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 14년(1483년 계묘) 7월 29일(기미) "신들이 의금부의 죄안(罪案)을 상고하건대, 宋玹壽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권완(權完)의 집에 몰래 통하여 반역을 꾀하였다.’ 하였으니, 특은(特恩)으로 ㉮말감하여 교형(絞刑)에 처하여졌을지라도, 어찌 반역한 사람의 아들이나 조카를 ㉯대관으로 삼아 조정을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공초의 말이 그렇기는 하나, 다만 장(杖) 1백 대를 때려서 ㉰권도로 외방(外方)에 귀양 보냈는데, 노산군의 장인이기 때문에 형세가 오래 살려 둘 수 없으므로 뒤에 교형에 처한 것이다. 선왕께서 이미 그 죄를 정하셨는데, 지금의 *대간(臺諫)이 어찌 증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양면이 다시 아뢰기를,
"宋玹壽가 처음에 반역을 꾀하였다고 공초하고 그 뒤에 공초한 말이 없었으니, 이것은 반역을 꾀한 것으로 죄준 것입니다. 노산군(魯山君)에 연좌되었다고 한다면, 장인은 연좌되는 율(律)이 없으니, 신은 宋玹壽가 실로 친히 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는 억측하여 말하지 말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말감(末減) : 형벌을 감(減)하여 죄의 등급을 가볍게 하여 주던 것.
㉯ 대관(臺官) : 고려 ·조선시대에 탄핵 ·감찰 등을 담당한 관료.
『생략』 조선 건국 직후 대관은 대체로 고려의 것을 계승하는 입장에 있었다. 1392년(태조 1) 사헌부를 설치하고 대사헌 ·중승 ·겸중승(兼中丞:종3품) ·시사(정4품) ·잡단(정5품) ·감찰(정6품)을 두었는데, 『생략』 《경국대전》에서 대사헌(종2품) 1명, 집의(종3품) 1명, 장령(정4품) 2명, 지평(정5품) 2명, 감찰(정6품) 24명으로 확정하였다. 1894년(고종 31) 의정부에 도찰원(都察院)을 설치하면서 폐지하였다.
조선의 대관은 사간원(司諫院)의 관료와 함께 대장(臺長)으로 부른 지평 이상은 탄핵 서경을 위한 합좌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반면, 감찰은 이에 참여하지 못하고 관료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만을 담당하면서 지방관의 비리를 감찰하기 위해 분대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의 대관도 ㉠청요직으로 인식되었고 간쟁에도 참여할 수 있었으나, 풍문(風聞)에 의한 탄핵이 금지되고 ㉡서경권도 5품까지 한정되어 기능이 제한되었다.
한편 대관에 대한 임용추천권은 이조전랑이 행사했는데, 이는 처음에 신료 사이의 권력구조의 균형과 견제를 위해 만든 제도였으나 붕당의 폐단이 생겨나면서 정치적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자 1741년(영조 17) 이조전랑의 추천권을 폐지하고 대관의 권한을 축소하는 조처를 내리게 하였는데, 이에 대관은 더 이상 관료들을 효율적으로 탄핵할 수 없었다. 【두산백과】
㉠ 청요직(淸要職) : 자의(字意)상으로는 청직(淸職)과 요직(要職)을 합한 말로, 지위가 높고 귀하며 맡은 직무가 중요한 관직을 가리켰다. 청현직(淸顯職)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 청요직으로 간주되었던 관직은 간쟁과 서경(署經) 등의 기능을 수행한 어사대(御史臺)의 대관(臺官)과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낭사(郎舍)의 간관(諫官), 인사행정을 담당한 상서이부(尙書吏部)와 병부의 관원들, 왕명을 기초하는 한림원 관원과 고원(誥院)의 지제고(知制誥), 왕과 더불어 경서를 강론한 보문각(寶文閣)의 관원들, 왕의 언동을 기록한 사관, 그 밖에 국자감의 수장인 국자좨주(國子祭酒)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 승선(承宣) 등이다. 이들은 주로 왕의 가까이에서 시종했고, 유교 이념의 구현과 관련한 업무에 종사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청요직에 임명되기 위해서는 일단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행실이 방정해야 했으며, 더불어 좋은 가문 출신이어야 했다. 그리고 청요직을 거친 대부분의 인사들이 재추(宰樞)로 승진하였다.
조선의 경우도 고려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주로 대간과 의정부 및 육조의 낭관 등이 청요직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 다만, 그 용례를 분석한 한 연구에 의하면,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즉 15~16세기에는 의정부 · 육조 · 승정원 ·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의 3품 이하의 관원을 지칭하였고, 17~18세기에는 여기에 비변사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3품 이하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이후 규장각의 3품 이하가 더해졌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서 용어의 출현 빈도를 조사해 본 결과, 17~18세기 중반에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고, 18세기 후반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역사용어사전 | 저자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 서경(署經) : 관리를 임명하거나 법령을 제정할 때 대간(臺諫)의 서명을 받는 제도를 의미한다.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을 합쳐 대간이라고 불렀는데, 고려시대에는 어사대(御史臺)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낭사(郎舍)에, 조선시대에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대간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간쟁(諫諍), 봉박(封駁), 시정(時政)의 논집(論執), 풍속(風俗)의 교정, 백관(百官)의 규찰 등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서경(署經)은 내용상 고신서경(告身署經)과 의첩서경(依牒署經)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신서경은 관료를 임명할 때 대간이 수직자(受職者)의 자격을 검토한 후 수직자에게 발급하는 *고신(告身)에 서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첩서경은 입법(立法) · 개법(改法)과 상중(喪中)에 있는 관원의 기복(起復 : 상(喪)을 당해 휴직 중인 관리를 복상기간 중에 직무를 보게 하던 제도) 등의 중요 사안에 대간이 심사하고 동의한다는 서명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관료의 임명이나 법률의 제정, 개정과 같은 사안은 국왕 자의로 결정되지 않았고, 대간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고려의 대간들은 1~9품까지의 모든 관료에 대한 서경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후 이와 같은 서경의 범위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태조는 1~4품까지의 관료는 대간을 거치지 않고 국왕이 직접 임명할 수 있게 하였고, 5~9품까지의 관료 임용에 대간의 서경을 받게 하였다. 대간의 반발이 심해지자 1400년(정종 1)에 고려의 제도로 복구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다시 태조대의 관례로 환원되었다. 이후 세종 초기에 고려의 제도로 일시 복구되기도 하였으나, 1423년(세종 5)에 다시 5품 이하의 관료 임용에만 서경을 행하게 하였고, 이것이 『경국대전』에 반영되었다.【역사용어사전 | 저자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 권도(權道) :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 임시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행위규범.
권도는 상황성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일정하고 불변적인 행위규범을 가지지 못하며 그때마다 다른 행위양식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가진다.
유학에서 권도는 불변의 경상(經常)에 대해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허신(許愼)의 ≪설문해자 說文解字≫에 권도를 ‘반상(反常)’으로 정의되고, ≪춘추공양전 春秋公羊傳≫에 ‘반경(反經)’이라 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권도는 결코 경상의 도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도는 경상의 도가 상황 속에 드러나는 다른 모습이며, 상호 대대적(對待的)인 것이다.
김시습(金時習)은 이런 점을 지적해 “상도(常道)로써 변화에 적용하면 그 변화가 적절하게 되고, 상도로써 변화에 대처하면 그 변화가 고루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도와 권도가 상대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해도 상호보완적인 본질을 지닌 것이다.
맹자가 “남녀가 물건을 주고받을 때 직접 손을 맞대지 않는 것은 예이고,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서 건져주는 것은 권도이다.”고 하여 예와 권도를 연계시킨 것이나, 이이(李珥)가 “때에 따라 중(中)을 얻는 것을 권도라 하고, 일에 대처해 마땅함을 얻는 것이 의(義)이다.”라고 하여 권도와 의를 관련지은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상도와 권도의 결합은 바로 유학의 시중론(時中論)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가 세상을 살아감에는 절대적인 긍정도 없고 절대적인 부정도 없이 오직 의(義)와 함께 할 뿐이다.”고 한 것이나, 맹자가 공자를 ‘시중의 성인(時中之聖)’으로 보고 공자를 배우겠다고 한 것은, 시중론이 유학의 중심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공자와 맹자의 이러한 시중론은 인간에 대한 진리나 규범의 획일적인 지배와 우위를 부정하고, 오히려 진리와 규범을 능동적으로 살려 나간다고 하는 정신이 터전에 깔려 있다.
즉, 진리의 측면에서 인간이 진리를 넓히는 것이지 진리가 인간을 키워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규범적인 가치에서도 예법과 같은 행동 양식을 인간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상황에 따라 가치 있는 행위 양식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중론이며, 권도가 정당성을 갖는 사상적 터전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권도는 상황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인 판단을 전제로 하고, 다시 그것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판단 주체인 인간의 높은 도덕적 인격을 요구하게 된다. 인간은 그가 부닥치는 다양한 상황 때문에 상도의 규범을 적절히 변용한 권도를 행할 수밖에 없지만, 이 경우에도 그 변용의 적절성 여부는 인간의 책임으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권도는 자칫 잘못하면 불의에 빠질 위험과 한계를 갖는다. ≪공양전≫에서 그러한 점을 지적해 “권도를 행할 때는 방법이 있으니, 남을 죽여서 자신을 살리거나 남을 망하게 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행동을 군자는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위험과 한계의 본질적인 극복은 오직 완성된 인격에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권근(權近)은 그 모범을 공자의 ≪춘추≫에서 제시하는데, “춘추의 대용(大用)이 권도이니, 이는 성인의 마음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다.”고 하였다.
김시습도 “상황의 변화에 따른 권도와 불변의 경상을 일치시켜가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지 도(道)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다만, 실제로 인간이 부닥치는 상황에서의 문제는 아직 미숙한 인간이 어떻게 이 시중의 권도를 창출해가느냐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경상의 도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실천을 통해 특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주체적 능력으로써 권도를 획득하는 것이다. 김시습은 그것을 지적하여 그 방법으로 ≪논어≫의 충서(忠恕)를 제시한다.
충은 인간자신의 본연의 모습 속에서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믿고 그에 접근하는 것이며, 서는 현실의 미숙함을 인정하고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해 가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