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실마을유래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은 조선 중기 때 기묘사화와 관련된 정암 조광조 선생의 종조부 후손이 환란을
피해 이 곳으로 와서 정착한 한양조씨 집성촌입니다.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 면서 일제 강점기의 서슬 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조있는 선비들의 마을입니다.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였던 조지훈을 비롯하여 한국 인문학의 대가 조동일, 조동걸, 조동원 교수 등 우리나라
역사에 남을 수 많은 박사와 인재들이 배출된 마을입니다.
일월산의 해와 달의 정기가 남쪽으로 쏟아져 내려 오다가 장군천에 이르러 문필봉을 바라 보고는 잠시 갈 길을 멈춘
언덕위에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이라고 부릅니다.
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과 주실 입향조 호은공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 선생의 옥천종택, 조선 영조
49년 (1773)에 후진 양성을 위하여 건립한 월록서당 등 문화자원들이 남아 있으며, 지훈문학관과 지훈시공원, 시비,
마을숲 등 볼거리가 가득합니다.
*지조와 절개를 지켜 온 주실마을 호은종가 '삼불차' 이야기 '삼불차'는 재물. 문장.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실마을 '호은종가'가 주목 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집안의 독특한 가풍 때문입니다. 이른바 "삼불차" '재물.글.사람'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원칙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조선
후기 노론이 득세하던 시대, 사림으로 야당이었던 남인으로서 이곳 선조들은 "굶어 죽더라도 아쉬운 소리를 안 하는"
노선을 택합니다.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삶을 인간다운 삶으로 보았던 그 정신은 의병활동을 했던 분들이나 일제
강점기에 창씨 개명을 거부한 지훈 선생의 조부, '지조와 절개'를 중시하며 지조론펼쳤던 지훈 선생의 정신으로 이어
진다 하겠습 니다.
*주실의 노래 - 조동걸 작사. 조동건 작곡. #1 훈기찬 매봉산의 아침해 받아 영남의 계명천지 열어가던주실 영웅의 산발로 찾는 새 모습 긴수풀 거친 길을 다시 딱는다 (후렴) 아아 주실아 새 사조 받아서 새 역사 새 천지를 이루어 가자 #2 미풍은 독산에 산 들어 우니 천지에 묵은 낙엽 멀리 던저라 성스런 새 이상 삶의 표적 새 시대 역사 위에 횃불을 들자 #3 일월산 정기로서 기운찬 창조 웅혼한 설계도는 문화의 샘 20세기 후반기의 선봉에 서서 힘 차게 뛰어 가자 주실의 건아.
*주실소년회 노래 -조동걸 작사,학도가 차곡
일월산 솟아나던 문화의 샘물 흐르고 흐르다가 매계이로세 꽃피고 열매맺어 씨앗 거두니 빛나도다 그 이름 주실 소년회.
*은화청년회 노래 -조성을작사 작곡
매봉산 기개를 가슴에 품고 매계의 정기를 일신에 모아 유수한 일월산 속 굳게 일어나 화랑도를 자랑하는 은화청년회 (후렴) 주실 은화 청년회 만세 만만세.
이 집은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한 사람이 며, 대표적인 한국 현대시인이고 국문학자 였던 조지훈(1920~1968)
선생이 태어 나고 자란 곳이다. 그의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동탁(東卓)이며 지훈은 호이다. 선생은 1939년 문장지(文章誌)에 [고풍의상, 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등을 남겼다. 그는 시인이자 국문학자로서 유명한 것은 물론 지조(志操)있고, 풍류(風流)있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집은 주실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入鄕祖)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仁祖) 때 지은
것이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兩班家)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집으로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에는 선생의 태실(胎室)이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고 솟을대문이 있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 복구
되었다.
3. #옥천종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로서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189 번지에 위치하고있다. 이 집은 17세기말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漢陽) 조씨(趙氏)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고택(古宅)이다. 조덕린은 조선 숙종(肅宗) 17년(167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교리(校理)와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이 집의 구조는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글을 읽는 별당(別堂)인 초당(草堂)과 가묘(家廟)인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채는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ㅁ자'형 뜰집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이는데 다만 안방이 동쪽에 오고
사랑방이 서쪽으로 배치된 점만이 다르다. 집의 평면구성에 좌우가 바뀐 이 같은 형식은 18세기부터 안방과 부엌이
서쪽 으로 배치되는 평면구성으로 통일되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 살림집은 지붕을 박공(朴工)으로 처리하는 등 상당히
오래된 건축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초당은 전형적인 서당의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사당은 18세기말 건물로서 일반적인 형식에 속한다. 이 집은 경북 북부지방의 폐쇄적인 “ㅁ자형 뜰집”의 민가(民家)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4. #월록서당月麓書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로서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227번지에 위치하고있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英祖) 49년(1773)에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 의 손자인 월하(月下) 조운도
(趙運道, 1718~1796)가 발의하고 한양조씨(漢陽趙氏), 야성정씨(野城鄭氏), 함양오씨(咸陽吳氏)등이 주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이다. 이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가운데 많은 석학(碩學)과 명현(名賢)들이 배출되었다. 한양조씨는 원래 영양에 입향한 후 원당리(原糖里: 영양읍 하원동)에 살다가 호은공 조전(壺隱公 趙佺)선생이 주곡동으로 옮겨간 뒤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과 학문이 끊이지 않았으며 호은선생의
아들 정형(廷珩)선생은 1630년(인조8年) 에 진사하고, 증손 호봉(壺峯) 덕순(德純)선생과, 옥천(玉川) 덕린(德?)선생
의 형제가 숙종조에 대과하여 호봉은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고, 옥천은 승지로서 성학과 문장으로 당시
남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그러나 옥천 선생의 손자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선생과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선생이 서당이 없어 학자의
수업에 지장이 있음을 크게 개탄하고 월록서당을 영건하게 되었다. 월록서당은 영산서당을 서원으로 승격한 후 서당으로서 본군에서는 처음이며, 일월산록에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위치가 한적하고 집이 4칸 겹집으로 넓고, 앞으로는 장군천이 남쪽으로 흘러 서당 앞을 돌아서 낙동강의 원류를 이루
었으며,주봉인 일월산이 뻗어내려 만장광경(萬丈光景)을 이루었으니 그 전망(展望)이 화려하며 수석(水石)이 깨끗
하고 아름다워서 유생들이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앞으로는 독산과 멀리는 흥림산이 안대(眼帶)를 이루고 있다. 서당의 중간은 마루이고 양쪽이 방인데, 왼쪽은 존성재(存省齋),오른편은 극복재(克復齋)라는 편액이 불어 있으며,
대산 이상정 (大山 李象靖)의 서당기와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과 간옹 이헌경(艮翁 李獻慶)의 시판이 새겨져 있다. 이 서당은 월하와 만곡을 위시하여 향내 후진양성은 물론 동남문풍의 중심이 되었다. 서당의 현판은 숙종조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선생의 친필이다.
서당건물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렸으며 전면에는 4주문을
세워 서당으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른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켰는데,대청의 전면에는 각 칸마다 4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서당의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세웠으며 양측면에는 평난간을 둘렀다 가구는 오량가의 굴도리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이 정자는 조선 정조(正祖) 때의 유학자(儒學者) 조술도(趙述道, 1729~1803)가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하기
위하여 1790년 영양 원당리(元塘里) 선유굴(仙遊窟) 위에 건립한 강정(江亭)을 문하생들이 주곡동으로 옮겨 미운정
(媚雲亭)이라 하였고, 그 뒤 현 위치로 옮겨 만곡정사(晩谷精舍)라 하였다.
그는 한양(漢陽) 조씨(趙氏) 조희당(趙喜堂)의 아들로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곡(晩谷)이라 하였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쓴 분이다.
이 정자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평면이나 좌측 온돌방 뒤쪽의 물건을 넣어 두는 수장공간(收藏空間)과 폐쇄형
마루 등의 독특한 구조와 나무를 다듬는 방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6. #침천정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注谷里)에 있는 조언유(趙彦儒)의 정자이다. 만곡선생(晩谷先生) 술도(述道)의 제자로 벼슬을 진사(進士)까지 지냈다. 후에 자손들이 공을 기리며 만곡정사(晩谷精舍) 맞은편에 정자를 세웠다. 강물이 정자 아래로 쏟아져 내려와 물소리가 들린다 하여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강해은(姜海隱) 선생의 기문(記文)이 있다.
7. #학파정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注谷里)에 있는 정자이다. 처음에는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剡村里)에 있었고 학파(鶴坡) 조성복(趙星復)이 머물렀던 곳이다. 후에 조성복의 자택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지었으며 세 칸 물림기둥으로 세웠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가 후손들이 보수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8. #창주정사 *건축 배경 창주정사(滄洲精舍)는 1708년(숙종34)에 태백산 노고봉 기슭에 있는 봉화군 소천면 소라리에 창건했다가, 영양군
청기면 흥림산의 정족리로 이건했다고 한다. 그 후 화재를 만나 불에 탄 것을 재건하여 임산서당(霖山書堂)이라
하였으며, 1990년에 주실마을로 옮겼다.
*건축 특징 정사로 출입하는 사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창주정사라고 편액한 정사가 있다. 정사의 앞면을 제외하고 삼면은
자연석을 쌓아 올린 석축으로 담을 만들어 놓았고, 건물 앞쪽에만 기와를 얹은 토석담을 둘렀다. 앞쪽 담 가운데
작은 사주문을 세워 출입하게 하였다.
*건축 구성 창주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평면은 가운데 4칸 크기의 개방된 넓은 당을 두고,
좌우에 2칸통의 온돌방을 둔 형태이다. 건물의 정면 좌우에는 온돌방에 불을 때기 위한 아궁이가 있으며, 연기는
각 방 뒤의 굴뚝으로 배출되었다. 마루 안쪽의 키 큰 띠살문을 통해 양쪽의 온돌방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마루 배면에는 판문을 달아 놓았다.
*현판 창주정사(滄洲精舍) 정사노인(精舍老人)이 쓴 편액이다. 창주재(滄洲齋) 임산서당(霖山書堂) 창주정사기(滄洲精舍記) 중표(重表) 현손(玄孫) 김대진(金岱鎭)이 쓴 기문이다. 시판 1(詩板 1) 창주정사잡영(滄洲精舍雜詠) 병서(幷序) : 1730년(영조 6) 12월 갑진일 정사 노인(精舍老人)이 쓴 서문이다. 창주정사 이건에 즈음하여(滄洲精舍) 십대주손(十代胄孫) 대봉(大鳳)이 기록하였고, 외예손(外裔孫) 평산(平山) 신홍균(申洪均)이 썼으며, 국한문
혼용문으로 되어 있다.
*관련이야기 - 내력과 기능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1658~1737)은 학문과 도학을 깊이 쌓고 기른 분이나 그것을 세상에 펴지는 못하였다.
당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그 큰 문장으로 현달한 지위에 이를 것으로 기대하였고 벼슬길이 열리자 어떠한 일을 맡겨도
감당하지 못함이 없었다. 그러나 조정이 변해 어진 이들이 나아갈 길이 크게 좁아져 한가로운 외직에 임명되었다가
마침내 차질이 있게 되었다. 만년에 이르러 국왕의 은혜를 입었고 언로도 열려 주달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으나,
여러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입었을 뿐 아니라 충언으로 인해 도리어 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쪽과 북쪽으로
유배를 당하다가 마침내 물러나 은거하였다. 일찍이 안동 북쪽, 곧 봉화군 소천면에 있는 소라산(召羅山)이 기이하고도 그윽한 멋이 있어 임우산(霖雨山) 동쪽의
옛 터전으로부터 이곳에다 터를 잡았다. 그곳은 바로 창주(滄洲) 가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창주는 조덕린의 별호
(別號)이다. 그곳에 3칸 집을 짓고 좌우로 그림과 책을 갖추어 두고 거처하면서, 선왕의 덕을 노래하기도 하고 후생들
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 집의 이름을 창주정사라고 지었다. 이는 대개 임우산의 아름다운 자태와 그윽하고 한적한 멋
을 더한 것이었다. 유배라는 곤경에 처하면서도 그 마음만은 편안하게 가져 도를 창주에 의탁했던 것이다. …(중략)…
주변의 숲과 언덕들이 둘러 있고 그 가운데로 시냇물 한줄기가 굽이쳐서 연못을 만들었다. 여러 산봉우리들이 그림자
를 드리우고 가을밤에 달이 가슴에 와 닿아 흡사 창주의 정취가 있는 듯하니, 선생의 옛 현판을 가져다 후인들의 흠모
의 대상으로 삼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 집에 오르는 이라면 창주의 집을 우러러보고 저 아래 창주의 연못을 굽어보
면서 선생의 시냇물을 즐기셨던 그 정취를 상상하고 선생께서 물과 달을 보며 가졌던 회포나 남겨두신 시를 읊조리면
도를 함양하고 본원을 찾게 될 것이다.
*관련인물 - 조덕린(趙德鄰, 1658~1737)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이며, 별호는 창주(滄洲)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군(頵)의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출중하여 소년시절에 이미 풍부한 학식을 쌓아 글을 잘 짓고 사리
가 통달하여 세인들이 감탄하였다. 1677년(숙종3)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숙종1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1) 노론·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적거(謫居)끝에 1727년(영조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숙사(肅謝)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영조4)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피임,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하였으며,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經筵)
에 참석하였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에의 뜻을 버린 채 다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영조12)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영조1)의 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다.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벽서사건
(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옥천집(玉川集)』 18권이 있다.
9. #주실마을숲 #지훈시비 1972년 서울 남산에 '지훈선생시비'가 1982년에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마을쑤에 주실마을숲 속에 "지훈시비"가 건립되었다.
영양 주실마을 숲은 마을 주민들이 오랜 세월 지극 정성으로 가꾸어온 숲이다. 예부터 영양에서 봉화로 가기 위해서는 주실마을을 지나야 하는데 주실숲은 길목에 위치하여 마을을 살짝 가려주고
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원래 천연림이었으나 100여년 전에 숲의 서북쪽 밭을 구입하여 소나무를 보식, 현재 규모의 숲으로 확장되었다. 숲으로 들어서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으며 상충목, 중층목, 하층목이 빼곡히 들어선 매우 건강하고 아름다운 숲이다. 주실마을은 350여 년 전 한양조씨가 입향하면서 생성된 집성촌으로서 청록파 시인이자 승무(僧舞)의 시인 '조지훈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산 아래 고즈넉이 자리 잡은 고택(古宅)들이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마을에서는 주실숲을 '시인의 숲'으로 부르며 보존하고 있으며 숲을 훼손하지 않는 최소한의 공간에 조지훈 선생을
기리는 기념 시비와 무대를 마련하여 문학해설이나 백일장 등을 열고 있다. 영양읍에서 주실마을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주실숲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이곳 숲은 마을로 들어서는 문이자 마을을
가려주는 커튼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의 당산목인 250년생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낯선 방문자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던진다. 기존의 천연림이 있던 곳을 보완하여 나무를 심고 오늘날 나무들이 두 팔벌린 듯 뻗어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장관을
이룬다. 마을 앞 개울은 숲으로 이어져 주실숲의 싱그러움을 더하고 다양한 식물과 곤충들이 생태적인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 주실숲은 마을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종중이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아 관리하고 있으며, 개발 대신 숲을 보존
하고 자연 그대로의 숲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곳이다. <2008년도 올해 ‘아름다운 숲’에 경북 영양 주실마을숲이 선정됨> (사) #생명의숲<이사장 김후란> 국민운동에서 선정해서 발표하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