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0.月. 윤흥길의 ‘장마’가 생각나는 날
07월10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벨라거사입니다.
장맛비를 홈빡 맞았습니다. 검고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뿌루퉁한 하늘에서 언제든지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집에서 나갔기 때문에 쏟아지는 비로인해 불편할 것은 없었으나 신발과 양말洋襪이 비에 젖어 발바닥이 조금 아팠습니다. 하지만 이정도로는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거나 살갗이 쓰라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6월 한 달 동안 일주일에 다섯 차례씩 그러니까 매일 4시간 반가량 걸어 돌아다녔기 때문에 다리와 발이 단련이 되어있어서입니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체중도 6Kg 감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주 동안은 들쑥날쑥한 장마로 걷기를 거의 하지 못해서 다리가 근질거리던 참이라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러닝팬츠에 가벼운 복장을 하고 침상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빗기 포룜한 바람이 허공중에 살랑거리고, 물안개인지 비구름인지 푸른 숲과 멀리 산기슭을 따라 하얗게 몽실거리는 기운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풍경들이 보기 좋은 이른 새벽녘의 양재천이었습니다. 우산을 손에 든 산책객들이 띄엄띄엄 보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면 알게 되겠지만 장맛비에는 그런 우산은 별로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직접 몸으로 확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산으로 몸을 얼추 가려도 결국 다 맞을 비라면 처음부터 비에게 아주 몸을 맡기고 편안하게 걸어 다니는 자세가 마음이 편할 줄도 모릅니다. 오늘 아침 나의 복장은 마라톤 복장입니다만 달리지 않고 걸을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걷다보면 어느 순간 이제부터 달려야겠다는 마음이 솟아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보통 체중이 78Kg가량일 때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달리려면 달릴 수야 있겠지만 예전 경험에 의하면 무릎이나 발목에 부상을 당하거나 몸에 무리가 오는 경우가 간혹 있어서 이제는 내 마음대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소리를 들을 후에 몸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달리는 것입니다. 집 현관문을 나섰을 때가 아침 5시50분이었습니다. 대치2교를 지나 양재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십여 년 전에는 대치2교에서 양재천으로 접어드는 입구를 대치 쌍룡 아파트 단지 측에서 막아놓았는데 그래도 자꾸만 사람들이 드나드는데다가 결국에는 산책객들에 의해 구청에 민원이 들어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대치2교에서 양재천으로 접어드는 이곳 양재천 제방길은 쌍룡 아파트 소유가 아니라 서울시 소유의 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이제는 정상적인 출입구가 생겨서 가슴을 펴고 위풍당당威風堂堂하게 양재천으로 들어 다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친구스님이 ‘사람이 그리운 산골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산문집散文集을 발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교보문고에서 저자 사인회도 열었고 출판사 쪽 사람들과 저녁 회식도 함께 했었습니다. 그런 뒤로 나중에 친구스님께서 집으로 책 두 권을 소포로 보내주었습니다. 나는 스님의 글 솜씨를 알고 있는지라 한 반 년쯤 지난 후에 책을 열고 읽어보았습니다. 만날 때마다 친구스님이 책 내용이 어때요? 하고 물어보면 아직 안 읽어봐서 몰라요. 하고 반 년 동안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게 반 년이 지나자 친구스님이 묻기에 지쳤든지 아니면 잊어먹었던지 책 내용이 어떠하냐고 묻지를 않았습니다. 책에는 내 이야기가 나와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친구스님은 나를 가리켜 말과 글에 대단히 예민한 사람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친구스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스님, 내가 말과 글에 예민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니까요. 그러자 친구스님께서 그게 그거라니까요, 허허허...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글쎄요, 친구스님 말을 들어보면 또 친구스님의 말에도 나름 일리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 나는 길을 걸을 때에도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걸음걸이를 상상하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며 걷습니다. 가슴을 펴고, 양 어깨는 붙이고, 턱 끝은 약간 당기고, 허리를 세우고 두 발은 11자가 되거나 일직선 위를 걷는다. 라거나 여기에 더하여 속보速步로 걸을 때면 가볍게 구부린 양 팔꿈치를 뒤쪽으로 채듯이 당기고, 엉덩이를 앞으로 내밀면서 걷고, 발바닥을 땅에 착지할 때는 엄지발가락부터 시작해서 뒤축까지 발바닥 안쪽이 먼저 닿도록 한다. 등등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걸었습니다. 양재천변 길을 따라서 대치교 아래를 지나고, 영동5교, 영동4교, 영동3교, 영동2교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영동1교가 저만큼 보이는 곳에서 드디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스아아아~ 슈와와와와~ 솨솨솨 아흐~ 하는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순식간에 내게로 달려오면서 주변 풍경이 갑자기 아무삼삼 희무끄레 해지더니만 다발 굵은 빗줄기가 눈앞에 어렴풋이 사선斜線을 그으면서 허공에 점점이 어슷한 줄을 세워 놓았습니다. 몸이 완전히 빗물에 젖었다는 느낌이 오는 것은 턱 밑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질 때부터였습니다. 그래도 영동1교 밑으로 들어가자 빗줄기 없는 투명하고 맨숭한 공간이 개운하게 좋아보였습니다. 아침 산책객 여럿이 우산을 털면서 걸음을 멈추고 먼 하늘을 본 채로 서있었습니다. 다리 아래 넓은 빈 공간에는 빗줄기에 밀려온 듯한 실바람들이 길고 가느다란 몸들을 꽈배기처럼 부드럽게 꼬는 시늉을 하면서 그렇게 흘러 다니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영동1교를 지나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넘어 U턴을 해서 출발기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등용문 출발기점 5,000m가 되기 때문에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는데 5,000m에다 양재천 입구에서 집까지 왕복 3Km를 더하면 양재천 일주 10Km에다 왕복 3Km로 총거리 13Km, 걷기 시간으로는 2시간20분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지난 주 운동을 못 한 것을 참작해서 조금만 더하기로 했습니다. 비는 이제 민낯을 내놓고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더 젖을 것이 없어진 마당이니 거칠 것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마구 걷다보니 양재동 LH 아파트가 있는 7,500m까지 걸었습니다. 자, 이제는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빗물에 젖은 신발과 양말 때문인지 불은 발바닥에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장맛비도 떨어지고 멈춤의 흐름에 따라 강약强弱이 반복되는데 세차게 내릴 때는 마치 내가 물속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부연 빗줄기 차지한 천변 산책길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아 왕관표 까스명수 마신 위장처럼 시선 닿는 곳까지 시원스럽게 뻥 뚫려있었습니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는 웬일인지 부채표 활명수보다는 왕관표 까스명수를 애용했기 때문에 소화제하면 왕관표 까스명수라고 머릿속에 각인刻印되어 있습니다. 양재천 건너편으로 조금 전 내가 지나갔던 천변 산책로를 이따금 쳐다보면서 그저 비를 맞으면서 빗물 위를 걸었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빗줄기가 많이 가늘어져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았더니 아침 9시30분이었습니다.
지난 늦가을 무렵에 고향 K시에 살고 있는 사촌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내용이란 사촌들 간에 오래 전부터 일 년이면 몇 차례씩 모임을 갖고 있는데, 우리 형제들만 모두 서울에 올라와 살고 있어서 항상 우리만 빠져있는 것이 서운하던 차에 오늘이 마침 모임 날인데 내 이야기가 나와서 그렇다면 서울로 형님에게 전화를 드려보고 다음 모임부터 참석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고 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한 집에서 대표 한 명씩 참석을 하는 것이라 형님에게 연락을 했으니 가부可否를 말씀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두말없이 좋다고 했습니다. 한 집에 대표 한 명이라니 그렇다면 윗 어르신들이 다섯 형제이시니 다섯 명이 모인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안은 손이 번성繁盛해서, 특히나 남자손이 번성繁盛해서 얼른 헤아려보아도 사촌 수가 서른 명은 되어보였습니다. 옛 어른들께서 좋아하시는 자손융성子孫隆盛으로 종의 질은 잘 모르겠지만 양으로는 대단히 성공을 한 예例라고 생각을 합니다. 집안 사정이 그러다보니 일 년이면 몇 차례씩 서른 명을 다 모이게 할 수도 없을 터이고 서울에 1/3가량, 고향인 K시에 1/3가량, 거기에다 부산과 대전과 순천과 인천 등지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사촌들을 모이게 하는 것보다는 대표 한 명씩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그저 잊고 지냈었는데 한 보름 전엔가 사촌동생에게서 전화가 와서 7월8일 토요일이 모임 날인데 시간을 내어 오실 수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쾌히 그날에 맞추어 K시 내려가마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슬금슬금, 시간은 소리 없이 7월8일이 되었습니다. 이번 귀향길은 기상상태도 그렇고 해서 차를 가져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서울보살님은 수서역에서 기차로 가시라고 권했지만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부산에서 조카아이 혼례식이 있어서 형님 몇 분과 ktx를 타고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자리가 비좁아 불편했던 기억이 있어서였습니다. 여하튼 서울보살님이 친절하게 학여울역까지 차로 데려다주어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편안하게 강남고속터미널까지 갔습니다. 지하철도 오랜만에 타보았지만 고속버스는 더 오랜만에 타보는 것 같았습니다. 고속버스표를 끊고 한 20여분가량 기다렸다가 버스에 올랐습니다. 고속버스 운행을 시작했던 ‘70년대 중후반만 해도 고속버스에는 안내양이 타고 있어서 물도 가져다주고 차멀미로 인해 구토를 할 수 있는 비닐봉투도 가져다주고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고속버스 안내양은 일반 시내버스 안내양보다는 무언가 세련되고 예뻐 보였습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고속버스 안내양이 지금의 비행기 스튜어디스 분위기가 살짝 났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쌍팔 년도인 1988년 여행자유화가 시행되자 냉큼 방콕을 거쳐서 인도에 가면서 타이항공을 타게 되었는데 태국 스튜어디스가 얼마나 기품氣品있고 예쁘게 생겼던지 김포에서 방콕까지가 10여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본 결과 태국이 원래 미인이 많은 곳으로 여러 명의 미스월드를 배출해낸 미향美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 갈 때는 꼭 태국에 들려가고는 했는데 나중에 뭄바이 직항이 생겨 방콕을 자주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뒤에 미얀마에 갔더니 미얀마 항공사 스튜어디스도 만만치 않게 예뻤습니다. 아프리카 항공은 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스튜어디스는 동남아권 항공의 미적 수준이 가장 착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나 유럽 항공의 스튜어디스는 그냥 객실 근무자라고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져옵니다. K시까지 내려가는 내내 한반도 남단의 하늘을 가린 짙은 잿빛 구름 틈새로 장맛비가 내렸다 멈췄다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