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헐적(間歇的) 시(詩) ★ 서정시(瑞正詩) 19
멈칫
오늘 아침 여러 시어들이 떠올랐으나 멈칫했다 아무래도 시적 아우라가 없고 감흥도 없고 밋밋하다 못해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가보지 못한 사막에 선 심정보다 더 심각했다
문득 허수경이란 시인이 떠올랐다 왜 그랬는지는 설명이 어렵다 허 시인의 시를 찾아 읽어보았다 고백조로 애절하고 상위어도 하위어도 아닌 기본층위 언어로 세레나데처럼 아프게 이어지는 감미로운 문장들이 나를 멈칫하게 했다 나는 시를 쓰지 말지어다
그래도 이렇게 뭔가를 적어나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다 살려고 하는 가상한 행위이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공부를 한다 이런 형식으로도 시를 쓰는 것이구나 지금 내가 쓴 것처럼
멈칫거릴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 역시 이렇게 적어가다 보니 심화가 된다 주눅 들어 멈칫거리고 싶을 때도 멈칫거리지 말고 내면과 외면 눈치 보지 말고 무장애만이 있다는 생각으로 쭉쭉 흘러가보자 멈칫거리지 말고
(김서정, 金瑞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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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우리는 시를 쓰면서도 언어를 불신해요. 불성실한 하인쯤으로 여기는 거지요. 언어는 우리보다 위대해요. 언어를 믿어야 언어의 인도(引導)를 받을 수 있어요.
17
시에 힘이 실리지 않는 건 언어에 대한 소홀한 대접 때문이에요. 언어는 시의 처음이고 끝이에요. 하지만 언어가 유일한 낙처(落處)라 해서, 반드시 시의 형식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18
우리의 세계는 언어로 된 세계예요. ‘언어 너머’ 또한 언어이고, 지금 이 말조차 언어예요. 시인은 알몸으로 언어와 접촉하는 사람이에요.
- <무한화서>(이성복)에서
(오늘 <무한화서> 글에서 “하지만 언어가 유일한 낙처(落處)라 해서, 반드시 시의 형식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를 보자.
먼저 ‘낙처(落處)’가 뭔지 몰라 검색해보았다. “본래 자리, 문제의 궁극적 귀착(歸着) 또는 요지 (要旨)를 말함”인데 영어로는 “A key point, a conclusion, or an essential point.”란다. 작성자는 종산스님이란다. 불교 용어 같다.
위 글에서 힘을 얻는다. 언어로 사는 인생, 그게 반드시 시의 형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시라는 것, 그 형식을 자꾸 멀리해야겠다. 시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말소시켜야겠다. 언어를 통해서 낙처를 찾는 일에 매진해야겠다. 멈칫거리지 말아야겠다.
간헐적 시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는데, 거의 매일 시를 쓰고 있다. 아침이 되면 생각들을 압축해서 시로 모으려고 한다. 그러다 불쑥 잊었던 어떤 기억들이 소환된다. 집중 사색이 이루어진다. 옹알옹알. 재미는 있다. 멈칫거리지 말고 계속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