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터라는 부활절은 파스카라는 예수님 부활과는 다른 부활절이다
마27:45-28:8 딤후2:5
세상에 수많은 피조물이 있지만 사람만큼 죽음을 두려워하는 피조물들이 또 있을까? 지금은 코로나방역으로 착용했던 마스크를 해제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혹시 코로나 걸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마스크를 벗지 않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지나간 일이지만 코로나로 죽은 사람이나 코로나 두려워 코로나 백신을 맞고 죽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사망권세를 막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처럼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산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일 것이다. 누가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인가? 모든 인류는 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므로 어느 누구도 이 죽음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 내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 번 쯤은 하게 마련인데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오직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사후의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내세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하루밖에 살 수 없는 하루살이가 내일이 어디 있어 해넘어가면 그만이지 하여도 내일은 있는 것이고 한여름밖에 살 수 없는 매미가 여름이 지나면 내년이 어디 있어 하여도 내년은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보게 자네가 이 땅을 떠나면 죄와 슬픔이 없는 영원한 나라에서 나와 만나세 한다면 보통 사람들이란 에- 죽어 흙이 되면 그만이지 그런 영원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한평생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 천국을 부인하여도 하늘나라는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세가 있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바로 2000년전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2024년 3월 31일인데 이 시간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가 쓰는 시간은 BC(Before Christ 그리스도탄생 이전)와 AD(Anno Domini 주님의 시대)로 구분한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인류역사를 예수님 탄생을 기준으로 나뉘었을까? 지금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역사는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던 유일한 분이시었기 때문에 그분의 탄생이 시간의 시작이라고 역사가들이 정했다는 것이다. 교회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인데 실제로 복음이란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다가 3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이 거의 끝나가기 한달전에 이스라엘 북부지역인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자신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고난당하여 죽지만 사흘 후에는 다시 살아난다는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말했는데 어느 제자도 예수님의 이 절박한 메시지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고민을 한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한 제자들은 이제까지 예수님이 말씀한 것 중 한번도 부도난 적은 없었는데 제자들은 웬지 예수님의 이 죽음에 관한 말씀을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의 마음에는 남의 이야기로만 들렸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3년을 함께 하면서 수많은 기적을 보았을지라도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이 그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가 죽은지 4일이나 지나 무덤속에 있었던 나사로를 살려냈는데도 말이다. 지금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들어서 사람이 죽는다면 예수님 오실 때 부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있기 전 까지는 부활이라는 자체를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후에 부활할 것임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 가이샤랴 빌립보지방에서 자신이 죽음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마16: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질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시니. 그리고 두 번째로 갈릴리에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마17:22-23) 22 그들이 갈릴리에 거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배반을 당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23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지리라. 하시니 그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그리고 세 번째는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을 때 말씀하셨다.
(마20:18-19)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사람의 아들이 배반을 당해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그를 정죄하여 죽게 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요, 셋째 날에 그가 다시 일어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적어도 한달 동안 이스라엘의 북단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부터 갈릴리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는 동안 자신의 죽음을 세번씩이나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전혀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질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에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였지만 오늘날 이 말씀을 100% 믿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아무리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정말 예수님이 다시 오실까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보라 인자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신 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기셨다는 것이다. 누구든 죽음이 온다면 본능적으로 피하기 마련인데 왜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나가셨을까?
(1) 예수님이 운명하시다
교회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징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은 인류구원의 복음이다.
(마27:35)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병사들이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다는 것도 예언의 말씀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이 죽임당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말한 신성모독죄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마련했던 유일한 길은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성자예수께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 지시고 죽으시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의 상황에 대해 성경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27: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육시는 오늘날 시간으로 정오를 가리키며 제 구시는 오후3시를 가리키는데 이는 하루 중에 가장 밝은 시간에 온 땅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예수의 수난현장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개입되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 갈 때 말할 수 없는 탄식과 함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을 향해 진노하셨다.
(마27: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침묵하시던 예수님이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외침이다.
(마27:50) 예수님께서 다시 큰 소리로 다 이루었다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예수님은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십자가위에서 인류구원을 위한 구속과정을 다 이루었다라는 마지막 외침과 함께 운명하셨다. 정말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므로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증거가 곧 나타났다.
(마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는 놀라운 광경이 일어나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고 첫 번째 일어난 현상은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찢어졌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성소휘장막이 찢어진 것은 지성소가 활짝 열렸으므로 이제부터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2) 무덤에 장사되다
당시 십자가에서 처형된 시체들은 묻지 않고 버려졌으므로 그 동산을 해골이라고 불렀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는 이런 관습과는 달리 경건한 장례가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마27:57-60) 57 저녁이 되었을 때에 요셉이라 하는 아리마대의 부자가 왔는데 그도 예수님의 제자더라. 58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몸을 달라고 간청하매 이에 빌라도가 몸을 넘겨주라고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그 몸을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그 몸을 두고 큰 돌을 굴려 돌무덤 입구에 놓고 떠나가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유하고 존경받는 공회의 일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할 것을 허락받았으므로 니고데모와 함께 유대인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세마포로 예수님을 감싸 새 무덤에 안장하였다는 것은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그의 묘실이 부자와 함께 하였다는 예언을 이룬 것이다(사53:9). 예수님이 무덤에 장례된 다음날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빌라도에게 와서 각하 저 속이는 자가 살아있을 때 말하기를 자기가 사흘 뒤에 살아난다는 것을 기억하노니 셋째 날까지 군인들로 하여금 저 무덤을 굳게 지킬 것을 요구하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너희가 할 수 있는 대로 무덤을 굳게 지키라고 했다.
(마27:66) 이에 그들이 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파수꾼을 세워 돌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었던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였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시다
(마28:1-2) 1 안식일이 끝나고 주의 첫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돌무덤을 보러 갔는데 2 보라 큰 지진이 났더라. 이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는 그 입구에서 돌을 뒤로 굴러 내고 그 위에 앉았기 때문이더라.
그들이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는 개어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없어졌으므로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줄로 생각하고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사람에게 고하였지만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눅24:11-12) 11 그들은 저들의 말을 근거없는(허탄한) 이야기로 보고 저들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뒤 베드로가 일어나 돌무덤에 달려가서 몸을 구부리고 보니 아마포만 따로 놓여 있더라. 그가 그 일어난 일로 인해 속으로 놀라며 떠나가니라.
새벽 미명에 돌무덤에 처음으로 왔던 막달라 마리아는 누가 선생님 시신을 가져갔을까 생각하고 슬피 우는 마리아의 뒤에서 예수님이 ''마리아야, 누구를 찾느냐.'' 라는 음성으로 비로소 마리아의 눈이 열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다.
(요20:15-16) 15 예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슬피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그녀는 그분이 동산지기로 생각하고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당신이 그분을 여기서 옮기셨거든 그분을 어디 두었는지 내게 알려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그분을 모셔 가리이다, 하매 16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리아야, 하시거늘 그녀가 돌이켜 그분께, 랍보니여, 하니 이것은 선생님이여 하는 말이라.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사람은 예수님 무덤을 제일 먼저 왔던 막달라 마리아였다. 우리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말세성도들이라는 것을 믿는다. 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이십 오리 쯤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중에 길에서 만난 분과 이야기하며 토론하였는데도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그들이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을 때에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서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고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해주고자 예루살렘에 올라갔었다. 또 그날 저녁 문이 닫혀져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니라. 또 여드레가 지난 후에 다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부활하셨다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손을 보며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하시니 그리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로 주님은 갈릴리 바다가에서 제자들을 만나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더니 예수님께서 받으사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요20:9) 이는 그들이 그가 반드시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나야 하리라, 하신 성경을 아직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더라.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너희는 이 일들의 증인이라(눅24:41-48).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너무 확실한 사건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세 번씩이나 나타나셨으며 제자들게 못박혔던 손과 옆구리 창에 찔렸던 곳도 보여주셨으며 제자들과 함께 음식도 먹으셨다. 예수님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죽으면 그만이지 부활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복음서 마지막에 너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누구든지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확실한 역사적인 사건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셨으므로 정말 우리들도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들도 죽어서 영혼은 하늘나라에 있다가 예수님 다시 오실 때는 무덤에서 부활의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을 성경은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었고 세상 끝날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3. 예수님의 부활절은 언제인가?
오늘날 교회가 초대교회를 따라간다고 하면서도 정작 초대교회와는 반대로 로마카톨릭이 제정한 성탄절과 부활절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러치도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경기하는 자가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는데도 말이다.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경기하는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오늘날 교회가 초대교회를 따라간다고 한다면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은 기념 안했을지라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기념했다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이 제정한 성탄절과 부활절은 성경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행12:3) 또 그가 유대인들이 그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했는데 (그 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
이 말씀은 헤롯 왕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인 후 베드로까지 감옥에 가두었을 때가 무교절기간 즉 파스카 때임을 말하는 것이다. 파스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며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지켰던 무교절을 헬라어로 말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한 대속의 죽으심이었고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로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주님 오실 때 부활생명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확증해 주시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전날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장사한지 3일 만에 안식후 첫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날은 무교절 때 주일의 첫날로 오늘날 일요일에 부활하셨는데 기독교가 로마로 가서 태양신 종교와 기독교가 합쳐져 로마카톨릭이 등장하면서 325년 니케아 공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절은 춘분지난 후 보름이 지나고 오는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게 되어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지키는 부활절인데 왜 이것이 잘못된 부활절인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4. 부활절의 배경
로마카톨릭을 알기 위해서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로마는 태양신을 믿는 다신교 국가였다. 태양신을 알려면 노아 홍수이후 바벨탑을 건설한 니므룻과 니므룻의 아내 세미라미스 그리고 니므룻이 태양신으로 환생하여 돌아온 담무스 이 세 사람이 고대 바벨론 종교의 중심인물이다. 세미라미스는 훗날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은 달신 Ishtar로 자신의 출생에 대해 ‘만물이 소생하는 춘분이 지나고 보름달이 유프라테스강을 비출 때 하늘로부터 거대한 큰 달걀이 떨어졌는데 비둘기들이 품어 부화한 여신이 바로 자신이라며 자신을 가리켜 달신 이쉬타르라고 부르는데 성경에서는 아스타롯 또는 아세라 라고 하며 이쉬타르의 변형된 이름이 봄의 여신 이스터가 탄생한 것이다
(1) 부활절의 기원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Easter라 하는 부활절 역시 이방종교의 영향에 의한 것인데 이는 기독교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교 즉 봄의 여신 Easter의 날을 기독교식으로 토착화된 것이 오늘날 교회가 지키는 부활절이다. 부활절 기원은 춘분 때 봄의 여신 이쉬타르 즉 Easter를 기리는 축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것을 알면 교회가 지키는 부활절은 예수님 부활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니 경기하는 자가 규칙을 지켜야 상을 받듯 신앙 경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교에서 행하던 부활의 날에 예수님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것은 무지의 극치가 아니고 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국교로 공인되기 전 교회에서 지킨 부활절은 무교절로 헬라어로 파스카라고 불렸고 교회는 예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교절기간 즉 파스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서 초대교회의 부활절이다. 3세기까지 교회에서 지킨 부활 축일은 오늘날 '이스터'(Easter)란 이름으로 지켜지는 부활절이 아니었다. [알렉산더 히슬롭, '두 개의 바빌론' 도서출판 안티오크]
Easter(부활절)는 이쉬타르(Ishtar)의 현대적 표현이다. 이 부활절(Easter)기간에 행하는 많은 관습들 역시 이방종교의 풍습에서 시작 되었다고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초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이나 교부들의 저술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지켰다는 암시는 없다. 특정한 날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이 축제일이나 기타 다른 어떤 축제일도 지키라고 명한 바가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크리스천 의식은 아마도 이 이교도 축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웹스터의 신국제 사전(성서대백과, 정인찬 편, 기독지혜사)에서는 이스터(부활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고대 이교도들의 봄 축제,
2.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일로서 3월 21일 춘분이 지난 뒤에 오는 만월을 기준으로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된다.
부활절은 춘분과 음력이 연결된 날짜이기 때문에, 만약 3월 20일이 보름이라면 그해의 부활절은 4월27일이니 날짜는 해마다 달라진다는 것이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그리스 동방 정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교회가 춘분축제에 맞춰 부활절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본래 부활절로서 파스카라는 무교절을 지킬 것인가? 로마카톨릭은 부활절에 대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이교에서 행하던 춘분축제에 맞춰 이스터축제를 부활절로 지키게 되었으며 그 명칭도 '파스카'대신 '이스터'라 불렀고 시기는 춘분 지나 보름 지나 오는 주일로 정한 것이' 현재 부활절이다.[카톨릭 백과사전, P.505]. 이제 교회가 파스카를 이스터로 부르는 것에 대해 확고부동하게 결정된 것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제는 이 이교 의식들에 대해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즉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낸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2) 부활절에 들어온 동방의 풍속들
니케아 종교회의 때 부활절 논쟁이후 가톨릭교회가 동방풍습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순수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잃고 이방종교 속에 기독교가 흡수되면서 하나님의 절기를 훼손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를 왜곡시킨 것이다. 현재 교회가 지키는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한다고 하지만 그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전혀 상관없는 태양신 담무스의 부활이였던 것이다. 예수님 부활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희생으로 한 알의 밀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하나님이 정한 유월절로부터 시작되는데 이교도의 부활은 바로 유월절을 빼버리고 동방의 태양신 담무스의 부활로 바꿔치기 된 절기로 보면 틀림없다. 예수님의 탄생을 태양신 탄생일 12월25일로 정한 것과 같은 맥락이며 그 배경에 대해서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3) 우상숭배의 기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 살면서 가나안들이 섬겼던 우상들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섬겼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겔8:12-16) 12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 원로들이 어두운 곳에서 저마다 자기 형상을 둔 방 들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신다. 주께서 그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13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여전히 다시 돌아서라. 그리하면 그들이 행하는 더 큰 가증한 일들을 네가 보리라, 하시더라. 14 그 때에 그분께서 나를 데리고 북쪽을 향한 주의 집 문의 입구에 이르셨는데, 보라, 거기에 여자들이 앉아서 담무스를 위하여 술피 울고 있더라. 15 그 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오 사람의 아들아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너는 여전히 다시 돌아서라. 그리하면 이것들 보다 더 큰 가증한 일들을 네가 보리라, 하시더라. 16 그분께서 나를 데리고 주의 집의 안뜰에 이르셨는데, 보라, 주의 성전의 문에 주랑(현관)과 제단 사이에 스물다섯명 가량이 있더라. 그들이 자기들의 등은 주의 성전을 향하게 하고 자기들의 얼굴은 동쪽을 향하게 한 채 동쪽을 바라보며 태양에게 경배하더라.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던 예루살렘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해 그들은 슬피 울었고 25명의 원로(제사장)들은 왜 낯을 동으로 향해 태양을 경배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태양신인 담무스를 섬겼다는 증거이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사탄을 숭배하는 신비 종교들이 극도로 성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남신인 태양신 숭배(바알 숭배)와 다산의 상징인 여신 달신 숭배 이었다. 태양신은 최초의 적그리스도이자 바빌론 왕국을 세운 '니므롯(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반역했던 노아의 증손자)'이다(창10:8-9).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는 니므릇이 죽자 죽은 남편이 태양신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후에 자신이 사생아 담무스를 낳았는데 사람들에게는 니므롯이 환생한 것이라고 속였다. 담무스는 세미라미스의 아들이었지만 장성하여 그의 남편이 되었으나 그가 멧돼지에 받혀 죽임을 당한 후 그의 영은 지하세계로 들어갔다. 세미라미스는 담무스를 위하여 40일 동안 애도하면(사순절의 기원) 따듯한 봄이 돌아 왔을 때 담무스가 부활하여 농작물과 초장을 푸르게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문제는 이것이 해마다 하나의 국가적 의식으로 발전하였고 담무스와 세미라미스가 교합할 때 농토가 비옥해지고,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믿는데서 그들은 제사를 지낼 때마다 제단 앞에서 음란한 축제를 벌려야 담무스와 세미라미스가 흥분하여 교합을 하여야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물질의 풍요를 안겨주는 담무스와 다산과 환희를 가져다주는 세미라미스가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으며 주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와 바벨론문화에 빠져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게 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다.
(4) 사순절의 유래
부활절 전 40일 동안을 사순절이라고 하는데 풍요로운 농작물과 다산을 보증하기 위해서 매년 바빌론 사람들은 이쉬타르와 함께 담무스의 죽음을 슬퍼하였던 이유는 담무스가 40세에 사냥을 나갔다가 멧돼지에 받쳐 죽은 담무스를 위해 40일 동안 고기도 먹지 말고 애곡할 것을 명령한 것이 바로 사순절의 유래가 된 것으로 기독교인들 조차도 이교도축제의 가르침인 사순절을 받아 들여서 이제는 예수의 부활전 40일을 고난주간으로 삼는 것이다. 히스롭에 의하면 40세에 죽은 담무스가 세상에 산 1년을 하루로 해서 담무스를 애곡하기 위한 사순절은 담무스가 부활하기 전 40일간의 금식애도기간이다. 이러한 관습은 바벨론인 뿐만 아니라 이집트, 그리고 로마 미트라교에도 흡수되어졌다. 미트라교에도 미트라가 부활하기 전 40일간의 고난주간이 있었고 매년 로마 사람들은 이쉬타르 탄생과 함께 담무스의 귀환을 축하하여야 했다. 40일이 끝나는 날 담무스가 부활하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면 농작물 풍년이 오고 사람들은 다산의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절기로 지켜졌다. 알렉산더 히슬롭은 이교도들 가운데서 이 사순절이 담무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연례 대축제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 되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봄의 절기 이쉬타르의 탄생과 담무스의 부활한 날을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한 날로 기념한다고 하니 이런 해괴망칙한 부활절의 유래를 알면서 이런 부활절을 지킨다면 무지의 극치는 아닌가 ?
(5) 부활절 날 인기를 차지한 계란
오늘날 교회가 부활절하면 바로 달걀을 생각하는데 어떻게 달걀이 부활절의 상징이 되었는가? 위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이쉬타르인 달신의 탄생이 큰 달걀로부터 나왔다고 하였지만 옛날부터 달걀은 봄에 풍요와 다산 등 생명의 상징이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달걀은 겉으로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병아리가 나오듯이 이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는 것에 비유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도 죽은 듯 보이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부활의미를 갖는 달걀이 예수 부활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사순절 40일 동안은 고기와 달걀까지도 금하면서 빵과 채소로 금욕 생활을 해오다가 부활절 아침에 비로소 달걀을 맛보는 기쁨을 누렸다. 오늘날 아름다운 색깔로 포장된 부활절 달걀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욱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축제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독일 살벨트 지역에서는 1만여 개의 부활절 달걀로 장식한 나무가 있어 화제다. 지난 40여 년간 부활절때 마다 정원의 나무를 달걀로 장식한 폴커 크라프트 씨 부부는 올해도 2주간의 작업 끝에 부활절 달걀 나무를 완성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부활절이 되면 전 세계에서 부활절 달걀을 활용한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고, 천주교회나 개신교회 앞에서는 부활절 달걀을 나눠주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봄의 축제 이스터인 부활절은 기독교인의 최대 축일이다. 부활절의 주인공은 당연히 예수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기를 누리는 주인공인 달걀은 부활절 이전부터 이방 종교에서 생명의 시작과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새 생명이 움트는 춘분에 열리는 봄 축제에는 달걀과 관련한 많은 풍습들이 존재하는데 이방종교가 기독교로 유입되면서 그들 문화도 함께 들어와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풍습으로 자리잡았다. 우리 속담에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속담이 이교에서 행하던 축제의 달걀이 부활절에 가장 돋보이는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니 말이다.
(6) 예수 부활 시간도 이교풍습에 맞추다
부활절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침 해가 막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는데 동쪽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부활절 아침을 맞는 다는 것은 실은 태양신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독교인들은 해가 막 떠오르는 부활절 일요일 아침에 예수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런 행사를 한다고 주장하나 예수님의 부활은 해 돋을 때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 무덤이 이미 비어있는 것을 알았을 때는 아직도 어두웠을 때 일출 전 이었으므로 이 부활절 일출예배는 고대 태양 숭배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에스겔 8장 16절에서 볼 수 있듯이 에스겔 시대에도 유대교의 추종자들조차도 태양숭배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겔 8:16) 그분께서 나를 데리고 주의 집의 안뜰에 이르셨는데, 보라, 주의 성전의 문에 주랑(현관)과 제단 사이에 스물다섯명 가량이 있더라. 그들이 자기들의 등은 주의 성전을 향하게 하고 자기들의 얼굴은 동쪽을 향하게 한 채 동쪽을 바라보며 태양에게 경배하더라. 이처럼 태양신숭배자들에게는 동틀 때의 태양과 연관된 의식들은 많은 고대 국가들 사이에서 알려져 왔다. Easter(부활절)란 말이 봄의 여신 East-er에서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동쪽(east)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리하여 동쪽에서 태양이 돋는 것과, Easter(부활절)과, 봄 계절과는 모두 관련이 있다. 기독교 학자들이 수긍하고 있듯이 Easter라고 번역된 말은 무교절 이란 헬라말인 파스카(pascha)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왜 이런 동방풍속이 교회안으로 들어왔을까 생각해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내 쫓으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있는 거주민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고 일부를 남겨 종으로 삼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올무가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그 땅의 이방족속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태를 걱정하셔서 그들 대대로 하나님을 기억할 만한 장치들을 만들어 놓으시고자 이스라엘의 절기인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너무도 쉽게 버렸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정착하게 되자 가나안족속이 섬기는 남신인 바알은 농사를 풍요롭게 해주는 신이고 여신 아스다롯은 다산과 쾌락의 신이며 이 둘은 부부관계 신으로 너무 매력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신들이 로마카톨릭교회 안으로 들어와 주인노릇을 하면서 이교의식속에 이름만 성탄절로 부활절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5. 성서에 기록된 부활절
교회의 가장 큰 축일인 부활절은 명칭부터 다르다. 성경에서는 부활절을 부활을 의미하는 The Resurrection day로 기록한 반면, 대부분 교회들은 부활절을 Easter라고 부른다. 이 부활절 논쟁은 아리우스 논쟁으로 알려진 325년 터키 니케아에서 열린 최초의 기독교 공의회인 니케아 종교회에서 하나님과 예수는 어떤 관계이냐? 예수를 피조물이라고 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었는데 이어서 부활절도 그 회의에서 유월절에 맞춰 파스카를 부활절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이스터 축제날을 부활절로 지킬 것이냐의 논쟁 끝에 이스터의 축제날을 부활절로 대치하기로 하였다. 이스터의 축제날을 부활절로 전환한 것만 보더라도 부활절은 이스터 즉 봄의 여신의 이름이다. 동방의 풍습이 교회로 들어와 이스라엘의 명절을 훼손한 것이다. 성경대로 한다면 이스라엘 명절인 무교절 기간 중 안식일 다음날인 초실절이 부활절이 되어야 한다.
(1) 초실절
(레23:9-11) 9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 그 땅의 수확물을 거둘 때에 너희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한 것으로 내가 그 단을 받도록 주앞에서 흔들되 안식일 다음날에 그것을 흔들지니라.
초실절은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로 무교절 속에 들어있는 안식일 다음날로 무교절 속에 들어 있는 주일이다.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야 지켜질 수 있었는데 안식일 다음날 제사장은 백성들이 수확한 첫 열매들의 첫 단을 흔들어 처음 곡식 거둔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부활의 순서를 말할 때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이다(고전15:23).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부활절 의미인데 오늘날 지켜지는 부활절은 이교도 봄의 여신 이스터의 탄생과 태양신 담무스의 부활을 축하하는 날일 뿐 초실절의 영적인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날이다. 또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장차 부활 육체를 얻어 영광에 이르는 것을 이 땅에서 맛보는 것이다. 우리의 부활에 대해 (고전15:51-52)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리니 52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자들이 썩지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예수님의 부활은 the Resurrection day를 의미하는 공식적인 단어임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지키는 부활절은 Easter인데 Easter란 니므룻(창10:8-9)의 아내 세미라미스의 또 다른 이름인 Ishtar에서 기원한 것이다. 태양신 탄생일인 12/25이 성탄절로 둔갑한 것처럼 예수부활절도 봄의 여신이며 달신인 Ishtar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와 담무스가 지하에서 부활한 날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유월절 직후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무교절속에서 초실절이 뒤따른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순서와 정확하게 일치하듯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과 부활에 대한 소망의 상징이다. 무교절 때는 누룩이 없는 떡과 쓴나물을 먹어야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현재의 삶이란 것은 오늘도 여전히 어제의 타성과 죄에 얽매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노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죄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출12:1 이하는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노예로 살았던 이집트를 떠나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를 벗어나기 위해 어느 날 밤 갑자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체하지 말고 떠나라고 하신다. 출12:8엔 저녁 식사로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으라는 말이 나온다. 즉 나물의 쓴맛을 우려낼 시간도 없이 쓴 나물 그대로 먹으라는 것이다. 또한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이란 떡에 누룩을 넣어 부풀릴 시간도 없이 무교병을 먹으라는 긴박한 상황을 더해주고 있다. 왜 이렇듯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급하게 떠나라고 재촉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구원의 긴박성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 밤 노예지인 이집트를 떠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떡을 먹되, 그것도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고 지금까지 노예로 살아왔던 삶을 떠나지 않으면 내일의 해방은 없다는 것이다. 오늘 죄를 씻고 지나온 타성을 떠나지 않으면 내일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이며 오늘 회개하지 않으면 내일은 심판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무교절에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떡을 먹고 떠나는 것은 단지 긴박한 시간의 문제만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이다. 사실 우리 몸에 좋은 것은 쓴 나물의 쓴맛은 우리의 입맛을 살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을 제공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쓴맛이 싫어서 쓴맛을 다 우려내고 양념을 쳐서 먹고 맛있다고 한다. 또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은 맛이 없으나 생명을 유지해주는 본질은 떡을 만드는 곡식 속에 있는 성분이지 누룩은 아니다. 누룩은 떡을 부풀리고 부드럽게 만드는 구실을 하는 촉매에 불과하지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물의 본질이 쓴 것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쓴 것을 우려내고 양념에 무친 나물을 맛있다고 하듯이, 삶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저 감각적이고 말초신경적인 재미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누룩이라는 비본질에 매달린 채 삶의 깊이를 상실하고 삶다운 삶을 살아보지 못하고 흘러가고 있는 인생은 아닌가?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할 가롯유다를 향해 네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 말씀은 가롯유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알고 구원받지 못한다면 누구나 해당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에 없는 크리스마스나 이스터데이를 아무 생각없이 지킨다면 그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말씀을 온전히 믿는 것 이외는 우리의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 말씀이 오늘 말씀에 다시 한번 의미를 갖게 한다.
(렘5:30-31) 30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들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나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농사를 풍요롭게 해주는 남신인 태양신과 다산과 쾌락을 주는 여신인 달신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신들이며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신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바알과 아스다롯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매혹적인 신이어서 자연히 주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주의 신앙이 자리를 잡았는데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걷는 길과도 너무도 비슷한 것이다. 하나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쫓아 섬기게 했던 사단은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의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도록 해 결국은 좁은 길을 포기하고 세상 사람들이 가는 풍요와 쾌락의 넓은 길을 가도록 유혹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야 말로 주님의 말씀을 듣기가 어려운 영적 기근시대임에 틀림없다.
(암8:11)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라. 그것은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는 것에 대한 기갈이니라.
교회사도 모르고 성경말씀도 모르고 전통으로 내려온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같은 교회절기를 하루아침에 포기하는 것은 어렵지만 정말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다면 어려울 것도 없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