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며칠 전 친구가 죽었다는 전화가 왔다. 망인(亡人)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나온 동창이며, 지금까지 다른 사람보다 유달리 친하게 지내던 동창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친구이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멍한 상태였다.
서둘러 친구가 이승에서 마지막 머물고 있는 장례식장에 갔다. 친구는 고(故)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생전의 환히 웃는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한 달여 전 선운사에서 동창회를 할 때만 해도 건강한 모습이었는데......
금산사에서 유스호스텔을 운영할 정도로 우리 친구들 중에서는 상당히 갖추고 사는 편이기도 하다.
감기인줄로만 알고 판콜A만 마시다 위급하여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어찌할 방도 없이 세상을 떴다고 했다. 미망인과 가족들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입원치료 한번 못해보고 죽은 것을 매우 원통해 하고 있었다.
젊었을 적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조문 온 동창도 몇 명 안 되었다.
먼저 간 친구들도 상당수이고, 이별이 잦아지는 우리 나이인지라 몇 명 안 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갑자기 나의 존재 나의 실체,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허무한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한동안 수렁에 빠진 듯 의미 없는 사유(思惟)가 깊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친구의 죽음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답 없는 물음을 던지고는 스스로 쓴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여기 멍 때린 나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몸으로서의 나, 종교적 관점에서 보는 나의 가치와 내 삶의 태도, 선(禪)적 내면에서 보는 나의 몸과 정신에 대한 잠재력과 존엄성 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주제를 깊이 궁구(窮究)하다 보면 본연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또 다른 의문과 명제(命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사라지곤 한다.
ㅠ우리는 흔히 한 생각 일어나지 않는 그 자리를 바로 ‘무아(無我)’의 자리라고 한다. ‘나(我)’라고 하는 고집이 사라진 그 자리다.
텅 빈 그 자리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너무나 추상적이고 멀고 먼 그 자리인지라 나의 존재와 실체에 대한 생각은 앞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무아의 경지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 자명함을 깨닫는다.
나와 만물과의 관계, 만물과 내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경지도 생각해 본다.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자리, 그러니까 내가 만물과 하나가 되는 그런 자리, 그 자리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볼 가능성은 있을 것인지. 이 역시 정답은 없을 것 같다.
그걸 찾기 위해서는 우선 나는 부처님께서 동자로 이 세상에 오시어 일곱 걸음 걸으시며 처음으로 하신 “내 마음 편안하게 할 주인공은 바로 나요(天上天下 唯我獨尊) 타인의 마음 편안하게 할 주인공도 바로 나 자신이다(三界皆苦 我當安之)이다.”란 말씀과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自燈明 法燈明).
스스로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自歸依 法歸依.)”
이 진리의 말씀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나의 모습과 현재의 나의 행위에서 미래의 내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나의 몸은 내 정신이 사는 집이다. 몸이라는 형태와 정신이 합쳐 나라는 이름의 가명이 형성된 것이다.
나라는 이 현재의 명칭과 정신이 사는 몸의 형태에 의하여 행위가 이루어지고 그 행위에 의하여 새로운 업보가 형성되어간다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음에 앞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어져야 할지가 명확하게 밝혀야 함이 먼저임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省察)이 필요하다.
이 성찰에서 내가 아는 나인가 아니면 나를 아는 지인들이 알고 있는 나인가 이다. 우리는 막연히 내 안에 여럿의 내가 있음을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짐작도 빙산의 일각이지 완벽하지는 않다.
내가 이런 고심을 하지 않을 때는 죽음이 목전에 다가 왔거나 부처님 같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것은 어쩌면 다음과 같은 말과 같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선운사에서 아가씨 둘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대화를 한다. 한 아가씨가 보리수나무를 보고
“이 나무가 ‘깨달음의 나무래’ 하니까
다른 아가씨는 서슴지 않고
“깨달아서 뭐하게”하면서 걸어갔었다.
순간 나는 그렇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깨달음을 얻어왔고, 앞으로도 깨달음은 계속될 것이다. 무엇을 취하고 잊으며 무엇을 버리고 놓을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결국 깨달음의 노정(路程)인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이며 신의 영역에 접근하는 인간 삶의 과정이다.
고로 “깨달음이란, 원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설혹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하등의 의미도 실익도 없는 무(無) 그 자체일 뿐이다.”라 했다.
그럼으로 나는 내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면서 인생길을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