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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열전 (市長列傳)
서(序)
도시는 공작이 지은 것이다.
노르트가우의 백작들과 슈바벤의 공작들은 대대로 성을 쌓고 도시를 열었다. 셀츠가 그러하고 빌링엔이 그러하며 상트갈렌의 신도시가 그러하다. 아달베르트 삼세에 이르러서는 백작령마다 짓느라 천오백 두캇이 넘는 돈이 없어졌고, 그 뒤로는 함락한 성의 창고를 털어 연명하였다.
그 도시들이 사람을 냈다.
왕국의 세 자리를 헤아리면 대장군과 재무관과 첩보관인데, 삼백 년 동안 이 셋을 도시의 시장들이 번갈아 채웠다. 싸움터의 배치에도 그들의 이름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백작이 된 자는 하나도 없다.
여기 그 이름들을 적는다.
휴고 에티코넨 — 셀츠
주후 1092년, 노르트가우백 게르하르트가 새로 지은 도시 셀츠에 그 아우 휴고를 초대시장으로 앉혔다.
휴고에게는 게르트뤼트라는 아내가 있었다. 뒤에 게르하르트가 그 여인과 통하였다. 게르하르트의 아우가 넷이었는데 그중 둘의 아내가 그러하였다.
휴고가 형의 노여움을 샀다. 그 뒤로 사료에 휴고의 이름이 없다.
이 가문이 낸 첫 시장은 이러하였다.
디트빈 — 셀츠
백 년 뒤, 같은 도시가 장수를 냈다.
디트빈은 몸이 굳세어 능히 싸울 줄 알았고, 성지에 다녀온 자였다. 위로 오르기를 바라되 스스로를 낮추었고, 사람 앞에 나서기를 부끄러워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모질지 않았다.
주후 1190년, 퓌르스텐베르크백 루돌프 폰 카른텐이 반란하였다. 벨프 폰 호엔슈타우펜을 슈바벤에 앉히려 한 것이다. 루돌프 폰 카른텐은 얼마 전까지 슈바벤의 대장군이었으나 루돌프 에티코넨에게 밀려난 자였다.
진압군의 중군은 대장군 루돌프 에티코넨이 잡았다. 그 무예가 당대에 견줄 자가 드물었다. 좌익은 셀츠의 시장 디트빈이 맡았다.
싸움에 앞서 누가 양쪽의 수를 세어 보이며 이길 것이라 하니, 디트빈이 말하였다.
"수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싸우나이다."
그 해 팔월, 포르트하임에서 이천사백이 이천이백을 맞았다. 천육백을 잃고 천오십을 죽였다. 수가 많은 쪽이 졌다.
디트빈이 그 싸움에서 죽었다.
반란은 뒤에 가라앉았다. 셀츠가 낸 첫 장수는 사료에 남은 첫 싸움에서 끝났다.
디트마르 에티코넨 — 빌링엔
주후 1197년 구월, 슈바벤공 안드레아스 이세가 퓌르스텐베르크에 빌링엔이라는 도시를 완공하고 그 삼촌 디트마르에게 내렸다.
디트마르는 이듬해 어머니에게서 피에몬테와 인스부르크를 물려받아 이중백작이 되었고, 인스부르크를 으뜸 이름으로 삼았다. 도시 하나로 시작하여 백작령 둘을 얻은 것이다.
주후 1207년 오월, 디트마르가 조카에게 사람을 보내어 폴크마르 에티코넨을 죽이는 일에 함께하자 하였다. 안드레아스 이세가 거절하였다.
이듬해 정월, 디트마르가 티롤공에게 반란하였다가 졌다. 뒤에 다시 반란하였다가 또 졌다.
두 번의 반란 끝에 그에게 남은 것은 피에몬테뿐이었고, 빌링엔은 공작에게 도로 갔다. 뒤에 안드레아스 이세가 그 도시의 소유권을 명분으로 티롤공과 싸워 되찾았다.
디트빈은 도시 하나를 지고 싸움터에 나가 첫 싸움에서 죽었고, 디트마르는 도시 하나를 백작령 둘로 불렸다가 다 잃고도 살았다.
고트하르트 — 그라츠
주후 1256년, 순트가우백 에크베르트 에티코넨이 죽어 재무관 자리가 비자 그라츠의 시장 고트하르트가 그 뒤를 이었다.
고트하르트가 곳간을 맡은 스물여덟 해는 슈바벤이 가장 많이 짓고 가장 많이 싸운 때였다. 아달베르트 삼세가 상트갈렌에 새 도시를 세우고 백작령마다 성을 올리면서 동시에 두 곳에서 전쟁을 치렀으므로, 선대와 당대의 소출이 모두 없어지고 천오백 두캇이 모자랐다.
주후 1283년 십이월, 고트하르트가 아뢰었다.
"곳간이 비었나이다."
공이 말하였다.
"그러면 걷어 오라."
이듬해 오월 르 피에서 육천오백 가운데 천오백만 살아 돌아갔고, 유월 몽펠리에에서 그 천오백마저 없앴다. 승전보가 이어졌다.
같은 해 십이월, 고트하르트가 세금을 걷으러 나갔다가 성난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두 해 뒤 슈바벤의 곳간이 흑자로 돌아섰다. 세금과 성의 노획으로 채운 것이다.
마티아스 — 카르펜트라스
주후 1297년 오월, 첩보관인 카르펜트라스의 시장 마티아스가 한 가지 일을 알아냈다.
공작의 장손 아달베르트가 제 아비인 상트갈렌백 페르디난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마티아스가 그를 찾아가 말로 그만두게 하였다. 어떤 말을 하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그해 유월, 아달베르트는 유스티나 브리엔니오스와 혼인하였고, 뒤에 슈바벤공이 되었으며, 그 손자가 왕국을 세웠다.
이 열전에 이름을 올린 자들 가운데 칼을 들지 않고 가문을 살린 자는 이 사람뿐이다.
쿠노 — 빌링엔, 그리고 잉가 에티코넨 — 킬리
주후 1308년 사월, 페르디난트 일세가 재상에 울름백 기셀베르트를 세우고 대장군에 빌링엔의 시장 쿠노를 세웠다. 그 밖에 쿠노에 관하여 전하는 것이 없다.
주후 1311년 삼월, 킬리의 시장 잉가 에티코넨이 죽었다. 지기스문트 계열의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가 죽자 킬리 남작령은 페르디난트 일세에게 돌아갔다.
발터 — 호엔베르크, 그리고 에른스트 — 하일리겐베르크
주후 1326년 오월, 브리에이에서 만이천이 구천을 맞아 육천을 잃고 팔천을 죽였다.
중군은 호엔베르크의 시장 발터가 잡았고, 좌익은 시장 에른스트가, 우익은 왕의 차남 필리베르트 에티코넨이 맡았다. 왕의 아들이 익에 서고 도시의 시장이 가운데 섰다.
그해 시월 엠브룬에서 상부르군트공 발터 폰 뉴엔부르크에게 크게 졌다. 만이천 가운데 삼분의 이를 잃고 지휘관 둘을 잃었다.
십이월 알본에서 사천으로 육천오백 가운데 오천을 도륙하였다. 중군은 용병대장 발도마르가, 좌익은 시장 발터가, 우익은 브뤼게백 군터 에티코넨이 맡았다.
주후 1329년 십이월 니온스에서 이겨 엠브룬 이전으로 되돌렸다. 중군 군터, 좌익 발터, 우익 필리베르트였다. 그달 스무여드레, 봉신들이 불평하고 성을 칠 병력이 없어 프로방스와의 전쟁을 승부 없이 거두었다.
주후 1332년 유월, 파사우에서 칠천이 사천을 맞았다.
처음에는 중군이 발터, 좌익이 필리베르트, 우익이 노르트가우백 카를이었다. 싸움 가운데 중군의 발터가 죽었다. 필리베르트가 가운데로 옮겨가고 카를이 왼편으로 옮겨갔으며, 빈 오른편을 시장 에른스트가 받았다. 그렇게 사천을 잃고 삼천을 죽여 반란군의 주력을 부수었다.
주후 1334년 정월, 슈바벤의 대장군 기셀베르트가 죽었다.
왕이 하일리겐베르크의 시장 에른스트를 불러 그 자리를 주며 말하였다.
"브뤼게백은 돌아섰고 발터는 죽었으며 필리베르트는 재상이 되었다. 남은 자 가운데 그대가 으뜸이다."
에른스트가 절하고 말하였다.
"신은 파사우에서 오른편을 받았나이다. 그때도 남은 자리였나이다."
아돌프와 디트폴트
주후 1338년 오월, 샹베리에서 상부르군트의 육천을 쳐서 팔백만 남겼다.
이때 슈바벤이 장수를 갈았다. 중군에 시장 아돌프를, 좌익에 시장 디트폴트를 세웠다. 오른편은 비엔나백 고트프리트 폰 노르트가우가 맡았는데, 그는 병을 알지 못하는 자였으나 에티코넨의 사생아 가문 사람이었다.
그해 시월 에펜슈타인에서 만삼천이 만천을 맞아 오천오백을 잃고 팔천오백을 죽였다. 그 싸움에서 비엔나백 고트프리트가 죽었다.
디트폴트의 이름은 샹베리 한 줄뿐이다. 그 뒤로 없다.
주후 1342년 팔월, 낭시에서 만이 만사천을 맞았다. 칠천을 잃고 구천을 죽였으나 수가 모자라 크게 졌다. 중군의 시장 아돌프가 죽었다. 왕은 군사를 흩을 수밖에 없었다.
이 뒤로 슈바벤의 중군은 한동안 만드 사람 하르가니 쿨름바이드가 잡았다.
군트람 — 호엔베르크
주후 1362년 구월과 시월, 카를만 일세가 상부르군트를 쳐서 내리 세 번 이겼다.
중군은 호엔베르크의 시장 군트람이 잡았다. 좌익은 비엔나의 사중백작 람베르트 폰 노르트가우가, 우익은 트렌트의 군주이자 주교인 필리베르트가 맡았다.
네 개의 백작령을 가진 자와 한 지방의 주교가 익에 서고, 도시의 시장이 가운데 섰다.
삼십 년 전 파사우에서 중군을 잡고 죽은 발터도 그 도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호엔베르크는 삼십 년 만에 다시 가운데를 맡을 사람을 냈다.
콘라트 보이젤라거 — 다카우
다카우는 지은 도시가 아니라 빼앗은 성이다. 주후 1323년, 아달베르트 사세가 바이에른을 칠 때 함락시켜 왕국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아흔 해 뒤, 그 성의 시장 콘라트 보이젤라거가 하르트만 일세의 왼편에 섰다.
주후 1414년 칠월 필센에서 만천이 삼천칠백을 맞아 삼백을 잃고 삼천백을 죽였다. 중군은 프리슬란트백 필리베르트 폰 포름바흐가, 좌익은 콘라트가 맡았다. 슈바벤이 치른 싸움 가운데 가장 깨끗하였다.
주후 1417년 정월 취리히에서 칠천팔백이 오천삼백을 맞아 천팔백을 잃고 사천을 죽였다. 이번에는 왕이 몸소 중군을 잡았고 콘라트가 그 왼편에 섰다.
그해 십일월 독립전쟁의 승점이 다 찼고, 십이월 왕이 죽었다. 콘라트의 이름은 그 정월을 마지막으로 없다.
이듬해 새 왕은 뜰의 손이던 에리히 폰 몬테풀키아노에게 슈비츠 백작령을 내렸다.
여덟 해 뒤에는 땅 없는 귀족 라인하르트 폰 부이용에게 퓌르스텐베르크 백작령을 내렸다.
그 뒤로 슈바벤의 싸움터에 시장의 이름이 오르지 않는다.
논찬
수도원장이 평하기를,
내가 삼백삼십 년의 기록에서 도시의 시장들을 골라내니 열셋이었다.
왕국의 대장군 자리를 셋이 채웠고, 곳간을 하나가 맡았으며, 첩보를 하나가 맡았다.
싸움터의 가운데를 잡은 자가 넷이다. 그중 사중백작과 주교를 익에 두고 가운데 선 자가 있었고,
왕의 아들을 익에 두고 가운데 선 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백작이 된 자가 하나도 없다.
또 한 가지, 도시의 수를 세면 사람의 수보다 적다. 셀츠가 둘을 냈고 빌링엔이 둘을 냈으며 호엔베르크가 둘을 냈다.
삼백 년 동안 왕국의 가운데를 맡을 사람을 대어온 것은 여러 도시가 아니라 몇 개의 도시였던 것이다.
호엔베르크는 파사우에서 발터를 잃고 삼십 년 뒤에 군트람을 냈다. 그 사이에 그 도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적지 않았다.
이것이 우연이 아님은 그 뒤를 보면 안다.
콘라트 보이젤라거가 사라진 이듬해에 왕은 봉토 없이 뜰에 얹혀 살던 토스카나 사람에게 백작령을 주었고, 여덟 해 뒤에는 땅 한 뼘 없는 귀족에게 백작령을 주었다.
왕들이 인색하였던 것이 아니다. 인색하지 않은 왕들도 시장에게는 주지 않았다.
집회서에 이름 있는 사람들을 기리자는 대목이 있다. 나라를 다스린 자와 지혜로 말한 자와 노래를 지은 자를 차례로 세다가, 문득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기억이 없는 자들이 있어, 그들은 있어본 적 없는 것처럼 되었다고.
나는 젊어서 이 구절을 읽을 때 왜 기리는 글 한가운데에 이런 말을 끼워 넣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제 디트폴트의 이름을 본다. 샹베리에서 왼편을 맡았다는 한 줄뿐이다. 그가 어디 사람인지, 언제 죽었는지, 무엇으로 죽었는지 아무도 적지 않았다.
성서를 엮은 이는 기림의 한복판에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것을 적어두어야 기림이 거짓이 되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복된 아우구스티누스가 두 도성을 논하여 이르기를, 하나는 스스로를 사랑하여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데까지 이른 도성이요 다른 하나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데까지 이른 도성이라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이 열전에 곧이곧대로 갖다 붙이지는 않겠다. 셀츠와 빌링엔과 그라츠와 호엔베르크는 돌과 흙으로 지은 것이지 사랑으로 지은 것이 아니며, 공작들이 그것을 세운 뜻은 세금과 병력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지상의 도성을 세운 자들은 제 이름을 위하여 세웠으나, 그 도성이 낸 사람들은 제 이름을 얻지 못하였다.
성을 쌓은 자의 이름은 남고 성이 낸 자의 이름은 남지 않았으니, 스스로를 사랑한 자와 스스로를 업신여긴 자가 한 도성 안에 함께 있었던 셈이다.
그라츠의 고트하르트를 따로 적어둔다. 복음서에서 세금 걷는 자는 죄인의 다른 이름이다.
주께서 그들과 함께 잡수신 것을 두고 사람들이 수군거렸고, 성전에서 가슴을 치던 자도 그런 자였다. 고트하르트는 스물여덟 해를 그 일로 살았다.
공작이 도시를 짓고 성을 올리고 두 곳에서 전쟁을 하느라 곳간을 비웠을 때, 곳간이 비었다고 아뢴 것은 그였고 걷어 오라는 말을 들은 것도 그였다. 그리고 걷으러 나갔다가 맞아 죽었다.
두 해 뒤에 곳간은 흑자가 되었다.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기록한 것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일 것이나, 그가 죽은 자리에서 셈이 맞았다는 것은 아무도 셈에 넣지 않았다.
끝으로 이 열전이 셀츠에서 시작하여 다카우에서 끝나는 것을 보라.
셀츠는 이 가문이 처음으로 지은 도시요, 다카우는 왕국을 세우며 빼앗은 성이다.
셀츠는 두 사람을 냈는데, 하나는 형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지워졌으며 하나는 제 이름이 처음 적힌 싸움에서 죽었다.
빼앗은 성이 낸 마지막 시장은 왕이 죽은 겨울에 사라졌다.
그 사이 삼백삼십 년 동안 이 도시들은 왕국에 장수와 곳간지기와 첩보관을 대었으며, 값으로 받은 것은 없었다.
나라를 지탱한 것이 성벽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은 흔하다. 나는 그보다 좁게 적겠다.
슈바벤을 지탱한 것은 공작들이 빚을 내어 지은 도시들이었고, 그 도시들이 낸 사람들이었으며, 공작들은 그 값을 치르지 않았다.
이는 배은이 아니라 셈법이다. 백작에게 땅을 주면 그 땅이 다시 돌아오지만 시장에게 땅을 주면 도시가 하나 줄기 때문이다.
셈이 그러하였으므로 삼백 년 동안 아무도 주지 않았다. 셈이 틀렸다고는 못하겠다. 다만 셈이 맞았다 하여 옳았다고도 못하겠다.
하르트만·헤리베르트 양대 장수열전 (兩代將帥列傳)
상편 — 독립전쟁의 장수들
에리히 폰 몬테풀키아노는 토스카나 사람이다. 언제 슈바벤에 들어왔는지, 무슨 연고로 왔는지 아무도 적어두지 않았다. 왕의 뜰에 머무른 지 여러 해였으나 봉토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는 다만 손[客]이라 하였다.
라인하르트 폰 부이용은 귀족이었으되 땅이 없었다. 그 아비가 누구인지, 그 집이 어디에 있었는지 전하지 않는다. 그 이름이 성지를 처음 다스린 이의 이름과 같으나, 그 집과 연고가 있었는지도 전하지 않는다.
다카우의 시장 콘라트 보이젤라거는 성을 가졌으되 영주가 아니었다. 다카우는 백 년 전 슈바벤이 바이에른을 칠 때 함락시킨 성이니, 왕국이 세워지며 얻은 땅이다.
이 세 사람이 하르트만 왕의 창이 되었다.
하르트만 왕은 병(兵)을 알았다. 당대에 그만한 자가 없었고, 후대가 그의 이름을 기억할 만하였다. 그러나 담이 크지 않아 스스로 앞에 나서기를 꺼렸고, 자기 것을 셈하는 데 밝았으며, 아랫사람을 낮추어 보았다. 다만 상벌을 매길 때만은 그 눈이 문벌을 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공정하다 불렀다.
주후 1412년 정월, 싸움이 끝난 뒤 왕이 한 사람을 불러 세웠다. 그 자가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이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인하르트 폰 부이용이라 하나이다."
"네 집의 땅은 어디 있느냐."
"없나이다."
왕이 곁의 서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적어두어라."
그때 라인하르트의 나이 스물넷이었고, 능히 한 익(翼)을 맡길 만하였다.
이듬해 오월, 왕이 대장군을 갈았다. 시에나백 알베리히를 물리고 뜰의 손 에리히를 세운 것이다. 봉토도 성도 없는 자에게 왕국의 군사를 맡겼으므로 사람들이 놀랐다. 에리히의 무예는 한 세대에 드문 것이었다.
그 다음 달, 멜길에서 싸웠다. 슈바벤의 군세 만천오백이 사천오백을 맞아 천사백을 잃고 삼천이백을 죽였다. 중군은 에리히가 잡았고, 왼편은 라인하르트가, 오른편은 에른스트가 맡았다. 뜰에 들어온 지 열일곱 달 만에 라인하르트는 대장군의 곁에 섰다.
주후 1414년 정월, 황제가 왕의 아내 헬레네에게 창을 겨누었다. 왕의 둘째 딸 엠마가 동방 제국에 대하여 가진 권리를 명분으로 삼았다.
왕은 전시에 한 달 스물두 두캇을 거두었다. 평시라면 쉰이었을 것이다. 그 정월에 왕은 아내에게 칠백칠십사 두캇을 보냈다. 서른다섯 달치였다.
오월에 스투트가르트가 떨어졌다. 칠월에 필센에서 싸웠다.
이 싸움은 슈바벤이 치른 것 가운데 가장 깨끗하였다. 만천이 삼천칠백을 맞아 삼백을 잃고 삼천백을 죽였으니, 열 사람을 죽이는 동안 하나를 잃은 것이다.
중군은 프리슬란트백 필리베르트 폰 포름바흐가 잡았다. 그는 에티코넨의 여인을 아내로 맞은 자이며, 그 무예가 뛰어났다.
왼편에 다카우의 시장 콘라트 보이젤라거가 섰다. 그의 무예는 쓸 만하였다.
이때 슈바벤에는 본진이 둘이었다. 하나는 왕이 몸소 이끌었고, 하나는 필리베르트가 맡았다. 왕의 왼편에는 라인하르트가 섰고, 필리베르트의 왼편에는 콘라트가 섰다. 두 사람의 무예는 하나가 겨우 나았을 뿐이어서, 뒷사람이 누가 위였는지를 가리지 못한다.
대장군 에리히의 이름은 그 뒤로 배치에 나오지 않는다. 왕이 스스로 중군을 잡았기 때문이다.
주후 1415년 삼월, 임스트에서 왕이 손수 칠천을 몰아 이천사백을 쳤다. 살아 돌아간 자가 사백이었다. 이 싸움에서 쿠노 이세와 튀링겐공 에멜리히 사세가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중군은 왕이, 왼편은 라인하르트가, 오른편은 아달하르트가 맡았다.
같은 해 팔월, 왕이 황제에게 독립을 선언하였다. 제국의 법이 땅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게 하니, 이대로 두면 장남 헤리베르트가 동방 제국을 잇는 순간 슈바벤을 잃게 되는 까닭이었다. 아들에게 나라를 물려주기 위하여 나라를 걸었다.
주후 1416년 이월, 주마르쇼센에서 이기고 라반트에서 이겼다. 라반트는 삼만이 이만을 맞은 큰 싸움이었으되 겨우 이겼다.
칠월에 황제 레오폴트 일세가 죽고 그 아들 아르놀트 이세가 섰다.
십이월에 왕의 손자가 났다. 이름을 헤리베르트라 하였다.
주후 1417년 정월, 취리히에서 싸웠다. 칠천팔백이 오천삼백을 맞아 천팔백을 잃고 사천을 죽였다. 중군은 왕이, 왼편은 콘라트가, 오른편은 에른스트가 맡았다.
싸움이 끝난 뒤 왕이 말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도장뿐이다."
콘라트가 답하였다.
"성문은 마지막 한 걸음에서 닫히더이다."
그 해 십일월, 독립전쟁의 승점이 다 찼다. 십이월, 왕이 황제 아르놀트 이세와 싸우다 죽었다. 왕이 죽자 전쟁은 없던 것이 되었다.
다만 그 전쟁이 반란이었던 까닭에 제국의 법이 미치지 못하여, 장남 헤리베르트가 스무 살에 왕위를 이었다. 왕이 이기고자 하였던 것을 왕의 죽음이 이루었다.
새 왕은 그달로 에리히 폰 몬테풀키아노에게 슈비츠 백작령과 마구간 관리인의 자리를 내렸다. 조서에 이르기를, 슈바벤을 위하여 봉사한 명장이라 하였다. 뜰의 손으로 들어온 지 몇 해 만에 백작이 된 것이다.
다카우의 시장 콘라트 보이젤라거의 이름은 그 정월의 취리히를 마지막으로 사료에 없다. 그가 십이월의 싸움에 있었는지, 거기서 죽었는지, 아니면 다만 늙어 물러났는지 전하지 않는다.
하편 — 유주(幼主)의 장수들
고첼로 에티코넨은 병을 알지 못하였다. 창을 잡을 줄도, 사람을 세울 줄도 몰랐다. 그러나 그에게는 베른에 대한 권리가 있었다.
주후 1364년 정월, 헤리베르트 일세가 상부르군트공 미카엘 이세를 쳐서 그 권리를 이루어주었다. 고첼로는 마흔아홉에 베른백이 되었고, 친족으로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가 얻은 것은 그가 싸워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 그의 아들 하르트만은 열아홉이었다. 위로 누이가 있었으나 어려서 죽었으므로, 그가 맏이로 자랐다.
하르트만이 병을 어디서 배웠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아비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후 1401년 유월, 하르트만 일세가 폴란드를 칠 때 안클람에서 싸웠다. 만삼천이 몰아쳐 이천을 섬멸하였다. 중군은 카스페르가, 왼편은 베른백 하르트만 에티코넨이, 오른편은 뤼트게르가 맡았다.
그때 하르트만의 나이 쉰여섯이었고, 그 무예는 남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 뒤로 스무 해 남짓, 그의 이름은 배치에 오르내렸으되 한 번도 중군에 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중군을 거쳐간 자를 세면 카스페르가 있고, 시에나백 알베리히가 있고, 에리히가 있고, 필리베르트가 있고, 왕이 있다. 하르트만은 늘 그 곁이었다.
주후 1422년 오월, 헤리베르트 이세가 혼수 중에 죽었다. 그 장남 헤리베르트가 다섯 살에 왕위를 이었다.
같은 달, 대모라비아왕 아르놀트가 슈바벤의 왕위를 요구하며 창을 들었다. 아르놀트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지난날 제국의 법대로였다면 슈바벤은 그의 것이 되었을 터였고, 하르트만 일세의 독립전쟁이 그 순서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작센과의 전쟁은 이기고 있었으나 조건 없이 거두었다. 티롤백 에기놀프가 섭정이 되었다. 왕은 다섯 살이었으므로 중군에 설 수 없었다.
이때 베른백 하르트만이 왔다. 그의 나이 일흔일곱이었고, 머리가 희고 길었다.
누군가 물었다.
"공께서는 연치가 높으신데 어찌 오셨습니까."
하르트만이 말하였다.
"내 아비가 베른을 받으실 적에 나는 열아홉이었소. 그때 창을 든 것은 우리가 아니었소."
팔월에 라우터부르크에서 이겼다. 구월과 시월에 걸쳐 촐레른과 카를스루에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 정월에 취리히에서 만이 칠천을 맞아 이천오백을 잃고 오천오백을 죽였다.
두 싸움의 배치가 한 자도 바뀌지 않았다. 중군에 필리베르트 폰 포름바흐, 왼편에 라인하르트 폰 부이용, 오른편에 베른백 하르트만 에티코넨.
라인하르트는 서른넷이었고 하르트만은 일흔여덟이었다. 마흔네 해가 그 사이에 있었다. 하르트만의 무예는 안클람에서보다 오히려 나아져 있었다. 몸은 늙었으나 병은 늘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해 동안, 땅 한 뼘 없는 자가 왼편에 서고 에티코넨의 백작이 오른편에 섰다.
주후 1423년 칠월, 켐프턴백이 후사 없이 죽어 그 땅이 왕에게 돌아왔다. 왕은 그것을 공을 세운 에른스트 폰 랑그레스에게 내렸다.
주후 1425년 삼월, 대모라비아와의 전쟁이 끝났다. 아르놀트 일세는 배상을 물고 슈바벤 왕국에 대한 권리를 버렸다. 다섯 살에 물려받은 나라를 여덟 살에 지켜낸 것이다.
그 유월, 아르놀트가 마조비아의 반란을 치는 데 도움을 청하였다. 석 달 전까지 슈바벤의 왕위를 요구하던 자였다. 헤리베르트 삼세는 군사를 보냈다.
그 해 십이월, 왕이 퓌르스텐베르크 백작령을 라인하르트 폰 부이용에게 내렸다. 조서에 전쟁의 영웅이라 하였다.
퓌르스텐베르크는 오래된 땅이다. 이백오십 해 전 슈바벤의 대장군을 낸 집이 거기 있었다.
봉작하는 자리에서 왕이 물었다. 그때 왕의 나이 여덟이었다.
"그대의 아비는 어느 백작이었는가."
라인하르트가 답하였다.
"소신의 집에는 땅이 없었나이다."
왕이 말하였다.
"그러면 그대가 첫 백작이로다."
뜰에 들어온 지 열세 해였다.
베른백 하르트만 에티코넨의 이름은 취리히를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 전하지 않는다.
논찬
수도원장이 평하기를,
내가 두 대에 걸친 전투의 기록을 펴놓고 세어보니, 싸움마다 적힌 이름이 셋뿐이다. 중군과 두 익이다. 그 밖에 싸운 자가 몇천이었을 터이나 이름은 없다.
열세 해 동안 그 셋의 자리를 거쳐간 이름을 헤아리면 열 남짓인데, 어떤 이름은 여러 번 나오고 어떤 이름은 한 번 나오고 만다.
다카우의 시장 콘라트 보이젤라거는 두 번 나오고 끊긴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적히지 않았다.
사무엘의 책에 다윗의 용사들을 적은 대목이 있다.
거기 이름이 서른일곱인데, 어떤 자는 무슨 일을 하였는지가 함께 적혀 있고 어떤 자는 이름만 적혀 있다.
성서를 엮은 자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는 자의 이름을 굳이 남겨둔 까닭을 나는 오래 생각하였다.
아마도 행적을 적지 못할지언정 이름을 지우지는 않으려 한 것이리라.
콘라트의 두 줄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나, 그가 두 번 왕의 왼편에 섰다는 것은 안다.
그것으로 족하다 할 수는 없으되,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낫다.
로마 사람 베게티우스가 병법을 논하며 이르기를, 무예는 태생에서 오지 않고 훈련에서 온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오래 의심하였다. 태생이 없이 병을 아는 자를 본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른백 하르트만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의 아비 고첼로는 병을 조금도 알지 못한 자였다. 창을 잡을 줄 모르는 아비를 위하여 왕이 삼 년을 싸워 백작령 하나를 만들어 안겨주었으니, 고첼로가 얻은 것 가운데 제 손으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아들은 쉰여섯에 익을 맡았고 일흔여덟에도 익을 맡았으며, 늙을수록 병이 늘었다.
몸이 쇠하는 만큼 병을 알게 되었다면, 그 스무 해의 익이 곧 훈련이었을 것이다. 베게티우스의 말이 옳다.
우리 규칙서에 이르기를, 수도원의 자리는 태생으로 정하지 않고 들어온 때와 삶으로 정한다 하였다.
늦게 온 자가 먼저 온 자의 앞에 설 수 있다 하였다. 나는 이 조항을 매일 아침 자리에 앉으며 지키거니와, 그것이 수도원 담 밖에서 지켜지는 것을 본 일은 없었다.
그런데 1422년과 1423년의 배치를 보면 왼편이 라인하르트요 오른편이 하르트만이다. 땅 한 뼘 없이 뜰에 들어온 자가 에티코넨의 백작보다 앞에 적혀 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자리를 바꾸지 않고 그러하다. 왕은 다섯 살이었으니 이 배치를 정한 것은 왕이 아니다.
누가 정하였든, 그 자는 사람을 문벌로 세우지 않았다.
한 가지 더 헤아릴 것이 있다. 1364년에 헤리베르트 일세가 고첼로를 위하여 싸운 것은 셈이 있는 일이었다.
친족에게 땅을 주면 그 친족이 충성을 바치고, 충성을 바치면 왕의 팔이 길어진다.
이는 왕들이 오래 써온 셈법이며 나는 그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다만 그 셈을 놓은 자들은 예순 해 뒤를 셈에 넣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사들인 것은 베른의 세금과 창 몇 자루였으나, 예순 해 뒤에 돌아온 것은 다섯 살 왕의 오른편에 선 백발의 노인이었다. 셈은 맞았으되 셈한 자들이 살아서 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편이 서로를 뒤집는 것을 보라.
상편의 하르트만 왕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겨놓고 죽었으며, 그가 죽자 이긴 전쟁이 없던 것이 되었다.
하편의 헤리베르트 삼세는 다섯 살이었으니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는데 이겼고, 그 왕위를 요구하던 자가 석 달 뒤에 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아비는 이기고 잃었고 아들의 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켰다. 그 사이에 있던 것은 사람이다.
필리베르트와 라인하르트와 하르트만과 에리히와 콘라트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 태생만으로 그 자리에 간 자는 하나도 없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왕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왕이 없었다면 이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왕이 다섯 살일 때에도 나라가 서 있었다면, 그 다섯 해 동안 나라를 세워둔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물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저 세 이름이었다고 적는다. 그리고 이름이 적히지 않은 몇천이 그 뒤에 있었음도 함께 적어둔다.
첫댓글 크킹에서 평민이라 해도 고유 인물창이 있다는 건, 이 우주에 기록될 만큼의 존재감이 있다는 이야기죠. 가끔 이름없는 유닛 1명이 맵을 돌아다니는 걸 보면 좀 웃기기도 하지만 ㅋㅋ
그시점 큰 승리의 일원이었다는 걸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아무래도 다 못적은게 아쉽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