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서재필이 망명지 미국에서 귀국했다. 미국 국적을 가진 계몽주의자 필림 제이슨으로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를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지각 때문"이라고 있던
그였다. 왜 대중은 부지몰각했는가. 1884년 서점 한 군데도 없고 정부가 펴내는 언문책이라곤
삼강오륜 같은 유교 교리서만 있던 때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후 수신사들 보고서는 비단
장정본으로 만들어 곧바로 왕실 도서관으로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개화를 읽을 수
없었고, 대중에게 개화는 악이었다.
일본 근대화는 대중이 개화를 알았기에 가능했다. 일본에서는 개화파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1866) 초판이 15만 부가 팔렸고 <학문을 권함》(1872)은 해적판을 포함해
300만 부가 팔렸다. 1871년 겨울 미 국과 유럽으로 떠났던 이와쿠라 사절단은 7년 뒤
<미구회람실기>라는 100권짜리 보고서를 만들어 '국민의 일반적 이익과 개발을 위해'
공개 출판했다. 적합한 일본어가 없어 그림을 많이 쓴 덕에 오히려 대중의 이해가 쉬웠다.
게다가 모두 한문이 아닌 일본어였다. 메이지시대 일본인들은 언문일치 문체를 개발해 서구
문물을 번역해냄으로써 일본식 근대를 완성해냈다.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사신단은 1876년, 1880년 수신사와 '신사유람단'
이라 불렸던 1881년 극비 조사시찰단이다. 이들 또한 귀국 보고서를 제출했다. 조사시찰단
단장 격이었던 이헌영은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서를 올렸다.
‘오늘날의 일본은 국토와 인민 이외에는 옛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천지개벽을 목격한 엘리트가 올린 보고서였다. 하지만 보고서들은 국왕이나 일부 위정자들이
정책을 결정할 때 참고자료로 이용되고 곧바로 규장각 서고로 들어갔다.
지금도 규장각 서고에 있는 보고서들은 독서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손때가 묻지 않은 비단장정
수서본이 전부다. 조사시찰단의 조사들이 쓴 일본 견문 보고서 대부분은 고종의 개인장서인
집옥재 도서로 보관됐다. 조사시찰단 일원인 유길준이 1895년 일본에서 펴낸 <서유견문》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그가 역적으로 몰리면서 금서로 지정됐다. 대중은 개화 정보로부터
격리돼 있었다.
- 박종인 저, ‘대한민국 징비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