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과 새것의 공존… 걷고 보고 먹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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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한옥이 모여 있는 가회동 골목. |
서울시 종로구 북촌한옥마을. 도심 속 역사기행은 계동 현대사옥 앞에서 시작했다.
처음 만난 유적지는 현대 사옥 정문 앞에 세워진 관천대. 경주 첨성대와 꼭 닮은 구조물이다. 조선 시대 기상청이었던 관상감에서 사용했던 천문관측기구다.
첨성대가 바닥에서부터 돌을 쌓아 올렸다면 관천대는 맨땅에 조성한 단 위에 관측기구를 만들었다.
현대 사옥 왼쪽으로 50여m 올라가면 몽양 여운형의 집터가 나온다. 좌우 합작 노선을 걷다 극우파 청년의 흉탄에 쓰러진 해방 정국의 거물이었다.
그가 살았던 보금자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집터엔 칼국수 집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 '정치는 허업'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오른쪽으로는 창덕궁 돌담길이 보인다. 길가에는 한국전쟁 직후 모더니즘 시인으로 활약했던 박인환이 하숙했던 집이 있다.
전후 폐허 속에서 통속을 거부하며 서구 취향의 도시 감각으로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던 영원한 댄디보이.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시인이 노래한 대로 박인환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문학적 발자취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자리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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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고 앞 욘사마 거리. |
창덕궁 돌담길은 궁중 음식연구원, 북촌 전통공예 체험관 등 공방 골목으로 이어진다.
계동 골목의 끝자락에는 중앙고등학교가 보인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곳이다. 유학생 대표 송계백이 숙직 중이던 교사 현상윤과 함께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 주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 무대가 중앙고등학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여성 관광객이 몰려드는 '욘사마 거리'가 되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배어나는 마을 북촌 마을의 핵심은 역시 전통 한옥이 모여 있는 가회동 골목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살던 모습이 보존된 곳이다. '여기는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조용히 관람해 주십시오.'골목 입구에 세워진 간판처럼 자연스럽게 사람 사는 냄새가 배어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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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카페거리 입구. |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카페촌으로 유명한 팔판동이 나온다. 조선 시대에 판서를 8명이나 탄생시킨 사실을 자랑하는 차원에서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요즘은 전혀 딴판이다.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와인바가 줄지어 있다. 권세를 자랑하는 팔판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촌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카페 거리 아래편에는 북촌마을이 자랑하는 정독도서관이 있다. 과거 명문고의 상징이었던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도서관이다. 그 이전에는 조선 말기 개화파의 거두였던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이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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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도서관 입구. |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일본과 미국으로 달아난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을 몰수한 조정이 그 터에 지은 학교가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경기고등학교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서재필의 손자(김옥균은 후손이 없음)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사유 재산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한 끝에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그 결과 경기고등학교는 1974년 강남(현 삼성동)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고 서재필의 손자가 그 땅을 도서관 용지로 희사한 것이 오늘날 정독도서관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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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거리. |
정독도서관 정문 맞은편에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설립한 선재미술관이 있다. 1991년 미국 유학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장남 선재 씨를 추모해서 만든 미술관이다. 사업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가던 시절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들의 시신 앞에서 세상이 덧없다며 오열했던 김 전 회장.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고 했던가. 그로부터 10여 년 이 지난 후엔 김 전 회장의 분신과도 같았던 대우그룹마저 해체되고 선재미술관만 남았다.
■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예술가들의 쉼터 선재미술관 앞에서 1분 거리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살던 집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두 차례에 걸쳐 대선을 치렀던 인물이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강조하며 선거판에 나선 박 전 후보가 명문가 출신인 윤 전 후보를 '서민의 아픔을 모르는 귀족'으로 몰아붙이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던 99칸짜리 한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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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살아 숨쉬는 필방. |
윤보선 고택에서 한 블록을 지나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나온다.
박정희·육영수 전 대통령 부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옛 국군통합병원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쿠데타를 지휘했던 국군보안사령부건물을 헐어 내고 2013년에 들어선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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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전 대통령 고택. |
피비린내 나는 정변의 흔적을 포크레인으로 밀어낸 자리에 세워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뜬구름처럼 흘러간 과거사를 청산하는 상징물로 보인다. 신세대 감각과 전통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예술가들의 쉼터가 마련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함께.
글·사진 =정순형 선임기자 junsh@busan.com
여행 팁
■교통편
KTX를 타고 서울역에서 도시철도 1호선으로 갈아타서 종각역에서 내리면 인사동이 나온다. 인사동 거리를 구경하며 북한산 쪽으로 700m가량 걸으면 북촌마을이 시작된다. 도시철도 1호선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탄 다음 안국역에 내리면 북촌마을이 시작되는 현대사옥이 나온다.
■잠잘 곳 북촌마을에는 한옥을 개조한 게스트 하우스가 많다. 그중에서 큰 대문집은 한옥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한복을 입어보는 이벤트를 제공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사진을 해 두면 좋은 추억거리가 될 수 있다. 이튿날 아침에는 식사를 제공한다. 식단은 비빔밥과 닭죽, 야채죽 등 수시로 메뉴가 바뀐다. 방은 5개가 있다. 1인실 10만 원, 2인실 20만 원.. 02-762-6981.
■맛집 북촌마을을 찾아가면 반드시 들러야 할 맛집이 있다. 삼청동 수제비집이다. 항아리에 담아내는 수제비로 유명한 집이다. 숙성 안 된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척척 뜯어 만든 수제비가 소박하다. 멸치와 조개를 우려서 만든 육수에 조개, 감자, 호박, 당근, 부추를 넣어 담백한 맛을 자아낸다. 여기에 시원한 동동주 한 잔을 곁들이면 추억여행을 떠난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1인분 8천 원. 동동주는 반 되에 3천 원. 02-735-2965
정순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