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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01> 조봉암과 진보당, 아홉 번째 마당
프레시안 : 1954년 5.20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을 지지하는 사람에게만 공천을 주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선거가 끝난 후 이제 헌법을 바꾸는 문제가 주요 정치 현안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서중석 : 개헌 문제가 급박하게 대두된다. 자유당은 개헌 정족수인 재적 인원의 3분의 2를 채우기 위해 국회의원을 계속 끌어들인다. 김두한이 그때 종로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지만 그런 김두한도 선거법에 걸릴 만한 게 많이 있지 않았겠나. 그러니 김두한도 여기에 넘어왔다. 김두한의 약점을 쥐고서 그런 식으로 한 것인데, 어쨌건 그런 방식으로 3분의 2가 넘는 136명을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확보했다. 그것으로 됐다 싶었는데 7월 2일 역사상 처음으로 국무원 투표라는 걸 했다. 뭐냐 하면 새로운 변영태 총리를 선두로 한 국무원이 구성됐는데, 이 변영태와 다른 국무원들을 일괄해 신임 투표를 한 것이다. 법 해석을 가지고도 이때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이 투표를 했다. 그랬는데 인준을 못 받았다. 재적 과반수(102표)만 획득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조차 인준이 안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자유당은 '이러니 어떻게 개헌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위기에 빠진다.
그런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 7월말 이 대통령은 미국 상하 양원 합동 회의에서 "우리들은 당장 행동을 개시하자"고 하면서 "소련의 생산 중심지를 파괴하자"고 이야기했다. 소련이 수소탄을 대량 생산하기 전에 그렇게 하자는 주장까지 하고 나선다. 미국 정부 인사들과 미국 의회 의원들은 기겁을 했다. 남의 나라 정치인이 와서 3차 대전을 일으키자고 하니, 참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세계적 위인, 세계적 반공 지도자라는 걸 미국에 가서 확실히 보여줬다', 이런 식으로 됐고 이 양반이 돌아오자마자 북진 통일 운동이 또 새로운 형태로 일어나는 걸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면서 9월 6일 자유당은 이기붕 외 135명이 서명해서 드디어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건 재적 의원 3분의 2를 넘는 숫자다. 그런데도 자유당은 겁이 나서 표결을 할 수가 없었다.
뉴델리 밀회 사건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자유당
프레시안 : 소련을 정말 공격했다면 그건 핵전쟁을 기본으로 한 3차 대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할 턱이 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을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주장을 공개석상에서 했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수많은 사람이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한국전쟁을 겪은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다시 돌아오면, 자유당은 왜 그토록 겁을 낸 것인가.
서중석 : 왜냐하면 당시 여론 조사만 보더라도 그 결과가 너무나 나빴다. 개헌안의 골자는 크게 봐서 네 가지였다. 하나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이었다. 얼마든지 대통령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1952년 발췌 개헌 때는 시일이 워낙 촉박했고, 이 중임 제한 철폐 문제까지 내놓으면 문제가 더 복잡해지니까 그때는 못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대통령제 강화였다. 국무총리제를 없애고 국무원의 힘을 약화시켜 대통령을 중심으로 몰고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국민투표제였다. 지금 중공 등에 의해 중대 상황, 국가 위기가 생길 것 같은데 그럴 경우 국민투표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네 번째는 경제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제헌 헌법에는 통제 경제 내지 사회주의적 균등 경제를 강조하는 요소가 상당히 있지 않았나. 국유화, 공영화도 강조했다. 그런데 그걸 전면적으로 바꾸라고 미국이 수년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한 요구에 맞춰 자유 경제 체제로 방향을 전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개헌 골자였는데, 다른 것도 다 인기가 없었지만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이 특히 그랬다. <한국일보> 여론 조사를 보면 16.9퍼센트만 찬성하고 78.8퍼센트가 반대한다고 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 내 반란표가 안 생기리라고 어떻게 보장하느냐, 이 말이다. 그런데 하늘이 자유당을 돕는 일이 생겼다.
▲ 해공 신익희. ⓒ연합뉴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유명한 뉴델리 밀회 사건이 발생한다. 이름만 보면 스파이 사건 같기도 한데, 야당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졸아들고 있던 민국당의 선전부장 함상훈이 10월 27일 '전 민국당우에게 고함'이라고 하면서 "우리 당에 제3세력이 침투했다"고 주장했다. 제3세력은 그전에는 주로 조봉암을 가리켰다. 극우 반공 세력을 제1세력이라고 하면 제3세력은 중도파,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함상훈은 민국당 당수인 신익희를 제3세력으로 몰아갔다.
신익희가 1953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 국가를 대표해 국회 의장으로서 참석했는데, 귀국할 때 인도 뉴델리에 들러 조소앙(한국전쟁 당시 납북)을 만났다는 주장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이 양반은 그때 대관식을 하고 지금까지 60년 넘게 여왕으로 있는데, 어쨌건 그 시기에 신익희가 남북 협상 문제에 관한 밀담을 조소앙과 나눴다는 것이었다. 협상파는 다 제3세력이었다. 그러고 나서 북한에서 조소앙의 밀사 오경심이라는 여자가 내려와서 신익희를 또 만났다는 것이다. 이것도 정말 어이없는 주장을 한 것인데, 민국당 내 옛 한민당 핵심 세력들이 신익희가 다음 대선에 못 나오게 하고 자기들이 나가려고 이런 짓을 꾸미지 않았나 싶다. 이걸 뉴델리 밀회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때 신익희와 동행했던 김동성 국회 부의장이 그건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걸 국회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그것으로 이 사건은 끝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유당으로서는 드디어 큰 것을 문 것이다. 이건 국가에 관한 중대사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물고 늘어져 공안 분위기, 긴장을 고조시키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긴급 동의로 국회에서 '남북 협상, 중립화 배격 결의안' 등 아주 강경한 결의안을 연달아 막 제출해 통과시켰다. 국회 바깥에서는 드디어 또 민의대가 동원되기 시작해 지방 의회 의원들이 속속 올라와서 개헌안 통과 촉구 결의문을 전달하고, 반공혈전대사령부라는 이름으로 "민국당은 역적"이라는 유인물이 나돌았다.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은 '휴전 감시 위원단 중 적성국 대표들은 일주일 이내에 철수하라. 불응하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이게 헌병 총사령관이 할 이야기가 전혀 아닌데도 그렇게 하면서 분위기를 돋웠다. 또 서울운동장 같은 데서는 총궐기 대회 등을 대대적으로 열었다. 그러면서 공안 정국을 띄우는데, 이때부터 1990년대 초까지 그야말로 40년간 공안 정국이라는 걸 맛보게 된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사오입 개헌 밀어붙인 이승만 정권
프레시안 : 공안 정국 조성은 예나 지금이나 지배 세력이 뭔가 딴마음을 품고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다. 자유당 정권은 이때 무엇을 노리고 그렇게 한 것인가.
서중석 : 이렇게 공안 정국을 형성해 안보 공세로 나아가고 긴장을 고조시킨 것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자유당 내분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반란표가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자유당뿐만 아니라 무소속 중에도 유동적 의원들이 많았는데, 이런 쪽 사람들 사이에서도 '긴장 분위기이니 위기 상황에서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고 그걸 또 개헌안에 있던 국민투표제와 연결하고 그랬다.
그러면서 자유당 지도부에서는 몇 번이고 표 검사를 했을 것 아닌가. 이제는 틀림없다 싶어서 11월 20일에 상정해 11월 27일 표결에 부쳤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당이 원한 것과 아주 동떨어진 결과가 나왔다. 최순주 국회 부의장이 사회를 봤는데 재적 203명 가운데 202명이 참석해 가 135, 부 60, 기권 7, 그렇게 해서 1표 차이로 부결됐다. 그래서 최순주가 이 개헌안은 부결됐다고 하면서 '땅땅땅' 두드렸다.
그런데 그다음 날인 11월 28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국회도 아니고 자유당도 아니고 정부에서 갈홍기 공보처장이 '국회의원들은 사사오입(반올림)도 모르냐'고 하면서 수학적으로 사사오입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개헌안이 통과됐다는 게 정부 견해라고 밝혔다. 아니, 국회에서 결의하고 나서 정부가 이런 설명을 하면 또 모르겠는데, 국회에서는 부결됐다고 명백하게 처리한 것을 가지고 정부에서 그건 통과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다음 날인 11월 29일 야당 의원들이 총퇴장한 가운데 최순주는 다시 '개헌안 부결 번복 가결 동의안'이라는 긴 이름의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게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이다.
프레시안 : 사사오입 개헌은 언제 들어도 어이없고, 관련자들이 두고두고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국 정치의 민낯이다. 전장에선 장병들이 쓰러지고 방방곡곡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고통을 받던 1952년 우격다짐으로 발췌 개헌을 한 데 이어 2년 만에 그런 일을 또 벌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서중석 : 사사오입 개헌으로 자유당은 영구 집권을 할 수 있게 됐고, 그야말로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국회의원들, 특히 여당 국회의원들은 거수기가 됐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권이나 이 대통령이 꼭 이득만 본 건 아니었다. 시민들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다. 그렇지 않나. 누가 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 아닌가. 자유당 정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 냉소적인 태도 같은 것이 한껏 고조되기 시작했다.
야당은 대단한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이거 우리 야당 쫄딱 망하는 것 아냐? 이렇게 되면 야당이 할 일도 없어지게 되는 것 아냐?' 그러면서 '새로운 야당으로 탄생해야겠다. 범야당을 만들어내자'는 움직임이 호헌동지회라는 야당 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다. 정치적으로 매장당하고 쫓겨났던 조봉암이 이래서 다시 살아나고 화제의 초점이 되는 일이 생기게 된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조봉암을 배척하고 탄생한 0.5 보수 야당, 민주당
프레시안 : 야권을 아우르는 새로운 정당 건설 운동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나.
서중석 : 호헌동지회에는 민국당은 물론이고 무소속까지 합쳐서 61명의 의원이 참가했다. 여기서는 모두 '이제는 야당이 하나로 뭉쳐서 이승만 정권하고 대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에는 잘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바로 양 파로 갈라졌다. 하나는 조병옥, 장면, 곽상훈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파였고 다른 하나는 장택상, 서상일, 신도성 등을 중심으로 한 민주대동파였다. 서상일은 한민당, 민국당의 중진이었고 신도성은 한민당 이래 민국당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이런 이름이 생긴 이유는 간단했다. 자유민주파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조봉암을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조봉암은 사절한다. 이 당에 못 오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민당의 지주라고 볼 수 있는 김성수는 그 당시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런 김성수가 '조봉암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까지 이야기했는데도 자유민주파는 완강하게 버텼다. 이와 달리 민주대동파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은 뭉치자. 그러니까 조봉암은 당연히 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 자유민주파는 왜 그토록 강하게 조봉암의 합류를 막으려 한 것인가.
서중석 : 우선 한민당 골수 세력은 조봉암하고 숙원 관계였다. 한두 해 그런 게 아니었다. 수많은 사건과 세월을 두고 원수,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같은 관계였다. 이런 점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곧 선거가 있는데 조봉암이 들어와서 휘젓고 다니면 다음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가 누가 될 것인가. 조봉암은 지난번 대선 차점자 아니냐',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을까라고 보는 견해도 많았다. 신익희도 대통령 선거에 나오려 했고, 조병옥과 장면 역시 적어도 부통령 후보로라도 나오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경우건 '조봉암이 들어오면 아주 어렵다. 문제가 심각하다', 이걸 느낀 것이다. 그래서 자유민주파를 중심으로 1955년 9월 민주당이 생겨나게 된다.
신익희를 대표 최고위원으로 한 민주당 출범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야당들은 이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무지하게 좋아한다. 야당이 가장 선호하는 이름이 신민당과 함께 바로 이 민주당이다. 왜냐하면 1955년 이후의 민주당, 이게 국민들한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민주당이 실제 내건 것 자체는 별것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내각 책임제 그리고 '자유 경제를 원칙으로 한다', 이 두 가지가 핵심이었고 다른 건 별게 없었다. 그리고 민주당은 권력을 정말 장악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정당이라고 사람들이 보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비실비실한 면이 보였다. 정책적으로도, 새로운 정부를 떠맡을 수 있는 대안자로서도 능력이 있는 정당이라고 사람들이 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 민주당을 0.5 야당 또는 0.5 보수 야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왜 민주당이 사랑을 받았느냐. 이승만 정권한테 되게 당하면서 참 힘들게 야당 노릇을 했다는 것도 있지만, 도시민의 불만을 야당이 해소해주기를 바라는 강한 분위기가 이 시기에 형성되고 있었다. 이때는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던 시기 아닌가. 그래서 야당이 좋아서 야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이승만 정권과 여당이 미워서 야당을 지지하는 한국적 현상이 바로 이때부터 나타난다. 이건 나중에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이 미워서 야당을 지지하는 모습으로 이어지고 어떤 면에서는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도 민주당의 출현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진보 정당 결성 움직임과 조봉암의 구상
프레시안 : 민주당 탄생 과정은 그 후 한국 야당이 보인 반공주의적 속성의 근원을 잘 드러낸다. 아울러 바로 이해(1955년) 이웃 나라 일본에서 자민당이 결성되며 '55년 체제'(자민당의 압도적 우위를 기본으로 한 자민당-사회당 양당 체제)가 만들어진 것과 대비하며 음미할 대목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일본에서는 자민당-사회당의 보혁(보수·혁신) 체제가 이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약 40년간 계속된다. (자민당은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할 때까지 38년에 걸쳐 장기 집권한다.) 한국의 경우 자유당과 민주당은 뿌리가 같다. 둘 다 분단 반공 세력으로 불리지 않나. 따라서 이 당시 진보당이라는 것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면 한국에서도 새로운 정당제로 차라리 보혁 제도가 발전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
그것이 9월 1일 광릉 회합으로 나타난다. 뭐냐 하면 해방 직후에는 좌파가 무지하게 많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좌파가 활동하기가 굉장히 어렵게 되지 않나. 그 후 잔존한 진보 세력의 다수가 9월 1일 광릉에 모였다. 이걸 광릉 회합이라고 부른다. 이때 조봉암은 물론이고 서상일, 장건상, 정화암, 최익환, 박용희, 서세충, 정이형처럼 한때 유명했던 원로들과 함께 윤길중, 신도성, 김기철, 이명하, 조규희 같은 신진, 청년들도 모였다. 전쟁에서 잔존한 진보 세력이 상당수 망라됐는데, 이렇게 모임을 한 것도 1956년 선거를 의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나온다.
프레시안 : 진보 정당의 조직 방식, 노선 등을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조봉암은 일종의 용광로론을 제시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광릉 회합 이후 여러 차례 회합을 하면서 많은 논란이 오갔다. 지도층 구성에서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갖고도 논란이 일었고, 노선 문제에 대해서도 진보 세력으로서는 또 논란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장건상, 정화암 등은 선이념 통일, 후창당을 주장했다. 먼저 이념을 통일하고 나서 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봉암은 선창당, 후이념 통일을 주장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념 통일부터 먼저 하려고 하면 신당 발족은 백년하청이다, 이 말이었다. 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정당은 정치 단체이지 사상 단체가 아니라고 조봉암은 주장했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들을 한 가마 속에 다 털어 넣고 거기서 쇠는 쇠대로, 금은 금대로 가려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이건 현실론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진보 세력 또는 혁신 세력은 굉장히 다양했다. 일제 때 어디서 활동했느냐, 이것부터 다 달랐다. 예컨대 만주, 노령 지방, 중국 관내, 일본, 국내 중 어디서 활동했느냐에 따라 사상적으로 차이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 후 그 복잡한 정국에서 여러 가지 이합집산이 있었고 전쟁을 겪으면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그랬나. 그런 여러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진보 세력을 어떻게 결집할 것인가 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니까 먼저 당을 만들어놓고 당을 운영하면서 거기서 구체적인 논의를 해나가자, 이게 조봉암의 생각이었다.
나중에 진보당을 보면 진보당이 인적으로 복잡하게 구성돼 있었던 걸 알 수 있다. 그게 한국적 혁신계다. 어떻게 보면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 아니냐,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이념이 상당히 다른 사람들이 민중당도 만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나.
"피해 대중의 자각과 단결" 강조한 진보당 발기 취지문
프레시안 : 우여곡절 끝에 진보당이 그 지향을 세상에 드러내는 단계에 접어든다.
서중석 : 1955년 12월 22일, 드디어 진보당 발기 취지문과 강령 초안이 발표된다. 진보당이라는 이름은 조봉암이 주장한 것인데, 진보당 발기 취지문과 강령 초안 발표는 우리나라 진보 세력의 노선, 길에서 아주 중요한 새로운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제3의 길을 제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발기 취지문에는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걸 깊이 인식하고"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이것도 조봉암이 집어넣은 것으로 돼 있다. 여기서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이라는 게 뭐냐 하는 것이 나중에 크게 논란이 된다. 진보당 사건을 일으킬 때 극우 반공 세력은 '이게 바로 노농 독재를 하려는 주장'이라는 식으로 해석했다.
강령을 보면 "공산 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한다고 돼 있다. 1946년 방향 전환을 할 때 이미 주장한 것인데, 조봉암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 주장을 했다. 제일 논란이 되는 것으로 통일 문제가 있는데, 여기서도 아직 평화 통일을 주장하지는 못했다. 다만 "민주 우방과 제휴하여 민주 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 통일의 실현"을 말했다. 이건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의 극우 세력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일 텐데, 표현을 그렇게 했다.
진보당을 만들기 위한 작업은 진보당 추진 준비위원회 구성으로 이어졌는데, 대통령 선거가 눈앞에 닥쳐버렸다. 1956년 3월에 가서 진보당 추진위원 208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여기에는 조봉암, 이동화, 서상일, 윤길중, 신도성처럼 이름 있는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지만 원내 의원은 신도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유명한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도 여기 들어왔다. 그걸 보면 김두한도 뭔가 생각하는 게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출 처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126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