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지와는 달리 끌려가는 자신을 본다. 늦게 가서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타면 다른 일들이 마중물로 나온다. 내가 그 차를 탔었면 무슨 일로 꼬였을걸로 생각한다. 내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따지지 말고 순종하며 살아간다.
아침이면 또 하루가 시작한다. 먼동이 트고 주위가 밝아지면 또 하루가 턱을 고이고 앉았다. 모든 일은 길에서 태어나고 소멸한다. 오늘도 가벼운 차림으로 밖을 나선다. 세상은 매일매일 변하지만, 꼭 가야 하는 곳은 따로 없다. 새벽에 일하러 가는 사람 틈에 같이 어제에 이어 또 그 자리에서 방향을 턴다. 숫자만 다르지 별반 차이가 없다. 달음산 쪽으로 발걸음을 해본다. 오래전에 좌천역에서 올랐던 길을 생각한다. 그래 그 길이야. 어물거리는 뒷 모습을 버리고 앞을 보고 간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지만 멀리 가본지는 가물가물하다. 좋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하루도 먼 인생길과 같이 반복의 연속이다. 우려했던 일이 잘 풀리고 예측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행복은 순간이고 그 반대는 오래간다. 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는가. 아집과 욕망이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종래에는 모든 것을 덮고 가야한다.
6개월마다 서울 가는 기차를 탄다. 늦여름의 푸름이 차창으로 획획 지나간다. 지나간 겨울회색의 외로움이 이제 풍성한 여인처럼 반듯이 앉아있다. 덜컹거리면서 천천히 장면이 바뀌는 옛날 비디오보다 고속으로 지나가는 영화도 좋다. 어제는 가고 오늘은 내일로 치닫고 있다.
다음 날 아침, 거미줄 같은 서울 거리를 버스로 타고 창밖을 본다. 간 적이 없는 길은 그리 감흥이 없다. 한번 올라간 적이 있던 대모산 입구에서 버스를 내린다. 서울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서지구에는 마지막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내일이면 오늘은 소멸한다. 없어져도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른다. 시간은 흘러가고 강물 또한 흘러간다. 어디가면 깊은 강물을 볼 수 있을까. 낙동강 하굿둑말고 그 위쪽으로 가보자. 안개가 있고 물새가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동해선 하행선을 타고 부전역으로 간다. 낙동강으로 갈 참인데 기차는 떠났고 출발역은 텅 비어있다. 다음 열차는 너무 멀다. 발길을 돌려 전에 갔던 기장시장으로 간다. 시장은 조용하다. 이것저것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생선 몇 마리 토막내 들고 돌아온다.
바람불고 큰비가 오려고 한다. 머리는 내가 어디에 와 있는 줄 모른다. 생각을 따라갈 움직임은 늦고 서툴다. 깊은 욕망을 다독거리지 못해 이런 아침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앉아있다. 시간은 빨리 가기도 하고 늦게 따라오기도 한다. 누구에게 마음을 줄 것도 없고 외로움은 그대로 있다. 여기서 멈춰면 누구에게 위로의 말도 기대할 수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왔다가 가는 줄 아직도 나는 잊고 산다.
기차는 덩치도 크고 미듬직스럽다. 오늘 아침 원동으로 낙동강을 보러 간다. 기차를타고 당감동 철도 정비창를 지난다. 우리 인생 마냥 무궁화호 그리고 그 전에 달리던 은퇴한 기차 머리가 수없이 선로 위에 앉아있다. 파란 허리에 빨간 띠를 둘은 기차가 수두룩하다.
바다가 아닌 낙동강은 어떤 모습일까. 구포, 화명, 물금을 지나 원동에서 내린다. 경부선이 지나가는 길목이다. 물론 지나치는 역이지만, 오랫동안 다녔던 철길이다. 아련한 향수가 있는 곳이다. 철길과 낙동강 물길이 나란히 흘러간다. 겹겹이 누워있는 산틈으로 힘차게 뻗어있다. 물안개는 산허리를 감싸고 있다. 순매원으로 가는 산책길은 지난 밤에 내린 비로 낙엽이 된 이파리가 가을 같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살지. 간단히 차려입고 어둠 속으로 빠져나간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다. 비가 내리다가 멈추었다. 산을 휘어감은 강물은 얘사롭지가 않다. 익어가는 과수원도 만나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도 만난다. 단정히 앉아있는 집들은 아직 미동도 않는다. 남의 동네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오늘은 태화강역으로 간다. 낯선 거리에는 내 의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건물들이 길 양쪽에 도열해 있다. 개개 건물은 사연과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흥이 없다. 가 본적이 있는 울산 대공원은 여기서 먼가. 대나무 숲은 어디일까. 낯선 거리에 다가가지 못하고 돌아선다. 내려오면서 남창역에 내린다. 수더분한 마을이 옛날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국밥을 말아 파는 음식점 옆에 우체국도 앉아있다. 조선시대 한양으로 실어갈 곡물창고가 있던 곳이다.
박경리 작가는 나이를 먹으니 홀가분해서 좋다고 했다. 대 작가의 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조용히 앉아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때가 아니였을까 생각해 본다. 폭풍이 온다고 했는데 바다는 조용하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상태가 영 이상하다. 집에만 있어라고 한다. 정체를 불문하고 사람을 못 만나게한다. 좋아보이는 곳에 기웃거리지도 말라고 한다. 누구 보는 앞에서 침이 튀지않게 입을 가리고 살아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 길은 없다. 돌아와서 또 나간다. 내가 아는 곳에서 모르는 곳으로 갔다가 흙먼지를 덮어쓰고 다시 돌아온다.
첫댓글 방금 공포스러운 행정명령
2단계, 방역강화조치 알림
이 왔네요. 남정우님의
나혼자 "길 떠난다" 는 공포스러움을 이기는 최고의
생각전환 입니다.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는 님의
행위에 박수를 보냅니다.
백수가 시간을 짤라서 먹고 있습니다.
회장님, 온천지가 코로나 입니다.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