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庶民)화가 박수근(朴壽根)의 삶과 예술
김 정 명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위치한 현대갤러리에서「박수근 45주기 기념전-박수근전」이 5월 12일(수)부터 5월 30일(일)까지 전시되고 있었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서민적이고 소박한 화가라고 일컬어지는 박수근화백과의 간접적인 만남이 있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전시가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박화백의 삶과 예술의 세계에 대하여 탐닉하고 싶었다.
드디어 지난 5월 17일 월요일 오전, 화창하게 맑은 날씨 가운데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차와 전철을 번갈아 타면서 전시장에 도착하였다. 이미 매표구 앞에는 감상자들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민(庶民)화가라고 알려진 박수근(1914〜1965)화백은 강원도 양구군 정림리 산골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 가정에서 성장하며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는 소질과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미 12살 때, 자연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밀레의「만종(晩鐘)」을 보고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해질 무렵 교회의 저녁종소리를 듣는 순간, 젊은 농부 부부가 하던 일을 멈춘 채, 서로 마주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감사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본 박수근화백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자신도 이 다음에 밀레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힘들고 고통스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의 목표였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붓을 놓지 않았지만, 여전히 생활은 곤궁하여 초등학교를 간신히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 양구공립학교를 졸업하고 가세가 몰락하게 되자, 진학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열심히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 작품인「봄이 오다」가 입선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36년부터 1944년의 마지막회까지 이 전람회의 공모 출품을 통하여 화가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이후, 1952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작가가 되었으며, 이어 1962년에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는 문화관광부 선정 5월의 문화인물로 홍보되었다.
그는 “나는 인간의 착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見解)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Image)를 가장 즐겨 그린다.”라고 하였다.
박수근화백은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였다. 특히 그는 화강암으로 만든 우리나라의 옛 석탑(石塔)이나 석불(石佛)을 보고 말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림 화면 위에 회백색이나 암갈색을 채색하는 방법으로 마치 석탑 위에 그림을 그린 듯한 느낌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박수근화백의 작품 주제가 되는 이미지(Image)는 화가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생활 주변의 가난한 농가(農家)의 정겨운 풍경과 평범하고 일상적인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시적(詩的)인 정취(情趣)을 창작의 중요한 조형요소로 표현하였다..
특히 작품상의 화면에서 보여지는 특이한 재질감을 관찰하면서 창의성과 열정적인 노력에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돌밭이나 화강석의 질감[質感・Matiaiere(프)=화면의 대상의 물질감 또는 화면에 나타난 재질감 자체]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마티에르는 화풍상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붓과 페인팅 나이프(Painting-Nife)를 사용하여 물감에 대한 색층의 표현 흔적들이 우둘두둘한 화강석의 표면처럼 느껴지도록 여러 번 반복하여 창작한 과정은 그의 삶의 여정(旅程)을 의미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위에 신선한 감흥을 주는 굵고 우직한 검은 선(線)으로 형태를 단순화시켜 한국적 정감(情感)이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나게 완성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표현 경향은 1952년 이후, 인생의 말년까지 제작되는 작품 화면에 진전(進展)을 보이며 두드러지게 표현을 하게 된다. 또한 공간 구도(構圖) 배치(配置) 측면에서는 단순화된 형태들을 평면적으로 대비(對比)하여 작가의 강한 주관적인 구성미(構成美와) 조형성(造形性)을 더욱 진실하게 형성하였다.
한편 그가 이룩한 회화세계는 사후(死後), 1965년 10월 중앙공보관에서 전시되었던 유작전(遺作展)과 1970년 현대갤러리에서 유작전을 계기로 재평가 되었다. 이는 다행스러운 화단계의 긍정적인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러므로 유화(油畵)로서 가장 한국적인 독창성을 발휘한 훌륭한 작가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빨래터(1952년 작)」「고목과 여인(1964년 작)」「절구질하는 여인(1952년 작)」「귀가(歸家-1962년 작)」등이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하여 거의 언급한 일도 없었으며 그럴 넉넉한 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부인 김복순여사가 기록한 아내의 일기(日記)내용 중에는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진 마음을 그려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었다. 박수근 화가의 이러한 마음의 세계는 그의 예술의지가 되었다. 즉 서민(庶民)들의 모습을 단순히 인상적으로만 담아내었던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평면화 작업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모든 개인의 감정에서 독립된 완전한 객체(客體)로서의 존재론적 사실주의(寫實主義)의 서민들의 생활상과 주변의 정경(情景)이었다. 그 결과 박수근화가의 그림은 기념비적인 특별한 미적가치(美的價値)의 방법론적 형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수근화백은 많은 역대 화가 가운데에서도 가장 거룩하고 성(聖스)러운 서민적인 작품의 세계를 보여준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현대적인 화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刻印)되어 있는 위대한 화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에 소재한 양구군 박수근 미술관은 동두천-인천-화천-양구-인제를 거쳐 양구초등학교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박수근화백의 진정한 삶과 예술을 기리는 문화공간으로 의젓하게 조성되어 있었으며, 그의 많은 습작(習作)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헌신적으로 그를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부인이 기록한「아내의 일기(日記)」도 살펴볼 수 있었다. 박수근화백의 열정적인 창작에는 항상 부인의 헌신적인 사랑이 지속되었기 때문었다.
그밖에 박수근미술관 부근에는 을지전망대, 양구북한관, 후곡약수터, 양구 교육청내에 기념식수인 박수근나무, 박수근화백을 기리기 위한 기념공원, 양구선사미술관, 향토사료관 등 문화예술의 학습배움터로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매우 흡족함을 느끼면서 박수근화백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망(眺望)하게 되어한국인으로써 자부심(自負心)을 갖게 되었다.
영구는 박수근화백이 한 평생을 바쳤던 그림에 대한 열정과 소망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그가 수없이 선묘(線描)를 중심으로 스케치(sketch)했던 많은 습작들(소재 ;풍경, 사물-탈, 조류, 조개껍질, 곤충, 건물, 나무의자, 시골집, 사찰(절), 산모습, 사당, 고양이, 잎사귀, 무화과 나무 열매, 청둥오리, 코끼리, 호랑이, 사자, 아구, 병든 잎사귀, 제비, 남대문, 밭, 산동네, 여인들, 점포와 사람, 동네어귀와 골목, 작약, 우산과 여인, 검은 소, 황소들, 연기 피어오르는 집 지붕, 인물들, 기와돌담, 나무장난감, 공작새, 중절모를 쓴 남성들, 석양에 지는 해, 말 수레, 항아리, 주전자, 술병들, 전통문양, 보자기를 인 여인, 울부짖는 사람, 비를 피하는 형제, 황소와 닭, 아기를 업은 모습의 노점상 어머니, 주모와 노인, 한복, 메주, 맷돌, 장독대 등)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품위 있고 신선한 인상(印象)을 풍기고 있었다.
그밖에 작가의 손길이 담겨 있는 유품(遺品)과 판화, 삽화(揷畵) 등 여러 유작을 소장(所藏)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잿빛을 띤 흰색을 주조색(主調色)으로 하여 생활 주변의 풍정(風情)을 표현하였는데, 굵은 선으로 소박하게 그려 한국 서민의 정서를 잘 표현하였던 것이다. 한국적인 주제를 서민적인 감각으로 다룬 점이 특색이며 대표작으로 위에 안내한 대표작 외에「소녀」・「산」 ・ 「강변」등을 포함시킬 수 있겠다.
박수근화백은 갖은 역경 속에서도 화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부단한 노력과 실험을 통해 사물의 본성(本性)을 깨달아 이를 가지고 세대에서 세대를 뛰어 넘는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 낸 작가(作家)였다. 박수근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정감(情感)을 갖고 다가서지만, 동시에 많은 함축성을 지니고 있다. 시대적 극한상황과 극빈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뛰어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창작(創作)의 미적가치(美的價値)를 보여주고 있는 박수근화백의 삶과 그 열정은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왠지 쓸쓸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보이면서 가슴 속 깊이 감동을 안겨 준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풍(作風)은 한국의 정서를 잘 반영해 담아내고 있었다. 박수근화백의 삶과 미술은 그 자체가 특이성(特異性)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귀가하는 나의 마음과 발걸음은 그 어느 날 보다 한층 상쾌하고 가벼웠다. 감사와 겸손의 미소를 지으며 걷다보니 갈아 탈 전철 역(驛)에 다가서고 있었다. 나의 가족은 앞으로도 다문화의 예술세계를 찾아보기로 약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