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청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창세 49, 1 - 2. 8 - 10
† 복음 : 마태 1, 1 - 17
★ 야곱은 아들들을 불러 앞으로 이스라엘 가문에 일어날 일들을 알려
준다. 야곱은 유다가 모든 민족들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제1독서).
★ 예수님의 탄생 경위를 전하는 족보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류
역사를 이끌어 오셨는지 알려 준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탄생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성탄도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미사 독서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읽을 때에는 괜히 신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말을 듣는 신자들이 지루해할 것이라는
노파심 때문이었습니다. 최영미 시인은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쓰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허무하다. 그치? 어릴
적, 끝없이 계속되는 동사의 수를 세다 잠든 적이 있다.”
가계의 영속과 씨족의 유대를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족보가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조선 시대가 그랬습니다.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족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문중에서 부끄러운
사람은 의도적으로 족보에서 빼 버리고, 자랑삼을 만한 벼슬을 한 사람은
사실 이상으로 과장해 온 것이 우리나라 족보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부끄러운 선조의 이름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왜
그런지 궁금합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잘못과 허물로 물든 인간을 도구로 당신의 구원 역사를
펼쳐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곡선을 가지고 직선을 그리시는 분이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오, 복된 죄!”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로써 구원으로 이끄셨던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지나온 우리 삶의 과정을 조용히 들여다봅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흔적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2012년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나도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항상 자기 밖에 모르는 노신사가 기차에 올라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 바로 옆자리에 여행용 가방을 올려놓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옆자리에 못 앉게 하고 편안히 여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차가 막 떠나려 할 때 소년 하나가 같은 차간에 뛰어 올라와
그 늙은이의 옆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자리가 있어요. 내 친구 곧 올 거요.”
“그럼 그 분이 올 때까지만 앉아 있겠습니다.” 하고는 그 가방을
그의 무릎에 놓고 늙은이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바로 그때 열차가 떠나려는 기적이 울리고 열차는 스팀을 내 뿜기
시작했습니다.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소년은 그 여행용
가방을 들어 창밖으로 내 던졌습니다.
그 늙은이의 대경실색 하는 보습을 보면서 "친구 분은 늦었어요.
기차를 놓쳤으니 가방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해 드려야지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이솝이
쓴 ‘양치기 소년’입니다. 양치기 소년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몇 번 거짓말을 하지만, 결국 그 화살은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거짓말은 - 그것이 착한 거짓말이나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며
남을 위한 거짓말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 사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말은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거짓은 사랑의 반대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의 아버지라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진실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러면 나도 말하지
않겠다.”라고 응수하십니다.
“나 너랑 더 이상 말 안 할래!”
이 말은 더 이상 관계를 원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하신다면 그것만큼 큰 비극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응답도 잘 안 오는 것 같고, 성경 말씀을
읽어도 그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나에게는 말씀을 해 주시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하느님은 그것을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따 먹고 죽었습니까?
만약 안 죽었다고 대답하신다면 내가 아직은 완전히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가 진실하지 못해서 뱀을
진실 되게 보고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 말씀대로 무조건 죽어야 옳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이나 라자로를 보고는 잠자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라.” 혹은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하시며 당신을 따르지
않거나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들을 죽은 이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는 어차피 썩어 없어질 육체가 죽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하느님과 단절되는 것이 참 죽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하느님과 단절된
것이 곧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먼저 진실 되지 못하기에 하느님께서도 더 이상
성경말씀이나 기도를 통해 가르쳐 주시거나 말씀을 해 주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한 번 거짓말을 하느니 천 번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거짓말의 해악이 큰 것입니다.
여러분도 호감 있게 보이던 사람이 대놓고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 갑자기 비호감으로 보일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고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깊은 진실을 털어놓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진실 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도 사람들로부터도 깊은 이야기를 듣지
못하기에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하고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에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기에 하느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기를 원한다면 내 입과 행동에서 거짓이
절대 새어나오지 않게 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2년 다해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마태오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집안에 있는 족보에 여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있었나
봅니다. 그리고는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지곤 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지금도 혈연, 지연, 학연에 목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 없이
올라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다말, 창녀로써
적군과 내통한 라합, 라합은 예리코를 정탐하러 갔을 때에
여호수아가 보낸 심부름꾼들을 그 여자가 살려 주었기에 그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그에게 딸린 모든 이를
살려주었습니다(여호6,23-25).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이를 갈며 싫어했던
이방인을 보아즈는 아내로 삼았습니다. 조상이 번듯해야 행세하는
세상인데 예수님의 조상은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다윗은 우리야라는 병사의 아내를 취하여
잠자리를 가졌고,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하자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하여 우리야를 최전선으로 보내 죽게 한 다음, 그의
아내, 바쎄바를 취하였습니다. 그렇게 빼앗은 여인에게서 얻은
자식을 메시아의 조상으로 삼았으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첩의 자식을 드러냄으로서
구박과 멸시 속에 살아가야할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내 부모, 혹은 윗대의 조상에서 이상한 가족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사랑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러 인간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하느님의 섭리 안에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4,18) 입니다. 이제 그분의 자녀가 그분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깊은 상처 그 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2012년 다해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 마태1,1-17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깊은 상처 그 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어려운 시절 한국에 선교사로 오신 파란 눈의 외국인 신부님들,
한국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한국식 성이나 이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외국 이름이 Robert인 경우 제일 앞 글자를 따서
노신부님이라고 성을 지었습니다. Maurizio인 경우 마신부님으로
이름 짓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웃기는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한 선교사 신부님
앞으로 정체불명의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족보 팔아먹는 업체에서
한국 신부님인줄 알고 선교사 신부님께 족보를 팔아먹으려고
집요하게 전화를 했고, 뭔지 모르는 착한 선교사 신부님, 한부
보내달라고 하셔서, 30만 원짜리 큼지막한 족보 책이
간이세금영수증과 함께 도착했더랍니다.
족보, 요즘이야 그게 뭐 대단한 거냐고, 여기지만 과거 우리
어르신들 마치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전쟁이라도 날라치면 집문서나
땅문서와 함께 제일 먼저 챙긴 것이 족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도 족보라는 것, 마치 뿌리, 생명,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사 다닐때 마다, 유배 갈 때,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조차도 족보를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족보, 조상, 민족, 뿌리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성서의 첫 부분인 마태오 복음서, 그 첫 장에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서두에 별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는 것, 대체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왜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 의미 없어 보이는 낯선 이름들이 복음서 서두를 장식하고
있을까요? 왜 복음서 첫 출발이 이토록 무미건조하고 흥미 없는 사람
이름으로 시작될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그 한가운데 현존해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세주께서는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기도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한 정도의
천상 용모를 지니신 분, 우리 인간이 도저히 닿지 못하는
아득한 먼 곳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위에
두발로 굳건히 딛고 서계시는 분, 다사다난한 우리 인간사, 폭풍
속 같은 우리 인생살이 한 가운데서 들어와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그 안에 들어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예수님의 조상들 가운데는 인간의 위대함도 보이지만
인간의 타락과 죄의 어두운 그림자도 뚜렷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간통행위, 솔로몬의 배교행위, 이스라엘 역대 왕들의
추문록, 왕실의 혈통 안에 버젓이 끼어들어있는 이방 여인들의
이름도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 안에는 상처투성이뿐인 인간의 역사, 인간의
고통, 인간의 아픔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의 재림은 비록 이스라엘이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현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측, 다시 말해서 인간 측의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도래합니다. 거듭되는 인간 측의 불충실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유대관계는 지속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측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실하십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깊은 상처, 그 사이를 비집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스며들어 오십니다. 우리 인간 측의 깊은 좌절을 딛고 하느님께서
일어서십니다. 우리 인간 측의 멸망과 죽음을 기반으로 하느님께서
살아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차한 우리 인간의 일상사 안에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질구질한 우리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결핍 투성이인 우리 인간사 안에서 당신 사랑의
역사를 계속 써나가십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편협된 생각들
언젠가 점심시간 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자매님들이 찾아와
밥을 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면 좋겠냐고
물으시더군요. 사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는 구도심이라서 오래된
식당은 많지만 아주 근사한 집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즐겨
가는 곳은 주로 백반 집, 김치찌개 집입니다. 그리고 조금
고급스러운 곳이라고 하면 차이나타운이 근처에 있으니 중국집이
되겠지요. 아니면 조금 멀리 바닷가로 나가 횟집을 가야 하는데,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그곳까지 가기란 조금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매님의 물음에 곧바로 “김치찌개 먹으러 가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저의 발언에 상당히 실망하시는 표정을
지으시며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신부님, 그런 것 말고 다른 것 없어요?”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김치찌개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식사를 아주 맛있게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 있다면 바로 이 김치찌개입니다. 그런데
자매님들은 크게 실망하시는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김치찌개 싫어하세요?”
그러자 자매님들께서는 “그건 집에서 자주 먹잖아요.”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자매님들은 요리를 해서 식탁을 차리는
주부의 눈으로 보신 것이지요. 그러나 자주 외식을 하는 저로써는
오히려 근사한 요리보다는 가정식 백반과 같은 ‘집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서 좋아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다양한 세상 안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다른 이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일까요? 특히 요즘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대통령
선거운동을 보면서, 또한 이에 대한 사람들의 극단적인 반응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네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경위를 설명하는 족보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는지를
알려 줍니다. 어떻게 이끄셨을까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이끌어 오셨고, 이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특히 예수님의 선조로 네 명의 여인, 즉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가 나오는 것이 인상 깊습니다. 모두 비정상적으로
아들을 낳을 뿐만 아니라, 첫째 여인 타마르 외에는 모두 외국인이라는
점 역시 독특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순수성이
제외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복음의 첫 자리에 배치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다양한 사람들의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편협된 생각들. 그러한 생각들을 이제
내려놓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다양한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 다음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라고
말하다 보면 인생 최고의 시간이 다 지나간다(귀스타브 플로베르).
예수님의 기쁜 성탄을 잘 준비하고 계십니까?
엄마와 아들의 대화
시장에 함께 온 엄마와 아들. 야채를 저울에 잰 뒤에 값을 지불하는
엄마에게 어린 아들이 묻습니다.
“엄마, 아기는 1㎏에 얼마에요?”
엄마는 깜짝 놀라면서 “아기는 파는 것이 아니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니?”
이에 아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다시 묻습니다.
“그런데 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무게를 재는 거예요?”
야채를 저울에 재고 나서 값을 지불하는 것을 보면서, 무게를 재기만
하면 무조건 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아기에
대해서도 그렇게 물었던 것이지요.
어린 아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바라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했다고 무조건 혼을 내야 할까요?
그것도 모른다고 야단을 쳐야 할까요?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는 모르는 것이
마치 큰 죄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해와 사랑보다는 배척과 미움이 세상에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닐까요?
이해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 주님께서 이 땅에 완성하시고 싶었던
하느님 나라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부산]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탄생
‘탄생’이라는 주제에 대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만큼 깊이 성찰한
인물도 드뭅니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 아들의 탄생을 우리 내면에서도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탄생이 일어나기 위한 관건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지니는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고방식에서
얼마나 전환하는지에 있습니다. 이 태도의 전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우리 자신 안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거짓되고 왜곡된 것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탄생은 내 내면이 얼마나 투명한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 식으로 말하자면,
이 탄생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향기가 퍼져 나가는 속성을 지니듯이 하느님의 탄생도 나
혼자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전해져야 할 구원의
향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어느 한 순간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당신이 품으셨던 영원한
사랑의 향기가 면면히 전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믿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탄생을 우리의
내면에서 알아보고 깨달아서 내 안에 지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향기를 품는 이 탄생을 다른 사람한테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동방 박사들처럼 다른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이 탄생을 제대로 알아보고 존중하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탄생의 의미일 것입니다.
- 김형수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교수) -
◈ [전주] 인정받는다는 것
인정받는다는 것
권위와 권위주의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앞선 것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스스로 그것을 부리려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에 가서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마음에서 많은
신부님들이 성직자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함께 강제노역을 떠났습니다.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어떤 때는 몇몇이서 몰래 화장실에서 기도와
미사를 드려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노동사제의 시작입니다.
해방이 되고 난 이후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도 노동자들과 더불어 살게
된 몇몇 노동사제들은 노동 안에서 때로는 이념적으로 다르고 때로는
종교적으로 다른 이들과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언젠가 한 노동사제가
다른 노동자를 구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들, 그리고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그의 관이 성당 문밖을 나가자 왼편과 오른편에
각기 자신들의 깃발들을 들고 서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깃발을 숙임으로써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비록 신앙면에서는
함께하지 않았지만, 수용소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 같은 노동자로서
아파하는 동료들 곁에서 늘 함께해 준 이를 진정한 형제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권위주의로 덧씌워진 이들이 ‘권위’와 ‘권한’에 대한 질문을
던지니, 예수님의 반문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전주 교구 박동진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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