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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원 박사 周·人·工 四書三經] *<제116강> (2018.08.06.)
— <周·人·工 四書三經>은 ‘周易과 人性을 工夫하는 四書三經 강좌’를 말한다 —
시경(詩經) 제1강 -(1) 詩經解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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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詩經 공부 ☞ 1. 國風 [1] 周南 [2] 召南 [3] 邶風a
❊『시경(詩經)』에 대하여 ❊
1.『시경(詩經)』을 읽어야 하는 이유
인간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늘과 하나 되어 하늘의 뜻으로 살아갈 때 온전해진다. 하늘의 뜻이 인간을 통하여 완벽하게 실현된 것이 지상의 낙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늘의 뜻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 하늘 같은 마음이다. 그것이 바로 성(性)이다.[天命之謂性] 인간의 성(性)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 개체마다 발휘되어 이루어진 것이 정(情)이다. 성(性)에서 정(情)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 이 조절기능은 육체가 갖고 있는 감각기관의 작용으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개체마다 감각기관의 능력이 각각 다른 만큼 인간의 정(情)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바로 그런 정(情)을 가진 존재다. 정(情) 때문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정 때문에 인생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정(情)이 없으면 인생 자체가 영위되지 못한다. 정(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순수한 느낌에서 나오는 순정(純情)과 이기적인 계산에서 나오는 욕정(欲情)이 그것이다. 순정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욕정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본래 순수(純粹)한 정으로 살아가는 ‘순수한 존재(存在)’였다. 그러나 ‘순수한 정’이 욕정으로 변질되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난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은 순수한 정을 욕정으로 변질시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시(詩)는 바로 이러한 마음의 표현이다. 시(詩)는 순수한 정서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욕정(欲情)으로 변질되는 상태를 참고 조절하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는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論語』爲政篇 제2장)라 했다.
그러므로 시(詩)를 읽으면 정서가 순화되고 느낌이 순수(純粹)해진다. 정이 순화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정을 순화(純化)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시(詩)를 읽는 것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시(詩)에서 일어난다.”고 했고, 그 아들에게 먼저 시를 읽도록 권했다. 시집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시경(詩經)』이다. 그래서『시경』을 읽어야 한다.
❊ 子曰 興於詩 02 立於禮 03 成於樂 —『논어(論語)』태백편(太伯篇) (제8장)
유학의 원조인 공자(孔子) 역시『시경(詩經)』을 최고의 경전으로 중요시하였다.『예기(禮記)』·『효경(孝經)』·『춘추(春秋)』에 무수히 인용하였을 뿐만 아니라,『논어(論語)』에는 특히 그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먼저 <술이편>에서 “공자께서 평소에 늘 말씀하신 것은 詩와 書, 그리고 禮를 행하는 일이었다.(子所雅言 詩書執禮)”고 하였으며, <태백편>에는 “학자들은 詩에서 善한 마음을 흥기시키고 禮에서 행실을 확립하며 樂에서 완성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말씀하셨다.
<계씨편>에서는 그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詩를 배웠는가? 사람이 詩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다.(學詩乎… 不學詩 無以言)” 하였으며, 또한 “사람이 周南·召南을 배우지 않으면 얼굴을 담장에 대고 서 있는 것과 같다.(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墻面而立也與)” 하여 이남(二南)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또 <양화편>(제9장)에서는 “제자들아! 그대들은 어이하여 詩를 배우지 않는가? 詩는 선한 마음을 흥기시키고 덕행과 정사를 관찰할 수 있으며, 여럿이 모여 화평하게 지낼 수 있고, 완곡한 표현으로 원망스러운 심경을 토로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군주를 섬기며 鳥獸와 草木의 이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된다.(子曰 小子何莫學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怒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하여『시경(詩經)』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근본임을 역설하였다.
공자는 또『시경(詩經)』은 내용이 충후(忠厚)하여 사람의 심성을 수양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다.『논어(論語)』위정편에는 “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마음에 간사[不正]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고 하였으며『예기(禮記)』경해(經解)에는 육경(六經)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溫柔敦厚 詩敎也’라 하여, 시(詩)를 배우면 사람의 마음이 온유(溫柔)하고 돈후(敦厚)해진다고 말씀하셨다. 즉『시경(詩經)』은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자신의 의사를 완곡하게 표현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므로, 인간의 윤리1도덕으로부터 정치·외교 등 폭 넓은 학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는『논어(論語)』자로편(제5장)에서 “시 삼백 편을 외우면서도 정사를 맡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사신이 되어 사방으로 나가서 마음대로 외교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시를 많이 외우고 있은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 한 것이다.
2.『시경(詩經)』의 성립과 영향
『시경(詩經)』은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시작되는 중구 서주(西周)에서부터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까지 불렀던 노래 가사(歌詞)의 모음집이다. 내용(內容)은 궁중의 향연이나 제례에서 불리던 노래 가사나 민간에서 불리던 민요 가사로, ‘국풍(國風)’ 160편, ‘소아(小雅)’ 80편, ‘대아(大雅)’ 31편, ‘송(頌)’ 40편 합계 311편인데 이 가운데 소아(小雅)의 생시((笙詩)인 <南陔>·<白樺>·<華黍>·<由庚>·<崇丘>·<由儀>의 6편은 가사가 없으므로 실제는 305편인 셈이다. 이 때문에 보통 ‘시삼백(詩三百)’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국풍(國風)’은 각국의 민요, ‘아(雅)’는 조정의 음악, ‘송(頌)’은 종묘 제사 때 연주하던 음악의 가사다.
『시경(詩經)』은 사언(四言)이 주조를 이루고 삼언(三言)에서부터 구언(九言)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그리하여 후세에 부시(賦詩)는 물론이요 각종 시체(詩體)도 이『시경(詩經)』에서 발달되었다. <江有汜>·<振振鷺>와 같은 삼언시(三言詩)는 이백의 <天馬歌>로 이어졌고, ‘誰謂雀無角 何以穿我屋’과 같은 오언시(五言詩)는 한대(漢代) 오언시의 기원이 되었으며, 육언(六言)과 칠언(七言)은 특히 악부(樂府)에 많이 영향을 주었다.
『시경(詩經)』은 원래 ‘시(詩)’라고만 불렀던 것이었으나, 전국시대 말기부터 ‘경(經)’이라는 말을 쓰게 되어, 각 경전에 ‘—경(經)’을 덧붙여 부르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러나『시경(詩經)』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송대(宋代) 이후로 보인다.
3.『시경(詩經)』의 편자(編者)
『시경(詩經)』이 만들어지기까는 채시(采詩)·헌시(獻詩)·산시(刪詩)의 3단계 과정을 거쳤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周)나라 때에는 열국(列國)의 풍속과 정치 상황을 고찰하기 위하여 채시관(采詩官)을 두어 시(詩)를 채집하였으며 또한 경(卿)·대부(大夫)들로 하여금 시(詩)를 지어 바치게 한 다음 태사(太師)와 악관(樂官)이 이를 편찬·정리했다는 것이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옛날에는 시를 채집하는 관리가 있었는데, 왕이 그것으로 풍속을 보고 득실을 알며 스스로 고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시(詩)는 각 지방에서 불리던 노래 가사를 채시지관(采詩之官))이 채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시의 원작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특히 국풍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사마천의『사기(史記)』「공자세가」에 의하면 채시지관이 모은 시가 3,000여 편이 되었는데, 공자가 그 중에서 잘된 것 300편을 골랐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공자가 시(詩) 3,000여 편을 300편으로 줄였다는 ‘산시설(刪詩說)’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어왔다. 그 중 김학주 역의『시경(詩經)』에서, 공자의 산시설(刪詩說)에 대해서, 당(唐)나라 때 공영달(孔穎達)의 소(疏)나 춘주좌전 노양공조의 계찰(季札)의 사례, 그리고『논어』「위정편」의 내용[주역강설 26~27쪽] 등의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송(宋)의 주자(朱子), 청(淸)의 주이존(朱彛尊) 등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다만『논어(論語)』자한편(子罕篇)에 ‘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란 공자의 말씀으로 미루어, 공자(孔子)가 현재와 같은 체제로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300여 편의 시는 공자가 정리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삼았기 때문에 오늘날『시경(詩經)』은 공자에 의해 정리된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정현(鄭玄)의『시보(詩譜)』에서 ‘당시 주(周)나라에 크게 유행하지 않던 ’노송(魯頌)‘과 ’상송(商頌)‘을 공자가『시경(詩經)』에 편입시켰다’고 한 것은『시경(詩經)』이 공자에 의해 정리된 것임을 확실케 하는 증거가 된다. 노송(魯頌)은 공자의 조국인 노(魯)나라의 송(頌)이고, 상송(商頌)은 ‘丘也는 殷人이다’(『시경(詩經)』「단궁편(檀弓篇)」)라고 한 공자의 말을 보면, 공자의 조상들의 조국인 은(殷)나라 송(頌)이기 때문에, 정현의 말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4.『시경(詩經)』의 체제
『시경(詩經)』은 사시(四始)·육의(六義)로 나누기도 한다. ‘사시’란 풍(風)·소아(小雅)·대아(大雅)·송(頌)을 이르며 ‘육의’란 풍(風)·아(雅)·송(頌)의 삼경(三經)과 흥(興)·부(賦)·비(比)의 삼위(三위)를 이르는 바, ‘風·雅·頌’은 시의 내용과 성질을 말하고 ‘興·賦·比’는 시의 체제와 서술방식을 말한다. 또한 풍(風)·대아(大雅)·소아(小雅)를 정(正)·변(變)으로 구분하여 주남(南)·소남(召南)을 정풍(正風), 패풍(風) 이하 13열국풍을 변풍(變風)이라 하며 소아(小雅)는 <鹿鳴>에서부터 <菁菁者莪>를 정소아(正小雅), <六月>에서 <何草不黃>까지를 변소아(變小雅)라고 하고, 대아(大雅)는 <文王>에서부터 <卷阿>까지를 정대아(正大雅), <民勞>에서부터 <召民>까지를 변대아(變(大雅)라 하는 바, 이에 대해서는 주자(朱子)의 해설이『시경집전』에 실려 있거니와 남송의 왕질(王質)과 정대창(程大昌), 청대의 고염무(顧炎武)는 남(南)[周南·召南]을 독립시켜 南·風·雅·頌의 넷으로 나눌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모시서(毛詩序)』『주례』「태사직」에는 시(詩)의 육의(六義)에 대한 설명이 있다. 시의 내용이나 서술방식에는 풍(風)·아(雅)·송(頌)·부(賦)·비(比)·흥(興)의 여섯 요소가 있다. 이 중에서 풍(風)·아(雅)·송(頌)은 시의 내용이나 성질에 따라 분류한 것이고, 부(賦)·비(比)·흥(興)은 시의 제작 원리와 서술 방식을 가지고 분류한 것이다. 육의(六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시의 내용
* 풍(風) ; 각 나라에서 유행하던 민요 / 당대 민중들의 유행가
* 아(雅) ; 조정에서 향연이나 제례를 거행할 때 불리던 노래 / 우아한 명곡
* 송(頌) ; 종묘의 제사 때 연주되던 음악의 가사 / 송가(頌歌), 찬송가(讚頌歌)
(2) 시의 서술방식
* 부(賦) ; 사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
* 비(比) ; 직접적인 비유(比喩)로 표현한 것.
* 흥(興) ; 먼저 다른 물건을 말하여, 읊으려는 내용을 끌어들여 일으키는 것, 복선(複線)
4.『시경(詩經)』의 해설
『시경(詩經)』의 해설서로는 한대(漢代)에 신공배(申公培)의 노시(魯詩), 원고생(轅固生)의 제시(齊詩), 한영(韓嬰)의 한시(韓詩) 등 今文[漢隸]에 의한 삼가시(三家詩)가 있었으나 모두 송대 이전에 실전(失傳)되었으며, 지금에 전하는 것은 오직 한대(漢代)의 모장(毛萇)이 古文[蝌蚪文字]으로 훈고(訓詁)한 것 뿐이다.이 때문에『시경(詩經)』을 ‘모시(毛詩)’라고 칭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전수과정을 설명하면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가 서(序)를 지어 증신(曾申)에게 전하였고, 曾申은 이극(李克)에게, 이극은 맹중자(孟仲子)에게, 맹중자는 근모자(根牟子)에게, 금모자는 순경(荀卿)에게, 순경은 모형(毛亨)에게, 모형은 <훈고전(訓詁傳)>을 지어 모장(毛萇)에게 전했는 바, 모형(毛亨)은 대모공(大毛公), 모장(毛萇)을 소모공(小毛公)이라 칭한다. 그후 후한 말기에 정현(鄭玄)이 모시(毛詩)를 근거하여 <시전( 詩傳)>을 지었으며 당(唐)나라 때 공영달(孔穎達)이 <모전(毛傳)>과 <정전(鄭傳)>을 취하여 正義를 세움으로써 <모시(毛詩)>만에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송대(宋代)에 이르러 구양수(歐陽脩)의「시본의(詩本義)」소철(蘇轍)의「시집전(詩集傳)」왕질(王質)의「시총문(詩聰聞)」정초(鄭樵)의「시변망(詩辨妄)」주자(朱子)의「시서변설(詩序辨說)」등이 나옴으로써「모전(毛傳)」과「정전(鄭傳)」에 대한 신봉이 퇴색하였다. 그러나 역시「정전(鄭傳)」은 주자(朱子)의「집전(集傳)」과 함께 권위있는 주해서로 인정받고 있다.
주자(朱子)의「시경집전(詩經集傳)」은 해박한 훈고(訓告)와 철저한 고증(考證)으로 모든 전주(箋注)를 압도한다. 원대와 명대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오직「시경집전」만을 공부하여『시경(詩經)』하면「시전(詩傳)」을 연상하게 되었다. 청대 고증학(考證學)이 나오면서 주자설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았으나 역시 그 위치는 확고부동하다.
詩經集傳 序
或有問於予曰 詩何爲而作也오 予應之曰 人生而靜은 天之性也요 感於物而動은 性之欲也니 夫旣有欲矣면 則不能無思요 旣有思矣면 則不能無言이요 旣有言矣면 則言之所不能盡하야 而發於咨嗟詠歎之餘者 必有自然之音響節族而不能已焉하니 此詩之所以作也니라
或者가 나에게 묻기를 “詩는 어찌하여 지었습니까?”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이 태어나서 靜할 때에는 하늘의 性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사물에 감동이 되어 動하면 性의 欲이 나온다. 이미 欲이 있으면 생각이 없을 수 없고, 이미 생각이 있으면 말이 없을 수 없고, 이미 말이 있으면 말로써 다할 수 없어서 咨嗟하고 詠歎하는 나머지 발하는 것이 반드시 자연스러운 音響과 가락이 있어 그칠 수 없으니 이것이 詩를 짓게 된 이유이다.”
曰 然則其所以敎者何也오
曰 詩者人心之感物而形於言之餘也니 心之所感이 有邪正이라 故로 言之所形이 有是非하니 惟聖人在上이면 則其所感者無不正하야 而其言이 皆足以爲敎요 其或感之之雜하야 而所發이 不能無可擇者면 則上之人이 必思所以自反하야 而因有以勸懲之하니 是亦所以爲敎也니라
“그렇다면 그 가르침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詩는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동이 되어 말의 나머지에 나타난 것이니, 마음이 감동하는 바에 邪와 正이 있다. 그러므로 말에 나타나는 바에는 是와 非가 있는 것이니, 오직 성인이윗자리에 계시면 감동된 것이 바르지 않음이 없어 그 말씀이 모두 족히 가르침이 될 수 있는 것이요, 혹시라도 감동이 雜되어 발하는 바가 선택할 것이 없지 못하면 윗사람이 반드시 스스로 돌이킬 바를 생각해서 이것을 인하여 善을 권면하고 惡을 징계함이 있으니, 이 또한 가르침이 된다.”
昔周盛時에 上自郊廟朝廷으로 而下達於鄕黨閭巷히 其言이 粹然無不出於正者 聖人이 固已協之聲律하야 而用之鄕人하며 用之邦國하야 以化天下하시고 至於列國之詩하야 則天子巡守에 亦必陳而觀之하야 以行黜陟之典이러시니 降自昭穆而後로 寖以陵夷하야 至於東遷하야 而遂廢不講矣라
저 옛날 周나라 전성기에는 위로는 交祭와 宗廟祭祀와 朝廷으로부터 아래로는 鄕黨과 閭巷에 이르기까지 그 (施의) 말이 순수하여 모두 正道에서 나온 것은 성인이 진실로 이것을 聲律에 맞추어 지방 사람들에게도 사용하고 국가에도 사용하여 천하를 敎化하였고 列國의 시에 이르러서는 천자가 巡狩할 때에 또 한번 반드시 이것을 진열하고 관찰하여 黜陟의 법을 행하였다. 그런데 시대가 내려와서 昭王·穆王 이후부터는 점점 침체하여 동쪽으로 天道함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폐지되고 講하지 않았다.*(平王이 大戎의 亂을 피하여 洛陽으로 遷都함)
孔子生於其時하사 卽不得位하야 無以行勸懲黜陟之政일새라 於是예 特擧其籍而討論之하야 去其重複하고 正其紛亂하며 而其善之不足以爲法과 惡之不足以爲戒者 則亦刊而去之하야 以從簡約, 示久遠하야 使夫學者로 卽是而有以考其得失하야 善者師之而惡者改焉케시니 是以로 其政 雖不足以行於一時나 而其敎 實被於萬世하니 是則詩之所以爲敎者然也니라
“孔子께서 이때에 태어나서 이미 지위를 얻지 못하여 勸懲하고 黜陟하는 정사를 행할 수 없으셨다. 이 때문에 다만 그 典籍을 들어 토론하고 중복된 것을 제하고 紛亂한 것을 바로잡으며, 善이 족히 법이 될 수 없는 것과 惡이 족히 경계가 될 수 없는 것은 또한 削除하여 제거해서 간략함을 따라 久遠함을 보여주어서, 배우는 자로 하여금 이것을 가지고 그 득실을 상고하여 善한 것을 본받고 惡한 것을 고치게 하셨다. 이 때문에 그 정사가 한 시대에 행해지지는 못하였으나, 그 가르침은 실로 만세에 입히셨으니, 이것이 詩經이 가르침이 됨이 이러한 것이다.”
曰 然則國風雅頌之體가 其不同若是 何也오 曰 吾聞之하니 凡詩之所謂風者 多出於里巷歌謠之作하니 所謂男女相與詠歌하야 各言其情者也라 唯周南召南은 親被文王之化以成德하야 而人皆有以得其性情之正이라 故로 其發於言者 樂而不過於淫하며 哀而不及於傷이라 是以로 二篇이 獨爲風詩之正經이요 自邶而下 則其國之治亂不同하고 人之賢否亦異하야 其所感而發者 有邪正是非之不齊하니 而所謂先王之風者 於此焉變矣라
“그렇다면 國風·雅·頌의 體가 그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내가 들으니, 무릇 詩 중에 이른바 風이라 하는 것은 里巷의 歌謠의 작품에서 나온 것이 많으니, 이른바 男女가 서로 읊고 노래하여 각기 그 情을 말했다는 것이다. 오직 周南과 召南은 치히 文王의 교화를 입어 덕을 이루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 性情의 올바름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 말에 나타난 것이 즐겁되 너무 지나치지 않고, 슬프되 傷함에 미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周南·召南 두 편은 홀로 風詩의 正經이 되었고, 邶風으로부터 이하는 그 나라의 治亂이 똑 같지 않고, 사람의 賢否가 또한 달랐다. 그리하여 감동하여 발한 것이 邪正과 是非의 같지 않음이 있었으니, 이른바 先王의 풍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변하였다.
若夫雅頌之篇은 則皆成周之世예 朝廷郊廟樂歌之詞라 其語和而莊하고 其義寬而密하야 其作者往往聖人之徒하니 固所以爲萬世法程而不可易者也요 至於雅之變者하야 亦皆一時賢人君子閔時病俗之所爲어든 而聖人取之하시니 其忠厚惻怛之心과 陳善閉邪之意가 尤非後世能言之士所能及之라 此詩之爲經이 所以人事浹於下하고 天道備於上하야 而無一理之不具也니라
雅·頌의 편으로 말하면 모두 成周의 세대에 朝廷과 郊廟에 쓰는 樂歌의 내용이다. 그 말이 和하면서도 장엄하고, 그 뜻이 너그러우면서도 치밀하여, 작자가 왕왕 성인의 무리였으니, 진실로 만세에 法程이 되어 변할 수 없는 것이다. 雅의 變으로 말하면 또한 이것도 모두 한 때의 현인·군자가 세상을 걱정하고 풍속을 안타깝게 여겨 지은 것인데, 성인이 이를 취하셨으니, 그 忠厚하고 惻怛한 마음과 善을 말하고 奸邪함을 막으려는 뜻은, 더욱 후세에 문장을 잘하는 선비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것이 詩經이 인간의 일이 아래에서 무젖고 천도가 위에 갖추어져 이치도 구비하지 않은 이유이다.”
曰 然則其學之也 當奈何오 曰 本之二南하야 以求其端하고 參之列國하야 以盡其變하고 正之於雅하야 以大其規하고 和之於頌하야 以要其止니 此學詩之大旨也라 於是乎章句以綱之하고 訓詁以紀之하며 諷詠以昌之하고 涵濡以體之하야 察之情性隱微之間하고 審之言行樞機之始면 則修身及家, 平均天下之道가 其亦不待他求而得之於此矣리라 問者唯唯而退어든 余時方輯詩傳일새라因悉次是語하야 以冠其篇云이라
淳熙四年丁酉冬十月戊子에 新安朱熹 序하노라 * (淳熙, 宋 熙宗年號)
“그렇다면 이것을 배우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二南(周南과 召南)에 근본하여 그 단서를 찾고, 列國의 風을 참고하여 그 變을 다하고, 雅에서 바르게 하여 그 규모를 키우고, 頌에 화하여 그 그침[歸結]을 요약하여야 하니, 이것이 詩經을 배우는 大旨이다. 이에 章句로써 그 벼리를 삼고, 訓詁로써 작은 벼리를 삼으며, 읊어 창달하고 무젖어 체득하여, 性情의 은미한 사이에서 살피고, 言行의 樞機의 시작에서 살핀다면, 몸을 닦아 집안에 미치고 천하를 고르게 하는 道[方法]가 이 또한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이 여기에서 얻어질 것이다.” 이에 묻은 자가 ‘예, 예!’ 하고 물러갔다. 나는 이 당시 詩傳을 편집하고 있었으므로 인하여 이 말을 모두 次例를 엮어서 이 편의 머리말로 적는 바이다.
淳熙 4년 丁酉年(1183) 겨울 10월 戊子日에 新安 朱熹는 序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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