도반이었다.
이렇게 걸출한 한 승려가 배출되는 데는 몽둥이를 동원한 과격한 선지식, 자상한 스승, 도반 같은 선지식이 있었기에 임제는 불교사에 독보적인 존재로 우뚝 서 있다. 과연 선사들의 다양한 제자 지도법이 현 시대의 교육 현장에서 접목될 수 있을까?
소납은 학부 때, 국문학 부전공을 했었다. 십년 전에 돌아가신 ‘낙화’ 시로 유명한 이형기 시인이 당시 국문과 교수로 재임하고 있던 때이다. 이 교수님 수업을 9학점 수강했다. 정확하지 않지만 교수님은 수업 시간에 출석을 부른 적이 없었고, 강의할 때도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당신의 시적詩的 세계를 토하셨으며, 학생들의 어떤 행동에도 별 말씀이 없었다. 교수님은 기말고사에 들어오시면 학생들의 양심에 맡기고, 책을 보셨는데, 고개 한번 드는 법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이형기님을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내게 있어서는 틀에 짜여진 구속력이 없는 천진스런 대자유인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또 한분의 기억나는 국문과 교수님이 있다. H교수님인데, 바늘로 이마를 찔러도 피한방울 나지 않을 만큼 완벽과 정확성의 이미지이다. H교수님 어느 강좌에서 발표하는 수업이었는데, 한 학생의 발표가 끝나면 교수님은 그 학생이 눈물을 쏙 뺄 만큼 과제물을 평가하셨다. 당시 2학년이었던 나는 발표 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걱정을 들었다.
두 분 교수님의 강의 기술이나 학생 지도법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분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정확하고 엄격했던 분에게서는 학문의 면밀함을, 시인에게서는 천연스러운 낭만을 배웠다. 요즘같이 교수 평가가 엄격한 때라면 학생들이 그분들에게 어떤 평가를 할까? 다양한 부류의 선생들로부터 공부해야 하건만 그렇지 못한 작금의 학생들은 먼 훗날에 어떤 룰모델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지(?) 노파심이 앞선다.
선사들의 제자 지도법도 그러하다. 대우 스님이나 덕산德山 선감宣鑑(782~865)은 거칠게 제자들을 제접했던 반면 설봉雪峰 의존義存(822~908)은 제자들에게 매우 자상한 선사였다. 그런 다양한 선사들이 존재했기에 선종이라는 커다란 거목이 형성되었으며, 이런 거목 아래 벽안의 수행자들이 배출되었다고 본다. 대학도 학점과 스펙이 아닌 인격 연마를 위한 곳으로 거듭나면 얼마나 좋을까?
[불교신문2994호/2014년3월19일자]
첫댓글 스승님과 제자 사이에도 끌림이 있어야......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