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일 신부
참된 단식
유다인들은 단식을 속죄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시하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이나 네페쉬’(영혼을 괴롭게 하다)라고 부르는 이것을 율법으로 정해 놓고 엄하게 명했습니다.
이외에도 국가적 재난이나 병들었을 때, 상을 당했을 때, 회개할 때, 위험에 임박할 때, 재앙을 기념할 때, 기근이 들었을 때 단식을 했습니다.
이러한 단식이 유다인들에게 강화된 것은 바빌론 포로생활 당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회개의 의미와 하느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의미에서 단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에 앞서서 40일 동안이나 단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단식을 조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종교적 계율에 철저했던 그들의 단식은 회개하는 마음과 이웃사랑의 마음은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거룩함을 드러내려는 종교적 의무감에 따른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굶주린 이웃에게 줄 먹을 것을 마련하느라 2-3일 동안 단식했다고 합니다. 신앙인의 단식에는 참된 회개와 이웃사랑의 실천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나 타인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단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자신의 단식을 숨기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새기며, 병자들과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끼니조차 거르신 채 밤늦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고쳐 주신 주님처럼 단식해야 합니다.
이렇게 단식이 은총의 시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항상 기도가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청주교구 김훈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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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단식은 절제를 절제는 겸손을 준다.
사순절에 필요한 덕목 중에 하나가 바로 단식이다. 단식은 절제를 말하며 절제는 겸손을 가져온다. 단식(斷食, fasting)은 본래 일정 기간 동안 종교·수행(修行)·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이다.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킨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다.(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新約)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마르 1,6; 마태 11,19; 루가 18,12)
따라서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행한 금욕생활과 단식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것이며, 도래한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위한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에 비유하신다.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哭)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와서 슬퍼하거나 아무 것도 먹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이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예수께도 단식은 있으며,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하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시기에 행하는 단식은 더 큰 의미로 다가오며, 신랑을 잃게되는 그때는 더욱 더 큰 슬픔과 단식이 있을 것이다.
오늘 금요일에 벌써 성금요일 십자가상 한 장면이 번득 눈앞을 스치는 듯하다. 단식이 자선과 기도와 더불어 사순시기의 중요한 수행덕목이긴 하나 '단식'이라는 수행자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단식은 분명히 '음식섭취'를 중단하거나 조절하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물자가 풍요로와 먹는 일을 낙(樂)으로 삼고, 단식을 몸매관리의 방편으로 이용하는 시대에 단식의 정신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단식의 정신의 절제이다. 절제(節制)는 방종에 흐르지 않도록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 제어하는 일이 아닌가? 절제는 9가지 성령의 열매(갈라 5,22) 중의 하나로서 어쩌면 단식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방치하는 무절제함의 피해는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부분에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서 자연생태계의 파괴는 참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의 파괴는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인간세상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따라서 창조질서와 생명을 보전하는 일과 현대 물질문명의 편리함을 절제로서 관리하는 일은 비단 사순시기뿐 아니라 일상(日常)의 덕목으로 제고(提高)되어야 할 일이다. 이는 곧 신앙인 모두가 부여받은 사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절제된' 삶을 사는 것이다.
1991년에 개최된《창조질서 보존 및 완성을 위한 공청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오늘날 만연된 자연파괴는 인간의 오만과 탐욕에 보다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오만과 탐욕의 감성적 욕구를 제어하는 데는 겸손함이 약이다. 겸손은 절제의 정신으로 닦이고, 절제는 식탐을 조절하는 수행으로도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니 단식 또한 겸손의 시작이요 생명사랑의 첫걸음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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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대웅 신부
우리는 사순 시기 동안 희생과 봉사 생활을 합니다. 이번 사순에 여러분들은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오늘로서 사순 시기가 3일째 됩니다.
작심 3일이라는 말이 있는데 처음 세웠던 계획을 부활절을 맞는 그날까지 잘 지키면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체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해서 들려줍니다.
원래 단식은 하루 또는 며칠 동안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이런 전통이 바뀌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했고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신 뒤 그리스도인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매주 두 번 단식을 했습니다. 식사를 멀리한 세례자 요한의 영향으로 그의 제자들도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적이기만한 종교 생활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행동이 반드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식을 하면서 하느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극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40일간 단식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마음을 열기 위해 단식을 했던 것입니다.
단식은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길 수 있는 겸손한 마음도 갖게 합니다. 육체적인 배고픔 앞에 무기력한 자신을 보면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은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고 주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단식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단식을 하는 것이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단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없는 단식만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웃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1독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단식을 해서 생긴 나의 양식으로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는 일, 헐벗은 사람을 따뜻하게 덮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단식이 그 자체로서 끝나 버린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행동일 뿐입니다. 반드시 자선이라는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신문이나 tv를 보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따스한 손길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때는 이름이 밝혀지기도 하지만 익명으로 드러나지 않게 도움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게 도와주는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도움을 받은 이가 또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고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움을 준 사람들을 살펴보면 어려운 생활을 하시는 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아끼고 절약해서 모은 돈을 자기보다 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놓는 그 분들의 행동 ...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단식도 이런 자선으로 이어져야 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넉넉한 가운데서 자신이 쓰고 남은 일부분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는 것이 되어서는 아닙니다.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들을 아끼고 절약해서 바로 그것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요, 나눔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순은 힘들기도 하지만 또한 은총을 풍성히 받을 수 있는 보람있는 시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선택에 따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태도 또한 달라질 것입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느끼고 그분의 은총 속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시작될 것입니다 !!
부산교구 천대웅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