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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견회 10월 여주 신륵사 그리고 명성황후생가 탐방기 2018.10.4(목) 보견회 10월행사는 판교에서 여주행 경강선을 이용 신륵사와 명성황후 생가를 찾기로 했다. 여주에는 여러 고적들이 많다. 작년에 세종대왕능과 효종대왕능을 탐방한 일이 있어 두번째 나들이이다. 신륵사는 신라시대에 건립된 명승고찰이라 경치도 빼어나 개인적으로는 승용차 탐방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교통을 이용한 편리함에다, 해설사 해설까지 곁들이니 좋은 기회이고, 더구나 명성황후생가는 대부분 처음 찾는 곳이라 보견회 회원들에게도 인기 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 의외로 적은 13명이 참석하는 행사가 되 었다. 여주에서 순환버스권을 이용해야 하므로 시간을 엄수해야 하여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 았다. 판교 10:34분발 --여주역 11:24도착 --11:35 순환버스탑승 --11:50 신륵사앞 주차장 도착 --12:00~12:50 점심식사(산너머남촌 식당) --13:00~14:10 신륵사 탐방(해설) --14:28 순환버스 탑승-- 15:07 명성황후생가 도착 15:10~16:00 명성황후생가 탐방(해설) --16:07 순환버스탑승 --16:05 여주역 도착 --16:48 경강선 판교행 --17:38 판교도착 판교역 집합시간 10시 20분 이전에 전원이 참석했다. 다만 곤지암의 문의용회원만 시간에 맞춰 조인하기로-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은 가을을 실감나게 황금색으로 익어가고 코스 모스와 들국화들이 시선을 뺏는다. 가을소풍의 들뜬 기분은 어릴때나 나이들어도 마찬가지 이다. 50분만에 여주역에 도착했다. 오늘은 사무총장까지 사정이 있어 혼자 진행해야 하니 더 바쁘다. 여주역 2번출구로 나오니 순환버스(시티투어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현금으로 표를 사야한단다. 성인5천원인데 경로할인 3천원이다. 13매를 사서 각자 나누어 주면서 잃어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15분만에 신륵사에 도착했다. 누가 안왔지? 황금벌판 여강길 5일장터길 8km 한번 걷고 싶다. 곤드레비빔밥에 낙찌볶음- 산너머남촌 식당에서 鳳尾山 신륵사(神勒寺) 먼저 점심을 먹고 탐방에 들어가기로 했다. 점심시간에는 해설이 안되기 때문이다. 미리 예약한 "산너머남촌"이란 집을 찾았다. 이 집은 곤드레나물비빔밥 전문점이다. 낙지볶음을 안주로 시켜 소주,맥주,막걸리 식성대로 마시면서--오늘 스폰서는 장세원회원이다. 보견회발전과 모두의 건강을 위한 건배를 힘차게 외친다. 커피까지 마시고 신륵사 안으로 들어갔다. 鳳尾山神勒寺라는 큼직한 글씨의 일주문 기둥에는 三日修心千載寶(짧은 기간의 마음수양이라도 천년의 보배요) 百年貪欲一朝塵(백년의 탐욕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로다) 멋진 주련이 세속의 어지러운 마음을 정화시킨다. 일주문을 지나 불이문 옆 해설사가 있는 사무실 앞에서 여자 해설사를 만났다. 해설사는 여주 문화관광과에서 관장한다, 남한강을 끼고 선 신륵사는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오랫만에 찾은 신륵사 감회가 새롭다. 신륵사에 관환 설화와 극락보전,명부전,조사당,다층석탑,전탑,나옹스님,여주의 인물과 특히 조선의 왕비 여덟분이 탄생한 여걸 등에 관해 해설이 이어졌다.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 전설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때 원효가 아홉마리의 용을 메우고 창건했다. "신륵(神勒)"이라는 절 이름의 유래로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신이한 미륵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는 신륵사의 륵(勒)자는 말을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두 번째는 고려 우왕때 왕사 나옹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신비한 굴레를 씌워 얌전하게 다스렸다는 이야기이다. 세번째는 고려 고종때 건너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승려 인당(印塘)이 나타나 고삐를 잡아채자 순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설화에 나타난 신력과 굴레에서 신륵(神勒)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신륵사에서는 고려의 고승인 나옹이 머물러 절이 크게 확장되었다. 나옹은 1376년(우왕2년)에 신륵사에서 사망하여 이색이 이곳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을 봉안했다. 지금은 나옹과 나옹의 제자인 무학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1473년 성종4년에 세종의 능인 영릉을 여주로 이장하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가 지정되었다. 이때 국가에서 확장하여 크게 중수되어 사찰명은 보은사(報恩寺)로 바뀌었다. 1671년(현종12)에는 계헌(戒軒),1702년(숙종28)에는 위학(偉學) · 천심(天心) 등이 중수하였다.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이 절에는 다층석탑(보물 225호) · 다층전탑(보물 226호) ·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228호)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229호) ·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230호)·보제존자석등(보물 231호) · 조사당(組師堂: 보물 180호) 등의 문화재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명부전(冥府殿)에서 해설사는 색다른 주장을 편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여 염라대왕과 시왕(十王)을 모시는 법당이다. 신륵사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원찰로 세종대왕의 업을 사멸하기 위해 명부전은 의미가 크단다. 세종은 어느 임금보다 본인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업무를 많이 시켜 과로사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염라대왕이 책을 펴고 있는 모습이 색다르다. 조사당(祖師堂)은 인도의 지공禪師(指空大和尙)과 고려왕사 나옹선사 조선개국시 무학대사 세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신륵사 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은 보물 제225호로, 신륵사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석탑이다.높이는 3m, 건립 연대는 15세기 후반으로 추측되는 8층 대리 석제탑이다. 8층 위에도 일부 탑신과 지붕이 남아 있어 전체 층수는 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472년 성종 임금시 신륵사 새 단장시 건축된 것으로 전해진다. 신륵사 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은 보물 제226호로,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벽돌탑이다. 진흙을 구워 만든 전탑은 대한민국에서는 드문 양식으로 신륵사의 것 외에는 경상북도 안동에에 4기가 더 있을 뿐이다.높이는 9.4m이며, 재료는 기단부(基壇部)가 화강석, 탑신부(塔身部)가 벽돌이다.전탑의 벽돌 하나하나에 당초 문양이 새겨져 있음에 눈여겨 봐야 한다. 본전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해서 정조 24년(1800)에 완공되었다. 보물 제1791호로 지정되었고 앉은 좌상의 아미타여래불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좌우에 입상으로 서 있다. 목조불인 것도 특징이다.극락보전의 정문 위에는 나옹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오는 ‘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 있게 쓰여져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600년 보호수 향나무와 은행나무/강변 정자 江月軒 긴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인 신륵사에는 600년의 수령을 가진 향나무(수고 5m)와 은행나무(수고 22m)가 길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특히 은행나무는 연리지로 불,법,승 삼보를 상징하듯 세줄기 가지로 모습을 갖추었고 가지 사이로 보이는 관세음보살 모습은 꼭 보아야 할 명물이다. 강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남한강의 줄기 여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 사찰 중에서도 유독 강변에 있는 신륵사를 좋아하는 것도 이러한 아름다운 경치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옛날 신륵사를 처음 왔을때 강변에 있는 정자에서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서울까지 황포돛배를 탄 기억도 아름다운 추억이다.강변정자에는 江月軒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신륵사의 백미로 꼽히는 여강가 바위에 올라앉은 강월헌 정자에는 관광객이 추억쌓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도 동참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일부만 잠시라도 앉았다 가겠단다. 봉미산 신륵사 현판글씨가 멋지다. 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욛일조진 불이문 앞에서 해설사를 만나다 구룡루(九龍樓) 극락보전 극락보전/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본당/좌측에 대세지보살 우측엔 관세음보살이 서 있다. 신륵사 다층석탑 명부전 왼쪽 두번째 책을 들고 있는 염라대왕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관음전 봉송각 祖師堂에는 인도의 지공화상을 중심으로 고려왕사 나옹선사 조선 무학대사를 좌우로 신륵사 다층 전탑(벽돌로 탐을 쌓은탑) 수령 600년의 향나무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세줄기 가지를 빧은 연리지) 가지 사이로 보이는 관세음보살상 여강 신륵사 강변 바위에 얺힌 정자 강월헌 너무나 멋진 풍경이다. 벌써 단풍이 시작되나? 명성황후 생가 순환버스를 타고 명성황후 생가로 간다. 목아박물관,강천보,유원지를 손님이 없어 달리다보니 황확산수목원에서 대기시간을 가졌다. 수목원도 가보고 싶지만 여분의 시간이 안된다. 버스에서 내려 10여분 주변 산책을 했다,코스모스와 구절초가 만발하여 가을의 정취를 한결 북돋운다. 다시 버스로 채 10분도 못가 명성황후 생가에 도착했다. 명성황후는 조선 26대 고종비로 민치록의 딸이다. 대원군과의 정권싸움, 조선의 쇄국과 개혁세력 그리고 조선을 둘러싼 열강국과의 세력다툼에서 일본 낭인들에 시해당하는 불운의 여인이다. 19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부친이 민유중으로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결정되고 고종은 황제로 즉위되었다. 따라서 명성왕후에서 황후로 개칭되고 그해 명성황후 국장을 거행했다. 해설사를 만났다. 대구사람이다. 알고보니 경북고 출신이고 산업은행 본부장의 경력을 가진 인테리로 작년부터 여주지역 문화해설가로 활약중인데 여주의 해설사 20명 중 유일한 남자 해설사란다. 햇수를 따져보니 우리보다 8년후배이다. 고향 선배를 만났다며 반가워 한다. 步見會라는 의미를 알고서는 그렇게 부러워 한다. 제한돤 시간이라 해설에 시간이 크게 부족 하여 아쉬웠다. 생가 - 명성황후가 태어난 생가는 6대 조부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묘소관리를 위해 1687년에 지어진 묘막으로 1861년 명성황후가 태어나 8세까지 살았던 집이다. 당시 건물로 남았던 것은 초가 한채였으나 1995년에 안채 외에 사랑채,행랑채,별당 14칸 와가로 복원 성역화 하였다.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 명성황후의 넋을 기리는 숭모비,추모비 등이 서 있다. 감고당(感古堂) 소개도 있었다. 숙종의 비 인현왕후의 친정집으로 명성황후가 8세 이후 간택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원래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나,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져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여주시에서 "명성황후성역화사업"으로 2008년에 이전 복원하였다. 감고당 한집에서 왕비가 2명이 나왔다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감고당 현판은 영조의 친필체를 살려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방이 있었던 자리이며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마을이라 뜻이다. 비석 전면에는 明成皇后誕降舊里라고 색인 되어 있는데 뒷면을 보란다. 거기에는 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광무8년 갑진 5월 어느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1904년 광무8년에 건립되었을을 알 수 있다. 필자 미상이나 황태자 순종의 글씨로 추정되는데 만일 순종의 글씨로 확인만 되면 국보급이라고 해설사는 강조한다. 민유중의 신도비에는 민유중의 업적을 소개하고 그를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도비를 등에 진 거북이의 머리가 민유중 묘소쪽으로 돌려 보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또한 그 규모가 국내 두번째로 동구릉에 있는 태조 이성계 신도비 다음이란다. 명성황후 기념관 기념관으로 이동하여 전시실을 구경했다. 상설전시실은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는데 대표유물로는 명성황후 친필 간찰첩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영정이 그려져 있는데 당시에는 사진이 있는 시기이나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이후 일본이 명성황후의 사진을 일체 없애버려 황후 주변 인물들의 구술 고증으로 그려졌다는 점도 슬픈 역사의 그늘이다. 특별전시실에는 황후의 一片丹忠이라는 글씨와 인품해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또 명성황후 시해도(弑害刀)가 전시되어 있고 시해장면을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 끔직함을 느끼게 한다. 명성황후의 국장 장면도 그려 놓았다. 여주지역을 탐방하면서 여주는 폐쇄적인 양반가문의 고장으로 왕비가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27왕조 중 8명의 왕비가 배출되었으니--음기가 센 지역이라고들 평한단다. 순환버스 시간에 임박하여 못내 아쉬운 작별을 하고 여주역으로 이동하였다.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다. 시간에 쫓기긴 했으나 신륵사와 명성황후생가를 보면서 역사공부와 풍광의 아름다움에 심신을 힐링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판교에 도착하니 5시40분경. 아무래도 저녁시간이 가까워 일행들을 현대백화점 9층에 있는 부민관으로 안내했다. 부민관 본점은 서울 다동에 있는 한식집으로 역사와 맛으로 유명한 집이다. 육개장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백화점 구경을 했다. 규모가 엄청나다. 지하 식품부로 내려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한담을 하다가 판교역에서 작별의 악수를 나눈다. 장세원 동문의 스폰서와 참석한 회원 모두의 협조와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생가 해설사를 만나다.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명성황후 추모비 명성황후 탄강구리 명성황후 6대조 민유중 신도비 감고당 감고당 명성황후 특별전시실 해설사의 열강 고종과 명성황후 영정 명성황후의 순종의 어진 명성황후 시해후 일본은 일체 사진을 없앴다. 명성황후 국장 장례 모습 명성황후 글씨와 인품,학식을 논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사상 명성황후 생가 탐방을 끝내고 오늘 일정을 마치고 여주역에서 판교행 전철을 탔다. 판교 현대백화점 9층 부민옥에서 영수증빙서류 <참가회원> 김능태,김문헌,문의용,박준천,서강조,서상호,안연효,오상평,이이춘, 이 훈,장세원,최문택,김수철 13명 <경비 결산> 전월이월 4,866,869원 이자수입 + 1,188원 장세원스폰서 +200,000원 회원회비(13명) +260,000원 해설사 음료 (2명) -5,500원 점심식대 -235,000원 순환버스(@3천원x13명 -39,000원 석식대 -132,000원 아이스크림 - 34,400원 금월 잔액 4,882,157원 - 다음 11월 모임은 제주여행(10/31~11/2)입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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