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사고의 체계와 적용
1. 철학적 사고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로 표현한다. philos(사랑)와 sophia(지혜)라는 두 말이 합해져서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또는 logos(진리, 말씀, 이성 등의 의미)로 표현하기도 한다. 동양에서는 道(자연과 인생을 꿰뚫고 가는 본질적 의미)를 말하는데, 이것은 자연과 인생의 조화를 이상으로 하는 수양의 철학을 의미한다.
철학적 사고의 계기는 경이와 자각이다. 칸트는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과, 내 마음속에 샘물처럼 흐르는 양심이 가장 큰 경이이다.”라고 하여 사물에 대하여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높아지는 감탄과 외경으로 마음이 가득 찬다고 했다. 그리고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고 하여 깨달음을 강조했다.
결국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관하여 체계적이고 근원적인 지식을 얻고자 하는 愛智와 求道의 과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철학적 존재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삶과 그 내용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2. 따져 묻기
소크라테스는 개인적 유용성을 강조하고 철저한 상대주의에 빠진 당시의 소피스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빼어난 자여 그대는 가장 위대하고 슬기와 힘으로 가장 이름나 있는 나라인 아테네의 시민이면서도, 그래 재물에 대해서는 되도록 많았으면 하고 관심을 쏟으면서도 그리고 세평(世評)과 명예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면서, 지혜와 진리에 관해서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온전해지게끔 영혼에 관해서 마음을 쓰거나 생각해보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따져 묻는다는 것은 바로 세움을 의미한다. 따져 물음으로써 자신과 세상을 반성하게 된다. 현실적인 제약으로 변화를 이루지는 못하지만 궁극적으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영향을 준다. 정약용은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마를 타고 가는 사람은 가마를 지고 가는 사람의 어깨가 얼마나 아픈지를 알지 못한다.”
자주적 주체성과 실용주의를 강조한 정약용의 인간관과 경세관(經世觀)은 오늘날의 정치와 경제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결국 따져 묻기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변증법적 변화가 바로 이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포이 신전의 물음을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라고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그래서 델포이의 선택은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물음과 해답의 과정을 변증법으로 해석한다.
석가의 깨달음도 변증법적이다. 석가는 혼돈의 상태(世間)에서 삶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려고 출가한다. 출가하여(出世間)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치나 벗어날 수 없으며 문제가 자신 내부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다시 본래의 삶으로 되돌아온다(出出世間). 그러나 이 삶은 출가 전의 상태와 다르다. 그 이후 그를 우리는 부처(佛陀, budda, 깨달은 자)라 부른다. 그래서 불교는 깨닫는 종교이다.
깨달음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실천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외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움과 나태함 등을 극복해야 하고, 온갖 유혹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40일 간의 기도 끝에 예수는 사탄의 유혹과 심판을 받는다. 그 유혹을 인간적으로 해석해 보자.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는 것은 ‘쾌락의 유혹’이고, ‘절만 한 번 하면 천하를 주겠다.’는 것은 ‘권력의 유혹’이다. 그리고 ‘탑 위에서 뛰어 내려라.’는 것은 ‘책임 회피의 유혹’이다. 우리는 항상 이런 유혹을 받고 산다. 예수께서는 “나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고하게 말씀하고 계신다.(존 포웰, 무조건적인 사랑)
종종 학생들은 이번 시간만 놀고 다음 시간부터 공부하자고 조르거나, 이 번 한 번만 용서 해달라고 사정을 한다. ‘한 번만’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영원히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따져 묻기는 철학의 출발이며, 동시에 마무리이기도 하다.
3. 경계를 넘어 서기
철학적 사고는 경계를 뛰어 넘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넘어서기는 사고의 전환을 의미한다.
“하나의 흐름을 넘어선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예컨대 로크가 데카르트를 넘어선다고 할 때, 이는 단지 한 철학자의 사상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상을 열었다는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다수의 사상가들을 포괄할 새로운 사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과학혁명의 구조’로 유명한 토마스 쿤의 용어를 빌면, 일종의 ‘패러다임 변혁’으로 비유할 수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이런 변혁을 통해 새로운 사고방식에 인간이 접근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비판한 경험론자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실재론자들의 실체를 부정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흄은 ‘자아의 실체 같은 건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형식으로만 존재하듯이, 중세의 보편자가 이름뿐이듯이, 버클이의 물질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듯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해석은 근대의 출발인 ‘자아의 주체성’과 ‘과학의 인과성’을 부정함으로써 근대적 사고의 기초가 흔들리는 위기를 초해하였다. 해체된 근대성을 다시 확립하는 것이 칸트의 종합적 인식론이다. 이처럼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기초를 더욱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경계를 넘어섬은 다른 영역으로의 전이와 통섭을 의미한다. 통섭(統攝)은 큰 줄기(통)를 잡다(섭), 즉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의미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한데 어울리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가 자신의 스승인 미 하버드대 석좌교수인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책 ‘컨실리언스(Consilience)’를 번역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 학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구상에서 고교생을 문과 이과로 나눠서 가르치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고득점한 학생들이 입학하지만 학문융합이 안돼 ‘수학(修學) 장애인’만 양산되고 있다.”(한국일보, 2007/09/16)
우리의 학문적 현실을 설명하는 중요한 시사점이다. 최근에 와서 통섭은 중심 아이디어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학문간의 통합, 학제적 결합 등을 시도하기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기본적 생각에 큰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근대에는 인간의 창조성이란 미세하게 세분화되는 전문화의 세계 속에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듯이, 전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발상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인문학에서도 과거의 문화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면 모두 아류 내지 모방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것이 근대적 사고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기존의 것들을 혼합하고 종합하는데서 창조성이 생겨나온다는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즉, ‘무엇을 발명(발견)했는가?’하는 질문보다 ‘어떻게 기존의 것을 잘 혼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는가?’하는 문제제기의 방식 자체가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경계를 넘어서기는 자유로운 사고와 확산적인 사고를 유발하여 새로운 학문 세계를 끊임없이 개척하는 유목적 삶과 관계가 있다.
4. 논술과 교사의 역할
통합논술은 특정 교과의 몫이 아님을 우리는 알았다. 다양한 영역의 교사들이 자기 교과를 중심으로 타교과를 살펴보고, ‘따져 묻기’와 ‘경계를 뛰어넘기’를 시도하는 것이 핵심과제이다. 이를 위해 자체 연수와 워크숍 등을 통해 교사의 가르침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