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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3. 23.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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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효과적인 읽기, 낭독의 재발견 (박관수)
2. 성경 문해력을 향상시키는 성경통독 방법 (이상준)
1. 효과적인 읽기, ‘낭독’의 재발견
출처 : 『생명의 삶』 두란노 2025년 3월호
글쓴이 박관수 : 구영교회 담임목사
요즘 '문해력의 위기'에 대한 보도를 자주 접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몇 년 전에 발표한 '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 보고서에서 만 15세 청소년들의 디지털 문해력 순위를 공개했다. 그 조사에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자신의 눈과 귀에 들어오는 디지털 정보를 보고 사실과 의견을 식별하는 능력이 국제 평균인 47%에 한참 못 미치는 25.6%에 머물렀다. 문해력 문제를 겪는 세대는 청소년만이 아니다. 취업 플랫폼 '인크루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직장인과 자영업자의 절반이 비즈니스 문서를 읽을 때 내용 이해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1) QT의 성패를 좌우하는 문해력
QT에 대해 얘기하면서 왜 문해력을 언급하는가? 문해력이란 글을 읽고 이해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이다. 글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은 언어 능력과 사고력, 학업 성취도 업무능력을 좌우한다. 마찬가지로 문해력은 QT의 성패를 좌우한다. 왜냐하면 QT란 기본적으로 '성경 본문'이라는 글을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본문을 읽어도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QT는 아예 출발조차 할 수 없다.
성경은 글로 쓰인 하나님 음성이고, QT는 그 음성을 듣는 것이다. 글로 쓰인 성경의 뜻을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고, QT한 내용을 적절하게 삶에 적용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QT는 성경 본문을 제대로 읽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글을 읽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글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리내어 읽기'(낭독)다. 책을 읽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눈으로 읽는 '묵독'과 입으로 읽는 '낭독'이다. 인류가 책을 읽을 때 소리를 내지 않고 눈으로만 읽는 묵독을 시작한지는 불과 10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동양과 서양의 책 읽는 방법은 낭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예로 우리 조상들이 천자문이나 사서삼경을 종일 낭독한 것을 들 수 있다. 서양에서도 호머의 시(詩)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등을 소리 내어 읽고, 서로 토론했다.
2) QT의 진일보를 이루는 본문 낭독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왜 소리를 내어 책을 읽었을까? 낭독은 책의 의미를 파악하고, 책의 내용에 공감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뇌과학의 권위자인 일본 도호쿠대학의 가와시마 류타 교수는 컴퓨터 게임을 할 때, 수학 계산을 할 때, 책을 묵독할 때, 책을 낭독할 때 뇌를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했다. 그 결과 뇌의 활성화 정도는 점점 더 높아져 책 낭독 시에 가장 활성화되었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하게 연구하고 조사한 결과, 묵독보다 낭독 시 뇌의 20~30%가 더 활발하게 작동한다고 밝혀졌다.
소리를 내지 않고 책을 눈으로만 읽을 때는 눈과 두뇌만 움직인다. 하지만 낭독하면 입도 움직이고, 내 귀에 내 소리가 들리고, 머리로 생각도 하게 된다. 내용이 더 선명하게 들어올 뿐 아니라, 잡념과 의심을 막아 주고 읽는 내용에 감정이 잘 스며들게 된다.
성경에서도 "이 율법책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밤낮으로 묵상해 ... 지켜 행하여라."라고 명령한다(수 1:8). 그래서 과거 믿음의 선배들도 성경을 읽을 때 소리 내어 읽었고, 지금도 정통파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소리 내어 읽는다. 이렇듯 말씀을 낭독하고 그 말씀을 계속해서 주야로 읊조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QT 방법이다.
필자가 온라인으로 인도하는 '행복한 말씀묵상학교'에서는 QT 본문을 소리 내어 10번 읽도록 강조한다. 그렇게 실천하는 이들은 읽을 때마다 본문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고, 집중도 잘 되며, 눈물이 나고,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기도가 터져 나온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실천사항을 제안해 본다. 이번 달에 QT하면서 해당 본문을 10번 소리 내어 낭독해 보길 바란다. 자신이 낭독하는 소리를 휴대폰 앱으로 녹음해서 수시로 들으면 더 좋을 것이다. 본문을 반복해서 낭독하는 것만으로도 QT가 분명히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2. 성경 문해력을 향상시키는 성경통독 방법
출처 : 『목회와 신학』 두란노 2025년 3월호
글쓴이 이상준 : 1516교회 담임목사
21세기는 언어의 시대이자 비언어의 시대가 돼 가고 있다. 지금보다 소통의 기술이 첨단을 달린 때가 없지만 지금처럼 언어적 소통이 어려워진 시대가 있었는가. 이는 영상 미디어의 홍수 때문이기도 하고 다원주의 사상의 범람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소통을 장려하면서도, 영혼 없는 말이 난무하고 말의 진위를 알기 어려운 시대가 돼 버렸다.
이런 시대에 성경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해석하기 어려운 고어들로 가득한 다락 속의 낡은 책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이 시대의 다원적이고 감각적인 언어와는 사뭇 다른, 고전적이지만 현대적이지는 못한 옛날 책으로 인식되지 않는가? 결국 성경은 ‘폐위된 왕’처럼 갈수록 더욱 외면당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 기독교 초기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한반도에서 기독교는 선교사보다 먼저 들어온 한글 성경 때문에 시작됐다. 만주에 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1879년에 번역한 성경은 보따리상들의 손을 통해 조선에 들어오게 됐고, 사람들은 성경만 읽고도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됐으며 세례받기 위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선교사들을 찾아갔고 이 땅에 교회를 세웠다.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온 것은 언어의 성육신이었다. 하나님은 불가해한 천상의 언어로 성경을 주시지 않고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주셨다. 성서 히브리어는 유목민이던 히브리인의 일상적 언어였고, 성서 헬라어는 시장에서 통용되던 코이네 헬라어, 즉 통속적 헬라어였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언어적 눈높이를 맞춰 줬다.
성경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신 30:11). 모세가 모압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성도들이 성경을 읽어 보려고 시도해도, 심지어 성경을 해설하는 설교를 들어도, 성경은 에덴처럼 굳게 닫혀 있는 동산처럼 느낄 때가 많다.
그렇다면 멀고도 가까운 성경책에 대한 문해력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은 절실하게 우리와 언어적 소통을 하기 원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의 장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의 언어가 내 영혼의 외국어에서 모국어로 전환될 때까지 자주 매일 친밀하게 대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바로 성경을 매일 통독하는 것이다.
성경을 매일 읽어 가면서 감동받은 부분에서는 잠시 머물러 묵상하고 난해한 본문이나 사건과 배경에 대해서는 공부하고, 의문점이 생길 때는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 질문할 수 있다. 그렇게 성경을 읽어 가는 통독을 바탕으로 말씀 묵상과 성경 공부를 접목하면 신앙적으로 건강하면서도 언어적으로도 풍성한 성경 이해가 가능해진다.
1)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라
지난 20년간 성경통독을 성도들과 함께하면서 매주 성도들에게 질문을 받고 답변을 했다. 그러면서 성도들은 생각 없이 읽던 성경,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의무감으로 읽던 성경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성경으로 바뀌는 일을 경험했고 나는 말씀의 진의를 더 깊이 연구하게 됐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하신 책이 아닌가! 그래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아가는 성경통독을 하면 성경에 대한 이해도가 놀랍게 향상된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려면 어휘력과 문장력이 필요하고 원어 사본 및 다양한 역본과의 비교를 통해 진의를 파악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경 읽기를 한다면 이보다 감격적인 성경 읽기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성도들에게 강조한다. "모든 질문은 좋은 질문이다.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다. 사람에게 질문하면 사람의 대답을 듣고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대답을 듣는다." 그래서 성경에서 질문이 생기면 하나님께 질문하고 성경에서 답을 찾아가도록 훈련한다. 그러면 놀랍게도 성경 안에서 상응하는 말씀들의 하모니를 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5세기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번은 부두교 신자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받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면 태초 이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느냐?" 유출설을 믿는 이단자는 천지가 없던 때에는 하나님이 계실 곳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문에 현답을 했다. “하나님은 천지라는 공간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태초라는 시간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영원에 계셨었고 지금도 영원에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영원에 계실 것이다.”
시간과 영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은 당시 이단자의 어리석은 질문에 명쾌한 답변이 됐을 뿐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면 어떻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통찰을 얻게 됐을까? 그가 성경을 평상시에 반복해서 읽으며 스스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겠는가.
오늘날에도 5세기의 질문자처럼 성경에는 전혀 사실성에 근거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많다. 과학주의 시대에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던 과거의 천동설을 여전히 믿고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에서는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칠 때 태양이 머물렀다(수 10:13)고 말하니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고 불신한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통독하다 보면 이는 단편적인 오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면 이미 아브라함처럼 족장시대 인물이었던 욥의 고난을 다룬 책에서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았고(욥 22:14), 지구가 공간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도 알았고(욥 26:7), 천체가 정해진 법칙에 따라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도 알았기 때문이다(욥 38:33).
결국 성경통독을 통해서 현대의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은 언어의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 주신 것이지 성경이 전혀 비과학적인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전적인 책일 뿐 아니라 현대적인 책이며, 근원적 진리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보편적 메시지를 다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성경을 통독하면서 질문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질문을 통해 질문자의 관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을 때 소위 은혜파가 있고 진리파가 있다. 은혜파는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홍수로 다 죽이시고 지옥 불에 보내실 수 있는가?“
진리파는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그냥 방관하실 수 있는가?" 그래서 어떤 성도는 출애굽 사건을 보면서 "저런 악한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도록 놔두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출애굽시키실 거라면 바로를 단번에 끝내시면 되지 않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정반대 질문도 나온다. "바로가 너무 불쌍하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는데 바로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10번이나 혼내시는가?“
하지만 출애굽기를 다시 읽어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구절이 5회 나오고(출 9:12; 10:20, 27; 11:10; 14:8), 바로가 스스로 완악해서 그랬다는 구절 또한 5회 나온다(출 7:13, 14; 8:15, 19; 9:34).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 해당하는 구절만 보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착한 바로를 완악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바로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구원 역사를 만들어 가셨다.
성경은 절대 진리의 책이면서 동시에 우리와 소통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린 책이기에 사람의 질문을 환영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편향된 관점으로 인해 못 보던 부분을 보게 되고 균형 잡힌 관점으로 성경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거울과 같아서 진리의 기준 앞에 비뚤어진 우리의 관점과 내면을 보여주고 고쳐준다.
성경을 읽어 가는 우리 영혼이 은혜 쪽으로 기울거나 진리 쪽으로 기우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은혜와 진리,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독과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와 같은 깊이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금강석과 같은 강도를 체험하게 된다.
2) 거룩한 상상력으로 읽고 질문하라
성경통독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간 세계에는 은혜와 진리, 사랑과 공의, 자율과 통제, 구원과 심판의 완벽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성경통독을 하면 이 완벽한 균형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자꾸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상상하게 된다.
거룩한 상상력은 성경을 통독할 때 문해력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아브라함은 소돔에 의인 10명이 있어도 심판하시겠느냐(창 18:32)며 질문했고, 하박국은 어떻게 악인들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 침묵하고 방관하시느냐(합 1:13)며 질문했다. 이런 성서 인물들의 질문과 마음이 우리 것이 될 때 성경은 현재형이 된다.
거룩한 상상력으로 호세아서를 읽어 보면,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에게 준엄한 목소리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외치시다가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느냐고 사랑으로 간청하시는 장면을 보면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내 마음이 치밀어 오르기까지 한다.
성경을 통독하다 보면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고 신약의 예수님은 부드러운 분이라는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첫 번째 범죄자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내보내시면서도 불쌍해서 가죽옷을 입혀 주시고, 첫 번째 살인자 가인이 읍소하자 불쌍해서 보호의 표를 주신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가인의 자손들 때문에 세상이 악해져가서 에녹을 통해 심판을 예고하시고도 천년을 기다리셨다가 홍수로 심판하신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홧김에 심판하신 분이 아니라 천년이나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성경을 무의미하게 읽던 성도들이 성경을 반복해서 읽고 질문하며 알게 되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통독을 통해 레위기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피의 제사는 불쌍한 동물들을 가차 없이 희생시키시는 비정한 하나님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욘 4:11)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길 얼마나 간절히 원하시는지 그래서 다시금 우리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를 얼마나 소망하시는지를 보여 준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리고 심판하시겠다는 무시무시한 말들로 도배돼 있는 예언서들이 전에는 너무나 시끄러워서 알아들을 수 없는 헤비메탈 음악처럼 들렸다면, 통독과 질문을 통해 새롭게 깨닫게 되는 예언서는 마치 부모가 자녀를 혼내고 싶지 않아서 “자꾸 말 안 들으면 혼난다. 제발 그만 돌이켜라” 말씀하시는 안타까운 외침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또한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고 죄인들을 용서하고 빈자들을 먹이며 긍휼만 보이신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상을 엎기도 했고 외식하는 종교인들에게 7번씩이나 “화 있을진저!"(직역하자면 "저주를 받아라!", 마 23:13-36)를 외치셨고, "독사의 새끼들아"(마 23:33)라고 부르셨고 마귀의 자식들이라고까지 하셨다(요 8:44)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일하게 사랑과 공의의 양면을 다 보여 주고 계심을 성경통독을 하면서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은 왜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렇게 악해졌을까?"를 질문하게 된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하나님 탓만 하고 사탄 때문이라고 핑계대기도 하지만 결국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책임 있는 동역자로 서야 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죄인인가 의인인가? 과연 나는 죄의 종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고민한다. 성경을 보고 자신을 보고 세상의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끊임없이 인간의 극단적 양면성을 보고 질문하게 된다. "진정한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바울의 고백처럼 정직하게 인간 자신을 들여다보면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사 아들까지 보내셔서 생명을 주시고 이제는 성령님까지 보내셔서 성화의 여정을 도우시는지 성경을 읽을수록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망가진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일까? 그런 신약의 질문은 다시 창세기를 읽을 때 해소된다. 망가졌어도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신약통독은 다시 구약통독으로 이어진다.
성경을 읽을수록 성경 문해력이 향상된다는 말은 단순히 지적인 측면만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을 읽을수록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고 깨달아지고 감격하게 되고 찬양하게 되는 영적인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고 우리가 성경을 읽기 원하시는 이유다.
3) 역설적 진리와 반전 스토리를 발견하라
성경을 읽다 보면 단순한 질문에서 깊이 있는 해답을 얻고 편향된 관점이 균형 잡힌 건강한 관점으로 변화되면서 성경 전체의 진리가 놀랍게도 역설적 진리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스로 의인인 줄 아는 자는 죄인이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는 의로움을 덧입게 된다. 낮아져야 높아지고 죽어야 사는 길이 성경의 길이다.
그래서 성경이라는 절대 계시의 진리 앞에서 유한한 인간이 갖고 있는 관점과 질문들과 생각들이 통전적이고 온전한 진리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논리 중에서 가장 탁월한 역설의 힘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논리로 보면 역설이요, 인생과 역사로 놓고 보면 반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끊임없이 반전의 대가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서 잘난 사람, 탁월한 사람은 낮추시고 못난 사람, 부족한 사람은 들어서 쓰시는 하나님은 반전 드라마를 선호하는 분이시다. 그래서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연약한 히브리인('하비루'는 고대에 난민이라는 뜻이었다)을 선택하사 가장 놀라운 출애굽의 구원 역사를 보이셨고, 빈들에 버려진 목동 소년을 들어서 사사시대 400년의 무너진 신앙을 놀랍게 반전시키셨고, 포로 된 백성 중에 다니엘과 에스더를 들어서 시대를 구원하시는 역사를 이루셨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어두운 죄악의 땅에 오셨다. 그것도 하나님과 동등이신 분이 인간의 형체를 입고 오사 십자가까지 지셨으니 성육신과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었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은 역사의 최종 심판주로 임하실 것이니 마지막 대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성경통독을 통해서 역설적 진리와 반전의 스토리에 익숙해지게 되면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평면적 관점이 입체적 관점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한다. 기존에는 인생과 역사를 바라볼 때 늘 좌 아니면 우, 전체 아니면 개인, 보수 아니면 진보 두 가지 선택밖에 없는 평면적 관점을 가졌다면 통독을 통해 성경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지면 입체적 관점이 열리게 된다.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했던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 불가합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저들은 친 제국 아니면 반 제국 두 가지 선택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이사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전혀 다른 입체적인 관점을 말씀하셨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선택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히브리인의 남아들은 다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히브리 산모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아이를 스스로 나일강에 버려 죽이든지 아니면 숨기고 있다가 잡혀 죽든지였다. 그러나 기도할 때 제3의 길이 그녀에게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바로의 딸 앞에 모세를 보였고 그 바로의 딸의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이 모세를 건져내셨다.
성경을 통독하면서 이 땅의 관점으로 사는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차원에서의 관점이 열리는 일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유대인의 경험주의, 헬라인의 합리주의라는 두 갈래 길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입체적인 해답이었다. 모든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민할 때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된다고 고백하는 순간, 양극단의 평면구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창공을 비상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것이 통독이 갖는 놀라운 힘이다. 말씀을 통독하면서 말씀의 길이 내 인생의 길이 되는 데까지 가면 승리의 삶이 열린다.
4) 진리 안에서 교제하는 축복의 장
지금까지 의무감으로 성경을 대하고 읽었다면 이제부터는 기대감을 갖고 성경을 통독하기를 권면한다. 하나님은 성경의 동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말씀을 읽고 질문하고 묵상하고 상상하며 말씀의 세계가 입체화되면 그 입체화된 말씀의 동산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와 대화하고자 기다리시는 또 하나의 동산이요,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또 하나의 성소다. 하나님은 절대자시며 자존자이신데 놀랍게도 피조물인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싶어 하신다. 성경 자체가 우리를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부르는 초대장이 아닌가. 거절하지 말고 그 초대에 응하기를 권한다.
사실 나는 어릴 적 동화책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아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동화책 10권을 채 읽지 못한 수준이었다. 검은 것은 활자요 흰 것은 여백일 뿐이었다. 아무런 상상력이 없었기에 내게는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입에 모래알을 넣고 씹는 것처럼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자연히 공부도 어려웠고 일상생활도 답답한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겨울 수련회에서 성령 체험을 하며 본격적으로 성경을 통독하기 시작했다. 족보에서는 혀가 꼬이고 레위기는 지루하고 예언서는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매일 성경을 1시간씩 읽어 가자 진리의 언어가 나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놀랍게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축복의 약속이 가득한 성경책이 보물창고 같아서 좋았고 그런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 좋아서 성경을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질문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관련 구절을 연결시켜 주시며 성경을 이해시켜 주셨다.
그러자 말씀은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졌고 성경 문해력이 향상되자 세상 공부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전 세계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호 공감과 상호 참여를 기다리시는 교제의 장이다. 성경통독을 통해서 진리 안에서 교제하는 축복의 삶이 모두에게 열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