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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부사 임진원 선생은 송시열선생의 기문과 육신사현판을 되찾아 제자리에 걸어준 인물이다.
1685년(숙종 11) 7월 하순에 은진 송시열(恩津 宋時烈) 선생이 <영월군육신사기寧越郡六臣祠記 이 기문을 짓고
육신사(六臣祠)라는 세 개의 큰 글자(大字)를 썼는데,(육신사 사당 현판)
5년 뒤에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인하여 송시열 선생은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되니,
송시열선생의 글과 글씨라는 이유로 영월 사당의 현판과 기문이 강제로 철거(철거를 주도한 읍수는 황희당 또는 당시 남인 계열 수령)되었다.
이후 영월부사 임진원(任鎭元)이 신사년(辛巳年, 1701년 숙종 27) 9월 초 6일에 부임하였는데,
임오년(1702년) 초여름(4월)에 더러운 먼지 속에 묻혀 있던 액판(額板)을 찾아내어 깨끗이 닦고 치장해서 옛날 그 자리에 걸었다.
찬술자 : 도곡 이의현(李宜顯, 1669~1745)
고전번역서 > 도곡집 > 도곡집 제13권 > 묘갈명 > 최종정보
도곡집 제13권 / 묘갈명(墓碣銘)
임진원 (任鎭元), 원주 목사 임공 묘갈명 병서 〔原州牧使任公墓碣銘 幷序〕
공은 휘가 진원(鎭元), 자가 화보(和甫)로 계통이 풍천(豐川)에서 나왔는데, 풍천 임씨(豐川任氏)는 당대의 현달한 가문이다.
증조 연(兗)은 승지이고 조고 준백(俊伯)은 첨정(僉正)이고 선고 규(奎)는 전라도 관찰사이다.
관찰공이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의 후손 이무립(李茂立)의 딸에게 장가들어 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22)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이미 세가(世家)에서 생장하였고 관찰공은 또 문예가 풍부하여 교유하는 분들이 모두 당대의 명현과 준걸들이었다.
공은 이에 훈도되고 물들어서 진실로 보통사람보다 뛰어났으나, 끝내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이룬 바가 없었다.
나이 38세에 서하(西河) 이 문간공(李文簡公)이 천거하여 동몽교관이 되고, 승진하여 사섬시와 내자시의 주부가 되었다.
준례에 따라 장차 외지의 고을로 조용(調用)하게 되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연달아 부모를 잃었고 이어서 세도(世道)가 어두워지고 막힐 때를 만나서, 물러나 시골에 살며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벼슬을 제수하는 목록에서 성명(姓名)이 끊어진 것이 7~8년이었다.
갑술년(1694, 숙종20) 다시 교화가 펴지자, 처음으로 의망(擬望)을 입어 사포서 별제로 있다가 개령 현감(開寧縣監)으로 나갔는데,
백성들을 잘 구휼하여 온 경내에 수척한 자가 없었으며, 특히 군정(軍政)을 삼가고 신칙하며 창과 갑옷을 잘 단련하여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사와 병사가 전후로 그 공적을 올려 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이르렀다.
체직하여 오위장에 제수되었으며, 또다시 여산 부사(礪山府使)로 나갔는데, 이때 염병이 날로 치성하여 백성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다.
그래서 군액(軍額 병사들의 수효)에 결원이 많았으나 보충할 수가 없으니, 교활한 아전들이 이 틈을 타서 법조문을 이용하여 농간을 부렸다.
공은 부임하자, 직접 민간을 순시하여 죽은 것이 사실인가를 살피고는 즉시 성안(成案)을 주어 간사한 아전들의 불법행위를 근절하였다.
그리고 부유하면서도 병역을 기피하는 자들을 은밀히 살펴 그 주인의 이름과 기거동작을 모두 알아서 끝내 가려내어 부역을 정하니, 오랫동안 내려오던 병폐가 모두 사라졌다.
관찰사가 마음속으로 공의 재능에 탄복한 나머지 장계를 올려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공은 임지에서 돌아온 다음, 또다시 위장(衛將)으로 있다가 원주 목사(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대관(臺官)이 너무 승진이 빠르다고 하자, 공론이 대관을 그르다 하여 대관을 교체시켰으나 공은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영동(嶺東)과 영서(嶺西)에 도적 떼가 크게 일어났는데, 이 가운데 스스로 독공자(獨公子)라고 칭하는 자가 특별히 용맹하고 뛰어나서 관리와 백성들과 결탁하여 죄수들을 탈취해 갔으나, 수령들이 그를 사로잡아 제압하지 못하였다.
그의 형세가 더욱 떨쳐지니, 조정에서는 이것을 걱정하였다.
영월(寧越)은 영동과 영서의 요충지에 있었으므로 공을 선발하여 영월 부사로 임명하고 토포사의 임무를 겸하여 도적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공은 부임한 다음 목소리와 얼굴빛을 변치 않고 독공자를 체포하여 목을 베었으며, 위협에 따라 도적이 된 자들을 앞에 꿇어앉히고, 술과 밥을 먹인 다음 가르치고 타이른 뒤에 해산시켜 각각 생업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후로는 이들 지역이 조용하여 아무 일이 없게 되었다.
영월부에는 2년을 연이어 흉년이 들었는데, 공은 봉급을 털어 1천 곡(斛)의 쌀을 사서 백성들에게 주니, 백성들이 몹시 기뻐하였다.
이에 관찰사는 공의 공적을 나열하여 보고하였다.
마침 세력가가 몰래 벌채를 금하는 나무를 베어 부정한 이익을 취하다가 발각되었는데, 그 사람은 크게 두려워하여 풀려날 길을 도모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이에 그 무리 중에 대관(臺官)으로 들어간 자를 사주하여, 공이 과오를 범하였다고 모함해서 옥사를 만들었다.
관찰사가 이 내용을 임금께 아뢰고 영월부의 인사들이 달려가 공의 억울함을 말하였는데, 일을 조사하자 모두 사실무근이었으므로 공이 깨끗이 벗어나게 되었다.
그 후 백성들은 공을 위하여 공덕비를 세우고 비 앞을 지나갈 때마다 반드시 절하여, 그 비를 ‘배비(拜碑)’라고 이름 붙였다.
공은 위장으로 있다가 다시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나갔는데, 또다시 흉년을 만나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사를 관장함에 있어, 더욱 마음을 다해 구제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궁창에 시신이 뒹굴 뻔한 자들이 모두 다시 집으로 돌아가 칭송하는 소리가 일어났으나,
공은 끝내 과로로 쓰러져서 병술년(1706, 숙종32) 7월 10일에 별세하였다.
병환 중에 중얼거리는 말씀도 모두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이었으니, 듣는 자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어사(御史)는 이 내용을 일일이 들어 아뢰고 또 말하기를, “그의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사랑한 정성은 고금에 드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상은 특별히 은혜로운 명령을 내리고 비단을 하사하여 표창하였으나, 공은 미처 보지 못하였다.
공은 두 배위(配位)가 있었는데,
전부인(前夫人)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고양 군수(高陽郡守) 창징(昌徵)의 딸이고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녀이며,
외조는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이다.
내외가 모두 아름다워 규문의 법칙을 구비하였는데 일찍 죽고 자식이 없다.
다시 정후망(鄭后望)의 딸에게 장가드니, 부인 또한 관향이 영일이며 부도(婦道)가 있었다.
장남은 유하(由夏)이고 그 다음은 종하(宗夏)이고 그 다음 술(述)은 생원이며,
딸들은 각각 유광렬(柳光烈)ㆍ유준기(兪峻基)ㆍ신명집(申命集)에게 출가하였다.
유하의 아들 익주(翼周)는 생원이고 딸은 찰방 김수집(金壽鏶)에게 출가하였으며, 술(述)의 아들은 석주(錫周)이다.
공은 철원(鐵原)의 송내(松內)에 있는 임좌(壬坐)의 산에 장례하니 후부인(後夫人)과 한 무덤이고,
전부인은 따로 장례하였는데 장차 아무 해 아무 달에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려 한다고 한다.
전부인은 바로 나의 선비(先妣)의 매씨(妹氏)이기 때문에 나는 공을 평소 익숙히 알고 있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후덕하고 선량하고 진솔하여 임기응변으로 남을 속이는 일이 없었으니, 공은 바로 옛날의 소위 ‘진실로 장자(長者)’라는 분이다.
백성을 보살펴 살려준 정사에 이르러는 정성이 간곡하고 백성들을 측은하게 여김이 지극하여, 더더욱 유속(流俗)에 헛되이 꾸미는 자가 견줄 바가 아니니, 아, 참으로 명문(銘文)을 지을 만하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동주의 땅은 / 東州之土
산이 감싸고 물이 감돌아 흐르네 / 山回水護
도끼 모양의 무덤 있으니 / 有崇若斧
바로 옛날 양리의 무덤이라오 / 斯其爲古良吏之墓
[주-D001] 서하(西河) 이 문간공(李文簡公) :
이민서(李敏敍, 1633~1688)로 자는 이중(彛仲)이며, 서하는 호이고 문간은 시호이다. 전주(全州)가 본관으로,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이고 송시열의 문인이다. 1652년(효종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대사간ㆍ대제학에 제수되었으며, 예조ㆍ호조ㆍ이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한 뒤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김수항(金壽恒)ㆍ이단하(李端夏)ㆍ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가 깊었다. 나주의 서하사(西河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서하집(西河集)》이 있다.
[주-D002] 성안(成案) :
어떤 계획이나 방침 등에 관한 안건을 작성함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군적에 대해 직접 작성한 안건으로 보인다.
[주-D003] 동주(東州) :
현재 강원도 철원군(鐵原郡)의 고려 시대 이름이다. 1310년(충선왕2)에 철원으로 개명하였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4
*도곡집(陶谷集)은 조선 후기의 영의정이자 노론의 영수였던 도곡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사후에 간행한 문집입니다.
원문 : 한국문집총간 > 도곡집 > 陶谷集卷之十三 > 墓碣銘 > 최종정보
陶谷集卷之十三 / 墓碣銘
原州牧使任公墓碣銘 幷序
公諱鎭元。字和甫。系出豐川。豐川之任。爲時顯望。曾祖兗承旨。祖俊伯僉正。考奎全羅觀察使。
觀察公娶 康靖王後李茂立女。生公於崇禎甲申。公旣生長世家。觀察公又富於文藝。所交游盡一時賢雋。薰陶灌沃。固有異於人者。而卒無所成名。
年三十八。西河李文簡公薦爲童蒙敎官。陞主司贍內資二簿。以例將試調外邑。亡何。連失怙恃。仍値世道晦塞。屛居不求仕。姓名絶除目者。七八年。
甲戌更化。始被檢擬。由司圃別提。出監開寧縣。善於賙賑。一境無捐瘠。尤飭厲戎政。鍛敹戈甲。罔有不弔。水陸使前後上其績。賞階通政。遞拜五衛將。又出礪山府使。時癘疫日熾。人死亡且盡。軍額多缺。不得充補。猾吏從而舞弄。
公至。親行民間。審其死是實直與成案。以塞奸竇。陰察富而逃役者。盡知其主名起居。一汰定之。流弊悉滌。按臣心服其能。至移牒嘉奬。旣還。又以衛將除原州牧使。
臺官言其驟。公議非之。遞臺官。然公竟不赴。是時嶺東西。盜賊大起。其自名爲獨公子者尤梟桀。連結吏民。簒取繫囚。守令莫能禽制。勢益張。朝廷患之。
以寧越在其衝要。選公爲府使。兼討捕任以治之。公不動聲色。捕得獨公子者斬之。前跪脅從者饋酒食。敎諭解散。使各復業。是後遂帖然無事。
府連二歲飢荒。捐俸得米千斛以與民。民甚悅。按臣列其功課。
會豪勢家潛斫禁木。爲姦利覺。其人大恐。圖解不能得。乃嗾其黨入臺者。誣以過犯。傅致獄。
按臣爲白其狀。府人士奔走寃訟。及査事。皆無實。公得淸脫。後民爲之立碑。行過必拜。仍名拜碑云。
復由衛將。出杆城郡守。又管荒政。益刻意救濟。晨夕弗懈。溝壑者盡復廬。頌聲方興。而竟用勞瘁。
以丙戌七月十日卒。病時啽囈皆賑事。聞者感歎。御史壹擧以聞。且曰。其憂國愛民之誠。今古所稀。上特下恩旨。賜帛以褒。而公不及見矣。
公有二媲。前夫人迎日鄭氏。高陽郡守昌徵之女。右議政維城之孫。外祖洪忠正公翼漢。內外協美。閫則克備。早圽無子。再娶鄭后望女。亦系迎日而有婦道。
男長由夏。次宗夏。次述生員。女適柳光烈,兪峻基,申命集。由夏男翼周生員。女適察訪金壽鏶。述男錫周。
公葬鐵原松內負壬之原。與後夫人同穴。前夫人別葬。將以歲月祔公墓云。
前夫人。寔余先妣之妹也。以此余習知公有素。公天資厚善。任眞無機變。卽古所稱誠長者其人也。
至其活民之政。懇惻至到。尤非流俗虗憍者比倫。嗚呼。是可銘也已。
銘曰。
東州之土。山回水護。有崇若斧。斯其爲古良吏之墓。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6~1997
2026.08.07.12:40 구글 AI 해역의 도움을 받아 매끄럽고 부드러운 문장과 용어에 대한 설명을 추가로 등록하다.
원주목사 임진원묘갈명 해역 (구글AI)
原州牧使任公墓碣銘 幷序 (원주목사임공묘갈명 병서)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내신 임 공(任公, 임진원)의 묘갈명(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의 글)이며, 서문을 함께 싣는다.
公諱鎭元。字和甫。系出豐川。 (공휘진원 자화보 계출풍천) 공(公)의 이름(諱)은 진원(鎭元)이고, 자(字)는 화보(和甫)이며, 세계(世系, 가문의 계통)는 풍천(豐川)에서 나왔다.
豐川之任。爲時顯望。 (풍천지임 위시현망) 풍천 임씨(豐川任氏) 가문은 당대에 이름이 높고 명망이 있는(顯望) 가문이었다.
曾祖兗承旨。 (증조연승지)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연(兗)이며 관직은 승지(承旨, 승정원 정3품 관직)를 지냈다.
祖俊伯僉正。 (조준백첨정) 할아버지의 이름은 준백(俊伯)이며 관직은 첨정(僉正, 종4품 관직)을 지냈다.
考奎全羅觀察使。 (고규전라관찰사) 돌아가신 아버지(考)의 이름은 규(奎)이며 관직은 전라觀察使(전라도 관찰사, 종2품 감사)를 지냈다.
觀察公娶 康靖王後李茂立女。 (관찰공취 강정왕후이무립녀) 관찰공(임진원의 아버지 임규)은 강정왕(康靖王, 조선 정종의 시호)의 후손인 이무립(李茂立)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生公於崇禎甲申 (생공어숭정갑신)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의 연호 갑신년(1644년, 인조 22년)에 공(임진원)을 낳았다.
公旣生長世家。觀察公又富於文藝。 (공기생장세가 관찰공우부어문예) 공은 이미 대대로 이름난 명문가(世家)에서 태어나 자랐고, 아버지 관찰공 또한 문학과 예술(학문)적 소양이 매우 풍부하였다.
所交游盡一時賢雋。 (소교유진일시현준) (아버지와 가문이) 서로 교유하고 지낸 이들은 모두 당대의 어질고 뛰어난 인재(賢雋)들이었다.
薰陶灌沃。固有異於人者。 (훈도관옥 고유이어인자) 그 훌륭한 환경 속에서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으니(薰陶灌沃, 향기에 훈습되고 물을 대어 기름을 받음), 본래부터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
而卒無所成名。 (이졸무소성명) 그러나 끝내 (세속적인) 명성을 이루려 하지는 않았다.
年三十八。西河李文簡公薦爲童蒙敎官。 (년삼십팔 서하이문간공천위동몽교관) 나이 38세(1681년, 숙종 7년)에, 서하(西河) 이문간공(李文簡公, 이민서)이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 어린이 교육을 담당하는 관직)이 되었다.
陞主司贍內資二簿。以例將試調外邑。 (승주사섬내자이부 이례장시조외읍) (이후 역량을 인정받아) 사섬시(司贍寺)와 내자시(內資寺) 두 관청의 주부(主簿, 종6품 관직)로 승진하였고, 전례(慣例)에 따라 장차 시험 삼아 지방 고을의 수령(外邑)으로 조율되어 나가려 하였다.
亡何。連失怙恃。 (무하 연실호시)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달아 아버지(怙)와 어머니(恃)를 모두 여의는 큰 슬픔을 당했다.
仍値世道晦塞。 (잉치세도회색) 설상가상으로 조정의 정세와 세상의 도리마저 어둡고 막히는 일(환국 등 정치적 격변)을 만났다.
屛居不求仕。姓名絶除目者。七八年。 (병거불구사 성명절제목자 칠팔년) 이에 세상에서 물러나 은거하며(屛居) 다시는 벼슬을 구하지 않으니, 관직 임명 명단(除目)에서 그의 이름이 끊어진 지가 7~8년이나 되었다.
甲戌更化。始被檢擬。 (갑술경화 시피검의) 갑술경화(1694년 갑술환국)가 일어나자 비로소 (인재를 선발하는 명단에) 검토되고 의망(擬望,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由司圃別提。出監開寧縣。 (유사포별제 출감개령현)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 종6품 관직)를 거쳐, 지방으로 나가 개령현감(開寧縣監, 현 경북 김천시 개령면 일대)이 되었다.
善於賙賑。一境無捐瘠。 (선어주진 일경무연척) 고을의 흉년을 맞아 구제하고 진휼하는 일(賙賑)을 지혜롭게 잘 처리하니, 온 고을(一境)에 굶주려 죽거나 여윈 백성(捐瘠)이 없었다.
尤飭厲戎政。鍛敹戈甲。罔有不弔。 (우칙려융정 단료과갑 망유부조) 특히 군정(戎政)을 엄격하게 정돈하고 힘써서, 창과 갑옷을 단단히 마련하고 기워 기우니(鍛敹) 온전치 못하거나 부실한 것(不弔)이 하나도 없었다.
水陸使前後上其績。賞階通政。 (수륙사전후상기적 상계통정) 이에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水陸使)가 앞다투어 그의 탁월한 공적을 조정에 올렸고, 그 상으로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당상관)로 올랐다.
遞拜五衛將。又出礪山府使(礪山府使)。 (체배오위장 우출여산부사) (개령현감 임기가 끝나 관직이) 교체되어 중앙의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지방으로 나가 여산부사(礪山府使, 현 전북 익산시 여산면 일대)가 되었다.
時癘疫日熾。人死亡且盡。 (시려역일치 인사망차진) 이때 고을에 전염병(癘疫)이 날로 치열하게 번져, 백성들이 거의 다 죽어갈 지경에 이르렀다.
軍額多缺。不得充補。猾吏從而舞弄。 (군액다결 부득충보 활리종이무농) 이 때문에 군적의 정수(軍額)에 결원이 많이 생겼으나 채워 넣을 수가 없자, 간활한 아전들(猾吏)이 이를 틈타 장부를 조작하며 농간을 부렸다.
公至。親行民間。 (공지 친행민간) 공(임진원)이 고을(여산)에 부임하여, 친히 민간의 현장을 돌아보았다.
審其死是實直與成案。以塞奸竇。 (심기사시실직여성안 이색간두) (전염병으로) 죽은 자들의 실상을 직접 하나하나 심사하여 실제 사실대로 장부(成案)를 새로 작성함으로써, 간사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릴 구멍(奸竇)을 막아버렸다.
陰察富而逃役者。盡知其主名起居。 (음찰부이도역자 진지기주명기거) 또한 부유하면서도 (아전에게 뇌물을 주고) 병역을 기피한 자들을 남몰래 감찰(陰察)하여, 그들의 이름(主名)과 일상생활의 동태(起居)를 샅샅이 파악하였다.
一汰定之。流弊悉滌。 (일태정지 유폐실척) 그리고 이들을 한 번에 과감히 도태시키고 바로잡으니, 대대로 내려오던 오랜 폐단(流弊)이 깨끗이 씻겨 나갔다.
按臣心服其能。至移牒嘉奬。 (안신심복기능 지이첩가장) 도를 다스리는 감사의 직책을 가진 신하(按臣, 전라도 관찰사)가 그의 탁월한 재능에 마음으로 복종하여, 공식 문서(이첩)를 보내어 크게 칭찬하고 포상하기에 이르렀다.
旣還。又以衛將除原州牧使。 (기환 우이위장제원주목사) (여산부사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오위장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臺官言其驟。公議非之。遞臺官。 (대관언기취 공의비지 체대관) 대간(臺官, 사헌부·사간원의 언관)이 그의 승진이 너무 빠르다(驟)고 말하자, 조정의 공론(公議)이 그 대간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여 마침내 그 대간을 경질(遞)해 버렸다.
然公竟不赴。 (연공경불부) 그러나 공(임진원)은 (정치적 구설에 오르자) 결국 원주목사 자리에 부임하지 않았다.
是時嶺東西。盜賊大起。 (시시령동서 도적대기) 이때 대관령의 동쪽과 서쪽(嶺東西, 즉 강원도와 영남 일대)에 도적들이 크게 일어났다.
其自名爲獨公子者尤梟桀。 (기자명위독공자자우효걸) 그중에서도 스스로를 ‘독공자(獨公子)’라 부르는 우두머리가 유독 사납고 날래었으며(梟桀, 사나울 효/걸출할 걸),
連結吏民。簒取繫囚。 (연결리민 찬취계수) 지방의 아전(아전) 및 백성들과 몰래 결탁하여,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繫囚)을 강제로 빼앗아 가기까지(簒取) 했다.
守令莫能禽制。勢益張。朝廷患之。 (수령막능금제 세익장 조정환지) 지방의 수령들이 누구 하나 그들을 사로잡아 진압(禽制, 사로잡을 금)하지 못하니 그 기세가 더욱 치솟았고, 조정에서도 이를 매우 근심하였다.
以寧越在其衝要。選公爲府使。兼討捕任以治之。 (이영월재기충요 선공위부사 겸토포임이치지) 영월(寧越) 고을이 도적들이 출몰하는 그 요충지(衝要, 길목)에 있었으므로, 조정에서 공(임진원)을 선발하여 영월부사(府使)로 삼고 토포사(討捕使, 도적을 잡는 군사 지휘관)의 임무를 겸임하게 하여 고을을 다스리며 도적을 다스리게 했다.
公不動聲色。捕得獨公子者斬之。 (공부동성색 포득독공자자참지) 공은 겉으로 소리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엄정하게 대처하여(不動聲色), 마침내 도적 우두머리인 ‘독공자(獨公子)’를 사로잡아 참형(斬)에 처했다.
前跪脅從者饋酒食。敎諭解散。使各復業。 (전궤협종자궤주식 교유해산 사각복업)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협박에 못 이겨 도적을 따랐던 이들(脅從者)에게는 오히려 술과 음식을 먹이고(饋), 부드럽게 가르치고 타이르며(敎諭) 집으로 돌려보내어 각자 생업으로 복귀하게(復業) 했다.
是後遂帖然無事。 (시후수첩연무사) 이 일이 있은 뒤로 고을과 인근 지역이 마침내 아주 편안해져서(帖然) 아무런 탈이 없게 되었다.
府連二歲飢荒。捐俸得米千斛以與民。 (부련이세기황 연봉득미천곡이여민) 그 후 영월부에 2년 연속으로 극심한 흉년(飢荒)이 들자, 공은 자신의 녹봉을 아낌없이 털어(捐俸) 쌀 1,000섬(斛)을 구해다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民甚悅。按臣列其功課(功課)。 (민심열 안신열기공과)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고, 감찰관(按臣, 강원도 관찰사)이 그의 뛰어난 공적과 성과(功課)를 조정에 조목조목 나열하여 보고하였다.
會豪勢家潛斫禁木 (회호세가잠작금목) 마침 권세 있는 집안에서 몰래 금지된 구역의 나무를 베어냈다.
爲姦利覺 (위간리각) 부정한 이익을 취하려던 짓이 발각되었다.
其人大恐 圖解不能得 (기인대공 도해불능득) 그 사람이 크게 두려워하여 일이 무마되도록 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乃嗾其黨入臺者 (내수기당입대자) 이에 사헌부나 사간원(대간)에 들어간 자기 처소의 무리를 부추겼다.
誣以過犯 傅致獄 (무이과범 부치옥) 허물과 죄를 지었다고 억울하게 모함하여, 결국 법을 얽어매어 감옥에 가두었다.
按臣爲白其狀 (안신위백기장) 안신(按臣: 사건을 조사하러 내려온 어사나 관찰사)이 그 실상과 형편을 명백히 밝혀 상소했다.
府人士奔走寃訟 (부인사분주원송) 원주부(原州府)의 선비와 백성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及査事 皆無實 (급조사 개무실) 사건을 조사하기에 이르러서는 (호세가들이 모함한 죄과가) 모두 실체가 없음이 밝혀졌다.
公得淸脫 (공득청탈) 공(任公)은 깨끗하게 누명을 벗고 풀려나게 되었다.
後民爲之立碑 (후민위지립비) 훗날 백성들이 공을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
行過必拜 仍名拜碑云 (행과필배 잉명배비운) 길을 가다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반드시 절을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이름을 ‘배비(절하는 비석)’라 불렀다고 한다.
復由衛將 出杆城郡守 (부유위장 출간성군수) 다시 위장(衛將: 궁궐을 지키는 무관 관직)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간성군수(杆城郡守)가 되었다.
又管荒政 益刻意救濟 (우관황政 익각의구제) 또 기근이 든 고을의 구휼 행정(荒政)을 맡게 되자, 더욱 마음을 다해 백성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
晨夕弗懈 (신석불해) 새벽부터 저녁까지(밤낮으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溝壑者盡復廬 (구학자진복려) 굶주려 도랑과 골짜기에 굴러떨어질 뻔했던(죽을 위기에 처했던) 백성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안정을 찾았다.
頌聲方興 而竟用勞瘁 (송방방흥 이경용노췌) 칭송하는 소리가 막 일어났으나, 결국 과로로 인한 병(勞瘁) 때문에
以丙戌七月十일卒 (이병술칠월십일졸) 병술년(丙戌年) 7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病時啽囈皆賑事 (병시암예개진사) 병환 중일 때 (의식을 잃고) 잠꼬대(啽囈)를 하는 것조차 모두 백성을 구휼하는 일(賑事)에 관한 내용이었다.
聞者感歎 (문자감탄)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고 탄복하였다.
御史壹擧以聞 (어사일거이문) 암행어사(혹은 관찰사)가 이 사실을 한꺼번에 모아 임금께 보고(이문)하였다.
且曰 其憂國愛民之誠 今古所稀 (차왈 기우국애민지성 금고소희) 또한 고하기를, "그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한 정성은 예나 지금이나 드문 일입니다"라고 했다.
上特下恩旨 賜帛以褒 (상특하은지 사백이포) 임금(상)께서 특별히 은혜로운 교서(은지)를 내리시고, 비단을 하사하시어 공로를 기리셨다.
傷而公不及見矣 (상이공불급견의) 그러나 슬프게도 공은 이를 직접 보지 못하셨다.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기 때문)
公有二媲 (공유이비)공은 두 명의 배우자(媲: 부인)를 두었다.
前夫人迎日鄭氏 高陽郡守昌徵之女 右議政維城之孫 (전부인영일정씨 고양군수창징지녀 우의정유성지손) 전처(첫째 부인)는 영일 정씨(迎日鄭氏)로, 고양군수 정창징(鄭昌徵)의 딸이자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의 손녀이다.
外祖洪忠正公翼漢 (외조홍충정공익한) (전부인의) 외할아버지는 홍충정공(洪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이다.
內外協美 閫則克備 (내외협미 곤칙극비) 안팎(친가와 외가)이 모두 아름다움을 합쳤고, 부인으로서의 규범(閫則)을 잘 갖추었다.
早圽無子 (조몰무자) 일찍 세상을 떠났고 자식은 없었다.
再娶鄭后望女 亦系迎日而有婦道 (재취정후망녀 역시영일이유부도) 재취(둘째 부인)는 정후망(鄭后望)의 딸로, 역시 영일 정씨 계열이며 부인으로서의 도리(婦道)가 있었다.
男長由夏 次宗夏 次述生員 (남장유하 차종하 차술생원) 아들은 맏이가 임유하(任由夏)이고,
다음은 임종하(任宗夏)이며,
다음은 생원(生員) 시험에 합격한 임술(任述)이다.
女適柳光烈 兪峻基 申命集 (여적류광렬 유준기 신명집) 딸들은 각각 유광렬(柳光烈), 유준기(兪峻基), 신명집(申命集)에게 시집갔다.
由夏男翼周生員 (유하남익주생원) 맏아들 임유하의 아들은 생원인 임익주(任翼周)이다.
女適察訪金壽鏶 (여적찰방김수집) 임유하의 딸은 찰방(察訪) 관직을 지낸 김수집(金壽鏶)에게 시집갔다.
述男錫周 (술남석주) 셋째 아들 임술의 아들은 임석주(任錫周)이다.
公葬鐵原松內負壬之原 (공장철원송내부임지원) 공은 철원(鐵原) 송내(松內)의 임좌(壬坐: 북북서 방향을 등지고 남남동을 향함) 언덕에 장사 지냈다.
與後夫人同穴 (여후부인동혈) 후처(둘째 부인인 영일 정씨)와 같은 광중(무덤 구덩이)에 합장하였다.
前夫人別葬 (전부인별장) 전처(첫째 부인인 영일 정씨)는 다른 곳에 따로 장사 지냈다.
將以歲月祔公墓云 (장이세월부공묘운) 머지않아 시일을 두고 공의 무덤 곁으로 옮겨와 합장(祔葬)할 것이라 한다.
前夫人 寔余先妣之妹也 (전부인 식여선비지매야) (공의) 첫째 부인은 참으로(寔) 내 돌아가신 어머니(先妣)의 여동생(이모)이다.
以此余習知公有素 (이차여습지공유소) 이 때문에 나는 평소부터(有素) 공에 대해 익숙하게 잘 알고 있었다.
公天資厚善 任眞無機變 (공천자후선 임진무기변) 공은 타고난 성품(天資)이 두터우며 착했고, 진실함에 맡겨(任眞) 임기응변이나 기교(機變)를 부릴 줄 몰랐다.
卽古所稱誠長者其人也 (즉고소칭성장자기인야) 예로부터 일컬어오던 '참된 덕망과 인품을 갖춘 어른(誠長者)'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至其活民之政 懇惻至到 (지기활민지정 간측지도) 백성을 살려낸(活民) 그의 정사에 이르러서는, 간절하고 슬퍼하는 마음(懇惻)이 지극하여 빈틈이 없었다(至到).
尤非流俗虗憍者比倫 (우비류속허교자비륜) (그 정성은) 세상의 유행을 따르며 겉치레만 하고 교만한 자들(虗憍者)과는 더욱더 비교할(比倫)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嗚呼 是可銘也已 (오호 시가명야이)아아! 이것이야말로 비석에 새겨(銘) 후세에 전할 만하도다.
銘曰 (명왈)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東州之土 山回水護 (동주지토 산회수호) 동주(東州: 철원의 옛 이름)의 땅이여, 산이 둘러싸고 물이 보호하는구나.
有崇若斧 (유숭약부) 도끼를 세워놓은 듯(若斧) 높이 솟은 무덤이 있으니,
斯其爲古良吏之墓 (사기위고량리지묘) 이곳이 바로 옛날의 훌륭한 관리(良吏)였던 분의 묘소이로다.
용어설명
康靖王(강정왕): 조선 제2대 왕인 정종(定宗)의 시호
崇禎甲申(숭정 갑신): 1644년
薰陶灌沃(훈도관옥): 훌륭한 덕성과 학문으로 사람을 교화하고 키워낸다.
卒無所成名(졸무소성명): 과거나 관직을 통한 헛된 명성을 좇아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西河 李文簡公(서하 이민서):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당대의 거물 학자이자 문신인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선생을 뜻합니다. '문간(文簡)'은 그의 시호입니다. 당대 최고 석학이 임진원의 학식과 품성을 알아보고 직접 천거했음을 뜻합니다.
司贍·內資二簿(사섬·내자이부): 사섬시는 지폐(저화)나 종이, 내자시는 대궐 내의 연회나 생필품을 관장하던 관청입니다. 이곳의 '주부(主簿)' 자리를 거쳤다는 것은 행정 실무 능력을 검증받았음을 의미합니다.
失怙恃(실호시): 시경(詩經)에서 유래한 말로, '怙(의지할 호)'는 아버지를, '恃(믿을 시)'는 어머니를 뜻합니다. 즉, 부모님을 모두 여읜 자식의 극진한 슬픔을 표현하는 대단히 격조 높은 한문 숙어입니다.
世道晦塞(세도회색): 이 시기는 숙종 재위 시절로, 당파 싸움이 극에 달해 정권이 통째로 뒤바뀌는 '환국(換局)'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때입니다. 가문의 화를 피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많은 선비가 조정을 떠났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除目(제목): 조선 시대에 관원을 임명할 때 작성하여 발표하던 '관리 임명 명단(발령 명부)’
甲戌更化(갑술경화): 1694년(숙종 20년) 인현왕후가 복위하고 남인이 실각하면서 서인이 다시 집권한 '갑술환국'을 뜻합니다. 정국이 안정되면서 은거 중이던 임진원 선생이 다시 등용되는 계기가 됩니다.
捐瘠(연척): '질 가', '여윌 척' 자를 써서 굶주려 길거리에 쓰러지거나 살이 깎여 뼈만 남은 비참한 백성들을 뜻합니다. 이들이 없었다는 것은 완벽한 구휼 성공을 뜻합니다.
鍛敹(단료): '쇠를 단련하고(鍛) 꿰매어 기우다(敹)'라는 뜻으로, 무기와 방어구를 철저히 정비했음을 이르는 고급 병학 표현입니다. 지방관이 민생뿐 아니라 국방에도 유능했음을 보여줍니다.
通政(통정): 조선 시대 문신 정3품 품계인 통정대부입니다. 이때부터 왕을 직접 배알하고 국가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당상관(堂上官)' 신분이 됩니다. 지방관의 공로로 당상관에 오르는 것은 대단히 큰 영예였습니다.
癘疫(려역)과 猾吏(활리): 여산부사로 부임했을 때 맞닥뜨린 대위기입니다.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 나가 병역 자원이 펑크나자, 악덕 아전들이 사망자나 도망자의 이름을 장부에 숨겨 군포를 가로채는 등의 농간을 부리던 상황입니다. 비문은 이 비참한 상황을 임공이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 긴장감 있게 유도하고 있습니다.
親行民間(친행민간): 책상 앞에 앉아 아전들의 보고만 받는 것이 아니라, 목민관이 직접 민생의 최전선으로 나가 현장을 확인하는 솔선수범의 자세를 뜻합니다.
奸竇(간두): '간사할 간'에 '구멍 두' 자를 써서 ‘부정을 저지르는 구멍(틈새)’을 뜻하는 격조 높은 표현입니다. 사망자 명단을 조작해 군포를 횡령하던 아전들의 밥줄을 끊었다는 의미입니다.
一汰定之(일태정지): '汰(씻어낼 태)' 자를 써서 뇌물을 쓰고 군역에서 빠져나갔던 부자들을 한 번에 적발해 내고 군적을 엄정하게 재정비했다는 뜻입니다.
按臣(안신): 고을 수령들을 감찰하고 평가하는 지방의 최고 행정관인 '관찰사(감사)'를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상급자인 관찰사가 임진원의 일 처리에 깊이 감동(心服)했음을 강조합니다.
原州牧使(원주목사): 강원도의 핵심 요충지이자 정3품 목사가 파견되던 큰 고을인 원주의 수령입니다. 여산에서의 눈부신 치적을 인정받아 더 큰 고을의 수령으로 영전했음을 보여줍니다.
言其驟(언기취): '승진이나 관직 임명이 너무 갑작스럽고 빠르다'며 대간들이 탄핵할 때 쓰던 정치 용어입니다. 비록 임진원 선생이 여산에서 훌륭한 치적을 쌓았으나, 파벌 싸움이나 견제로 인해 태클을 걸었던 상황입니다. 조정에서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 도리어 반대한 대간을 잘라버렸지만(遞臺官), 임공은 청렴하고 담박한 성품답게 굳이 구설을 낳으며 무리하게 부임하지 않았습니다(竟不赴).
嶺東西(령동서): 조령(문경새재)이나 대관령을 기준으로 한 경상도(영남)와 강원도(영동·영서) 일대를 포괄하는 지명입니다.
獨公子(독공자): 당시 영남과 강원 일대를 뒤흔들며 관군을 조롱했던 실존 도적단의 우두머리 명칭(혹은 도적단의 이름)입니다. 홍길동이나 임꺽정처럼 백성과 아전들까지 포섭(連結吏民)할 정도로 조직적이고 기세등등했던 세력입니다.
簒取繫囚(찬취계수): 관아의 감옥을 습격해 갇혀 있던 동료나 죄수들을 탈옥시켰다는 뜻으로, 단순한 생계형 도적이 아니라 국가 공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한 중범죄를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衝要(충요): 사방의 교통이 통하는 군사·행정상의 매우 중요한 길목입니다. 영월은 도적들이 강원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兼討捕任(겸토포임): 지방관이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군사 작전권(도적 소탕 권한)까지 쥐는 '토포사'를 겸했음을 의미합니다. 조정이 임진원의 군사적 역량을 전적으로 신뢰했음을 보여줍니다.
不動聲色(부동성색): 요란하게 군사를 움직여 도적들을 자극하지 않고, 치밀하고 차분하게 작전을 수행하여 우두머리만 쏙 골라 잡았음을 뜻하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脅從者(협종자): 도적떼의 협박이나 굶주림 때문에 억지로 가담한 평범한 백성들입니다. 이들을 처벌하는 대신 ‘술과 음식(饋酒食)’을 주어 달랜 대목은 임 선생의 목민관으로서의 깊은 자애로움을 잘 보여줍니다.
捐俸(연봉): 지방관이 백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인 국가 녹봉을 기부하는 고결한 행위입니다. 무려 쌀 1,000섬(千斛)이라는 엄청난 양을 내놓아 민생을 구휼했습니다.
啽囈皆賑事(암예개진사): 이 비문에서 가장 극적이고 감동적인 구절입니다. '암예(啽囈)'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하는 잠꼬대를 뜻합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사리사욕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죽을 나누어 주었느냐", "곡식이 부족하지 않으냐"며 구휼(賑事)을 걱정했다는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不及見(불급견): 훌륭한 목민관의 죽음을 애도하는 전통적인 비문 형식으로, 국가의 대대적인 포상과 명예가 내려졌으나 당사자는 이미 순직하여 직접 받지 못한 것에 대한 글쓴이의 깊은 안타까움과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삼학사 홍익한(洪翼漢): 첫째 부인의 외할아버지가 병자호란의 영웅 홍익한입니다. 홍익한의 사후 충정(忠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므로, 이 비문은 홍익한 사후(효종 대 이후)에 지어진 것입니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 첫째 부인의 친할아버지인 정유성(1605~1664)은 효종~현종 대의 고위 관료입니다.
영일 정씨 가문: 두 부인 모두 당대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영일 정씨(포은 정몽주의 후손 등) 계열입니다.
負壬之原(부임지원): 전통 풍수지리 용어로, 24방위 중 '임(壬)'방향을 등졌다는(負) 뜻입니다. 즉, 북북서쪽을 머리로 두고 남남동쪽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명당 자리에 모셨음을 의미합니다.
同穴(동혈)과 祔(부): 조선 시대 사대부 가문에서는 남편이 먼저 죽거나 혹은 부인이 먼저 죽었을 때, 최종적으로 세 사람(남편과 두 부인)을 한곳에 모시는 합장이나 쌍분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첫째 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 당시 다른 곳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조만간 남편의 묘소 곁으로 이장(祔)하겠다는 계획을 비문에 남겨둔 것입니다.
先妣(선비): 제사 지낼 때 쓰는 신주나 지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단어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뜻하는 높임말입니다. 글쓴이의 어머니와 공의 첫째 부인(영일 정씨)이 자매지간이므로, 글쓴이에게 공은 '이모부'가 됩니다.
任眞無機變(임진무기변): 꾸밈없이 진실한 성품을 극찬하는 표현입니다. 앞서 원주목사 시절 권력가(호세가)의 횡포에 타협하지 않고 원칙대로 처리하다 모함을 받았던 성격이 바로 이 '우직하고 때 묻지 않은 성품'에서 비롯되었음을 뒷받침합니다.
長者(장자): 단순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덕망이 높고 너그러운 인격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유교적인 극찬의 표현입니다.
活民之政(활민지정): 앞서 간성군수 시절, 굶어 죽어가던 백성들을 집으로 돌려보낸(진복려) 공적을 뜻합니다. 단순히 행정을 잘한 것을 넘어 '백성의 목숨을 살린 정치'라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虗憍(허교): '빌 허(虛)'에 '교만할 교(驕)'의 고자로, 실속 없이 겉치레만 화려하고 속은 거만한 당대 관료들의 폐단을 꼬집는 단어입니다. 공의 우직하고 진실한 성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東州(동주): 고구려 때부터 전해 내려온 강원도 철원(鐵原)의 옛 지명입니다. 앞 구절에서 공이 '철원 송내'에 묻혔다고 기록한 것과 완벽하게 호응합니다.
有崇若斧(유숭약부): 무덤의 형태가 웅장하고 뚜렷함을 풍수지리나 예법의 표현을 빌려 묘사한 것입니다.
銘曰。
東州之土。山回水護。有崇若斧。斯其爲古良吏之墓。
산회수호(山回水護) : 명당
유숭약부(有崇若斧) : 훌륭한 사대부의 봉분을 은유
고량리(古良吏) : 공의 청백리 일생을 기리는, 백성을 사랑한 참된 목민관(良吏)인 공의 영원한 안식처임을 묘사하고 있는 핵심적인 운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