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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20100628 역사학과 정다혜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저자와 책에 대한 소개 Ⅲ. 본문 감상 1. 조선의 민중생활과 관습 2. 조선의 왕실 3. 조선의 사회제도 Ⅳ. 나오며 Ⅴ. 참고문헌
서지사항 제 목 -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저 자 -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역 자 - 조경철 출판사 - 예담 출판년도 - 2001 Ⅰ. 들어가며
19세기 말,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여행가, 선교사, 의사, 탐험가, 교육자 등 적지 않은 수의 낯선 서양인들이 찾아와 다양한 목적에서 조선 사회를 묘사하거나 분석하는 여행기를 저술하였다. 이들이 남긴 저서는 당시의 조선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국내에도 번역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혹은 서양의 문화적인 우월성을 주장하는 유럽우월주의적인 시각에서 조선에 방문하였고, 이러한 그들의 편향적인 시각은 그들의 저술에 그대로 반영되어있다. 이는 우리가 서양인이 남긴 기록을 볼 때 필히 주의를 기울이고 비판적인 자세로 살펴보아야 할 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러한 서양인의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이는 타자의 시선에서 우리를 객관적으로 되돌아보게 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서양인에게는 놀랍게 여겨지기도 하고, 같은 현상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기존의 편향적인 시각에서 탈피하여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조선의 문화를 비교사적으로 연구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저술의 사료적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에 필자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당시 조선을 어떻게 파악하였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며 책을 읽어나갔다. 특히 보통 서양인들의 저술은 그들이 직접 보고 경험한 민중들의 생활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생활사라는 이번 수업의 주제에 맞게 당시의 민중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며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Ⅱ. 저자와 책에 대한 소개
저자인 퍼시벌 로웰은 1855년 미국 보스턴의 명문 로웰 가家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환경 속에서 청교도적인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로웰은 미국 남북전쟁(1861~65)이 일어난 가운데 허약한 모친의 전지치료를 위해 파리로 함께 가서 9세부터 2년간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이때의 경험을 통해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고 외국어 습득 능력을 학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로웰은 1872년 하버드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졸업식에서 성운설(Nebular Hypothesis)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을 정도로 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졸업 후에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보헤미안처럼 지내다가 1833년 이후 극동의 신비에 매혹당하여 28세부터 38세까지(1883~1893) 총 네 차례 일본을 방문하며 동양학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일본에 머물고 있던 중, 1883년 고종에 의해 미국에 파견할 조선 보빙사를 수행하는 참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며 조선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고종이 그의 노고에 대한 답례로 그를 “조선 국왕의 빈객”(the guest of the King)으로 초청하며 4개월간 조선을 여행하였고, 당시의 경험을 남긴 것이 『조선 : 조용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다. 이후 이 책은 2001년에 조경철에 의해 국내에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타자의 시선에서 세밀하게 묘사하고 기록하였으며, 당시의 조선사회를 사진 및 삽화 자료와 함께 기록하고 있어 개화기 풍속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미국에 파견되었던 보빙사 일행과 함께한 미국 측 인사.
왼쪽부터 주한 미국 공사 루셔스 푸트, 전권대신 민영익, 참찬관 퍼시벌 로웰, 종사관 서광범, 부대신 홍영식, 미국 공사관 조지폴크)
Ⅲ. 본문 감상
책의 본문은 총 3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에서는 주로 지도에서 본 조선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조선의 사계, 부산항과 제물포의 모습 등이 소개되어 있다. 중반부 이후부터는 로웰이 서울로 상경하며 접한 장안풍경, 조선의 행정조직, 고종황제와의 알현 경험 등을 서술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저자가 직접 보고 경험한 민중생활과 조선의 풍속을 잘 녹여내고 있다. 필자는 로웰이 기록한 당시 조선의 모습을 큰 주제별로 3가지로 분류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1. 조선의 민중생활과 관습
로웰은 부산항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이후, 제물포를 거쳐 서울로 상경하였다.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냈는데, 그 속에서 자신이 직접 관찰한 모습과 여러 조선 사람들과의 일화를 통해서 조선 민중들의 생활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서울 거리의 밤낮의 풍경이나 조선의 가부장적인 풍습, 여성들의 지위, 결혼 양식과 상례 절차, 종교, 의복체계 등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며 소상히 다루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먼저 조선에 처음 온 외국인들이 대개 그러하듯 로웰 역시 조선의 장승에 대해서 놀라움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는 길의 모퉁이마다 놓여있는 사람의 형상 모습을 하고 있는 목각 초상을 조선에서는 ‘장승’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어찌 보면 군자의 얼굴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지독한 흉악범의 초상 같게도 느껴진다고 하였다. 그는 장승에 대해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설명을 자신에게 해주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어떤 이는 그 장승이 유명한 명장의 초상으로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 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와 정 반대로 장승은 극악함이 최고에 달했던 흉악범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네거리에 초상을 걸은 것이라는 설명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처럼 자신이 접한 유래에 따라 장승이 흉측하게 생긴 목상으로 보이다가도 일순 경탄스러운 대상으로 보이기도 했다며, 자신의 신기한 경험을 전하고 있다.
다음으로 로웰은 조선 민중들의 생활을 관찰하며 가부장적인 사회모습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는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집단에서 아버지의 위치는 통치자와 다름없이 높으며, 이러한 가부장제가 서양에서는 차츰 사라졌지만 조선을 비롯한 극동에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극동에 아직까지 가부장제가 남아있는 원인으로 특히 유교를 중요하게 꼽았는데,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도덕적 원리는 효孝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조선인들은 조상이 죽은 뒤에도 생전에 선조에게 바치던 존경의 마음으로 숭배를 계속하며, 조상들이 후손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아버지에 대해 가족들이 자신을 노예화하면 할수록 남들에게 더욱 높이 평가받는다며, ‘서구 사회는 전 세대로부터 받은 친절과 보살핌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일반적이나 동양인들은 봉사와 헌신을 윗대에 먼저 지불한 다음 그 대가를 자식에게서 기대한다’고 표현하였다.
그는 가부장제 하에서의 재산 분배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는데, 일반적으로 재산의 소유권은 가장에게 있으며 아버지가 생존하는 한 어떤 이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는 장남이 실권자가 되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3분의 2가 장남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3분의 1이 다른 아들들의 몫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조선의 재산 분배 과정을 설명하면서 서구인의 편향적인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조선 민중들의 생활을 이해하였다. 즉 로웰은 모친과 다른 가난한 형제들을 보살피고 조상을 모시는 일을 담당하는 장남의 의무를 생각할 때, 이러한 방식의 재산분배는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덧붙여 이름을 정하는 문제를 통해 조선에 남아있는 가부장적 씨족 사회의 특징을 잘 알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즉 조선인들은 이름 석자 중 첫 글자는 성姓으로 같은 씨족의 모든 구성원과 공유하며, 나머지 두 글자 중 하나는 동일한 항렬을 나타내는 표시로 모두 같은 글자를 쓴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항렬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며, 조선인들은 서로 멀리 살아서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친족관계일지라도 이름을 통해 각자가 한 조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정도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항렬은 입양 문제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친족 간에 입양이 이루어질 때 입양하려고 하는 사람은 적어도 항렬이 자신보다 한 단계 낮은 사람에 한해서 집안에 들일 수 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로웰은 조선에 온 서양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다고 볼 수 있는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는 조선에서 여성의 지위는 낮다고도 볼 수 없는, 아예 지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고 비판하였다. 물질적, 육체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정신적, 도덕적,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은 거의 무無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는 출생부터 시작되는 여성의 생애를 살펴보며, 여성들이 일곱 살 까지는 성에 대한 구별 없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으나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 외부세계와 단절된다고 보았다. 이는 유교의 남녀칠세부동석이 조선에 적용된 모습에 대해 로웰이 느낀 바를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곱 살 이후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미혼인 여성들은 아버지와 형제 외에는 어떤 남자도 만날 수 없으며, 출가 후에도 남편과 시댁 식구들만이 여성들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경제적 사회적 차이에 따라 여성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는데, 부유하기 때문에 ‘가마를 타고 다녀서 전혀 모습을 볼 수 없는 여성’, 그보다 덜 부유하여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걸어가는 옷 뭉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여성’, ‘생계를 위해 일하느라고 남의 눈에 노출된 여성’으로 구분하였다. 그는 조선의 가부장적인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되지 못하고, 그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로웰은 이처럼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조선의 혼인 제도에 대해서도 의문을 드러냈다. 그는 조선의 결혼 의식은 서양인이 볼 때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라고 보았다. 조선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자손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며, 부를 얻거나 유력한 인척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조선에서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혼인을 해야만 ‘어른’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으며 이러한 일반적인 지위의 성취를 위해 혼인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혼인과정에서 모든 일의 절차가 서한을 통해 중매로써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드러내었다. 조선의 혼인 중매에서는 모든 일이 서한을 통해 비밀리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중개인이 쌍방을 속이는 일 또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로웰은 조선 내에서 자신이 직접 듣고 경험한 것을 통해 민중들의 생활상을 상세히 묘사하고 기록하였다. 그는 서양인으로서 자신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조선의 생활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묘사하였으며, 그 속에서 조선민중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호기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특히 저자는 자신이 머무는 곳에 골동품 행상인이 방문할 때마다 번번이 복권추첨이라도 하는 듯한 흥분을 느꼈다며 재미있는 경험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행상인이 깊숙한 소매 속에서 여러 가지 특이한 물건을 꺼내놓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며, 어찌해서 책, 그림, 부채, 베갯모 등이 줄줄이 소매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지 신기해하였다.
또한 조선의 역사와 사회모습을 깊숙이 파고들지 않으면 잘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도 통찰력 있게 파악하였는데, 양반들이 평민의 땅을 빼앗는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묘지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리 평민이 소유하고 경작하고 있던 땅이라고 할지라도, 관료계급이 그 땅에 가족 묘지를 만들거나 이장을 하면 그 땅은 양반의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제도가 양반들이 권리를 남용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일단 관리들의 소유가 된 땅은 그들이 어떤 용도로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토지를 차지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남용되고 있다고 보았다.
2. 조선의 왕실
로웰은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한 뒤에, 고종의 배려를 통해 직접 궁궐에서 고종을 알현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직접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이후 순종으로 즉위하는 왕세자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고종의 첫인상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졌다고 묘사하며, 고종의 웃음이 타인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게다가 로웰은 최초로 왕가의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었는데, 1884년 3월 10일 왕과 세자, 3월 13일에는 어진을 촬영하였다. 그리고 당시 로웰이 촬영한 고종의 사진은 왕실 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자신의 책에 함께 수록하여 의미는 자료가 되고 있다. 다음은 당시 로웰이 직접 촬영한 고종의 어진이다
(고종황제의 어진)
로웰은 고종과의 알현 이후 이어서 왕세자와도 만날 수 있었는데, 왕세자는 고종과 달리 위엄은 있으나 무력해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은 왕자로서 격리된 궁중 생활과 강요된 위엄에 지쳐있는 듯 보였고, 시종일관 의무적인 얼굴만을 보였다고 했다. 또한 안색은 핏기 없이 보였으며, 왕세자의 눈은 동양인 중에서도 가느다란 편이어서 졸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는 두 명의 키 큰 대신이 뒤에 서서 허리를 굽혀가며 왕세자에게 해야 할 말을 일러주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이러한 왕세자의 모습이 흡사 권위와 무력無力이 혼합돼 있는 상태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는 아마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순종의 모습이 로웰에게는 궁중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무력한 왕세자의 모습으로 느껴진 듯하다.
또한 이외에도 로웰은 궁중을 방문할 때, 관리들의 궁중 예복차림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 속에서 기묘한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앞에서 보면 양옆으로 날개를 단 듯한 관모의 형태는 임금의 명령을 언제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음을 상징하는 표시라는 설명을 들었다며 신기해하였다. 또한 궁중예복의 신발은 밖에서의 목이 짧은 신발에 비해 목이 긴 구두의 형태였는데, 이에 대해서 자신 나름의 추측을 한 부분도 재미있었다. 그는 조선에는 포장된 길이 없어 어딜 가나 진흙투성이인데, 그런 진흙투성이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목이 긴 구두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즉 궁 바깥에서는 모든 관리가 가마를 타기 때문에 보통의 신발을 신어도 상관이 없지만, 궁중에서는 관리라 할지라도 걸어 다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이 긴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특히 그는 왕은 긴 구두 대신 보통 신을 신고 있었는데, 그것은 궁내를 직접 걸어 다닐 필요가 없는 왕의 지위 상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모습은 재미있게 느껴졌다.
3. 조선의 사회제도
다음으로 로웰은 이 책에서 조선의 야간통행금지법과 형벌제도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는 그가 직접 밤에 이동하다가 순라꾼에게 제재를 받을 뻔한 경험을 하였고, 또 아침 일찍 목이 잘린 시신들을 마주하고서 깊은 충격과 인상을 받은 경험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그는 조선의 밤 풍경에 대해 조선은 유럽과 달리 밤이 되면 지상에는 어떠한 불빛도, 움직임도, 소리도 없는 죽음과도 같은 적막함에 휩싸인다고 묘사했다. 그는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철창으로 덧씌워진 성문이 굳게 닫히고 이때부터 새벽까지 그 누구도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밤늦게 인적이 끊긴 거리를 돌아다니면 포도청에 끌려가 벌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에서 밤중에 성내를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몇몇의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주인의 명령을 받은 하인들이고, 또 하나는 맹인들이라고 하였다. 그는 맹인들에게는 저녁때부터 새벽녘까지 통행이 연장되며, 이를 이용해 사람들이 맹인 행세를 하며 밤에 돌아다니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맹인 흉내를 내며 돌아다니다가, 순라꾼의 기습적인 부름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눈을 부릅떠서 잡혀가기도 한다며 당시 상황을 재미있게 묘사하였다.
다음으로 로웰은 자신이 어느 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서다가 끔찍한 현장을 목격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목이 떨어져 나간 시체 서른 여 구가 궁중이 보는 가운데 신작로에 널려 있었으며, 몸뚱이에서 잘려 나간 시체의 머리들이 진흙투성이인 길 한편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고 묘사하였다. 그는 그 얼굴들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의 공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눈을 부릅떠 허공을 응시하거나 산 사람을 노려보기도 하였으며, 눈을 감은 쪽은 마치 죽기 전의 온갖 고뇌를 여전히 안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로웰은 이렇게 목이 잘려 죽은 사람들이 노상강도들이나 폭동을 일으킨 폭도들이 아니라 단지 10달러어치 가량의 물건을 훔친 사람들 중에서 재수 없게 현장에서 붙잡힌 사람들이었으며, 이러한 형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정규적으로 집행되는 법률이었다는 점에 놀라워한다. 그는 이러한 형벌이 법적인 면에서 유럽인들에게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될 수는 있으나, 조선에서는 적어도 엄중하게 형벌을 가하는 것이 범죄에 대한 확실한 예방이 된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목이 잘린 죄수들이 관리들에 의해 사흘 동안이나 길에 방치되며,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공포심과 경각심을 심어주는 모습에 대해서도 놀랍게 생각하였다.
Ⅳ. 나오며
지금까지 로웰이 약 4개월간 조선에 있었던 경험을 자세히 기록한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에 대해 중요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다. 이 책은 내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처럼 당시 민중들의 생활이나 사회제도에 대한 묘사가 돋보이기 때문에 역사를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그동안 일반적인 책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보았을 때는 단지 사실관계만을 파악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흥미가 떨어지는 점이 있었는데, 책을 통해서 생생한 묘사를 접하고 또 사진 및 삽화와 함께 보니 보다 흥미로웠다. 또한 무엇보다 서양인이라는 타자의 시각에서 당시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았던 것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앞서 말했듯, 타자의 시선에서 보니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다른 문화에서는 신기하게 느껴질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같은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의 저자 로웰은 내가 느끼기에 비교적 제국주의적 시각이나 유럽우월주의적인 시각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고, 문화 상대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조선 사회를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욱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웰 역시 서양인으로서 조선을 바라볼 때,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이라고 표현한다거나 조선의 언어에 성(性), 수(數), 격(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개성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 부분 등은 한계가 분명히 존재함을 알려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역사서술이나 사료를 접하더라도 객관적이 자세를 가지고 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역사적 독해를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서양인의 저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기술된 저서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서양인의 저술이라고 해서 그 가치가 없다거나 혹은 시각이 편향되었을 것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비판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앞으로도 로웰의 저서뿐만 아니라 국내에 번역된 많은 저서들을 읽고, 나름대로 역사적 독해를 해나가고 싶다.
Ⅴ. 참고문헌
퍼시벌 로웰,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조경철 역, 예담, 2001.
이상각, 『꼬레아러시』, 효형출판, 2010.
김종갑, 「초월적 기표로서 “조용한 아침” : 퍼시발 로웰의 『조선-조용한 아침의 나라』」, 『19세기 영어권 문학』, Vol.14 No.1, 2010.
우남숙, 「퍼시벌로웰과 한국」,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35 No.2, 2014.
* 각주는 첨부된 한글파일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