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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다하여 놓아버리십시오
어느 뱃사공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배를 젓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태운 첫 손님이 짐을 많이 실어 고생했다며 인심 좋게도 뱃삯을 두 배나 주고 내렸기 때문입니다. 사공은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에 아주 기뻐하며 배를 저어 강을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다른 배가 오는 걸 미처 보지 못하고 배 앞머리가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사공은 순간 짜증이 나서 상대 배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배를 어떻게 모는 거야?” 하지만 상대 배에선 아무 대꾸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배는 빈 배였고, 묶였던 끈이 풀려 떠내려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사공은 겸연쩍은 듯, 빈 배 때문에 기분만 잡쳤다며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배를 저어 갔습니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가만히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변한다는 사실 앞에서 마음이 홀린 듯 헤매게 됩니다. 변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사공은 손님이 두 배의 뱃삯을 주었을 때에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할 만큼 좋았던 기분이, 떠내려 온 빈 배 때문에 짜증이 나고 기분이 상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사공이 없는 빈 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엔, 그 짜증과 화가 순식간에 다시 들어가 버렸습니다. 모든 게 변하는 것이 만고의 진리인데,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그 짧은 순간에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다시 좋았다가 나빴다가 합니다. 여기에 휘둘리면 우리 인생 전부가 매우 고달파집니다. 사공이 배가 비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자신이 그저 나무 조각으로 된 빈 배에 화를 내봐야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배에 사공이 타고 있었다면, 그 사공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발산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짓이었을까요? 손님이 두 배로 값을 쳐준 것에 대해 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좋은 일이 오면, 기분이 좋아서 행복해하고, 나쁜 일이 오면 확 가라앉아서 침울해하고, 이렇게 일희일비하는 것은 어찌 보면 참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좋은 일과 나쁜 일,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마구잡이로 규칙 없이 그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럴 때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거울과 혹은 맑은 호수와 같다고 했습니다. 마음은 그저 맑아서 사물과 상황과 대상들을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맑은 하늘이 비취면 호수는 그저 푸르고 청명한 빛을 띱니다. 하늘에 구름이 떠 있으면 호수도 하얀 구름을 비춥니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가득하면 호수는 어둡고 탁한 색을 띱니다. 먹구름에 비바람이 가득하면 호수는 어둡고 탁하며 떨어지는 비에 출렁이며 요동을 칩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호수는 여전히 맑습니다. 표면은 출렁일지 모르지만 그 깊은 심연은 여전히 고요하고 잠잠합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맑은 호수 표면에 비추는 하늘의 상태들과 같습니다. 그저 마음에 비춘 것들일 뿐인데, 그게 고정된 실재인 것처럼 호수에 비추는 각각의 상태들이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어떤 실재인 것처럼 그것을 붙잡고 매여 있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날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두 사람이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깃발이 흔들린다.’고 주장했고, 다른 사람은 ‘바람이 휘날린다.’라고 주장하며 다퉜습니다.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본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아니요, 깃발도 아니라. 자네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세.” 모든 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하는 그 진실을 모르고 거기에 따라 흔들린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변하는데, 그걸 잊고서 좋은 것은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하고, 나쁜 것은 고개를 돌려 짐짓 외면하거나 피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매달리고 회피하는 한 우리는 변화무쌍한 우리의 삶에서 결코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평화와 자유는 결코 내 인생에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고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평화와 자유는 좋은 일에 지나치게 좋아하지 않고, 나쁜 일에 지나치게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붙들고 집착하지 않고, 나쁜 일을 손사래 치며 회피하지 않는 일종의 초연함입니다. 초연함이란 집착하여 붙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삶에 집착하는 것을 삶을 바라보는 아주 나쁜 방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모든 게 변하고 모든 것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초연하다는 것은 미움, 질투, 욕망, 분노, 두려움 등 이런 나쁜 것들에서 벗어나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초연함은 또한 모든 것을, 자기가 사랑하는 것까지도, 철저히 놓아버린다는 뜻입니다.
삶은 어찌 보면 계속 이어지는 순간들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순간순간이 이어집니다. 조금 전의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또 다른 순간이 지금 여기에 펼쳐집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펼쳐지던 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고 다음의 순간이 또 다시 펼쳐집니다. 그야말로 순간의 신비, 지금 이 순간의 신비입니다. 순간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 또 순간에 죽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의 연속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이어지는 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지나간 순간을, 그리고 그 순간에 있었던 일들, 그 일들에 대한 나의 반응, 나의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을 사는, 삶을 대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요 가장 지혜로운 삶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초연함이 철저하게 놓아버린다는 뜻인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어도 그것은 그 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건 금세 지나가버립니다. 나쁜 일은요. 그것도 또한 금세 지나가 버립니다. 거기에 집착할 필요도, 거기에 매몰되어 있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순간들을 과감하게 놓아버리고, 새롭게 찾아드는 순간들을 기꺼이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 지혜입니다. 영적인 성숙은 바로 이렇게 놓아버리고 내게 찾아오는 삶의 순간들을 기꺼이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올 것이 오게 되어 있고, 살아야 할 삶들이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올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야 할 뿐입니다.
임상심리학자인 잭 콘필드는 내려놓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로운 내려놓음은 삶으로부터 초연히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 그 자체를 온 가슴으로 껴안는 것. 지금의 현실 앞에 온전히 가슴을 열고자 하는 의지이다.” 자신에게 불현 듯 찾아온 행복에 너무 겨워하며 매달리지 않는 것,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불현 듯 찾아온 불행에 대해서도 피하려들지 않고 기꺼이 용기와 사랑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내려놓음입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바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진실은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진실입니다. 쉽진 않겠지만 그 진실, 지금 이순간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일 때, 있는 그대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흘러갑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한 남자가 유럽의 어느 거대한 공사장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선 많은 일꾼들이 돌을 다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높은 건물을 지어 올리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공사는 수백 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어느 인부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지친 듯 대답했다.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갖다 주는 일을 하고 있소.” 남자는 또 다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돌을 깎는 석공인데, 이 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소.” 세 번째 일꾼에게 남자가 물어보자, 같은 일을 하고 있던 일꾼은 즐거운 목소리로 “나는 대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바로 아느냐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대성당을 짓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우리는 각각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을 사는 것과 분명히 알고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은 다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가 펼쳐지는 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 모든 지금 이 순간은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모든 순간에 우리를 자비의 품으로 끌어안고 계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세의 신비가인 노리치의 줄리안은 “떨어지고 다시 올라오는 중에도 늘 한결같은 귀한 사랑 속에 안겨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삶의 진실로 인정하면 변화무쌍한 삶의 변화에 놀라고 두려워하기보다는, 또한 매달려 집착하려는 마음도 내려놓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그러한 변화 속에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한결같은 하나님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한 그 어떤 것이 찾아와도, 그 어떤 변화가 내게 찾아와도 그것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며, 내게 주어진 최선의 지금 이 순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북미 인디언인 오지브웨이 족 속담에도 “때론 자신이 측은하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위대한 바람에 실려 하늘을 가로지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를 쪼그라들게 만드는 일을 겪으며 실망하고 절망하며 괴롭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그래서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처럼 여겨질지라도, 기억해야 합니다. 위대한 바람이 나를 실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요. 아니 어쩌면 그 바람이 아니면 우리는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떨어지고 올라오는 삶의 흔들림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변함없이 우리를 받쳐 안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모든 것은 흘러갑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지금 이 순간만이 놓여 있습니다. 모든 순간은 다 흘러가지만, 그래도 변함없는 사실은 그 흘러가는 순간은 항상 ‘지금 이 순간’이라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그래도 그 변하는 모든 것은 항상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신비를 깨달으십시오. 지금 이 순간으로 깨어나십시오. 그렇게 변화무쌍한 삶, 변화무쌍한 현실 앞에 지금 이 순간을 깨달으면 그저 있는 그대로 그것을 맑게 비추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은 변함없이 맑고 고요하게 지금 이 순간을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려면, 우리는 과감하게 지나가는 순간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마음이 거기에 매달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다가오는 새로운 지금 이 순간을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기꺼이 그것을 환영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함 안에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나를 받쳐주고 계시다는 믿음으로 또 위대한 하나님의 바람이 나를 실어 하늘을 날게 하고 있다는 믿음으로요.
한 남자가 먼 곳에서 배를 타고 항해 끝에 위대한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근사한 저택이었습니다. 어느 유렵 도시의 거리에 자리 잡은 커다란 집이었습니다. 남자는 랍비의 방으로 안내받아 가면서 기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멋진 방일 거라고. 하지만 그가 안내 받은 곳은 아주 작은 다락방이었습니다. 방에 들어가 랍비를 만난 남자는 또 다시 놀랐습니다. 작은 다락방에는 침대, 의자, 그리고 몇 권의 책뿐이었습니다. 멋진 방의 풍경을 기대한 남자는 실망한 듯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소유는 어디 있습니까?” 랍비가 되물었습니다. “그럼 그대의 것은 어디 있소?” 남자가 대꾸했습니다. “아, 저야 그저 여행 온 여행객 아닙니까?” 랍비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렇소. 나도 이 세상에 여행 온 것뿐이오.”
내려놓고 또 내려놓는 것, 놓아버리고 또 놓아버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길입니다. 잭 콘필드의 말을 인용하면, “과감히 놓아버리고 인생의 한 상태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쥐고 붙들고 매달리는 것은 영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어리석은 부자를 비유로 들면서 쌓아두고 쌓아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풀고 놓아버리고 내려놓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이 영적 성숙의 지름길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게 하는 아니,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계속해서 잭 콘필드는 ‘사랑하기와 놓아버리기가 똑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놓아버리기와 사랑하기, 둘 모두 소유하기를 원치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놓아버리기와 사랑하기는 우리들이 이 변화무상한 인생에 매 순간을 어루만지도록 하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온전히 깨어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모든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기 위해서는, 모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과감하게 지나가는 순간을 놓아버리고 또 다가온 지금 이 순간을 삶의 유일한 진실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30대 후반에 목장, 건축사업 등을 운영하며 이미 엄청난 부자가 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BMW를 몰고 가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검사 결과 흑색종이라는 뇌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종양을 제거하면 살수는 있지만 대신 읽고 쓰고 말하고 이해하는 모든 능력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수술을 안 하면 6주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습니다. 그런 자신을 찾아온 친구에게 대화중에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남겨둔 재산, 집, 자동차, 그 커다란 목장, 얼마 전 구입한 고급 요트,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게 될 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젊은 날 잠시 관심을 가졌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자기가 벌었던 그 막대한 재산이며 고급 요트와 BMW 승용차를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놓아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불현 듯 찾아오는 새로운 지금 이 순간들을 기꺼이 환영하고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유일한 삶이요,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가 펼쳐지는 기회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루미의 시를 기억하시죠? “암울한 생각, 부끄러움, 울분, 이 모든 것을/웃음으로 맞아/안으로 모셔 들이라.//그 누가 찾아오시든 감사하라./모두가 그대를 인도하러/저 너머에서 오신 분들이리니.” 그 모든 지금 이 순간들은 바로 나를 인도하러 저 너머에서 ‘오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 한 사람이 먼 길을 여행하던 중, 드넓은 들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어둡기 전에 쉴 수 있는 마을을 찾기 위해 서둘렀지만 이미 해는 저물어 주변이 어둑어둑해졌습니다. 들짐승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며 길을 재촉하는데 어디선가 어흥!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그네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습니다. 바로 앞에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그네는 비명을 지르며 냅다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먹이를 발견한 호랑이는 놓칠세라 그의 뒤를 바짝 쫓아왔습니다.
나그네가 정신없이 도망치다 도착한 곳은 벼랑 끝이었습니다. 급한 김에 그는 야생덩굴을 붙잡고 벼랑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덩굴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의 머리 위로는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벌벌 떨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또 다른 호랑이가 한 마리 발밑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갑자기 야생쥐 두 마리가 절벽 구멍에서 나오더니 덩굴을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맞은 나그네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위아래에 호랑이, 중간에 덩굴을 갉아먹고 있는 쥐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나그네가 한숨을 쉬며 앞을 보는 순간 그의 눈에 띄는 불그스레한 물체가 있었습니다. 벼랑에 핀 산딸기였습니다. 나그네는 한 손으로 덩굴을 꽉 움켜쥐고 자신도 모르게 다른 한 손을 뻗어 산딸기를 한 움큼 따서는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탄성을 지르며 말했습니다. “이야, 기가 막힌 맛이로군!”
무수히 변하는 현실 앞에,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실 앞에 마음까지 흔들리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사십시오. 지금 이 순간으로 뛰어 드십시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기꺼이 그리고 용감하게 그대로 살아내십시오. 노리치의 줄리안은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고는 하나님께 이런 응답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모든 존재가 잘 될 것이다.” 얄팍한 기복이나 만사형통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기에 결국 모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이 바로 잘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낸다면 거기에 있는, 즉 지금 이 순간이라는 모습으로 찾아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의 신비요, 하나님의 선하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