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25)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3장 명군 명신 (8)
중산(中山)은 위(魏)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다.
정벌하기도 힘들었지만 지키기는 더욱 어려웠다.
위문후(魏文侯)는 특별히 세자 격(擊)을 중산군(中山君)에 임명하여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중산무공의 손자 중 한 사람인 중산환공(中山桓公)은 끈질기게 저항하여 수십 년 후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재건된 중산국 역시 조(趙)나라에 의해 재차 멸망한다.
한편, 영토를 동쪽으로 늘린 위문후(魏文侯)는 여전히 국방과 내정에 힘을 쏟았다.
위나라가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위문후와 그 신하들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업(鄴)이라는 땅이 있었다.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 일대로, 한(韓)나라의 상당(上黨)과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사이에 있는 고을이었다.
즉, 위ㆍ한,ㆍ조 세 나라가 국경을 이루는 곳이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다.
한(韓)나라도, 조(趙)나라도 호심탐탐 그 땅을 노렸다.
위문후(魏文侯)는 어떻게 하면 도읍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업(鄴) 땅을 잘 지키고 다스릴 수 있을까 고심했다.
명장 악양을 천거한 바 있는 적황(翟璜)이 위문후의 마음을 짐작하고 또 한 사람의 인재를 천거했다.
"업(鄴) 땅을 지키고 다스릴 만한 사람으로는 서문표(西門豹)밖에 없습니다."
서문표라면 악양과 더불어 중산국을 공격하여 중산성을 점령한 사람이 아니던가.
위문후(魏文侯)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서문표는 무재(武才)에 능한데, 과연 그가 업(鄴) 땅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서문표(西門豹)는 심지가 굳을 뿐 아니라 지혜롭기까지 합니다. 황폐해진 그 땅을 잘 다스릴 것입니다.“
여러 차례 적황(翟璜)이 천거한 사람으로 인해 재미를 본 위문후(魏文侯)는 곧 서문표를 업 땅의 수장(守長)으로 내보냈다.
서문표(西門豹)는 업(鄴)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당도한 순간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업은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번화하고 복잡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정반대였다.
거리는 텅 비다시피 쓸쓸했고, 농토는 황량했다.
무엇보다도 거주민이 많질 않았다.
마치 저주받은 고을 같았다.
변경 지역이라서 그런가보다 여긴 서문표(西門豹)는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몇몇 백성들을 불러 물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애로사항이 무엇인가?“
백성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희들은 하백(河伯)이 자주 부인을 얻는 바람에 못살겠습니다.“
하백이라면 하천을 다스리는 수신(水神)이다.
서문표(西門豹)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하백이 어찌 부인을 얻을 수 있단 말이냐? 좀더 자세히 말해 보라."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곳 마을 밖에는 장수(漳水)가 흐릅니다.
저희들이 말하는 하백이란 바로 그 장수의 신(神)이지요.
그런데 그 수신(水神)은 어찌나 여자를 좋아하는지 해마다 장가를 듭니다.
그 부인을 대느라 우리는 뼈가 다 휠 지경입니다.
만일 처녀를 구하지 못해 부인을 바치지 못하면 홍수가 일어나 농토는 물론 인가(人家)까지 다 떠내려가는 재난을 당하지요.“
"하백(河伯)에게 처녀를 바쳐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냐?“
"이 고을 무당입니다.“
백성들의 얘기는 이러했다.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큰 비가 내려 농사를 망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영험이 뛰어난 여자 무당 하나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 무녀를 대무(大巫)라고 불렀다. 큰 무당이라는 뜻이다.
대무(大巫)는 백성들에게 말했다.
- 이곳 하백(河伯)은 아름다운 처녀를 좋아하신다. 일년에 한번씩 장가를 들게 하면 수재를 면할 수 있으되, 그렇지 않으면 이 고을은 망한다.
그때부터 백성들은 번갈아 처녀를 내어 수신(水神)에게 바쳤다.
그런데 그것만이라면 그래도 견딜 만했다.
혼례식을 치룬답시고 무당과 관속과 이 고을의 세도가인 세 노인이 서로 짜고서 백성들로부터 수백만 금의 비용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그 방법 또한 실로 교묘했다.
농사철이 되면 대무(大巫)는 제자인 소무(小巫)들을 거느리고 처녀가 있는 집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처녀가 있는 집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말한다.
- 이 처녀야말로 하백의 신부감이다.
자기 딸을 하백에게 내주기 싫은 그 집 부모는 대무에게 많은 재물을 바치며 애걸한다.
- 이 아이는 병이 있어 하백의 부인이 될 수 없습니다.
대무(大巫)는 재물을 잔뜩 뜯어내면 다른 집으로 또 처녀를 고르러 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부자일 수는 없다.
결국 가난한 백성의 집 딸만 빼앗기는 셈이 되는 것이다.
처녀를 고른 대무(大巫)는 장수 강변으로 가 그곳에 있는 재궁(齎宮)에 처녀를 집어넣는다.
그곳에서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후 하룻밤 재워 날이 밝으면 갈대로 엮은 배에다 처녀를 태운다.
갈대로 엮은 배는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다가 이내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 이로써 저 처녀는 하백의 부인이 되셨도다!
대무의 이 같은 외침을 마지막으로 하백의 혼례식은 끝이 난다.
"해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백성들이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또 딸 가진 부모들은 딸을 빼앗길까 염려하여 늘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아예 이곳을 떠나 먼 곳으로 달아나기 때문에 보시다시피 고을이 쓸쓸하고 황량합니다."
백성들의 하소연을 다 듣고 난 서문표(西門豹)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장수의 수신(水神)이 그렇듯 영험하다고 하니 나도 그 혼례 치르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너희들은 그때가 되거든 나에게 기별하라."
과연 얼마 후, 대무(大巫)가 돌아다니다가 어느 집 처녀를 하백의 신부감으로 점을 찍었다.
재궁에서 하룻밤 보낸 처녀를 갈대로 엮은 배에 태워 강물로 떠내려 보내는 날이 되었다.
전에 부탁을 받은 백성 중 하나가 서문표(西門豹)를 찾아와 혼례식이 치러질 것임을 알려주었다.
서문표는 의관을 갖추고 장수(漳水)가로 나갔다.
과연 그곳에는 고을 관속과 유지임을 자처하는 세 노인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백성들도 그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백사장을 가득 메웠다.
마을 유지라고 하는 세 노인과 관속들이 신임 수장(守長) 서문표를 찾아와 대무(大巫)를 소개하며 인사시켰다.
대무는 태도가 거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눈만 깜빡였다.
쉰 살이 조금 넘은 못생긴 여자였다.
대무 뒤편으로는 20여 명의 젊은 무녀들이 호위하듯 따르고 있었다.
소개를 받은 서문표(西門豹)가 늙은 대무를 향해 말했다.
"해마다 백성들을 위해 수고가 많도다. 나는 평소에 호기심이 많다.
오늘 하백에게 시집가는 신부의 얼굴을 보고 싶으니, 잠시 이리로 데려오라."
대무(大巫)는 제자들을 시켜 처녀를 데려왔다.
그 처녀는 나이가 어렸으나 얼굴은 그다지 이쁜 편이 아니었다.
서문표(西門豹)가 대무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명색이 하백에게 바치는 여자인데, 어찌 이렇듯 아름답지 못한 처녀를 구했단 말인가.
수고스럽겠지만, 너는 직접 하백에게 가서 '천하절색(天下絶色) 미인을 구해 바칠 터이니 며칠만 기다려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고 오너라.“
그러고는 자신이 데리고 온 병사들에게 명했다.
"이 늙은 무당을 하백(河伯)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어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이 달려들어 대무(大巫)를 번쩍 들어안았다.
그러고는 배에 태워 강심으로 나가 강물 깊은 곳에다 던져버렸다.
"으악!"
대무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경실색(大驚失色)했다.
서문표(西門豹)는 한동안 물가에 서 있다가 병사들을 향해 다시 분부했다.
"무당이 늙어서 건망증이 심한 모양이다. 하백에게 가더니 돌아와 보고할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
하백(河伯)이 기일을 연기해줄지 어떨지 나는 몹시 궁금하다. 얘들아, 늙은 무당의 제자를 다시 한번 보내보아라."
병사들이 젊은 무녀 하나를 덜렁 들어 안아 강물 속에 내던졌다.
잠시 후, 서문표(西門豹)가 또 말했다.
"어허, 그 스승에 그 제자로다. 어이하여 가기만 하면 이리도 소식이 없는 것이냐. 하나씩 보낼 것이 아니라 무더기로 보내봐야겠다."
강변 백사장에 한차례 요란스런 비명이 일었다.
그러나 젊은 무녀들이 병사들의 힘을 이겨낼 리 없었다.
병사들은 몸부림쳐대는 소무(小巫)들을 모조리 잡아다 강물 한가운데로 내던졌다.
얼마 후에 서문표(西門豹)는 또 말했다.
"아무튼 여자들이란 믿을 것이 못 된다. 기껏 심부름을 시켰더니 하백에게 잘 전하지 못했나 보다. 이번에는 마을의 유지들을 보내보자"
곁에서 지금까지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세도 있는 세 노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몸을 뒤로 빼며 황급히 대답한다.
"저희는 바쁜 일이 있어 분부를 거행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별안간 서문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이놈들! 어서 가서 하백에게 나의 뜻을 전하지 못할까!“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세 노인을 잡아 강물 속에 처넣었다.
뒤에서 구경하던 백성들 사이에 수근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이번에 새로 부임해오신 태수는 보통 분이 아니시네. 참으로 통쾌하군.“
"명관(明官)이 나셨네. 어쩌면 저렇듯 태연하게 일을 처리하실까."
서문표(西門豹)는 여전히 의관을 바로한 채 강물 속으로 들어간 세 노인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는 또 말했다.
"거참 이상하다. 어찌하여 하백(河伯)을 만나러 간 자들마다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아무래도 이번 일을 주관해온 관리들을 보내야겠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무당과 짜고 재물을 긁어온 관속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서문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서문표(西門豹)는 정색하고 관속들을 향해 꾸짖었다.
"너희들은 듣거라. 수신(水神)이란 것이 정말로 있느냐? 있으면 어디 내보아라.
너희들은 해마다 죄 없는 처녀를 잡아다 물속에 빠뜨리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너희들의 죄는 천 번 죽어 마땅하다."
"어리석은 저희들은 늙은 무당에게 속았을 뿐입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그동안 무당들과 세 세도가에게 빼앗은 재물을 모조리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돌려주어라.
이후 또다시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자가 있으면 능지처참형에 처하리라."
그 후로 업(鄴) 땅에는 무당이 사라졌다.
이 소문이 퍼지자 타향으로 떠나갔던 백성들이 차차 고향인 업으로 돌아왔다.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관리와 무당을 타파한 명관 서문표의 일화는 재미날 뿐 아니라 상당히 상징적이다.
오늘날도 혁신(革新)은 어렵다.
지혜도 필요하거니와 웬만한 용기가 없고서는 기존의 제도나 세력을 이겨낼 수 없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