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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전화가 지난번에 한 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이 강단의 꽃과 이제 스톨 색깔이 보라색이지 않습니까? 보라색인데 보라색의 의미가 뭐라는지 여러분 기억 혹시 나세요?
세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기다림, 그다음에 소망, 그다음에 회개 예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 땅에 오신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하늘의 소망,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가 참 잘못한 거, 부끄러운 것이 있으면 회개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이 대림절에는 기다림과 소망과 회개로 나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라는 말씀의 제목입니다. 어떻게 바라라고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요즘 많은 분들이 그냥 조용하면 잠을 못 주무시는 분들이 참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잠을 자더라도 TV를 켜놓어야 되고 또 음악 소리를 음악을 틀고 잠을 자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시대가 자극적이고 시끄러운 환경에 길들여져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특별히 우리 아이들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우리 아이들 중에는 길을 걷거나 또 차 안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니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심지어는 수업을 하는 교실에서도 그것을 귀에 꽂은 채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이런 현상을 못 마땅히 여긴 어느 선생님께서 대상으로 아이들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텔레비전을 본다든지 음악을 기울이면서 공부하는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두고 물어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놀랍게도 응답자의 대부분 아이들이 유익하다 도움이 된다고 답을 한 것입니다.
아마 우리 나이가 드신 분들은 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떻게 시끄러운데 공부가 되느냐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시끄러 음악 소리를 들으면서 공부를 해야 공부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음악 소리가 끊어지면 졸립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약해지고 또 잊혀져 가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바로 묵상입니다. 뭐라고요? 묵상 묵상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묵상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영성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영성 강의를 하면서 이 개신교가 기독교 유산 가운데 잃어버린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묵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한 목사님께서 자신은 명성만 하면 이상한 생각이 들고 오히려 기도에 더 집중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강사 목사님께서 그것은 이 통성 기도에 길들여진 현대 기독교의 현상이라고 말하시면서 기도의 본질은 자신의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마음에 묵상하면서 가야만이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도 통성 기도에 길들여져 있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무조건 기도하면 통성 기도부터 나옵니다. 하지만 이 묵상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기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이것은 묵상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묵상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묵상은 나를 돌아보게 될 것이고 내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고, 내가 정말 진정으로 구하는 것이 맞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묵상에 대해서 너무나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쓴 시인데 노년에 기록한 시입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다윗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없습니다. 베들레헴의 양치는 목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사람입니다. 그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서 다윗은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울 왕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 충성스러운 다윗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배신을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인 자기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는 뼈아픈 슬픔도 겪어야만 했습니다. 자기가 믿었던 나라, 자기가 믿었던 친구들, 또 자기가 믿었던 신하들,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전부 배신하는 아픔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 많은 시련과 사건 속에서 다윗은 깨달은 것이 깨닫는 것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는 믿을 자가 없구나 아 세상에는 믿을 것이 없구나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다윗의 마음속에는 고요해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담대하게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외침입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육체의 건강마저 잊어버렸고, 친구도 떠나버렸고, 동료도 잃어버렸고, 명예도 잃어버렸고, 자신의 아들마저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은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내 영혼입니다. 뭐라고요? 내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다 흔들리고 다 병들어도 내 영혼아 너만은 하나님을 바라보라.
내 영혼아 너만은 하나님을 바라보라.
영혼만큼은 바로 서 있어야 됩니다. 내 영혼만큼은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지난주에 우리는 우리 김혜숙 권사님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우리 권사님은 육신적으로는 아주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희로애락을 모두 다 경험을 했습니다.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한 한두 달 정도 뺄 때는 마지막 병상에 누워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누워서 보냈습니다. 권사님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이런 것들을 다 겪습니다.
하지만 우리 육신보다 더 중요한 것 있지 않습니까? 바로 사람의 영혼입니다.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가 길지 않습니다. 우리가 젊었다고 해서 나는 괜찮다 아닙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인간의 육신은 흙으로 그 영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 잘 돼야 될 게 뭘까요? 영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기를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되기를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되기를.
여러분 우리 육신은 약해지고 병들어지고 더 나빠지고 더 약해지지만 하지만 그 영혼은 더욱더 강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영혼이 약해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도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지금 자신을 향해서 꾸짖고 꾸짖고 있는 겁니다. 야 너 왜 세상에서 방황하느냐 야 너 왜 세상에서 미련을 갖고 있느냐 믿지 못할 것인 줄 알면서도 왜 너 마음을 그곳에 속아 부었느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라.
여러분 여기에 잠잠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말하지 마라.
그런데 우리는 오늘도 얼마나 많은 말을 쏟아붓는지 모릅니다. 이 말 저 말 엄청나게 쏟아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만 일만 생기면 누구에게 얘기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뭐가 좀 나아질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 말하는 순간은 그 순간은 물론 시원할 겁니다. 말하는 순간에 해결이 다 된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얘기할수록 점점 더 고통스럽기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힘든 사연을 가시거리로 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내 말 잘 들어주겠지 내 아픈 사정 이해해 주겠지 여러분 그런 사람 별로 없습니다. 내가 속 얘기를 하고 되면 여러분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자꾸만 쉽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 얘기가 돌고 돌아서 내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많은 얘기를 쏟아낼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말씀에 우리 3절 4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세요. 3절 4절입니다. 시작
아버지는 가사가 그리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였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땅에서 떨어뜨리기만 배하고 거짓을 즐기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오 속으로는 저주로나
아멘 보시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뭐하려고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마귀를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절 말씀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뭐 하고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무엇을 즐겨하니 거짓을 즐겨하는 입으로는 무엇이오 축복이오 속으로는 무엇이로다 저주로다.
여러분 사람들은 입으로는 겉으로는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여러분 저주를 품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힘든 가운데 있습니다. 아마 가장 힘든 분은 아마 윤 대통령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충신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정말 배신하는 것들을 보면서 아마 굉장히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말로는 다들 충성충성이라고 하지만 자신에게 손해가 끼칠 때 문제가 생길 때 다 당신 탓이라고 당신의 문제라고 시키지 않았느냐고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사람에게 자꾸만 하소연을 합니다. 여러분 입으로는 축복이요 겉으로는 저렵다. 다윗은 이것을 뼈저리게 느낀 겁니다. 그 자식에게조차도 배신을 당하는 그 마음. 그러니 그가 그의 소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처럼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라.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라. 입을 다물고 잠잠하라는 겁니다.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불평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고 하나님 앞에 잠잠히 내 영혼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잠잠하라는 말은 변명을 거두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조그만 자기 집 문제가 생기면 변명을 합니다. 내가 그런 게 아니다고 내 잘못이 아니다고 여러분 이 변명조차도 잠재우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화에 맺히고 원한에 맺히고, 내 육신의 뜻대로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간다 할지라도, 내 상황이 좋지 않다 할지라도 여러분 그때 내뱉는 말은 나를 더 고통의 절망 속으로 빠뜨린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에 걱정이 생기고 근심이 생기고 하나님이 지다 보면 여러분 기도가 잘 나올까요? 잘 안 나올까요?
맞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도 기도도 잘 나오기 위해서는 내가 마음이 편안해야지 내 마음이 기뻐야지 기도도 잘 나오고 예배도 잘 드리죠. 내가 이 시간 앉아 있기는 한데 이런 이런 걱정 저런 걱정 이런 것들이 가득 차 있으면 여러분 앞에 있는 목회자가 아무리 은혜로운 설교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제가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잖아요.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마음으로 주일을 보내십시오. 주일을 사모하십시오. 설렘으로 주위를 기다리십시오. 이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저도 목회자입니다마는 이 주일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금요일 날부터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고 내 마음을 추스리고 그렇게 준비하고 했을 때 주일을 앞에 서게 되면 굉장히 은혜가 되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고 토요일까지 마음의 근심 걱정 아픔이 있으면 주일날 선포하면 말씀의 은혜도 없고 내 자신부터 편안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설교를 하고 예배에 인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걱정과 염려와 근심은 다 내려놓고 내 영혼아 하나님만 바라보라. 내 영혼아 하나님만 바라보라.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지도 마시고,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지도 마시고, 대신 조용히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성아우구스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판단을 중지하라.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라. 일단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하나님을 보아라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출애굽을 했습니다. 대군중의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광야로 떠납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고, 백성들은 모세를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들은 모세가 인도한 대로 그저 따라갈 뿐입니다.
그런데 가고 보니 그 길이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출렁거리고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뒤쫓아옵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습니다. 독 안에 던집니다. 아이고 이제 우리 죽었구나. 원망과 절망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모세 보고 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애굽의 공동 묘지가 모자라더냐 왜 우리를 이끌어내서 이 광야에 죽게 만드느냐고 그래 우리가 뭐라고 했더냐 진작에 우리를 그냥 놔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인도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고 원성을 높여 소리를 지르면 할 말 못할 말 다 합니다.
그때 모세가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아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뭐 하시리니 싸우시리니, 너희는 뭐 할지어다 가만히 있을지어다. 조용해라. 하나님께 뭐라 말하지 말고 시비를 가리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홍해를 열으셔서 홍해 밑으로 구원의 길을 예배하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아무리 해도 길이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길을 여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생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누구 손에 달려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올 한 해 2024년 이 한 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한 해를 보내면서 수많은 사연을 겪었습니다. 아픔도 많았고 또 할 말도 많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다윗처럼 다윗처럼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원망하지도 말고 누구 때문이라고 비난하지도 말고, 왜 그랬느냐라고도 생각지도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부족함도 많았고 허물도 많았고 후회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멈추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2025년도를 희망차게 보낼 수가 있습니다. 여전히 누구 때문이라고 하소연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면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을 개입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내 슬픔도 아시고, 내 눈물도 아시고 내 사정도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드리시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말씀하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더레베카파를 보라 나는 참새를 보라. 내가 돌보지 않겠느냐 하물며 너희들 까보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만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