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부사 임진원 선생은 송시열선생의 기문과 육신사현판을 되찾아 제자리에 걸어준 인물이다.
1685년(숙종 11) 7월 하순에 은진 송시열(恩津 宋時烈) 선생이 <영월군육신사기寧越郡六臣祠記 이 기문을 짓고
육신사(六臣祠)라는 세 개의 큰 글자(大字)를 썼는데,(육신사 사당 현판)
5년 뒤에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인하여 송시열 선생은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되니,
송시열선생의 글과 글씨라는 이유로 영월 사당의 현판과 기문이 강제로 철거(철거를 주도한 읍수는 황희당 또는 당시 남인 계열 수령)되었다.
이후 영월부사 임진원(任鎭元)이 신사년(辛巳年, 1701년 숙종 27) 9월 초 6일에 부임하였는데,
임오년(1702년) 초여름(4월)에 더러운 먼지 속에 묻혀 있던 액판(額板)을 찾아내어 깨끗이 닦고 치장해서 옛날 그 자리에 걸었다.
찬술자 : 도곡 이의현(李宜顯, 1669~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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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집 제13권 / 묘갈명(墓碣銘)
임진원 (任鎭元), 원주 목사 임공 묘갈명 병서 〔原州牧使任公墓碣銘 幷序〕
공은 휘가 진원(鎭元), 자가 화보(和甫)로 계통이 풍천(豐川)에서 나왔는데, 풍천 임씨(豐川任氏)는 당대의 현달한 가문이다.
증조 연(兗)은 승지이고 조고 준백(俊伯)은 첨정(僉正)이고 선고 규(奎)는 전라도 관찰사이다.
관찰공이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의 후손 이무립(李茂立)의 딸에게 장가들어 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22)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이미 세가(世家)에서 생장하였고 관찰공은 또 문예가 풍부하여 교유하는 분들이 모두 당대의 명현과 준걸들이었다.
공은 이에 훈도되고 물들어서 진실로 보통사람보다 뛰어났으나, 끝내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이룬 바가 없었다.
나이 38세에 서하(西河) 이 문간공(李文簡公)이 천거하여 동몽교관이 되고, 승진하여 사섬시와 내자시의 주부가 되었다.
준례에 따라 장차 외지의 고을로 조용(調用)하게 되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연달아 부모를 잃었고 이어서 세도(世道)가 어두워지고 막힐 때를 만나서, 물러나 시골에 살며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벼슬을 제수하는 목록에서 성명(姓名)이 끊어진 것이 7~8년이었다.
갑술년(1694, 숙종20) 다시 교화가 펴지자, 처음으로 의망(擬望)을 입어 사포서 별제로 있다가 개령 현감(開寧縣監)으로 나갔는데,
백성들을 잘 구휼하여 온 경내에 수척한 자가 없었으며, 특히 군정(軍政)을 삼가고 신칙하며 창과 갑옷을 잘 단련하여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사와 병사가 전후로 그 공적을 올려 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이르렀다.
체직하여 오위장에 제수되었으며, 또다시 여산 부사(礪山府使)로 나갔는데, 이때 염병이 날로 치성하여 백성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다.
그래서 군액(軍額 병사들의 수효)에 결원이 많았으나 보충할 수가 없으니, 교활한 아전들이 이 틈을 타서 법조문을 이용하여 농간을 부렸다.
공은 부임하자, 직접 민간을 순시하여 죽은 것이 사실인가를 살피고는 즉시 성안(成案)을 주어 간사한 아전들의 불법행위를 근절하였다.
그리고 부유하면서도 병역을 기피하는 자들을 은밀히 살펴 그 주인의 이름과 기거동작을 모두 알아서 끝내 가려내어 부역을 정하니, 오랫동안 내려오던 병폐가 모두 사라졌다.
관찰사가 마음속으로 공의 재능에 탄복한 나머지 장계를 올려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공은 임지에서 돌아온 다음, 또다시 위장(衛將)으로 있다가 원주 목사(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대관(臺官)이 너무 승진이 빠르다고 하자, 공론이 대관을 그르다 하여 대관을 교체시켰으나 공은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영동(嶺東)과 영서(嶺西)에 도적 떼가 크게 일어났는데, 이 가운데 스스로 독공자(獨公子)라고 칭하는 자가 특별히 용맹하고 뛰어나서 관리와 백성들과 결탁하여 죄수들을 탈취해 갔으나, 수령들이 그를 사로잡아 제압하지 못하였다.
그의 형세가 더욱 떨쳐지니, 조정에서는 이것을 걱정하였다.
영월(寧越)은 영동과 영서의 요충지에 있었으므로 공을 선발하여 영월 부사로 임명하고 토포사의 임무를 겸하여 도적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공은 부임한 다음 목소리와 얼굴빛을 변치 않고 독공자를 체포하여 목을 베었으며, 위협에 따라 도적이 된 자들을 앞에 꿇어앉히고, 술과 밥을 먹인 다음 가르치고 타이른 뒤에 해산시켜 각각 생업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후로는 이들 지역이 조용하여 아무 일이 없게 되었다.
영월부에는 2년을 연이어 흉년이 들었는데, 공은 봉급을 털어 1천 곡(斛)의 쌀을 사서 백성들에게 주니, 백성들이 몹시 기뻐하였다.
이에 관찰사는 공의 공적을 나열하여 보고하였다.
마침 세력가가 몰래 벌채를 금하는 나무를 베어 부정한 이익을 취하다가 발각되었는데, 그 사람은 크게 두려워하여 풀려날 길을 도모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이에 그 무리 중에 대관(臺官)으로 들어간 자를 사주하여, 공이 과오를 범하였다고 모함해서 옥사를 만들었다.
관찰사가 이 내용을 임금께 아뢰고 영월부의 인사들이 달려가 공의 억울함을 말하였는데, 일을 조사하자 모두 사실무근이었으므로 공이 깨끗이 벗어나게 되었다.
그 후 백성들은 공을 위하여 공덕비를 세우고 비 앞을 지나갈 때마다 반드시 절하여, 그 비를 ‘배비(拜碑)’라고 이름 붙였다.
공은 위장으로 있다가 다시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나갔는데, 또다시 흉년을 만나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사를 관장함에 있어, 더욱 마음을 다해 구제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궁창에 시신이 뒹굴 뻔한 자들이 모두 다시 집으로 돌아가 칭송하는 소리가 일어났으나,
공은 끝내 과로로 쓰러져서 병술년(1706, 숙종32) 7월 10일에 별세하였다.
병환 중에 중얼거리는 말씀도 모두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이었으니, 듣는 자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어사(御史)는 이 내용을 일일이 들어 아뢰고 또 말하기를, “그의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사랑한 정성은 고금에 드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상은 특별히 은혜로운 명령을 내리고 비단을 하사하여 표창하였으나, 공은 미처 보지 못하였다.
공은 두 배위(配位)가 있었는데,
전부인(前夫人)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고양 군수(高陽郡守) 창징(昌徵)의 딸이고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녀이며,
외조는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이다.
내외가 모두 아름다워 규문의 법칙을 구비하였는데 일찍 죽고 자식이 없다.
다시 정후망(鄭后望)의 딸에게 장가드니, 부인 또한 관향이 영일이며 부도(婦道)가 있었다.
장남은 유하(由夏)이고 그 다음은 종하(宗夏)이고 그 다음 술(述)은 생원이며,
딸들은 각각 유광렬(柳光烈)ㆍ유준기(兪峻基)ㆍ신명집(申命集)에게 출가하였다.
유하의 아들 익주(翼周)는 생원이고 딸은 찰방 김수집(金壽鏶)에게 출가하였으며, 술(述)의 아들은 석주(錫周)이다.
공은 철원(鐵原)의 송내(松內)에 있는 임좌(壬坐)의 산에 장례하니 후부인(後夫人)과 한 무덤이고,
전부인은 따로 장례하였는데 장차 아무 해 아무 달에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려 한다고 한다.
전부인은 바로 나의 선비(先妣)의 매씨(妹氏)이기 때문에 나는 공을 평소 익숙히 알고 있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후덕하고 선량하고 진솔하여 임기응변으로 남을 속이는 일이 없었으니, 공은 바로 옛날의 소위 ‘진실로 장자(長者)’라는 분이다.
백성을 보살펴 살려준 정사에 이르러는 정성이 간곡하고 백성들을 측은하게 여김이 지극하여, 더더욱 유속(流俗)에 헛되이 꾸미는 자가 견줄 바가 아니니, 아, 참으로 명문(銘文)을 지을 만하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동주의 땅은 / 東州之土
산이 감싸고 물이 감돌아 흐르네 / 山回水護
도끼 모양의 무덤 있으니 / 有崇若斧
바로 옛날 양리의 무덤이라오 / 斯其爲古良吏之墓
[주-D001] 서하(西河) 이 문간공(李文簡公) :
이민서(李敏敍, 1633~1688)로 자는 이중(彛仲)이며, 서하는 호이고 문간은 시호이다. 전주(全州)가 본관으로,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이고 송시열의 문인이다. 1652년(효종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대사간ㆍ대제학에 제수되었으며, 예조ㆍ호조ㆍ이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한 뒤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김수항(金壽恒)ㆍ이단하(李端夏)ㆍ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가 깊었다. 나주의 서하사(西河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서하집(西河集)》이 있다.
[주-D002] 성안(成案) :
어떤 계획이나 방침 등에 관한 안건을 작성함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군적에 대해 직접 작성한 안건으로 보인다.
[주-D003] 동주(東州) :
현재 강원도 철원군(鐵原郡)의 고려 시대 이름이다. 1310년(충선왕2)에 철원으로 개명하였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4
*도곡집(陶谷集)은 조선 후기의 영의정이자 노론의 영수였던 도곡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사후에 간행한 문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