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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주일설교. 성령을 거역하면, 모독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장 22-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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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책을 보시면 오늘 본문 말씀 위에 제목이 쓰여져 있는데, 개역개정, 개역한글, 우리말 성경은 ‘예수와 바알세불’ 이라고 되어 있고, 표준새번역에는 “예수와 바알세블을 같은 편으로 모함하다” 라고 되어 있고, 공동번역에는 ‘베엘제불과 성령’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대 가나안에는 많은 우상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우상이 바알과 아세라였으며, 이 둘은 부부로 묘사 되었습니다. 바알은 우상 신들 중에 주인에 앉은 주신(主神)격 신으로 알려 졌으며, 폭풍과, 전쟁, 풍요를 주관하였고,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을 주관하는 여신으로 출산을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알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척점에 있는 우상으로 여기고 바알세불(혹은 바알제붑) - 높은 거처의 주인(The master of high dwelling) - 이라고 불렀으며, 신약 시대 이후 바알세불은 사탄과 동일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1~3절에 바알세불이 등장하는 하나의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들의 반응은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후손, 왕이 될)이 아니냐(분명하다, 틀림없다)” 라고 하면서 칭송을 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그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권세를 힘입어 그런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고쳐 주셨는데, 오히려 예수님이 귀신과 짝이 되어서 이런 해괴한 일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을 가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앞의 내용을 보시면 두 가지 사건이 더 있었습니다. 1~8절에서,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을 잘라 먹자 유대인들이 안식일 율법을 어겼다고 항의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들이 무죄한 자를 정죄 하는 구나 안식실의 주인은 나이니라”라고 바리새인들을 가르치며 혼내 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 1패, 예수님 1승입니다.
9~21절에서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손이 오그라져서 펴지지 않는)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안식일 율법을 어겼다고 두 번째 항의를 합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 빠져도 꺼낼 터인데 사람이 양보다 귀하지 않느냐,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라고 말하면서 바리새인들의 말문이 막히게 만들어 버립니다. 바리새인들 2패, 예수님 2승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까 논의 하던 중이었습니다.
2전 2패를 당한 바리새인들은 3번 째로 항의 하면서, 예수님이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는 것처럼 쇼를 하고 있다고 덮어 쒸우려 합니다. 이건 무리수 정도가 아니라 분노한 나머지 이성을 잃어서 말도 않는 이유로 조롱하고 시비를 거는 불량한 태도였습니다. 그들의 속 마음은 고발할 거리를 찾으려고 유죄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치졸한 작업을 걸어 본 겁니다. 보나마나 바리새인들은 3전 3패를 당할 겁니다.
25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화가 많이 나셨지만 다시는 이런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차분하게 조목조목 반박을 하십니다. 25~27절 까지 치밀한 논리로 반박하시는 내용을 보십시오.
“귀신하고 바알은 같은 나라에 속해 있고 같은 가족이나 다름 없는데 자기 식구들끼리 싸우고 쫓아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왕이라고 하는 사탄이 자기 부하들인 마귀 귀신들을 쫓아낸다면 그 나라가 제대로 세워 지겠느냐? 너희 바리새인들의 아들들(제자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있던데, 그러면 너희 제자들도 바알세블의 힘을 빌린 것이냐? 나에게 바알세블을 들먹이며 비난 하는 것이 곧 너희들 자신에게, 그리고 너희가 가르친 제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냐, 이 어찌 황당하고 우습지 않느냐?”
참으로 통쾌한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누워서 침 뱉은 꼴이 되어 예수님을 향해 날린 독설이 자기들에게 그대로 반사 되는 답변을 듣고 말문이 막히고 창피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을 겁니다. 예수님의 완벽한 3전 3승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이 귀신을 쫓아낸 것이 성령의 전적인 능력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서 설명을 하십니다.
2~30절입니다.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아멘
이 말씀의 요지는 예수님께서는 귀신도 다스리실 수 있는 강력한 권세, 곧 왕의 권세가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하는 사탄, 귀신, 마귀라고 할지라도 꼼짝 못하게 결박하고, 그 어둠의 영들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며 사람의 육신과 영혼을 강탕하는 행위를 즉시 멈추고, 그 권세를 빼앗아 버리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감추어진 실상을 드러내서 그들의 허구와 허언을 직설적으로 비판 하신 겁니다. “너희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믿음과 율법 지식에 뛰어나다면, 귀신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니 어떠니 하는 괴변을 늫어놓지 말고, 그 잘난 너희들의 입술에 과연 귀신을 정말 쫓아낼 권세가 있는지 실행해 보아라. 귀신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뭔가 대단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떠들어 대는 새털 같이 가벼운 그 입을 닫아라” 라고 무지르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창피함과 무안함에 몹시 당황하면서 지금 당장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고 싶은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을 겁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심리를 다 아시고 그들의 무지와 완악함을 깨트리시는 진리의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앙에도 대단히 중요한 핵심 포인트입니다.
첫째는, 28절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 나라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이며, 지금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낸 이 곳과 이 현장이 곧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 장소이고,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낼 권세가 있는 내가(예수님 자신이) 있는 지금 이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 그 자체이며, 이것을 보고,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감동이 충만 하게 역사할 것이다” 라고 선포 하신 겁니다.
그러나, 지금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 귀신들이 물러가는 권능의 역사를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고, 오히려 부정하고 공격하는 너희들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가 역사 할 수 없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라고 질책 하신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극도의 흥분 상태여서 어떠한 진리의 말씀도 냉정하게 귀담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전혀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들을 수 있는 귀도 막히고, 마음도 막혀버린 불쌍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할 때, 지금 당장 내 삶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흔히 심령천국이라고 부름)와 미래(죽은 후)에 가게될 하나님 나라로 구분해서 생각합니다. 지금도 누리고, 나중에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준으로 우리의 생각을 통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으면 하나님 나라는 언제든지 임하게 되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언제든지 하나님 나라는 내게 임하지 않습니다. 간단하죠.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언제나 YES 천국이요, 예수님이 없으면 언제나 NO 천국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눈 앞에 있음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복음이 충만히 퍼져있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지켜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믿는 자들)와 함께 하셨고, 지금 이 시간에도 함께 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언제든지 임할 수 있는 조건이 만 천하에 공개 되어 있음에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매일 같이 누리며 평안과 소망 속에 살아가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여전히 곤고함과 근심 속에 살아 갑니다. 이 시대에도 현대판 바리새인들과 같이 말로만, 지식으로만, 율법으로만, 자기 의로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귀도 막고, 마음도 닫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시대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현장을 보고, 듣고, 믿는 자라면 이미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선포 하셨습니다. 내가 만약 삶의 현장에서 성령과 동행하며, 성령의 역사를 수시로 경험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려고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면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곧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나에게, 우리에게 임하여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마음 껏 누리셔야 합니다.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겁니다.
둘째는, 30절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에 대해 말씀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하나님 편에서 일한다고 확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해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칭찬 받아 마땅하고, 높은 자리에서 대접 받아 마땅하고, 뭇 사람들에게 존경 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가 지나쳐서,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 편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면서 기형적인 신앙의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도무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고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흩어 버리는(헤치는) 사람이다”(30절)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시 말해서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은 내 사람(자녀)이고, 성령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자녀)도 아닐뿐더러, 내 일을 방해하고, 내 사람들을 실족시키고 흩어지게 만드는 악인들이다 라고 하신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판단으로는 의가 충만한 신앙인 이었지만, 예수님의 눈으로는 믿는 자들까지 흩어버리는 악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이 두 가지, 28절과 30절을 요약하면, 신앙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매일 같이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성령이 하시는 일을 방해 하지 않고 적극 협력하고 동참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요,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 가는 참된 구원의 자녀들의 삶이라고 가르쳐 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주셔도 바리새인들은 들을 귀가 막혀 있어서 전혀 듣지 않고 분노하기만 했습니다. 우리들은 바리새인들이 아니기에 마음을 활짝 열고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의 말씀에 적극 부응하도록, 몸과 , 마음과, 열심과, 시간을 아낌 없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릴 수 있도록 결단하고 실천해 옮겨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편입니까? 아닙니까? 반대 하는 자입니까? 합력하는 자입니까? 우리는 전부 예수님 편이어야만 하고, 합력하는 자 이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분들이라는 것은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지금 너무나 잘 하시고 계시고 응원하고 칭찬해 드립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를 공급 받으셔서,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매일 매일 경험되는 소망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 그리고 함께하는자와 반대 하는 자, 너무나 중요한 이 두 가지를 말씀 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오늘 설교 말씀의 제목인 ‘성령 훼방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함께 31, 31절을 읽겠습니다.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아멘.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이 말씀 대할 때마다 왠지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부담감이 밀려 옵니다. 인자, 곧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은 차라리 사하심을 얻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중대한 죄악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지금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일 텐데, 이 말씀을 듣는 바리새인들도 우리와 같이 무섭고, 떨리고,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을까요? 오히려 분노가 극대화되어서 지금도 호시탐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의가 넘쳐 났을 겁니다.
바로 이겁니다. 끝까지 성령을 모독하고, 거부하게 되면 끝장을 보고야 맙니다, 자기 자신이 살인자가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끝장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지만 악한 행위를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영혼도 구제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이 세상이든, 오는 세상이든 어디에서도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암흑의 구렁텅이로 자기 스스로을 밀어 넣는 꼴이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기가 들어갈 함정을 자기 스스로 파고 있다는 무서운 경고를 내리신 겁니다.
자 그럼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그렇게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예수님 조차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못 박듯 말씀하신 성령을 모독하고 거부하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을 모독하고 거부하는 죄가 무엇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내용을 토대로 하면, 성령이 역사하시는 일에 대해 폄하하고, 불인정하고, 공격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성령훼방죄에 해당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성령을 모독하는 성령훼방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역사상 예수님이 실제로 활동하셨던 시대처럼 빛과 영광과 기적과 진리가 왕성하게 선포되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가장 뚜렷하게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 있었음에도 바리새인들은 성령으로 역사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도 도무지 믿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을 뿐만 아니라, 죽이려 했고, 귀신이 들렸다고 공격했습니다. 이런 수모를 참고 은혜를 주시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최종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성령훼방죄는 이처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예수님이 곧 하나님 이심을, 성령님이 곧 하나님 이시라는 자체를 인정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고, 알수 있는 기회를 주어도 걷어 차 버리고, 그토록 오래 참으시며 은혜주시려고 기회를 무수하게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대적하는 마음을 꺾지 않는 죄를 말합니다. 이렇게 까지 거부한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멸망을 당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면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이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기는 하지만, 이 말씀이 은혜의 통로, 구원의 기회를 박탈하려는 최종적인 심판의 말씀은 아닙니다. 가장 큰 경고를 통해서라도 마지막 돌이킴의 기회를 주시려는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의 결정판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적대적인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보시고는 말씀하시는 화법을 바꾸셔서 은유와 비유로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을 감추어서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마태복음 13:11~13절 나옵니다.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도 듣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듣지 못하게 하여 더 이상 시간 낭비 하지 않겠다, 더 이상 방해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귀 있는 자들만 들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겁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염소와 양,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있듯이, 아무리 진리의 성령이 가르쳐 주고, 권면하고, 경고를 해도 듣는 자는 듣고, 듣지 않으려는 자는 끝까지 안 듣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들 앞에서, 산이 솟아나고, 바다가 사라지는 기적을 행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듣는 자는 은혜로, 듣지 않는 자는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훼방죄는 바로 이러한 갈림길에 선 위기의 자들에게 던지는 우리 주님의 마지막 경고이자 기회의 권면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겠지만” 이라고 하셨겠습니까? “차라리 나를 욕해라 그건 오히려 낫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일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절대로 거부하거나 멸시하지 말라. 그렇게 반대하고 거부하는 태도와 자세가 곧 성령훼방죄이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그건 나도 정말 참지 못한다. 끝까지 그런 나쁜 태도를 보인다면, 나도 내 할 일 하겠다. 그 결정은 곧 죄 사함의 기회를 더 이상 주지 않는 것이다. 명심해라.” 이런 뜻이 성령훼방죄에 담겨 있는 진실한 의도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이 말씀을 엄하게 하셨는지 33~35절을 보시면 실감이 납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말씀이 심한 욕설이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교묘한 화술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거절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학적인 용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도 요단 강가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말을 했습니다. 요한이나 예수님이 욕쟁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은 뿌리도 없고 썩은 나무가 문병한데, 자기들의 입으로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마치 몸은 풀 숲에 감추어져 있고 입으로는 독기를 내뿜으며 긴 혓 바박을 낼름 거리는 독사와 다를 바 없다고 질책하셨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입으로도 좋은 말, 예쁜 말, 품격있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악한 사람은 입으로도 저질 스러운 말, 거짓된 말,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속 마음이 악함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다 아시고, 너희들이 행하는 악한 행위는 성령훼방죄에 해당하며, 그렇게 계속 살다가는 나쁜 열매들을 맺게 되어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성령훼방죄 말씀이 레프트 훅 이라면, 나쁜 열매, 그리고 멸망과 심판에 대한 이 말씀은 라이트 훅입니다. 두 번의 카운터 펀치를 맞은 바리새인들은 정신이 혼미 했을 겁니다.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들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견제할 어느 누구도 만나 본 적이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교만함이 하늘을 찔렀고, 하나라도 자신들의 말을 거스르는 자를 죽이려고 까지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36~37절을 읽어 드립니다.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아멘.
이 두 구절을 우리 고전에서 전해 오는 속담으로 풀어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야 이×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 그런 심뽀로 잘도 살아 지겄다. 천벌을 받을 것이여 천벌을~” 성경 해석이 이렇게도 찰지게도 되네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기억하시고, 우리가 행한 그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입으로 말한 것들에 대해, 그 말들이 의로운지, 정죄를 받아야 하는지 심문을 받는날이 온다고 합니다. 심판, 심문, 말대로 행위대로 판단, 이런 말씀들을 접할 때마다 힘이 빠지고 두렵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성령을 거역하면, 모독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도 권면과 경고와 기회와 은혜의 말씀으로 울려 퍼져야 합니다. 사탄의 이름은 “하나님께 대 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우리를 동참시키려고 갖은 유혹을 합니다.
성령을 거역하며 편하게 살라고 유혹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며 내 이름을 높이라고 유혹을 합니다. 입을 더럽게 만들어서 거짓과 불의함에 앞장서도록 유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령을 훼방하는 사탄의 유혹에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까딱하다가는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사탄이 활개치면서 나도 모르게 현대판 바리새인으로 변질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온갖 사탄의 유혹을 분별하고 물리 칠 수 있는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시고, 막아 주시려고 성령이 오셨습니다. 우리의 입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절제 시키시려고 성령이 오셨습니다. 뿌리부터 견실하게 만들어 주셔서 좋은 열매을 맺도록 도와 주시기 위해 성령이 오셨습니다.
마지막 심문을 받는 날에,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언해 주시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성령훼방죄,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일체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안에 와 계신 성령님을 의지 하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나도 얼마든지 바리새인화 되어가는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명심 하시고, 오늘 주신 예수님의 강력한 권고의 말씀과 기회의 말씀을 잘 받들어서, 오직 성령 충만함으로 세상의 악과 유혹을 물리치며, 믿음의 길,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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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에게 성령 충만함의 은혜를 내려 주시고, 오직 성령이 인도하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직 성령이 우리 몸과 마음을 주장 하여 주셔셔 거짓과 악행을 도모하지 않도록 지켜 보호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