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국을 소망하여
성경본문 : 계시록 22:1-5
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창2:10, 겔47:1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겔47:12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교역자들과 함께 외도를 다녀왔다. 그곳이 얼마나 아름 다운 곳인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아름다운 예술품을 보거나 들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하고, 좋은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기고 한다. 때로 우리는 좋은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음으로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이처럼 아름 다운 것들에 깊은 감명을 받을 때 우리의 정서는 풍성해지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넉넉해진다. 그러므로 각박한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자주 깊은 감동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제가 외도를 가서 받은 감동은 흔히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감동과는 그 정도가 매우 달랐다.
외도와 이창호씨는 69년 우연히 바다 낚시를 갔다가 풍랑을 피하며 인연을 맺었다. 처음에는 밀감농장으로, 그 다음은 돼지 사육으로 시작했으나 그나마 실패하고, 농장 대신 식물원을 구상하게 된다. 76년 관광 농원으로 허가 받고 4만 7천평을 개간, 원시림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1만 3천평의 수목원을 조성하고, 외도의 자생 동백나무 외에 아열대 선인장, 코코아 야자수, 가자니아, 선샤인, 유카리, 종려나무, 남아프리카산 압데니아, 코르디 프리아, 귀면각, 부채선인장, 부겐빌레아, 금목서, 금황환등 천여 희귀종을 심어 온대 및 열대 식물원을 가꾸었다. 부인 최호숙씨도 전세계의 식물원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면서 수목 배치, 조경구상등을 담당하고 있다. 강수일 이사와 그 가족은 원래부터 섬에 살던 주민으로 지금까지 남아 함께 외도를 관리하고 있다. 정문, 매표소, 화장실, 전망대, 관리 사무소, 리스하우스, 휴게소, 선물가게, 기념관등은 강병근 건국대 건축학과 교수가 자연의 멋을 살려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하였다. 95년 4월 15일 개장하여 "한 차원 높은 섬 문화 창조"에 헌신하고 있다.?
특별히 한 기독교인 부부의 30여년의 삶이 담겨 있는 그 식물원은 전인적인 감동을 주었고 장차우리가 가게될 천국대한 강렬한 소망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천국에 대한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묵상해 보고자 한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의 역사를 계시로 보여준 말씀이요, 주로 종말에 역점을 두고 기록한 말씀이다. 그래서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이야기 해주고 있는데 일곱 단원으로 나누어서 기록해준다. 각 단원이 1-3장까지의 1단원을 제외하고는 다 같은 내용을 다루면서도 조금씩 그 내용이 구체화되어 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형식의 문학 형태를 점진적인 병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이라고 한다.
20-22장까지 마지막 단원인데 이 환상을 요약해 보면 20:1-6절까지는 천년 왕국의 비전이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이야기이다. 9-15절까지는 최후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으며 21:1-8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이요 21:9-22:5절 까지는 새 예루살렘의 곧 하나님 나라의 8가지 특성을 보여준다. 21장에서 4가지 특성이 나오고 본문에서 4가지 특성이 나온다. 21장에서 보면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찬 나라요, 둘째로 하나님의 빛으로 충만한 나라(21:11,23, 22:5), 셋째,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것이 그대로 보존된 나라(24,26), 넷째, 세상의 모든 죄 된 것은 용납되지 않는 나라(21:27)이다. 오늘의 본문에서 또 다른 3가지 특성을 특별히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Ⅰ. 생명수의 강이 있는 나라(22:1)
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이것은 에스겔이 본 환상과 유사점이 있다. 에스겔은 성전의 성소에서 나온 강이 모든 생명체에 생명을 공급하여 사막에 있는 각종 나무들이 시절을 쫓아 신선한 열매를 맺으며 그 나무 잎이 마르지 않게 되는 것을 (겔 41:1-12) 보았다.
생명수의 강은 모든 생명체에 생명을 공급한다. 그 강은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보좌 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보좌로부터 흘러 나온 다고 하였다. 우리가 은혜와 생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서 주어지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의 공로로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생명수의 강은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새 예루살렘은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이다.
생명수의 강이 상징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막에서 생명수의 강이 흐를 때 이보다도 더 풍성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뜨거운 사막기후에 시달리며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에서 이와 같은 생명수가 상징하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에스겔이 본 환상처럼 사해의 소금물에 찌들어 있던 강이 생명수로 맑아질 때 각종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소금에 찌들고 가뭄에 목말라한 인생들, 더러운 죄악의 물을 마시며 병들어간 인생들에게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예수님의 보좌에서 흘러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신선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함을 보여준다.
많은 성경 학자들은 이 생명수의 강을 성령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요 7:37-39)에 근거를 둔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 넘치는 충만함을 맛본다. 그러나 아무리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자라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땅에서 완전한 만족을 누리려고 지나친 욕심을 갖는 것도 우리의 영적인 삶에 큰 해를 주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신령하다는 사람들은 다 찾아다니고 이 기도원 저 기도원 등을 전전하며 끝내는 직장도 가정도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이단에 빠질 위험이 많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가져서도 안되겠지만 장차 천국이 임할 때 우리에게 약속된 그 충만한 천국을 맛보기 위하여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할 것이다. 그 소망을 갖기 위해서 이 땅에서도 그 충만한 생명수의 강을 마시며 살기 위하여 힘쓰는 삶이 필요하다.
Ⅱ. 생명 나무가 있는 나라(22:1-3)
길과 강 사이에는 생명나무로 가득 찬 낙원, 공원, 혹은 정원이 있다(22:2-3상).
2-3절: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첫째로 그림을 생각해보자.
생명나무라는 말은 길과 강과 같이 집합적이다. 그것은 다만 하나의 나무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강과 길 사이에 강을 따라서 나무가 줄지어 있다. 그 성의 모든 길에 접해 있다는 것이다. 그 도시는 공원으로 가득 찼다. 물론 그 공원은 생명나무로 가득 차있다. 또한 이 생명나무는 열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정규적으로 매월 열매를 맺는다. 그 나무의 잎사귀까지도 치료하기 위해서 있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해 보면 우리의 구원의 초 풍성한 성격을 상징한다. 그 거룩한 성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측량할 수 없는 가장 축복되고 항상 함께 거하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져온다. 이 상징에 따라 그 공원, 혹은 정원이 그 성안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생명 나무는 창세기에서 말한 생명나무를 생각할 때 그 해석의 실마리를 찾는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각종 나무의 실과도 주셨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주셨다고 창세기 저자는 언급한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음으로 에덴에서 추방을 시켰는데 그 중요한 의미가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함이었다. 그래서 이 생명 나무를 화엄검으로 지키게 하였다. 그 이유는 인간의 범죄를 인하여 인간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의미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주실 때는 아담이 그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인데 범죄함으로 영적인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제 생명나무를 따먹어 보아야 그 목적을 이룰 수도 없고 오히려 범죄한 상태로 영원히 산다면 이것은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게 된 것이다. 때로 인간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있는데 죄악의 고통가운데 영원히 살게 한다는 것처럼 잔인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 예수의 피로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나무를 마음대로 따먹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주신 생명은 최초에 인류가 가졌던 아담안에 있었던 생명보다 훨씬 더 풍성한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다. 그러나 장차 새 예루살렘에 가서 마음껏 따먹고 누릴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 나라는 죽음이 없는 풍성한 생명이 있는 나라이다.
죽음이 없는 나라라는 것이 얼마나 복된 나라인가?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서 해방된 자이다. 죽음은 잠자는 것과 같고 우리는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다. 우리가 다시 부활하여 살게된 하늘나라는 영원히 복된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죽음은 두려운 것임에 틀림 없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의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죽음을 미화하여 ?죽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책을 썼지만 역시 그 책을 읽어보아도 죽음은 고통이요 두려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나라는 영원히 죽음이 없는 나라이니 얼마나 복된 나라인가?
또한 거기에는 풍성한 생명이 있는 나라이다.
생명이면 생명이지 무슨 또 풍성한 생명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생명이라도 풍성한 생명은 얼마나 복된 생명인지 모른다. 풍성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풍성하고 거룩한 생명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는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완전히는 누리지 못했지만 우리가 풍성한 생명의 성격이 무엇인가는 어렴풋이 알수 있도록 이미 우리는 풍성한 생명을 맛본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 풍성한 생명을 어느정도는 맛본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풍성한 생명은 죄를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죄의 습관으로부터 담대히 돌아선다. 몸에 해롭다고 생각하는 담배를 끊을 수 있고, 술을 끊을 수 있다. 건전하지 못한 습관들에서 돌아 설 수 있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힘쓰게된다. 풍성한 생명을 누릴 때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도 능히 그 모든 문제를 해결 힐 수 있다. 풍성하고 거룩한 이 생명을 누린 자는 사랑이 풍성하고 마음이 항상 뜨겁고 부드러우면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준다. 곧 생명이 풍성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의 열매를 항상 풍성히 맺고 사는 것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절제등의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은 열매를 맺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가. 그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생명나무가 열두가지 실과를 달마다 맺게 된다.
Ⅲ. 섬김으로 왕 노릇 하는 나라(22:3-5)
3-5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성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다(22:3,4).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그의 위엄과 주권이 보여진다. 보좌는 주권을 상징한다. 이 때문에 강이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곳, 성안이나 성 밖에서 보여진다. 그러나 성안에서는 진노가 아닌 사랑의 주권이 나타난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복종한다. 그의 뜻은 그들의 열망이다. 그들은 그의 얼굴을 본다. 그들은 그의 은혜를 누린다. 그들은 그를 예배한다. 그의 이름이 그의 이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그 자신에 속한 자들인 것을 알아보고 그들은 그를 그의 주로 즐겁게 고백한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우주에서 영원히 왕노릇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왕노릇은 섬김을 통한 왕노릇이다.
3절을 읽어 보라. 어린양을 섬기는 왕노릇이다. 어린양과 같은 왕 노릇을 하는 것이다. 어린양과 함게 하는 왕 노릇이다. 어린양은 섬기는 왕이라고 막10:45절에서 말했다. 섬김으로 왕 노릇 한다는 것을 생각 해면 이것이 얼마나 복된지 모른다. 섬기는 왕은 군림하는 왕보다는 훨신 복된 것이다. 우리는 왕이라고 하면 군림하는 왕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므로 왕이란 별로 복된 삶이 아니다. 우리가 왕이 되어보지 않아서 흠모하지 군림 하는 왕이란 사실 행복한 것이 아니다. 이조 왕조에 대한 드라마를 보면 왕들이 얼마나 고통이 많은가? 진짜 행복한 왕이란 섬기는 왕이 되는 것이다.
나는 섬김으로 왕노릇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왕은 모든 것에 얽매임이 없다. 왕이라고 하면 자유롭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군림하고자 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왕이라고 하드라도 모든 사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갈등이 있고 미움과 대립이 있다. 그런데 섬기는 사람은 항상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를 섬겨 주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내 마음대로 하고자 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 속이 상하고 미운 생각이 들지 그냥 섬기고자 하면 항상 기쁘고 즐겁기만 한다.
요즈음 우리 교회는 예배 중에 영아부를 책임 맡고 섬기는 분들이 많이 있다. 영아들을 돌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천방 지축 도무지 돌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잘돌본다. 그런데 하필 잠시 화장실 가는 동안에 아이가 넘어져서 우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엄마가 와서 이 광경을 본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 엄마는 기껏 수고해서 돌보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 보다는 왜 이렇게 아이를 울리느냐고 섭섭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 상하지 않고 죄송하다고 말한다. 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을 섬기는 자세를 가지게 될 때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마음 상하지 않고 기쁨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삶을 사는 자는 참으로 왕과 같은 자유와 기쁨이 있다. 어떤 일을 만나도 상처 받지 않고 다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런 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이런 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공동체는 행복할 것이다. 그 나라는 바로 이런 왕들이 가득 찬 나라이다. 이곳이 최고의 지복의 장소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오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 8: 19-21을 보면 바울은 현재의 창조세계(피조물)가 얼마나 간절히 새 땅을 고대하고 있는가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테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다시 말하자면, 인간만 이러한 새 땅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세계와 피조물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활 때에 최후의 영화를 얻는다면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세계도 모든 고통의 저주로부터 구속받게 될 것이다. 필립의 번역은 더욱 실감나게 말하기를 모든 피조세계가 ?발꿈치를 들고?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고대하고 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모든 피조세계가 해산의 고통과 같은 아픔 속에서 탄식한다고 했을 때 이것은 죄의 결과들인 현재 피조세계의 불완전함들은 장차 올 더 좋은 세계를 잉태, 분만하기 위한 해산의 고통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이처럼 간절하게 기다리고 고대하고 있는 천국은 반드시 올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것이다. 이 당에서 아무리 복되고 아름다운 장소도 천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천국이 약속된 사람이다. 그 소망을 가지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