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위 시(詩)는 요석(樂石) 김성태가 작곡한
우리 가곡 '동심초(同心草)'의 노랫말입니다.
요석(樂石) 김성태의 주옥같은 가곡은
가슴 속을 파고 드는 감상(感傷)과 서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나는 시를 좋아해요.
시집을 밤새워 읽고 내가 스스로 선택하지요.
나도 한때 시를 쓰고 싶어했으니까… .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 정지용이고,
소월의 시는 순수한 감성과 민요적인 요소가 넘쳐서
시 자체가 음악이라고 할수 있어요.
시에다 음만 올려놓으면 그대로 노래가 되니까.
'동심초'의 경우는
중국의 설도(薛濤)란 기생이 쓴 시인데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었어요.>
김성태가 이 가곡을 작곡한 동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시는 김소월의 스승인 안서(岸署) 김억(金億)이
당대(唐代)의 기생, 설도(薛濤)의 시를 번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전을 찾아 보면 동심초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즉, 동심초라는 꽃이나 식물이 없는 것입니다.
동심초는 풀의 이름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에게 띄우는 '러브레터'라고 합니다.
그 당시 종이를 풀로 만들었으며, 풀의 매듭을 엮는 방식과
연서(戀書)를 접는 방식이 동일하여,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풀을 가지고 엮는다거나 매듭을 만든다거나,
들국화, 클로버의 꽃으로 꽃반지를 만드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행하여졌습니다.
또, 나무잎,풀,꽃으로 사랑의 점을 치기도 했습니다.
이란에서는 봄이 시작되는 첫날을 새해로 생각하였으며,
새해 축제 기간의 마지막 날인, Seez Deh Bedar에,
풀로 매듭을 만들어 배우자를 원하는 소원을 빈다고 합니다.
매듭이 풀릴 때 행운이 열리며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군요.
- 望江樓 竹林 薛濤像
동심초는 설도(薛濤)의 오언절구인,
춘망사(春望詞) 4수(四首) 중 세 번째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 여류시인, 설도의 자는 홍도(洪度)로,
일찍 아버지를 따라 성도(成都)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 부터 시,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아주 총명하였고, 말재주도 비상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었고,
성도(成都) 관리들이 술자리에 불러 시를 짓게 한 것이
설도가 기적(妓籍)에 오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합니다.
그때 그 지방의 군사장관이었던 '웨이가오'라는 사람은
그 문학적 재능과 총명함에 반하여 설도를 총애하였고,
웨이가오는 그녀를 약 20년 동안 돌보아 주었습니다.
또 웨이가오는 임종시에 설도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 주어,
여생을 자립하여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시(詩)뿐만 아니라, 그녀의 서체(書體)인 행서(行書)도 오묘하여,
설도는 붉게 물들인 종이를 손수 만들어 그 위에 시(詩)를 썼으며,
사람들은 이를 설도전(薛濤箋)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녀의 친필 시(詩) 한 수 적힌 설도전을 얻는 것이
당시 성도 사람들의 소망이고 자랑이었다고 하니,
그녀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당시의 대표적 문인들을 보면,
백거이, 원진, 유우석, 두목(杜牧) 등이 있었으나,
이들 중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고 합니다.
원진(779 - 831)은 설도보다 9세 연하였습니다.
자는 미지(微之). 9세 때 시를 짓기 시작했고
15세 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습니다.
원진은 백거이와 아주 절친한 관계였고,
백거이와 더불어 알기 쉬운 새 시풍(詩風)을 개척했으나,
속되고 경박하다하여 사람들의 비방을 받았다고 합니다.
원진이 권력 다툼에서 밀려 동천(東川))에 좌천되었고,
5년 후 백거이도 '강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이 때, 원진이 설도의 문명(文名)을 듣고 방문하여,
809년 3월 설도와 원진이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설도'도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고,
직접 만든 아름다운 색종이에 백 여편의 시를 써서
원진에게 주며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원진 역시 설도에게 향한 정을 시로써 화답하였으니,
그들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 두 사람은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 하나씩 간직하며
다시 만나 그것을 하나로 만들 날을 기약하였습니다.
한편 원진은 옛 은사였던 위하경(韋夏卿)을 만났는데
그는 원진이 기생을 좋아하고 있음을 책망하면서
자기 질녀(姪女)를 처로 맞아들이기를 바랬습니다.
-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었다는 설도정(薛濤井):
중국 성도의 망강공원(望江公園) 안에 있다.
후에, 설도가 벼루를 들고 원진을 만나러 가는 길에
위(韋)씨 질녀가 그녀의 길을 막으며 소매를 잡는 와중에
설도는 벼루를 시냇물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무례한 위씨녀의 행패로 인하여 벼루를 잃은 설도는,
절망감을 느끼었고, 그 녀의 운명을 한탄하며,
사랑이 깨어지는 아픔을 감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설도는 평생을 홀로 외롭게 살았습니다.
적지않은 나이에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나,
그녀에게 사랑은 떨어진 꽃처럼 애절한 심사(心思)였고,
원진은 사모의 정을 바칠 수 없는 스쳐간 바람이었습니다.
[춘망사(春望詞) 四首]
花開不同賞(화개부동상) 꽃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화락부동비)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相思處 (욕문상사처) 묻노니, 그대는 어디 계신고,
花開花落時(화개화락시) 꽃이 피거나 꽃이 질 때에.
攬結草同心(람초결동심) 풀을 따서 한 마음으로 맺어
將以遺知音(장이유지음) 지음의 님에게 보내려 하네
春愁正斷絶(춘수정단절) 봄 시름 그렇게 끊어 버렸건만,
春鳥復哀吟(춘조부애음) 봄 새가 다시 슬피 우네.
風花日將老(풍화일장노) 꽃은 바람에 날로 시들어가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가네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헛되이 풀잎만 맺었던 건가.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 어찌 견디리 꽃이 가득 핀 나뭇가지,
飜作兩相思(번작량상사) 돌아보면 또다시 그리운 내 마음이여.
玉箸垂朝鏡(옥저수조경) 눈물이 주르르 아침 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 봄바람은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薛濤(대략 770~832)
자는 홍도(洪度)이며 어렸을적 부터 시,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아주 총명하고 말재주도 뛰어나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당시의 일류 문인들
백거이(白居易),원진(元[禾眞]),우석(劉禹錫), 두목(杜牧)등과
교류가많았는데 이들 중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으며, 설도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비분상심의 감정을 붓 끝에 모아내어 시를 썼다고 합니다.
도교의 사제로 불리우고 약 450편의 시를 썼지만 남은건 90수라고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동심초는
설도(薛濤)의 시 춘망사(春望詞=봄날의 바램) 사수(四首) 중에
삼수가 되겠습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
순종 그리고 온순을 상징하는 꽃말의 동심초(同心草)
식물의 풀 이름이 아니라 바로 연애편지(戀書),
곧 옛 중국에서부터 불리우는 러브레터(Love letter)라고 합니다.
그런데 '풀 초(草)'가 들어가는 이유가 뭔가 했더니
종이는 풀로 만드는 것이며, 러브레터 접는 방식이
바로 돗자리 짜는 풀의 매듭방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백거이, 두목등 당대의 거목들과 교류를 했던 설도는
특히 10세연하의 시인 '원진'을 사모 했다고 하지요,
그때 설도는 이미 청춘을 벗어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40세나 된 그때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설도였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떨어져 버린 꽃잎과 같았고,
일생 일대에 오로지 정을 바칠 수 있었던
원진은 흘러가는 바람이었을 수 밖에..(안타깝다...)
그 때문인지 .....
맘과 그리고 몸의 정을 나누지 못하고
그저 편지로만 주고 받는 것 자체가 덧없음에
설운 마음을 시(詩)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그녀는 홀로 시냇가에 집을 마련하고 살다
도교(道敎)에 들어가 귀의하다 세상을 하직 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명복을 빕니다..)
성도 망각루(望江樓)공원내의 설도 묘-당나라 유명한 여류 시인 설도(薛濤)의 무덤
'동심초' 작곡가 김성태 선생님 100세 축하공연이 작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연세에 아직도 정정 하시다고 하고요 .... 건강하게 사시다 가셨으면 합니다
글의 출처http://kr.blog.yahoo.com/cocolandkr/4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