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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시 웅진로 280 (금성동 65-3)
공산성은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으로 백제의 문중왕 원년(475) 한강유역의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옮길 때까지 웅진시대의 도성이었으며 그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도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산성의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성곽의 길이는 2,660m이며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으로 원래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대부분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내 유적은 임류각, 추정왕궁지, 연지,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공북루, 진남루, 동문루, 금서루, 영은사, 광북루등 각 시대별로 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다. 백제의 고도 부여의 동쪽 교외인 '능뫼골'에 있는 능산의 중복에 자리잡고 있다.
이괄의 '삼일천하'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조선 사회는 한동안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 란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은 또 다른 반란을 염려하는 한편,
사분오열되어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다 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각 계파들은 반대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계략 짜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급기 야 역모설을 퍼뜨려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이같은 계파간의 갈등이 빚어낸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는 등극한 지 1년도 채 못되어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는 신세가 된다. .
인조실록의 한 사론은 이 사건을 이괄이 인조반정 때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2등 공신에 책록된데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밀려난 것에 앙심을 품고 일으킨 반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624년에 일어난 이괄 란을 나주의 저희 선대 남간공의 세밀한 기록을 올려보자.
영은사는 세조 1458년에 세워진 사찰이다.
인조임금은 이괄의 부인, 며느리..등등 가족들을 처형시키고 장유의 만류에도
2월 8일 남대문 자물통을 부수고 동작나루를 건너 이곳 공주 금강나루 안쪽 공산성 내
영은사로 피난을 왔다고 한다.
금강건너 영은사가 보이군요,.
인조임금이 한양에서 내려와 금강을 건너 간 곳입니다.
원문/남간 나해봉
移記와 번역 /나천수
□ 熹宗哲皇帝天啓四年甲子, 仁祖大王二年, 四十一歲(희종철황제천계사년갑자, 인조대왕일년, 사십일세)/1624년 갑자년 인조대왕1년, 마흔한살이 되다,
二月聞逆适擧兵叛馳倡義檄/2월에 역적 이괄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고 들려서 창의 격문을 전파하였다.
正月二十二日逆适以平安兵使與龜城府使韓明璉(정월이십이일역괄이평안병사여구성부사한명련)/정월 22일 역적 평안 병사 이괄과 구성부사 한명련이
謀反直向犯京(모반직향범경)/ 반역을 꾀하여 곧바로 서울로 침범하니
始聞急警發檄道內畧曰(시문급경발격도내략왈)/처음 급한 경보를 듣고 격문을 도내에 보냈으니 이르기를
彼逆适負天地邜/卵/育之恩(피역괄부천지석/란/육지은)/저 역적 이괄은 천지에 알을 품듯 길러준 은혜를 저버리고
肆陞梁吹主之毒(사승양취주지독)/방자하게 들보에 올라가 주인에게 독을 불고 있습니다.
又曰(우왈)/또 이르기를
當於十六日整旅啓行爲諸道倡云(당어십육일정여계행위제도창운)/이 달 16일에 군사를 정돈하여 길을 떠나니 여러 도에서는 앞장서 주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는데
餘見集選/나머지는 남간집선을 보라.
聞大駕幸公州與靈光郡守元斗杓議討賊之策(문대가행공주여영광군수원두표의토적지책)/임금이 탄 수레가 다행히 공주에 있다고 들어서,
영광군수 원두표와 적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書畧曰(서략왈)/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國有大變軍與方急宮軍外(국유대변군여방급궁군외)/나라에 큰 변란이 있어 軍은 바야흐로 급하므로 宮을 지키는 軍 외에
加抄別隊直赴行在(가초별대직부행재)/예비로 뽑은 별대는 행재소로 직접 가고
則急調義兵卽當繼援云(칙급조의병즉당계원운)/그리고 급히 調發한 의병은 마땅히 후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聞慈殿至完府董督義旅(문자전지완부동독의여)/임금의 어머니께서 전주부에 이르렀다고 들었으며, 의병대를 독촉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初十日李公元翼奉慈殿至完府/초10일 이원익공이 받들어 임금의 어머니가 전주부에 이르렀는데
道內臣民尤切奔問之擧/도내 관원과 백성들이 더욱 절실히 급히 달려가 안부를 여쭙고 물었다.
會兵公館布告慈殿敎文/공관에 모인 병사들에게 布告하여 임금의 어머니께서 敎文를 내렸다.
十三日敎文畧曰(십삼일교문략왈)/13일 임금이 내리던 글에 대략 이르기를
嗟爾八方忠義之士(차이팔방충의지사)/아, 너희 팔방에서 충의에 찬 선비들이여
皆我祖宗及先王敎育之人/모두 나의 조종이나 선왕이 가르친 사람들이니
當此危難爾等各出義兵穀/마땅히 이 위난에 너희 등이 각각이 의병과 곡식을 내어
急急來救云/매우 급히 와 구원하였느니라.
聞大駕還都罷義旅(문대가환도파의여)/임금의 수레가 환도한다고 들어서 의병대를 파하였다.
十一日元帥張晩先鋒(십일일원수장만선봉)/11일 장만 원수가 선봉이 되고
鄭忠信再從叔宣傳德憲戰于鞍峴(정충신재종숙선전덕헌전우안현)/정충신, 재종숙 선전관 덕현께거 안현 전투에서
适敗走就斬二十二日(괄패주취참이십이일)/이괄이 패하여 도주하였는데 22일 붙잡아 목을 베었다.
上還都湖南義兵遂罷(상환도호남의병수파)/임금께서 환도하자 호남의병은 일을 마치고 파하였다.
答義廳募穀通文/義廳의 募穀 통문에 답하다
時自靈光郡義廳分定九大邑(시자영광군의청분정구대읍)/때는 영광군 의청에서 9대읍에 나누어 정한 바
定有司付屬邑馳通募穀(정유사부속읍치통모곡)/정한대로 관리는 부속 읍에 모곡에 대해 뒤좇아 통문 하였다.
故二十三日答文畧曰(고이십삼일답문략왈)/그러므로 23일 답문에 대략 이르기를
官廩軍儲罄竭無餘(관름군저경갈무여)/官의 창고는 군량이 탕진되어 여분이 없습니다.
當此板蕩之時(당차판탕지시)/이처럼 국정이 문란할 때는
可不効治(가불효치)/가히 다스리는데 힘쓰지 못하겠지만
埃之補云(애지보운)/조그마한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幼學鄭如龍姜鳳覽李榮廷李完廉公弼羅海崙李宗吉生員吳挺男進士羅海鳳生員吳以健等(유학정여룡강봉람이영정이완염공필나해륜이종길생원오정남진사나해봉생원오이건등)
/幼學 鄭如龍, 姜鳳覽, 李榮廷, 李完, 廉公弼, 羅海崙, 李宗吉, 生員 吳挺男, 進士 羅海鳳, 生員 吳以健 等입니다.
爲募義穀有司(위모의곡유사)/모의곡 유사가 되었다
本州有司爲十七員(본주유사위십칠원)/본주의 모의곡 관리는 17명이다.
見募義錄(견모의록)/모의록을 보라
聞林戚丈觀海殉節作輓(문임척장관해순절작만)/친척되는 어르신 관해 임회가 순절하였다고 들어서 輓詞를 지었다.
秋中別試(추중별시)/가을에 별시에 합격하였다.
위의 자료들은 서울 대학교 규장각에 所藏되어 있음
쌍수정에서 내려다 본 강북쪽 공주시가지.바로 저 금강을 건너서 서울로 향하는 길입니다.
인조임금은 매일 이곳에 올라서서 서울 도성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누군가가 천리마를 타고 오지 않나 강 건너 쪽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한양을 가려면 반드시 거처야 하는 관노의 길인 논산을 거쳐서 이곳 공주 공산성 (진남루)문으로 들어와 금강을 건너야 한양을 간다.
1624년 이괄 란 때 남간공이 의병들을 모집해 이곳 공주까지 온 것이다.
討逆适募義檄(토역괄모의격)p171
-역적 이괄을 치는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
지은이 / 남간 나해봉
번역과 해설 / 나천수
募義都有司進士羅海鳳等(모의도유사진사나해봉등)/모의도유사 진사 나해봉 등은
傳檄于道內諸君子(전격우도내제군자)/도내의 모든 군자에게 격문을 전합니다.
嗚呼(오호)/아!
彼逆适負天地卵育之恩(피역괄부천지난육지은)/저 역적 이괄은 알을 품듯 길러 준 은혜, 하늘과 땅에 빚을 지고 있음에도
肆陸梁吠主至毒(사육양폐주지독)/방자하게 날뛰며 지독하게 주인을 짖는 개가 되어
至於稱兵邊圉(지어칭병변어)/변방의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며
將犯京邑(장범경읍)/서울을 범하기에 이르렀으니
則在欒士臣民者(칙재란사신민자)/가름대 역할로 모범을 보이는 선비, 신하, 백성들은
寧能哭殺而不效寢皮之策乎(영능곡살이불효침피지책호)/어찌 울음으로 이를 죽일 수 있으며 적의 가죽을 깔고 앉을 대책을 세우지 않겠습니까.
生等以爲今日眞我死日也(생등이위금일진아사일야)/생 등은 오늘이 참으로 우리가 죽어야 할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唾手奮臂(타수분비)/손에 침을 뱉고 팔뚝을 걷어붙이고
裂裳募義(열상모의)/치마를 찢어 내걸고서 의병을 모집하나니
聚甲士略干(취갑사약간)/군인 약간과
粮餉略干(량향약간)/양곡 약간
兵器略干(병기약간)/무기 약간을 모으고
戴頭直前(대두직전)/머리를 처 들고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
突刃觸鋒(돌인촉봉)/칼날에 부딪치고 칼끝에 베이고
爲王師顔行(위왕사안행)/왕의 군사에 앞장이 되어
而誓虔劉一天之讎賊也(이서건유일천지수적야)/한 하늘을 같이 하지 못할 원수를 죽이기를 맹세 합시다.
嗚呼(오호)/아!
三軍易得(삼군역득)/3군은 얻기 쉽지만
一將難求(일장난구)/한사람의 장군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故前直講林堜(고전직강임연)/옛날에 전 직강 임연은
世襲忠義(세습충의)/대대로 충의를 이어온 집이요
兼有智略(겸유지략)/겸하여 지략도 있는데
而身在草土(이신재초토)/몸이 초야에 있어
以禮自固(이례자고)/예의를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生等引陳大義(생등인진대의)/생 등이 대의를 들어
反復開勤(반복개근)/반복해서 부지런히 말하기를
一依死節臣故崔兵使慶會故事(일의사절신고최병사경회고사)/옛날에 병사 최경회가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신하의 고사로
强奪其情(강탈기정)/강제로 그의 생각을 돌려
使之登壇(사지등단)/단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當於同月十六日(당어동월십육일)/이 달 16일에
整旅啓行(정여계행)/군사를 정돈하여 길을 떠나
爲諸道倡(위제도창)/여러 도를 위해 앞장을 서려고 하노니
伏願諸君子(복원제군자)/엎드려 원하옵건대 모든 군자는
振敵愾之氣(진적개지기)/적개심을 떨치고
勵死君之義(려사군지의)/임금을 위해 죽을 의기를 가다듬어
千里來應(천리래응)/천리 밖에서 오고 응하여
一乎偕作(일호해작)/한번 부름에 함께 거사를 합시다.
則必見賊不暇走而當死咋矣(칙필견적불가주이당사사의)/그러면 적은 달아날 겨를 도 없이 씹혀 죽을 것이 분명합니다.
大抵遣賊君父(대저견적군부)/무릇 임금에게 적을 보내는 것은
罪之大者(죄지대자)/죄가 큰 것이요
與賊俱生(여적구생)/적과 함께 산다는 것은
恥之甚者(치지심자)/수치스럽기가 심한 일입니다.
伏願諸君子(복원제군자)/엎드려 원하옵건대 모든 군자는
寧作沙場上鬼(영작사장상귀)/차라리 백사장 위의 귀신이 될지언정
而毋爲無義之人也(이무위무의지인야)/의리가 없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공산성에서 내려다 본 금강
앞에 보이는 금강대교는 일제 강점기대 세운다리로 6.25때는 중공군이 내려오는 길을 막기 위해 아군쪽에서 일부를 푹파해다가 다시 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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