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맹무상(群盲撫象). 장님 여럿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을 자기의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글로벌무역인턴십은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싶다’는 나의 꿈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였다.
국내 교육을 마치고 말레이시아의 KMT TRADING SDN BHD라는 회사로 인턴 배정을 받았을 때, 6개월간의 인턴 생활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무엇보다도 알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떠한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인턴 기간 내내 이런 화두에 방점을 찍고 생활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인턴으로서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인턴 생활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운 회사의 업무를 말하기에 앞서, 내가 느끼고 경험한 말레이시아 사람들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중국계와 말레이계 사람들
말레이시아 국민은 중국계(24%)와 말레이계(50%)가 주축이며 원주민과 인도계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 중 ‘내가 본’ 중국계와 말레이계의 차이는 확연했다.
중국계 사람들은 호탕하다. 또 타인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많이 이해타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0% 남짓한 중국인들이 말레이시아 상권의 70%를 지배하는 것은 이러한 기질이 뒷받침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중국계 사람들은 매우 가정적이다. 중국계 식당은 항상 외식을 나온 가족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중국어와 함께, 현지 식으로 발전시킨, 매우 빠르고 발음이 특이한 영어를 구사한다.
종교는 민감한 부분이라 많이 알아보지는 못하였으나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가 공존한다. 가끔씩 중국식 불교 사원들을 길에서 볼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심심치 않게 관우상과 그림을 만날 수 있었는데, 중국계 사람들은 관우를 ‘관다이’라 부르며 재물 신으로 섬긴다. 조그맣게 단을 만들어놓고 관우상 앞에 향을 피우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말레이인들은 느리다. 모든 것은 알라의 뜻이라는 이슬람 문화의 특징인지, 더운 나라 사람들의 기질인지 어쨌든 삶에 여유가 있다. 이러한 점이 그들의 행복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자본주의적 관점, 효율성의 측면에는 긍정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도날드나 KFC 같은 대형 푸드 체인의 종업원들은 대부분 히잡을 두른 20~30대 무슬림 여성들인데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다 보면 속이 터진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절대 던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알라의 뜻이기 때문에.
인도계 사람들과는 교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몇몇 식당 주인들을 만나보았으나 손으로 생선을 뜯어 카레와 함께 먹는 모습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펍에서 본 인도 여성들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피부는 검은 편이었지만 서구적인 외모와 훤칠한 키를 가지고 있었다.
짜고 단 말레이시아 음식
짜다. 달다. 내게 말레이시아 음식을 평가하라면, 이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냉방시설이 워낙 잘 되어있어 땀을 많이 흘릴 일이 많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매우 짜게 먹는다. 또한 물을 제외한 모든 음료는 전부 달다.
새로운 음식을 시도해 보았을 때 내 입맛에 맞을 확률은 반이 되지 않았다. 특히 말레이계 음식은 특유의 향신료를 사용하여 적어도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여기서 ‘Spicy’는 맵다는 뜻보다는 향이 강하다는 정도를 나타낸다.
현지인들이 주로 먹는 것은 볶음밥이나 돼지고기 또는 생선으로 육수를 낸 국수류였다. 한국과는 조금 다른 식감의 어묵을 ‘Fish cake’라 하며 매우 즐겨먹는 것이 이채로웠다. 쌀은 기후 탓인지 알갱이가 작고 푸석푸석하여 그냥 먹기보다는 항상 기름에 볶아서 먹는 것 같았다. 다양한 과일이 있고 매우 저렴하였다. 과일의 왕이라는 두리안을 먹어보았으나 당분간은 다시 시도할 것 같지 않다.
이슬람 국가라 그런지 물가에 비하여 술이 상대적으로 비쌌다. 한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우리가 강남이나 홍대에서 맥주나 양주를 마실 때 가격을 생각하면 되겠다. 현지 맥주시장은 Carlsberg와 Tiger라는 브랜드가 대부분 지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맥주보다는 진한 풍미를 가지고 있다.
내가 본 정치, 사회, 문화
말레이시아는 왕국이다. 각 주를 대표하는 9명의 술탄이 있고 그 중에서 5년마다 아궁(왕)을 선출한다. 아궁은 영국 여왕, 일본 천황과 같은 상징적 존재이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말레이시아 아궁은 전시를 선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군대를 통제한다. 아궁의 승인 없이는 군대를 움직일 수 없으며 극단적인 경우, 아궁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궁의 선출은 말레이시아의 큰 이슈이다. 아궁이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 국가 정책이 크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수상내각제로 국민투표로 선택된 정당의 수장이 수상(Prime Minister)으로서 국가의 대표 역할을 수행한다. 흥미로운 점은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한 정당이 56년간 계속하여 집권했다는 사실이다.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kuala lumpur, Selangor 등 수도권 지역에서는 이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변화를 원한다고 한다.
덧붙여 ‘팩트’라기보다는 하나의 ‘해석’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이야기도 해 보자. 중국계가 많은 상권을 갖고 있으며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말레이계이다. 그들은 그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교육의 질 수준을 낮춘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교육열이 높고, 많은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중국계들의 성장을 방지하는 것이다. 다양한 커리큘럼을 만들고 배움의 기회를 많이 제공할 경우, 그 혜택은 대부분 중국계에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이후로 영국, 또는 호주로 유학을 가는 중국계들이 많다고 한다.
또한 ‘부미푸트라’라는 정책이 있다. 기업이나 업체에서 채용을 하는데 있어 말레이계를 우대하도록 법적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내가 근무했던 곳에서도 이런 정책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사무실은 중국계 사람들로, 창고는 말레이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창고 직원들과는 말레이어를 배우지 않고서는 간단한 인사 외의 의사소통이 힘들다. 물론 그 회사가 모든 표본을 대표하지는 않겠으나 실제로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인턴이 아닌 직원의 자세
이제 내가 인턴으로 근무했던 회사와 업무 이야기를 할 차례다.
KMT TRADING SDN BHD는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한국식품유통업체이다. 한류열풍과 더불어 한국의 여러 문화를 소개하고, 홍보함으로써 말레이시아에서 ‘한국’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드높이는데 앞장서는 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나는 상품의 현지 마케팅 업무를 주로 수행하였다. 회사가 취급하는 농심, 팔도, 대상푸드, 롯데제과 등 다양한 상품의 인지도 향상과 매출 증대가 목표였다.
간단한 복사부터 인쇄, 배달, 심부름까지 가벼운 일들도 많았지만 역시 기억에 남는 것은 ‘인턴이 아닌 직원의 마음가짐으로’ 수행한 업무들이었다. 무언가 변화를 만들고 왔다(!)는 뿌듯한 경험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로컬레스토랑에 신라면 납품을 위해 직접 만든 다양한 신라면 레시피(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번역)를 들고 지역별로 세부계획을 세워 하루에 30개 레스토랑을 방문하였다.
또 2년마다 열리는 동남아지역 최대 식품관련 전시회인 ‘FHM 2013’에 국순당 부스 담당자로 참가하여 크고 작은 바이어들과의 미팅을 진행하였다.
이어 일본계 백화점인 이세탄과 코트라, 그리고 우리 회사가 함께 3주간 진행한 ‘ISETAN KOREAN FAIR’에서 3층 브랜드 플로어매니저를 맡아 6개 한국브랜드의 재고를 관리하고 각 브랜드 담당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였다.
이 밖에도 KMT배 로컬 풋살대회를 기획하였는데, 총 5개 에이전시들과 미팅을 통하여 적정한 예산을 구상, 협의에 이르렀고 사장님의 결재를 받아 2박3일간의 토너먼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생각난 김에 자랑 한 가지를 덧붙이자. 농심 신라면을 필두로 할랄 인증을 받은 상품들을 현지 언론에 소개하기 위하여 말레이시아 정부 기관인 HDC(Halal Development Center)에서 ‘Korean Halal Food Press Conference’라는 기자회견을 실시한 적이 있다. 나는 이 행사의 사회를 맡아 현지 주재 한국 대사님, President of HDC, KOTRA 쿠알라룸푸르 무역관장님, Datuk(말레이시아 왕실 작위) Lee 등 귀빈들과 현지 언론사들 앞에 섰다.
그리고 완벽을 기하기 위해 일주일 전 대본을 만들어 하루에 두 시간씩 연습하였던 덕에 실수 없이 원만히 수순을 이끌었다. 영어뿐만이 아니라 가능한 많은 말레이어를 사용하였다. 덕분에 사장님으로부터 “연습 많이 한 것 같다. 넌 어디 가서 뭘 해도 잘 할 거다”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전시회에서 발굴한 잠재고객
위에 열거한 업무 가운데 2013년 9월17일부터 20일까지 쿠알라룸푸르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던 제12회 FHM(전시회) 참가 경험을 간략히 소개한다. 나는 국순당을 담당하여 ‘국순당 쌀막걸리’와 신제품 ‘아이싱(Icing)’의 시음을 제공하고 두 제품 외 3개 품목(명작 복분자/오미자/청매실)을 홍보하였다. 전시회에서의 판매는 공공연히 자행되었으나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상품을 판매하지는 않았다.
전시회 참가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잠재고객의 발굴이었다. 우리 제품에 관심을 갖고 시음을 해보는 많은 사람들(4일간 쌀막걸리18병/아이싱29캔 소비) 중 사업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고객을 파악하는 것이다. 타깃을 호텔사업자, 레스토랑사업자, 도/소매상, 프랜차이즈운영업체관계자, 카페사업자, 와인/주류 판매업자, 매스컴관계자 등으로 설정하여 많은 정보를 전달하고 명함을 수집하였다.
부스 방문객들에게 쌀막걸리를 한 잔씩 주며 그들의 반응을 살펴본 후, 어떠한 분야에 종사하는지 확인하였다. 위의 범주의 부합되거나 매우 큰 관심을 보일 경우, 아이싱을 막걸리의 Cocktail version 이라고 소개하며 한국에서 매우 인기 있다고 강조하였다. 아이싱 시음 후 국순당 브로슈어와 명함을 주고 상대방의 명함 또는 연락처를 요청하였다. 또한 아이싱의 경우 4%의 알코올 도수로 법적으로 애매한 영역이기 때문에 맥주를 취급할 수 있는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판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였다. ‘명작’(브랜드명)의 경우 병의 디자인에 매우 큰 관심이 있었다. 이 병이 2011 샌프란시스코 국제 와인대회 라벨 디자인 부문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퍼뜨리며 와인/주류업체 관계자들에게 중점적으로 홍보하였다.
4일간의 전시회 결과, 국순당 부스는 110여 개의 잠재고객의 명함 또는 연락처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후 동료와 함께 이들과의 꾸준한 연락을 통하여 사업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판별하였고 다양한 추가 거래처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자부심과 아쉬움의 사이
‘군맹무상’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기간이었지만, 막상 인턴을 마치고 드는 소회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여전히 ‘장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기간 동안 쏟았던 열정만은 뜨거웠다고 자부한다.
무궁무진한 해외진출의 기회를 두 눈으로 확인하였으니, 이제 그 파도의 일부가 되기 위하여 고군분투할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다국적기업의 해외영업부, 고객관리부에 입사하여 포용력 있는, 꿈을 향해 달리는, 세계적인 영업사원으로 발전해 나가고자 한다. 말레이시아 생활에서 단 한 가지 후회를 들자면 더 많은 경험을 하지 못한 순간의 선택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세상을 넓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고 계속하여 ‘나의 세상’을 넓혀가고자 한다.
김 민
말레이시아 / 쿠알라룸푸르
KMT TRADING SDN B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