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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기 위하여/눅 3:1-17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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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상호목사
중학교 때 축구공에 망막을 다쳐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지만, 후에 미국으로 유학 가서 한국 최초의 맹인박사가 되신 강영우 박사님을 제가 몇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쓰신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라는 책에서, 하버드 대학교의 교육 제도에 대해서 기록한 글을 읽어 보았는데, 하버드 대학에는 낙제를 하면 1년 동안 정학을 시키는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낙제를 해서 정학을 받게 되면 그 기간 동안에는 대학 근처에 살아도 안 되고, 집에 돌아가서도 안 되고 제3의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살면서 근신해야 합니다. 몇 년 전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 10명이 낙제를 했는데, 그중 9명이 한국계였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 당국에서는 상담을 목적으로 그 원인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들은 하버드대학을 입학한 이후 인생의 장기적인 목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한국 학생들이 세계 일류대학인 하버드 대학에는 다니고 있었지만, 스스로 자신의 삶을 불태우며 공부해야 할 목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어야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데,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불태울만한 인생의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난 주 주보 3면 <은혜 나눔터>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을 보면, 모두 다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이 쓴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을 보면, ‘목표를 확립하라’는 이야기를 역설하면서, 찰스 박사가 리서치 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육상경기에서 1등 한 사람이나 사업계에서 세계적으로 유수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뒷조사해보면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확고부동한 목표의식을 갖고 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목표 없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이 없으며, 목표를 가진 사람만이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이 분명한 목표의식, ‘내가 어디를 향해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지금 이렇게 땀 흘리고 사느냐?’하는 질문에 분명한 답을 하는 사람, 그 사람만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삽니다. 사람들 가운데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만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열심히 삽니다. 다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땀 흘리며 수고하며 애를 쓰며 사는 사람 중에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냐?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사느냐?”하는 질문에,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당당하게 대답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한 채 그냥 열심히 땀 흘리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닉슨 대통령 때 국무장관을 지냈던 헨리 키신저 박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모르면 어떠한 도로도 당신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달려야 할 삶의 방향을 분명히 해야 알아야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에 따라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깨닫고, 그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는 분명한 목적을 추구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도대체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았다고 인정받게 되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세례 요한처럼,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우리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려면 첫째로, 목적을 갖고 태어났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서 세례 요한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분명한 목적을 갖고 태어났고, 또 그 목적을 위하여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이유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7절). 사실 그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우연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 중에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갈라디아 1장 1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1장 5절에서도 “그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 139편 16절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주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보셨으며, 나를 위해 작정된 날이 하루도 시작되기 전에 그 모든 날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정리해보면 우리가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하여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셔서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향한 특별한 계획과 뜻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 뿐 아니라, 우리들도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목적을 갖고 태어난 줄로 믿습니다. 그 목적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아무 목적도 없이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는 줄로 믿습니다.
2) 빈 들에서 미리 준비하라
우리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려면 둘째로, 빈 들에서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목적을 갖고 태어났을 뿐 아니라, 그 목적을 준비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7명은 모두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한결같이 세상에서 유명한 자들이었습니다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다른 사회 지도층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누가복음 1장 80절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여기 ‘아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이디온’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청소년 시기가 아닌 아주 어린 아이를 의미합니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에 빈 들로 나간 것입니다. 원래 그는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광야로 갔습니다. 물론 빈 들은 집안의 따뜻한 아랫목과 전혀 다른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빈 들은 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내려 쬐이고, 밤에는 추위와 맹수들의 위협이 있는 삭막한 곳입니다. 세례 요한은 30세 때까지 빈 들에서 살았습니다. 비록 빈 들은 외롭고 힘들고 어려운 곳이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목적을 위해 준비했던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빈 들에서의 삶이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멋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수 년 전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김모 형제님이 <진흙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놓았는데, 그 글을 읽고 마음에 닿는 것이 있어서 따로 저장해 놓은 적이 있습니다.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들판에 아직 채굴되지 않은 진흙이 있었다. 어느 날 포클레인이 들어오더니, 그 진흙을 파내어 트럭으로 옮겼다. 다시 그 진흙은 큰 컨테이너에 들어가 잘 게 부수어졌다. 진흙은 너무나도 아파서 까무라칠 뻔했다. 그러더니 다시 큰 떡메가 이리치고 저리쳐, 완전히 혼절하였다. 겨우 깨어보니 자신이 도자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제는 끝났겠지 했지만, 정작 고통은 그 순간부터 더 커졌다. 유약을 바르고, 채색을 하고, 활활 타는 불화로로 들어갔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며 한 두 시간도 아니고 이틀이나 불화로 안에 있었다. 이틀 후에 불화로 밖으로 나온 자신을 보고 진흙은 깜짝 놀랐다. 아주 아름다워진 자기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들판에 널려 있던 하잘 것 없던 진흙이 아름다운 도자기로 변화된 것이다. 지금의 고통,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아름다움으로 변화되는 기회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고통과 시련의 한가운데에 서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믿을만한 사람이 다 떠나고, 의지할 아무런 빽도 없고, 자랑할만한 돈도 가지지 못한 채, 지금 황량한 빈 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빈 들에서의 삶이 너무 힘이 드십니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시련 가운데 빠질 즈음에 피하 길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고전10:13).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빈 들에 던져졌을 때, 여러분들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도구와 그릇으로 빚어질 수 있는 기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빈 들에서 주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준비한 세례 요한처럼, 여러분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3)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
우리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려면 셋째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살던 시기는 제사장직을 돈으로 사고 팔 정도로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만큼 종교적으로 매우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진리를 선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절)
독사와 뱀은 사단을 상징하는데,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책망한 것은 굉장히 심한 책망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뒤로 하고, 적당히 귀에 달콤한 이야기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달랐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빼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이러한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면 타협 한 번 잘못해서 세상이 바뀌어진 적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들은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소련의 스탈린과 손을 잡았습니다. 스탈린은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며, 인권을 처절하게 유린하는 독재자였고 독일의 히틀러 못지않게 무섭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그와 적당히 타협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순식간에 동유럽과 중국과, 중남미 곳곳에 공산 정권이 세워지고 말았습니다. 만약 연합군이 소련과 타협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연합군은 타협함으로 결국 60년대에 들어왔을 때에는 세계 지도의 3분의 1이 공산주의로 뒤덮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들도 타협을 조심해야 합니다. 당장 쉽고 편한 것을 위해서, 타협하다보면 나중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가나안의 정복 영웅이었던 여호수아가 바로 그랬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먼 곳에서 온 것처럼 변장하고 찾아왔을 때, 여호수아는 자세히 조사해보지도 않은 채 그들과 덜컥 화친조약을 맺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이 진을 치고 있는 길갈로부터 겨우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기브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아무리 속아서 맺은 것이라 할지라도 약속은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기브온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스라엘은 두고두고 그들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들의 타락한 도덕성과 우상숭배 행위를 본받게 되었습니다. 또 나중에는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 역사에 큰 올무가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타협으로 말미암아 두고두고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죄와 타협은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세상과 타협하지 말로 오직 믿음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라
우리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려면 넷째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며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려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로 그를 생각할 정도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쯤 되면 세례 요한도 딴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으로 자기가 메시아라고 할 수도 있고,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조직하여 뭔가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몰려와 세례를 받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해지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몰려 온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엄청난 부흥이 일어나도 그는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막1:3)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정이지만, 만약 그가 날마다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며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질투심과 시기심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보면 정작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어느 날 수도사를 공격하기 위해 사타들이 모여 집중 회의를 했습니다. 이 수도사는 영적으로 아주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번도 유혹에 넘어간 적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돈에 대해서나, 여자에 대해서도 항상 깨끗했습니다. 이 수도사를 넘어뜨리기 위해 사탄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했으나 그는 결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장 노련하다는 사탄이 나섰습니다.
“내가 한번 그 수도사를 넘어 뜨려보겠다.” 그 수도사에게 다가간 사탄은 그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자네 친구는 대주교가 되었네.” 이 말을 듣자마자, 그 동안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던 이 수도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더랍니다. 이 수도사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바로 비교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작년 11월 13일자 신문에 한국을 대표하는 두 명의 정상급 등반가 엄홍길씨(43)와 박영석씨(40)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비록 세살 차이가 나는 선후배지간이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깊다고 합니다. 국제 캠프에 함께 참가하고 등반도 같이 할 만큼 가까운 두 사람이 어느 날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14좌 정복’의 기록 때문입니다. ‘14좌’란 히말라야의 8000m 고봉 14곳을 말하는데, 이 14곳을 한국사람 중 누가 최초로 정복하느냐를 놓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90년대 후반부터 두 사람은 자의반 타의반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바람을 잡아 시작된 두 사람의 경쟁은 2000년 7월 엄홍길씨가 K2 에 오르면서 일단 엄홍길씨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박영석씨도 이듬해 8월, 8000m 14좌 고봉 정복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히말라야 14좌’ ‘세계 7대륙 최고봉’ ‘남극. 북극. 에베레스트’를 모두 정복하는 산악 그랜드 슬램 경쟁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의 경쟁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 중 누가 가장 먼저 산악 그랜드 슬램을 차지 할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남극에 도전하기 위해 남극으로 떠나던 박영석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경쟁은 주위에서 하지 저희는 신경도 안씁니다. 산을 두고는 경쟁하는 게 아닙니다. 명 재촉할 일 있습니까?”
여러분,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 여러분들의 삶을 무너뜨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내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5)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라
우리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려면 다섯째로,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높임을 받거나, 존경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당신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적이 있는 엘리야입니까?”, “당신이 선지자입니까?”
그 때마다 세례 요한은 단순히 한 가지 대답만을 했습니다. “아니라.” 그러자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그 때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 23절에서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자기를 단지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말씀을 증거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자꾸만 주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주목할 것이 아니라, 예수께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와서 “당신은 왜 세례를 주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푸는 것도 감당치 못할 존재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훌륭한 모습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30절을 보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모습입니까? 그는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서 수술 받을 때 사용하는 마취제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 년 전에 발명되었습니다. 마취제를 발명한 사람은 제임스 심슨(James Simpson, 1811~1870)이라는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심슨은 스코틀랜드에서 빵을 만드는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머리가 좋은 심슨은 14세 때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고, 29세에 에딘버러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심슨은 외과수술을 받는 환자들이 겪는 고통을 어떻게 하면 덜어 줄 수 있을까하며 깊이 생각하다가, 창세기 2장 21절부터 22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오셨다.”는 말씀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의사의 상식으로 볼 때, 갈비뼈 하나를 떼어 내는 것은 매우 큰 수술인데, 그 수술을 받은 아담은 잠에서 깨어난 후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감탄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슨은 “하나님이 아담을 잠재우시듯, 환자를 잠재워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무사히 수술을 끝낼 수는 없을까?”하고 고민하다가 수술용 마취제의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그 결과 1847년 11월에 심슨은 클로로포름이라는 무거운 액체를 실험한 결과, 이것을 마취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논물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1853년 빅토리아 황후가 왕자를 분만할 때 이 클로로포름 마취제를 사용한 후, 수술에 성공함으로써 이 마취법이 널리 공인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로로 당시 스코틀랜드 출신의 의사로서는 처음으로 ‘Sir’(경)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년에 그의 제자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큰 발견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가장 큰 발견은 내가 큰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나를 구해 주신 큰 구세주라는 사실이지요.” 제자는 그가 클로로포름이라고 대답할 것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다른 대답을 하자, 깜짝 놀랐습니다.
제임스 심슨 교수에게 가장 중요한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최고의 자랑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최고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성취한 업적입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힘들에 모아놓은 돈입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건강입니까? 무엇을 여러분들의 최우선순위에 놓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들의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단지 ‘소리’로 여긴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여러분들의 삶의 최우선순위에 올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만을 여러분들의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빈 들에서 준비했습니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았고, 오직 주님만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태어난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눅1:15)이라는 천사의 예언처럼, 주님으로부터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큰 자’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저는 이 자리에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분이 한 분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처럼 그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 주님께 큰 자라 인정받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아직까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금번 “목적이 이끄는 삶“을 주제로 하는 <40일 특별새벽기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캠페인을 처음으로 시작하여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새들백교회에 이러한 간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원문 그대로 읽겠습니다. “단 40일 만에 671명의 새신자들이 세례를 받고, 1,200명이 새로 등록하고, 예배출석 인원이 평균 2,000명 정도 증가되었다면, 이것을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40일 만에 이전에 한번도 교회에서 봉사한 적이 없었던 2,200여명이 교회의 각종 사역에 헌신했고, 또 다른 3,700명은 내년 연말까지는 단기선교 사역을 떠나겠다고 서약했다면, 이런 현상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을 영적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교회의 성도들이 이웃을 향한 큰 부담감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거의 25,000명에 달하는 친구, 이웃, 직장, 동료들이 6주 동안 약 2,400여 개의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면, 이것을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놀라운 일들과 엄청난 열매들이 지난 2002년 가을, 미국의 새들백교회에서 있었던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통해 실제로 경험한 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새들백교회만의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미국 내 50개 주와 전 세계 10여개 나라의 1,500개 이상의 교회가 함께 경험한 것이었다.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교회에서 사역했던 이전 13년보다, 지난 40일 동안 교회가 더 많이 성장하는 걸 보았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통하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세례를 받고,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소그룹 모임을 통해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진정한 예배를 경험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역이 무엇인지, 전 세계를 향해 주어진 나의 사명은 무엇인지 깨닫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로 헌신했다. 이것은 특별한 나라, 특별한 지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와 역사가 어디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보십시오. 서울의 수많은 교회에서, 경기도의 많은 교회에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많은 교회에서 이러한 영적인 변화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현지인교회와 교포교회에서, 또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시드니와 브리스베인, 등지에서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간증과 감사와 응답을 경험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비전과 소망으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영적각성 및 영성회복 운동과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변화는 이곳 뉴질랜드와 크라이스트처치와 우리 교회와 우리 가정과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영적인 변화가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별새벽기도에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이번 40일 동안 바르게 인식한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에 크나큰 전기가 마련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새벽기도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은 분이라 할지라도, 이번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개인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우리 교회가 변할 뿐 아니라, 이 지역 사회가 변화되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