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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욕심/기도
제목 : 잘못된 욕심, 잘못된 기도
성경 : 약 4:1~4
찬송 : 268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218 낙양교회 주일 오전예배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약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신자가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품고 마음과 말을 다스려야 합니다. 동시에, 특별히 종말의 관점에서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지혜와 종말을 연결시킵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영원한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종말이, 세상 속에 흩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 안에서, 그 성도들의 심령 한복판에서 함께 만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럴 때 거기 세속의 진흙탕 같은 연못 한가운데서, 비로소 정결한 꽃 한 송이가 올라오듯 하늘에 속한 그리고 영원한 나라의 향기를 풍기는 성도의 ‘정결’이 피어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말들보다 그 말들이 나온 출처를 꿰뚫어 보는 영적 통찰력을 발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다툼에 관해서 마치 어두운 창고에 수천 볼트의 조명을 비추듯이 변명의 여지가 없는 폭로 전을 펼칩니다. 그의 어조는 거침이 없고 단호합니다. 교회의 안과 밖에서 싸우고 분쟁하는 일들은 아무리 좋은 대의명분이나 화려한 신학적, 신앙적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해도, 실제로는 버리지 못한 세상의 탐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수술용 칼로 깊숙이 찌르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교회를 위하고 주를 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는 때깔 좋은 명분을 걸어 놓지만, 그 뒤에는 그냥 자기 욕심이 숨어 있습니다. 혹은 싸우기를 즐겨하는 자신의 정욕을 채우고자 벌이는 자기 ‘놀음’입니다. 이 놀음에 교회는 분쟁과 상처와 수치에 휘말립니다. 야고보는 이런 암 덩어리를 도려내고 싶어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안과 밖에서 분쟁들과 싸우는 잡음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직분을 둘러싸고 싸웁니다. 교회와 관련된 협의체들이 상석을 두고 서로 멱살을 잡고 세상의 법정에까지 끌고 가며 분쟁을 일삼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싸웁니다. 헌금 때문에 싸우고, 건축하다 싸우고, 교회가 빌린 돈 때문에 다투고, 주고받는 일 때문에 싸웁니다. 많은 경우, 대의명분이 있고 신앙적인 이유들이 넘쳐나지만, 독수리같이 날카로운 야고보의 눈앞에서는 그 속에 숨은 정욕들을 결코 감출 수 없습니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정욕
√약 4:1 여러분 가운데서 벌어지는 전쟁들이 어디에서 오며 전투들은 어디에서 옵니까? 거기, 곧 여러분 몸의 여러 부분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여러분의 이기적 욕망들에서 오는 것 아닙니까?(새한글성경)
‘여러분 가운데서 벌어지는 전쟁들이 어디에서 오며 전투들은 어디에서 옵니까?’ 혹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법 합니다. 아니, 상대방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편의 ‘말’이 맞고 상대편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상대편이 아둔하고 어리석기 때문이고, 우리 편이 ‘지혜롭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말이 지혜롭게 들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 이 모든 상황을 분쟁과 싸움으로 몰고 가게 된 그 근본적인 ‘영적 정서’ 즉 결코 하나님 앞에서는 속일 수도 감출 수도 없는 그 숨은 동기를 밝혀내고 있습니다.
‘싸움, 전쟁’(플레모스)은 격한 말입니다. 말 그대로 칼을 들고 상대를 죽여 없애는 물리적인 전쟁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뒤를 이어 2절을 봅시다.
√약 4:2 여러분은 간절히 바라지만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시샘하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전투하며 전쟁합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달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새한글성경)
여기에서 ‘죽이고 시샘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죽이고’라는 말에서 살인 이미지나, ‘시샘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으로 암살도 전쟁도 마다하지 않은 셀롯당을 떠올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이 표현들은, 야고보서가 초대교회의 종교,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정치적 억압뿐만 아니라 경제적 착취와 압박의 문제를 전쟁을 통한 무력 저항으로 풀어나가려 했던 셀롯당과 매우 근접한 문제의식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이와는 전혀 다른 해결책을 추구했던 전통이었다는 가설을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그들은 실제로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했고, 그들의 최종 목표는 수많은 소작농들에 대한 빚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정황을 가정한다면, 야고보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문제를 지적하는 셈입니다. 아마도 당시의 셀롯당원들이라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셀롯당의 활동이 배경이 되는 것을 가정한다면, 야고보가 제시하는 문제 분석과 해결책은 전혀 색다를 것이고, 그들의 눈에는 무력해 보이기까지 하는 해결책에 가까울 것입니다. 더구나 야고보의 해결책은 당시 사두개인들이 주창하고 선도했던 ‘현세주의적’인 오늘날로 옮겨 놓으면 그야말로 ‘예수 믿으면 삼중, 사중으로 복을 받는다.’가 전부였던, 과거 귀가 솔깃해지는 그런 복음도 아닙니다. 야고보는 그야말로 구닥다리 전통, 곧 그가 전해 듣고 그 자신도 그대로 전하는 예수님 자신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싸움과 분쟁은 겉으로 드러나기 훨씬 이전에, 사람의 속에서부터 일어납니다. 1절에 “여러분 몸의 여러 부분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여러분의 이기적 욕망들에서 오는 것 아닙니까?”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우리 인간들은 정욕에 이끌려 시험을 받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이 그 근원입니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즐기는 정욕이 문제입니다. 악한 줄을 알지만 그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사실, 옳고 그른 것보다 타락한 인간에게 호소력이 있는 악을 즐기는 정욕, 싸움을 즐기는 정욕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다투는 것은 겉으로는 ‘진리를 위한 고상한 투쟁’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악한 성향을 진리에 대한 논쟁으로 덮어씌운 위장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처참한 현실입니까?
야고보는 이미 어떤 이의 ‘말만’ 듣지 말고 그 행동을 주시하며, 더욱 그 말이 동반하는 영적 정서를 분별하여 깨달음으로써 그 말의 출처, 기원을 가늠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말다툼이나 분쟁, 옳고 그름에 대한 논변들이 다 부질없습니다. 그것들은 그것이 정당화하고자 하는 “싸우기를 즐겨하는 정욕”, 곧 서로 상처주고 헐뜯고 죽이고 망하게 하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그런 악한 정욕의 불을 꺼버리지 않으면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연코 그들 안에 ‘심겨 있는 말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태도도 아닙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의 특징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 지혜는 땅에 속해 있고, 죽이며 멸망시키는 마귀적인 것입니다. 어찌 이것보다 더 뚜렷한 어떤 다른 특징을 구하겠습니까?
√다투고 싸워도 얻지 못함
√약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2절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 욕심(에피쑤메이테) 혹은 정욕이, 그들 안에 있는 싸우기를 즐겨하는 정욕에 의해 격동되고 이끌릴 때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그리고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밝혀줍니다.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정욕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선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없이는 인간으로서 살 수 없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식욕’을 생각해 봅시다. 식욕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음식을 거부하게 되고 그러면 영양실조가 되어 마르게 되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식욕이 넘쳐서 과식이나 과음을 하게 되면 병이 생기게 되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욕망은 인간의 생존 조건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있어서 어떤 욕심이 일어나 그것을 추구할 때, 그 추구하는 대상이 잘못되었거나, 혹시 그것을 얻는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그것을 얻으려하는 목적이 잘못되었을 경우, 그때 그런 정욕은 채워진다 해도 그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를 결코 얻지 못하는 허망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죽이고 시기하여도 쟁취하지 못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싸워도 결코 그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욕심대로 해서 싸우고 다투고 죽이고 분쟁해서 얻었는데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능하지 못하다’(두나스쎄)는 표현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야고보 ‘능하다’는 개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신자들 안에 섬긴 말씀은 그들은 구원할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1:21).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를 구원할 ‘능력 없는’ 믿음으로 드러난 셈입니다(2:1-4). 오직 하나님만이 법을 명하시며 그 법에 따라 심판도 하실 ‘능하신’ 분이십니다(4:12). 이처럼 능하다는 표현은 야고보에게 있어서 어떤 것의 본질이 참되고 실효성이 있는 진짜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로 쓰입니다. 2절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들이 다투고 싸워도 능히 쟁취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구하는 방식이 단지 실효성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본질에서 옳지 않고 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들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왜 구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구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런 식으로 구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결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점을 설득하려 합니다. 이것은 야고보가 이미 2:12~16절에서 생생하게 묘사한 그대로입니다. 생명을 얻고자 죄를 잉태하면 단지 사망을 낳을 뿐입니다.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16절). 지금 이 문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못된 대상을 향해, 잘못된 방식으로, 잘못된 목적으로 얻고자 다투고 싸운 것으로는 결단코 그들의 욕망, 그들의 정욕을 채울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기도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하라! 즉, 하나님께 구하라. 이 처방 자체가 치유이면서 동시 그들의 문제점을 정확히 폭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욕심을 내고 정욕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정욕들을 채우는 대상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 대신 세상을 끌어들였습니다.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더구나 그 정욕들을 채우는 방법으로 ‘온유함’을 택하지도 않았고, ‘화평 가운데 온유함으로 행함’을 택하지도 않았습니다. 곧 성도가 되었어도 그들 안에 심긴 말씀이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에 사로잡혀 그 말씀과 지혜를 따라 행하는 대신, 지옥 불과 같은 악한 충동과 말로써 다투고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들은 하나님께 구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야고보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폭로한 것도, 아무리 말과 지혜로 화려하게 자신들을 치장해도, 그들은 그 원하는 바를 추구할 때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은 그런 영적 자세로 일관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1:5,17) 그분께 구하지 않았을까요? 그 해답이 바로 3절에 있습니다. 그들이 ‘잘못 구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혹시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투기를 즐겨하는 정욕대로 서로 싸우고 시기하고 죽이려 드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있는데도 다툼을 그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는 이런 일이 당연합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영광이요, 주의 일이라고 치장하지만, 그리고 말로는 주를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고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그 바라는 바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정 무어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먼저 결정해버립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나에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그 확신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비전으로 그려놓고, 그 원하는 비전을 그림으로 그려서 벽에 붙여놓고, 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혹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 이미 받았다고 믿음으로 말하고 다녀도,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뒤집거나 취소할 수 없도록 스스로 확고하게 결정해버린 그 자신의 욕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3절을 깊이 고려하면,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할 때,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하나님께서 결정하도록 한다면, 과연 그것이 내게 필요한지도 다시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의 그 대상과 그것을 얻는 방법과 그것을 얻고자 하는 목적까지 모두 포함해서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결정권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핵심입니다.
√내 욕심, 내 정욕이 원하는 바와 그것을 얻는 방법과 그것을 얻고자 하는 목적까지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구하는 간구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그것이 무엇이든 풍성하고 온전합니다. 그것은 변질되지 않고 속이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선하고 완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단지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그 대상과 방법과 목적까지 정해놓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며 구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구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기도하며 구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그대로를 받을 의향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그것을 구하고 있는지도 결정해 놓았고, 그것을 바꿀 의향이 없기 때문에 구해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르지 않은 교회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할 때 세상이란 ‘하나님이 안중에 없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짝하면 어쩔 수 없이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벗되어 살 수도 있고, 혹은 교회 생활하면서 그 한복판에서 세상과 짝하여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인들아’라는 말은 매우 심각한 표현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라는 말은 남편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남편이신 하나님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남편을 놔두고 외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음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간음했습니다.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을 함께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듭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상 속에서 살기에 그런 유혹을 항상 받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 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주로 부나 재물의 문제 때문에 시험 든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예수 믿고 부자 된 성도들, 혹은 부자로서 예수 믿은 형제들이 그 세상의 부를 자랑하여 거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형제들이 그들을 부러워하여 속으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쟁하고 싸우는 데에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는 부나 재물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비참한 것은, 부나 재물이 전부인 것처럼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이 있어서 자랑하거나, 혹은 없어서 부러워하거나 하는 그런 심령상태입니다. 그 속에 세상이 꽉 들어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간음하는 자’의 심령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뉜 마음이고 두 마음입니다. 그것으로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적이 되지 않을 것이 없는 그래서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복 받기 원하십니까?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믿어서 받는 복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복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합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비참과 온갖 가난 속에서 인간은 복을 갈구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틀림없이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처럼 복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은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하나님께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해달라고 간구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태양은 오늘도 찬란하고, 매순간 마시는 공기는 여전히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셨고, 항상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복음이란 예수 믿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 믿고 받는 복들은 모두 이 세상에 갇혀 있습니다. 이 세상이 끝나면 그 복들도 끝납니다. 그 복들이 하찮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복음다운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주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주고자 하는 가장 큰 선물을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삼위 하나님이 계시면 이 세상이나 장차 오는 세상이나 모두 천국입니다.
예수 믿고 건강의 복, 물질의 복, 자녀의 복을 받는 것을 복음이라고 말하면, 그런 복들을 받지 못한 신자들은 예수님을 잘못 믿은 것이 됩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 받은 복들을 제쳐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할 때, 그렇게 해서 받은 복들보다 예수님의 뜻을 더 좇아야 할 때, 그런 복들을 쉽게 놓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은 목적이 그런 복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이 사라진다면, 예수 믿는 것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으로는 하나님을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복 받자고 하는 신앙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부차적이고, 종종 복을 받기 위한 조건에 그칩니다. 정말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자신이 받은 복들을 놓아야 할 때, 그런 신앙은 좌초합니다. 목적과 결과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복 받는 것을 신앙의 기초로 놓으면 망합니다.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그 땅에서 은혜로 모든 것을 받고 누렸던 이스라엘이 그런 식으로 망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이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명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소유로 남아, 하나님의 이름을 짊어지고 그 이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이 따라 옵니다. 하지만 안 따라와도 그만입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 종말의 복이 이미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온유한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을 신앙의 주된 내용으로 삼으면 그래서 망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자도 망하고 그렇게 듣고 행하는 자도 함께 망합니다. 예수님이 복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잘못된 욕심으로 잘못된 기도를 드린 자신을 돌아보면서 오직 먼저 구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