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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최 화 웅
내 고향, 명지(鳴旨)는 ‘낙동강이 남해를 만나 낳은 옥동자’다. 낙동강 하구 삼각주, 명지도(鳴旨島)는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 전부터 낙동강이 꾸준히 날라다 쌓은 퇴적층(堆積層)이 융기(隆起)하면서 해수면(海水面) 위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땅이다. 1622년 이준은『임술 낙강 범월록』서문에서 ‘낙수(洛水)는 태백의 황지에서 나와 수 백리를 흘러 상락(上洛)의 동쪽에 와서야 그 물길이 점점 커지는데 낙동강이란 이름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반도에 낙수는 없다. 낙수는 중국 해남성에서 황하로 합류하는 물을 말한다. 그리고 ‘상락’이란 상주의 옛 이름으로 신라 진흥왕이 제정한 것이고 낙동강(洛東江)은 상주로 하여 생긴 이름이다. 낙동이란 가락국의 땅이었던 '상주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지금 쓰이는 경상도라는 지명은 경주와 상주에서 첫 글자를 따왔다. 그렇다면 신라의 땅에서는 낙동을 낙서라고 불렀을까? 1861년 고산자 김정호의『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대저도, 명호도가 쓰인 이후 조선시대 역사서에서는 한동안 명지(鳴旨)와 명호(鳴湖)가 혼용되었다. 명지는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함백산(咸白山, 1573m)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천 300리 먼 길을 쉼 없이 달려와 남해로 떨어지는 곳이다. 낙동강(洛東江) 하구의 삼각주는 예로부터 기름진 퇴적토가 갈대뿌리에 걸리고 얽혀 모래등인 사주(沙柱)가 나타난 뒤 몇 차례 이어지며 자라난 생명의 땅이다. 이곳에는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질고 부지런한 원주민들이 어패류를 잡고 개펄을 막아 염전(鹽田)을 일구었다. 명지도에는 사주가 동서로 길게 늘어선 열촌(列村)을 이룬 곳이 ‘사취등(砂嘴登)’, ‘경등(鯨登)‘, ’전등(田登)’이라는 마을 이름을 남겼다. 명지의 지명을 ‘울 鳴‘자에 ’뜻 旨‘자로 쓰듯 바다와 강이 만나 샛바람이 부는 날이면 해조음이 온몸으로 흐느껴 우는 것 같다.
그 이야기는 1530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김해 산천 편에서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면 섬의 어딘가에서 천둥소리가 섬 전체에 울려 퍼졌다.‘고 전한 데서 유래했다. 1482년 자반(子胖) 노사신(盧思愼)이 쓰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등이 교정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낙동강을 ‘낙수(洛水)’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되었다가 이중환이 쓴 인문지리지『택리지(擇里志)』에서 비로소 낙동강(洛東江)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수영강이 신라와 장산국(거칠산국)의 국경이었으나 신라가 장산국을 흡수한 뒤로는 낙동강이 신라와 가야의 국경이 되었다. 낙동강하구는 가야와 신라의 경계였고 남해가 왜(倭)와 국경을 이룬다. 부산의 원주민은 대부분 북방에서 내려와 정착한 가야(伽倻)인과 신라(新羅)인의 후예다. 그 옛날 부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가야문화권과 신라문화권을 형성한 역동적인 지역이다. 귀 기울이면 스치는 강바람에 화랑도의 발자국 소리와 가야인의 함성이 어렴풋이 들리는 듯하다. “보아라 신라(新羅) 가야(伽倻) 빛나는 역사 / 흐르듯 담겨있는 기나긴 강물 / 잊지 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 이 강물 내 혈관에 피가 된 줄을 / 오 낙동강 오 낙동강 /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전통의 낙동강.” 이은상 작시 윤이상 작곡의 ‘낙동강’을 노래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남다르다. 온몸에 깊은 전율을 느낀다. 낙동강을 두고 아홉 굽이로 돌고 돌아 흐르는 긴 강이라고 구곡장류(九曲腸流)라 표현했다. 내 고향 명지의 모습은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것과 같다. 손끝은 눈을 감고도 코와 눈, 그리고 입을 만질 수 있다. 명지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조 역사서에 자주 등장할 만큼 일찍이 염전(鹽田)을 일구어 낙동강 수운(水運)을 따라 영남일원에 소금을 공급했다.
조선조왕조실록에 따르면 명지에는 모두 74결(結)의 염전이 있어 물물교환이 성했다고 전한다. 겨우내 구운 소금을 내륙으로 내다풀고 가을에 나락으로 거둬들였다. 나락을 구포에 푸느냐 하단에 푸느냐에 따라 정미소의 흥망과 부산항의 객주들이 몰렸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나라 재정이 어려울 때는 공염장(公鹽場)으로 전환하여 나라의 재정을 도왔다. 명지에서는 소금이 쌓은 부(富)를 바탕으로 구한말(舊韓末)부터 신교육과 개화사상(開化思想)이 들불처럼 일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침략에 짓밟히고『러일 전쟁』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제가 진해에 요새사령부를 설치하고 가덕도에 해안포를 비롯해 명지 들녘에 비행장 과 해안방공포대를 두어 ‘군부’라 칭하는 마을이 들어서기도 했다. 공항건설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열강의 침략 속에서도 주민들의 결기는 신교육기관으로 사립 동명(東鳴)학교를 세웠다. 그런 명지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첫발을 디딘 사람들은 가족을 보호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따뜻한 기후와 좋은 물, 그리고 기름진 땅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고장이나 장소의 이름 또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명지는 남해와 맞닿아 형성된 모래등이 오랜 기간 염도를 씻어내는 동안 촌락을 형성하고 해태(海苔)와 염전(鹽田)을 일구어 생존의 터를 마련해 나갔으리라.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인 15세기 초의 일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김해도호부 산천 편에 명지라는 지명이 소개되고,『난중일기(亂中日記)』에 따르면 1592년 4월 15일의 다대포해전과 같은 해 9월 부산포해전의 격전지로 1592년 4월 29일 경상수사 원균이 이순신 장군에게 보낸 원군요청서에 “부산, 김해강(서낙동강), 구포강(낙동강), 명지도에 적선 500여 척이 상륙해서 고을, 포구, 병영, 수영이 함락되었다.”고 썼다.
1731년 간행된『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는 “지선어민들은 고기를 잡고, 해태를 양식하며, 소금밭을 일구어 살았다.”고 기록했다. 명지 공염장을 둘러싼 관리들의 비리와 부패가 극심해지자 조정에서 암행어사 박문수를 파견했다는 옛이야기가 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명지의 염전은 1959년 사라호 태풍이 거의 휩쓸어버렸다. 씨름과 소싸움으로 이름난 모래섬, 명지에는 조그만 두 개의 돌비석이 있다. 그 중 하나는 1824년 순종 24년에 세워진 경상감사 김상휴(金相休)의 송덕비고 다른 하나는 1841년 현종 7년 경상감사 홍재철(洪在喆)의 송덕비다. 경상감사 김상휴는 염민(鹽民)을 위해 수군의 횡포를 막아준 공적이고 경상감사 홍재철은 염전의 땔감과 인력난을 겪던 염민을 돕기 위해 조정의 지원을 받은 공적을 기린 것이다. 나의 초등학교 동기 중에도 강둑 밖의 하신부락에서 우일(이계영), 익준(엄명섭), 종섭(최중해) 세 친구의 어른들께서 염전을 경영했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낙동강의 홍수예방과 논농사를 위한 수리대책으로 당시 서낙동강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본류를 대동수문과 녹산수문으로 막고 대동으로부터 대저를 거쳐 녹산에 이르는 저지대에 강둑을 쌓은 1930년대의『낙동강일천식(洛東江一川式)공사』이전에는 해마다 대홍수로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명지는 개화사상의 발흥지로 19세기 말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개화기에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한국학보 등이 발굴한 83편의 개화가사가 있는데 낙동강 하구 명지에서 15편이 추가 발굴되어 1978년『문학사상』1월호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명지는 신교육과 개화사상이 일었던 곳으로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인 1908년 당시 개화기의 선각자 추호(秋湖) 선생과 양재일 씨 등을 중심으로 명지초등학교의 전신인 2년제 사립 동명학교를 세워 개화의 물결 속에 신학문, 신사상을 받아들였음이 추호문집(秋湖文集)에서 전하고 있다. 지명과 학교이름은 지층이 쌓이듯 그 땅의 유래와 역사와 함께 해왔다.
추호문집에 수록된 동명학교 개교가는 “맹호같이 날랜 용기 / 해외군구(群狗) 모라가세 / 독립세를 깊이 알고 / 자유권을 굳게 잡아 / 천지장구 東西界에 / 상등인물 되어보세."라는 가사에서 보듯이 당시 영남지역의 어느 곳보다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을 외친 개화정신이 드높았다. 개화사상과 함께 불붙기 시작한 항일투쟁은 동명학교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부 문서기록보관소에 소장된 일제 강점기 부산지방법원의 공판기록에 따르면 일제가 1919년 4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명지 진목리와 영강리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사건을 주동한 동명학교 교사 이진석(李鎭奭)을 비롯한 7명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고향이 그리운 날 다대포 아미산전망대에 올라 질펀한 낙동강하구를 내려다본다. 새롭게 형성되는 모래톱과 아름답기 그지없는 명지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지고 그 위를 노을 지는 석양의 아름다움과 윤슬이 눈에 벅차다. 명지는 바람이 많고 갈대의 자생지로도 유명하다. 강바람과 해풍에 샛바람이 잦고 여름이면 대한해협을 거슬러오는 동남풍이 싱그럽고 겨울이면 북서계절풍이 차분한 올리브 그린색의 마른 갈대를 사정없이 누인다. 강둑을 걸으며 맞는 강바람은 군자의 덕(德)처럼 느껴지고 갈대와 들풀의 덕은 꺾어지고 눕는데 있으리라. 나는 어린 날 게 잡던 갈밭에 들어가 갈숲 사이로 열린 하구를 내다본다. 1987년 하구언 설치로 물길이 막히면서 새로운 모래톱의 형성이 옛날 같이 않아 백합조개가 귀하다. 오직 투기를 부채질하는 개발 사업만이 온 들녘에 요란할 뿐이다.
모두 2조 1,456억 원의 예산이 드는 명지 국제신도시 개발 사업은 193만여 평에 24만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사업으로 해운대 신시가지의 2배, 센텀 시티의 5배 규모에 달한다. 부산에서 최초로 건설되는 명지 국제 신도시는 신항만의 배후지역으로 쾌적한 거주 환경을 위해 낙동강 하구의 자연특성을 살린 생태공원을 조성하여 동북아시아의 물류 중심 지 이자 부산신항의 배후지로 세계인이 함께 살 수 있는 도시를 건설하기 위함이다. 더불어 부산시는 올해부터 낙동강과 서낙동강 사이의 삼각주(델타) 지역을 ‘에너지 자립섬’으로 ‘탄소 제로 지역’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한 햇빛 발전 설비와 빗물 순환 시스템을 갖추어 ‘에너지 제로 건축물’을 보급하는 등 클린에너지 원년으로 선포했다. 또 노면 전차인 트램(tram)을 도입하고 전기, 수소차 충전 인프라를 확충하여 미세 먼지가 발생하지 않는 청정지역을 조성하고 부산시의 도시철도망은 하단-녹산선의 건설로 하단역에서 명지국제신도시를 거쳐 녹산까지 14.4km가 이어지고 명지오션시티를 기점으로 명지국제신도시, 김해신공항을 잇는 21.3km의 노선을 확정되었다. 해마다 봄이면 물안개 커튼이 앞을 가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파밭과 철새의 정겨운 지저귐이 뒤덮고 샛강을 미끄러지던 돛단배의 목가적인 풍경이 기억으로 남았다. 한 여름이면 바다로 뛰어드는 개구쟁이들의 다이빙대가 되었던 청년배의 위용이 새삼 그립다. 새벽시장을 오가던 소달구지의 숨 가쁜 워낭소리마저 비행기 이착륙 소음이 삼켜버린 지 오래다.
내 삶의 작은 섬, 명지의 바다울음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고향을 이끈다. 갈대와 짚으로 지붕을 이은 정다운 고향집은 다 헐리고 낯선 아파트 숲이 앞을 가로막는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노래했던 정지용의 시 ‘고향'이 머리를 스친다. 순간 나는 갑자기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 되어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읊게 된다. 한 세기가 넘는 역사를 가진 명지초등학교가 하루아침에 이전하고 그 자리에 다른 시설이 들어선단다. 학교에 남은 상징 하나쯤은 함께 옮겨 동문과 지역민들의 꾸준한 사랑과 기억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해 이제 칠순 중반을 넘긴 동기들이 모일 때 마다 안타까워했다. 결국 부산시교육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짜증 섞인 예산타령뿐이었다. 작은 표지석 하나 세우거나 텅 빈 교정을 지키는 늙은 향나무 한 그루라도 옮겨 심을 수 있는 교육적 배려와 관심이 못내 아쉽다. 이웃나라에서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산기슭 분교를 헐면 곧은길을 낼 수 있는데도 출신 동문들과 지역민들에게 의견을 묻고 끝내 학생 몇 안 되는 작은 분교를 그대로 보존한 채 길이 돌아갔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네 교육행정과 지역개발은 지방자치제를 확보하고도 왜 이 같은 수준과 품격을 지키지 못할까! 안타까운 일이다. 내 고향 모래섬, 명지는 잊혀 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예서 자란 사나이들의 영혼 속에 영원히 살아남으리라. 아, 그리워라! 내 고향 명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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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애향 명지를 사랑하시는 국장님의 그리움을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리움으로 살아 있는 대상이죠.
명지의 소중한 산 역사이네요.... 자주 갔었는데...
'낙동강과 명지'의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를 꿰고 있답니다.
명지의 향토사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매우 중요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