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9월초 감사원 1국 3과 근무시 부천시청에 출장간 일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직원들의 말을 들으니,시청부근 원미동 일대를 개발하고
시청은 곧 그쪽으로 옮기게 될 것이라고 했다.시청 직원들은 모두 다 알고 있었으나
서울에서 간 우리들에는 아주 중요한 정보(사실은 소문정도 였지만)였다.
나는 돈이 없었지만 집을 사는 무슨 방법이 있을까 궁리했다.감사원에서 동아건설로 옮긴 나는
일요일 원미동을 다시 찾아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원미동 산꼭대기에 가자,
뜰이 아주 넓은 집이 있었으나, 수도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헐값에 나와서
그집을 사고 싶었다.그러나 얼마 안 있다가 동아건설에서 해외로 가야 할 상황이어서 그것을 포기하고
그 아래쪽 개발지역에서 연립주택 2층 24평짜리를 190만원에 사서 불광동에서 이사했다.
이사가서 며칠후 옆방에 세 들어온 부부가 있었든 데 집사람은 상욱이 엄마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리집 이사를 도와주는 데 힘이 장사라고 놀라와했다.
알고 보니,내가 직전 해인 1977년도에 감사원 1국3과에 재직중일 때 우리 직원들을 초대해서 갔던
명동에 있는 같은과 소속 박태원 감사의 명동 불고기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세상은 좁다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나는 서울 서소문에 있는 동아건설 본사에서 전철로 출퇴근 했을 때인데 워낙 사람들로 붐벼서
힘들었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감수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얼마 되지 않아 1978년 초여름 그 집을 230만원에 팔고 나는 그해 6월 7일 사우디로 갔다.
내가 없는 사이 이모님과 의논해서 대치동 개나리 아파트 21평을 1,850만원에 샀다.
사우디에서 번 돈과 부족분은 대출로 충당해서 집을 샀다
내가 사우디로 떠난 일주일도 못된 1978년 6월 13일 둘째 아들 율이 험한 산고 끝에 세상에 나왔다.
나는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내에게 죄스럽고 아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내가 두번째로 사우디로 떠나면서 집사람과 두 아들 융.율과 함께 광주 어머니집으로 보냈다.
이때가 1979년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서 국가가 대혼란에 빠졌을 때였다.
우리는 한국의 상황을 잘 몰라 CNN등을 통해 어렵사리 한국의 소식을 조금씩 접했다.
나중에 한국에 와보니,집사람과 아이들이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도청앞에 가서 죽은 사람들의
늘비한 시체를 목격했다고 무서워했다.
내가 귀국해서 얼마 안있다가 곧 강동구 성내동 436-31번지 주택으로 이사왔다.
큰 주택을 갖고 싶었다.그래서 반지하 2층의 방이 여러 개 있는 집,즉 9개가 있는 집으로 이사왔다,
그때 강동구 성내동 일대는 허허 벌판이었고 이런 류의 집이 유행했다.
그런데 ,내가 사우디에서 귀국하니까 아내가 "2층에 있는 작은 방 하나에 나의 중학교때
반 친구 김 0 제군이 월세로 들어와 살았다"고 말했다.김군은 내가 중학교 2년때 광주 남중으로 전학 온 첫날
담임 선생님이 자리 배정해 줄 때 손을 번쩍 들어 환영해주었던 완도 청산면에서 전학온 같은 입장의 학생이었다.
학급에서 김군이 83번 내가 꼴지인 84번이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술집에 다니는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여자에게 구박을 받으면서
직장도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얻어 살고 있었다.나는 김군이 그곳 면장의 아들이고 공부도 잘 했는데
그리고 심성이 아주 착했는데 왜 취직도 못하고 그런 상황이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안탑깝기도 했다.
그들은 거의 매일 싸웠는데 몇달 살지 않고 어느날 이사갔다고 했다.
어떻든 우리는 처음 가져 본 큰 주택이라 아주 좋아했지만,나중에 주택을 산 것을 두고 두고 후회했다.
그 이유는 연탄을 하루에 16장을 갈아야 했고,반지하가 끼어 있어서 비만 오면 방에 물이 자주 들어와
1년에 몇번씩을 집 가까이에 있는 <장항 설비>아저씨를 불러 수리해야만 했다.
장항 설비 아저씨는 내가 2000년도초 덕소 쌍용아파트에 살 때 우연히 한강변을 산책하다가 만났는데
그때는 설비일을 그만두고 덕소 한 아파트에서 사위와 딸 그들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얼마 후 아들 결혼이라고 청첩장을 보내와 우리 부부가 옛정을 생각하며
상봉터미날 부근 예식장에 가서축하해 주었는데 그후에는 소식이 없다.
내가 대림산업에 다니던 1984년 9월초였다.태풍 매미가 와서 성내동 일대가 침수되고
우리는 중흥교회 2층으로 피신해서 하루를 꼬박 잠을 자지 못한 일도 있었다.
그때 고향친구 김이호가 차를 가지고 정운섭이와 함께 와서 집일을 도와주었다.
이를 계기로 현대 정주영화장께서 아산병원을 중심으로 제방도 만들도 자동 수도펌프 시설도 만들어서
지금은 거의 완벽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집에는 착한 현섭이네 부부가 전세들어 살 때였다.
처음에는 그들 부부는 1층 옆 방 2개에 살았고 우리는 그 윗층 방 3개에 살았는데 내가 외국으로 가게 되자
살림을 줄일 목적으로 아래층으로 가겠다고 하자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외국에서 와서 조금 형편이 나아져서 2층으로 올라 가겠다고 하자 그들 부부는 2층에서
우리가 살던 1층옆으로 옮겼다.
이렇듯 몇차례 서로 바꾸어서 옮겼지만 이 선량한 부부들은 한결같이 집주인이 하자는 대로 했다.
나중에 우리가 중흥교회옆쪽으로 옮기면서 "제발 전세 살지 말고 이웃 연립주택이라도 사시면
충분히 집을 살 수 있다"고 하자 그때에야 가까운 연립주택 3층으로 옮겼다.지금은 남양주시
진접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데 2015년 집사람이 우연히 만나 보험을 가입해주었다.
우리가 중흥교회 옆으로 갔을 때도 그들 부부는 중흥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
남편은 장로로,아내는 집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후 얼마 있다가 사람이란 게 건망증이 있는지 우리가 또 옮긴 곳이 같은 성내동 중흥교회
바로 옆 반지하를 낀 3층의 큰 집이었다.우리는 피아노 학원경영하는데 좋다고 생각했지만 뜻하지 않게
교회가 옆에 있어 큰 암초가 되었고 아래 반지하에서도 또 비가 오면 물이 방으로 들어와 세사는 사람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한쪽 반지하 방에는 언니가 장애인인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집사람이 월세를 받지 않아
나중에 내가 말했더니,그들이 3층 우리집으로 아픈 몸으로 어렵사리 올라와 "이중으로 집세를
받으려한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그래서 설명해주었더니 우리가 잘못 게산했다고 따졌다.
그러면서,동생은 "자기가 경실연에 다니는데 그곳 윗사람에게 말해서 가만 안 있겠다"고까지 했다.
나는 경실연에 대해서 전혀 우리들의 생활괴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이 없어서
"도대체 네가 다니는 경실연과 우리집에 월세 사는 것과 무슨관계 있느냐,한번 해봐라"했더니
며칠후에 구리에 일 때문에 따로 나가 있던 아버지가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
전후 상황을 설명해 주었더니,"아이들이 잘 몰라서 무슨 피해의식으로 그랬던 것 같으니 이해 달라"고
한 일도 있었다.
이집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아주 좋고 늘름했지만,기름 보일러였기 때문에 기름값이 한달에 수십만원들었다.
우리는 주택에 산다는 것에 질리도록 염증을 느꼈다.피아노 학원(전원피아노)을 경영하기 위해
아파트로 들어가지 않고 큰 주택에서 20여년간 생활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잘못 판단한 결과였다.
1981년 개나리 아파트에서 성내동 주택으로 이사간 후 거의 20여년만인 1999년 가을
우리는 중구 신당동 삼성 아파트 24평으로 이사갔다.우리는 한번 주택으로 이사가자
주택이 최고인 줄 알고 뜨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1980년 동아건설에 다닐 때 사우디에서 번 돈 현금 500만원과 전세 500만원을 끼어
1,000만원에 사두었던 신당동 달동네 딱지가 그간 아파트로 재개발되어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