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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의 아침은 오전 7시에 시작한다. 8시까지 일을 하러 작업장에 가려면 서둘러 씻고 아침식사를 마쳐야 한다. 작업은 오후 4시에 끝난다. 작업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CD 케이스에 종이를 끼우고 포장하는 단순한 일. 수감자들은 그걸 목숨 걸고 한다. 몇 박스를 작업했는지에 따라 돈을 주기 때문이다. 첫날 내 파트너가 됐던 수감자는 왜 이렇게 일을 못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밤에도 방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아 구치소는 불도 끄지 않았다. 열심히 하면 한 달에 100~120유로를 벌 수 있다고 했다. 억지로 잠을 청해봐야 잠이 올 리 없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들 수가 없는데, 며칠을 먹다보니 자꾸 손을 대게 되고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중독되는 것 같았다. 구치소에서 주는 수면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먹으면 잠깐 동안 기분이 붕 뜬다. 공연히 옆에 있는 친구가 예뻐 보일 정도로 심신이 풀어진다. 그 잠깐의 기분을 잊지 못해 자꾸 수면제를 찾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0.5mg을 먹었다. 하루 이틀 지나면 안 듣는다. 그러면 1mg으로 늘리고, 다시 2mg으로….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7.5mg까지 늘어났다. 어떤 친구는 한번에 100mg을 먹는다고 했다. 안 죽는 게 기적일 정도다. 무엇보다도 구치소측의 잘못이 크다. 수감자들이 말썽을 부리면 귀찮으니까 수면제라도 먹여서 재운다. 본인이 원치 않아도 약을 주는 사람이 약과 물을 들고 온다. 그 앞에서 약을 삼켜야 한다. VIP룸의 비밀 내가 머무는 3층에 한국 사람은 없었다. 방을 같이 쓰던 태국인 수감자는 프랑스에 온 지 3년 가까이 되어 프랑스 말이 꽤 늘었다고 했다. 그 친구의 도움으로 나도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우울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게 그 친구의 말이었다. 그 뒤로는 낮이고 밤이고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첫 달에 월급을 95유로, 둘째 달에는 100유로 남짓, 셋째 달에는 200유로를 탔다. 다들 “역시 한국 사람은 일을 무섭게 한다”며 웃었다. 금세 작업반 부반장이 됐다. 한 층에서 일하는 사람 20~30명이 같은 작업반을 이루는데, 프랑스 말을 전혀 못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일을 다 하면 세어서 표에 적어 교도관에게 내는 게 전부였다. 3층의 한 방에는 ‘VIP’라는 팻말이 붙은 방이 있었다. 감옥에 웬 VIP룸인가 싶었지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통 크기의 방 두 개를 터서 만든 그 방은 3층의 유일한 프랑스인과 유일한 일본인 수감자가 쓰고 있었다. 다른 방과 달리 칸막이 있는 화장실이 따로 있었다. 방 배정은 물론 구치소측이 한다. 일본대사관 직원이 하루에 한 번씩 면회를 왔다. 다른 수감자들은 면회실에 가야 면회를 할 수 있지만, 일본인 수감자는 방에서 대사관 직원을 만났다. 묘한 것이, 프랑스 교도관들은 일본 사람한테는 꼼짝 못했다. 영어도 잘 안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일본인에게는 “하이!” 하고 일본어로 대답한다. 일본인 수감자는 원래 작업에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심심했던지 작업실에 왔다. 그런데 교도관이 내가 쓰던 작업기계를 일본인 수감자에게 쓰라고 내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그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작업기계는 어느 정도 숙련된 사람만이 쓰는 게 원칙이었다. 교도관이 지정한 일본인 수감자의 파트너는 반장이었다. 교도관은 일본인에게 의자까지 갖다주며 한껏 친절하게 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일본인 수감자는 하루 만에 일을 그만뒀다.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원래 기계를 차지했지만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생긴 걸로 따지자면 일본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차이가 있다면 일본이 한국보다 강국이라는 것뿐이었다. 교도관이 조금만 서운하게 대하면 하루에 한 번씩 면회를 오는 대사관 직원에게 바로 얘기할 테니까. 프렌 구치소에 있는 3개월 동안 모두 세 번 대사관 직원의 면회를 받은 한국인 수감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VIP룸’에 얽힌 비밀이다. ‘톰보이’라는 별명의 교도관 구치소에서 공공연한 또 하나의 비밀은 성추행이었다. 여자 재소자만이 있는 구치소이므로 교도관도 모두 여자였지만, 원래 동성애자여서인지, 특수한 환경에서 일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교도관 중에는 노골적으로 성향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다. 작업시간에 일하고 있는 수감자의 몸을 더듬고 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수감자가 새로 들어오면 ‘단독 조사’라는 명목으로 온몸을 거칠게 다루는 일이 있었다. 그렇게 한 친구가 불려가면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악명이 높은 것은 ‘톰보이(tomboy, 말괄량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교도관이었다. 작업시간에 와서 수감자들을 만지는 것이 취미인 모양이었다. 싫은 기색을 보이거나 뿌리치면 바로 ‘찍힌다’. 무언가 잘못을 해서 괴롭힘을 당한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프랑스는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가 아닌가. 이것도 편견이라고 하면 할 수 없지만, 구치소에 있는 동안 내가 본 프랑스 교도관들은 겉으로만 점잖은 척할 뿐 실제로는 엉망진창이었다. 작은 일이라도 기분을 거슬리면 어떤 식으로든 꼭 불이익을 주곤 했다. 백인우월주의 역시 다반사였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프랑스령 식민지 출신 수감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노골적이었다. 하다못해 배식을 할 때도 백인에게는 제대로 된 생선토막을 주지만 흑인에게는 자투리만 주는 식이다. 교도관들의 수준이 그렇다보니 차라리 프랑스 말을 모르는 게 더 편했다. 어차피 외국인이 많아 재소자들끼리의 공용어는 프랑스어가 아니라 영어였다. 교도관이 지시하는 걸 못 알아들으니 조금 있으면 자기가 귀찮아서 그냥 가버린다. 눈치로 대충 알아듣고 손짓발짓으로 되물으면 오히려 시비를 걸고 말꼬리를 잡는 식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봉사단체 사람들이 와서 과자와 우표를 나눠주고 갔다. 구치소 안에서 우표는 화폐 구실을 한다. 편지를 부치려면 우표가 필요하기 때문에 월급을 타면 50장, 100장씩 사곤 했다. 외국인 수감자가 고향에 편지를 부치려면 0.5유로짜리 우표 두 장을 붙여야 한다. 봉사단체 사람들이 주고 간 봉투에는 우표 두 장이 붙어 있었다. 그래봐야 우리 돈 1000원 남짓. 그 작은 선물이 사람을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참으로 절절하게 깨달았다. 대서양을 건너서 아침 10시, 교도관이 방으로 들어섰다. 짐을 싸라는 것이었다. 새해가 되고도 한 달가량이 흐른 1월31일이었다. 방을 옮기는 것일까, 아니면 층을?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방을 짊어지고 나선 나를 교도관들이 차에 태웠다. 간혹 수용 인원이 넘치면 근처에 있는 다른 구치소로 옮기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차가 도착한 곳은 공항이었다. 검색을 하고 바로 비행기 맨 뒷자리에 태워졌다. 나이가 많은 남자 호송관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손짓발짓으로 물어보니 화를 내며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다. 내가 탈 때는 한 사람도 없었지만 오후 2시가 가까워오자 승객들이 타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에어프랑스 여객기였다. 비행기는 가도가도 멈출 줄을 몰랐다. 멀리 창문으로 보니 바다 위를 날아가는 듯했다. 무려 9시간을 날아간 끝에 착륙했다. 다른 승객들이 내리는 동안 죄수복을 입고 수갑이 채워진 나는 조용히 기다려야 했다. 내리자마자 후끈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탈 때는 한겨울이었는데 여름이 된 것이다. 껴입은 겨울옷 사이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뒤코스라는 이름의 새 구치소에 도착한 다음에야 알았다. 영어를 하는 재소자가 “여기도 프랑스는 프랑스다. 대서양에 있는 마르티니크라는 프랑스령 섬”이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사전에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고, 당연히 가족이나 대사관에 알릴 틈도 없었다. 모르긴 해도 한국 교도소에서도 이렇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연루된 사건의 재판 관할지가 마르티니크였기 때문에 재판 개시와 함께 이감(移監)한 것이었다.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프랑스 법무부도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누가 잘못한 건지는 파리 당국과 마르티니크 당국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긴 했지만. 마르티니크는 무척이나 더웠다. 비는 며칠 만에 한 번씩, 그것도 5분 남짓 잠깐씩 내리고 말았다. 기본적인 것들은 프렌 구치소와 비슷했다. 다만 짜증스러운 것은 파리에서와는 달리 전혀 일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작업제도 자체가 없었다. 그저 하루 종일 문이 잠긴 방 안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혼자 쓰는 방도 있었지만, 내 우울증이 심하다고 판단한 교도관들이 혼자 있게 두지를 않았다. 마르티니크의 교도관들은 프랑스어는 거의 안 쓰고 마르티니크 말을 썼다. 말이 통할 리 없고,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 더 멀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심리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뒤코스 구치소는 수감자들에게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명색이 프랑스의 구치소가 그랬다. 아침에는 블랙커피 한 사발, 점심식사, 저녁에는 요구르트 하나와 비스켓 하나 정도. 점심메뉴는 그때그때 달랐지만 그나마 질도 낮고 양도 부족했다. 다만 돈이 있으면 갖가지 군것질거리를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다. 일도 할 수 없으니 외부에서 돈을 부쳐줄 사람이 없으면 그대로 배를 곯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돈이 많으면 왕 대접을 받는다. 교도관에게 뇌물을 주고 휴대전화를 쓰는 이도 있었다. 아예 전화를 갖고 있는 경우도 보았다. 일을 하지 않으니 교도관들과 부딪칠 일이 많고, 그럴수록 말썽도 많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수감자끼리 걸핏하면 먹을 것을 훔치거나 치고받고 싸우는 식이었다. 언제나 욕설과 고함이 넘쳐 흘렀다. 여기는 정글이었다. ‘정글’에서의 삶 창문은 있지만 벽에 막혀 밖은 보이지 않는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방을 나서는 시간은 다 합쳐봐야 1시간30분을 넘지 않는다. 식사도 배식만 받아다 방에서 먹는 식이다. 더운 날씨 때문에 하루에 세 차례 샤워를 하게 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번만 허락된다. 그나마 5분을 넘기면 아예 물을 꺼버렸다. 비누질을 한 채로 방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도 생겼다. 하루에 한 번 있는 운동시간에는 더워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게 고작이다. 그래도 그 시간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교도관의 수준도 파리와는 다르다. 겉으로는 마르티니크의 교도관들이 더 친절하다. 파리는 말을 짧게, 엄격하게 했다. ‘저리로 가세요’가 아니라 ‘저리로 가’ 하는 식이다. 파리에서는 성추행을 하는 교도관도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기는 대부분의 교도관이 그랬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더 음흉한 것이다. 뒤코스로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뒤에 서 있었다. 가장 평판이 나쁜 교도관이었다. 묘한 웃음을 흘리면서 내 몸쪽으로 손을 뻗었다. 노골적인 의사 표시였다. 단호하게 뿌리쳤다. 뭐라고 하는데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면서 도망쳤다.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방을 쓰던 친구도 며칠 전 같은 교도관에게서 비슷한 일을 당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씩씩대다보니 식사시간이 되었다. 배식을 타러 가야 하는데, 바로 그 교도관이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비스켓 한 조각에 요구르트 하나였지만 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근무 교대시간이 되어 다음 교도관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항의하자, 문제의 교도관이 다가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슨 일 있었나? 깜빡 했다.” 그게 전부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랐지만, 방법이 없었다. 수면제를 삼키며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노릇이었다. 유일한 통로는 대사관뿐이었지만, 뒤코스로 이감된 후부터 출감할 때까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사관 직원은 딱 한 차례 면회를 왔다. 경찰 조사가 마무리되자 대사관의 관심은 눈에 띄게 소홀해졌다. 뭘 열심히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달라는 편지를 계속 썼지만, 답신은 하염없이 늦어졌다. 처음에는 워낙 바쁜 사람들이니까 하고 이해하려 애썼다. 분명 나는 범법자였고,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가만 보니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진 제3세계 국가들도 그렇게 무심하지는 않았다. 그 나라들 대사관도 모두 파리에 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아홉 시간을 날아와 수감자를 면회했다. 사람이다보니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재소자들에게 한국 얘기를 할라치면 “그렇게 잘사는 나라 대사관에서 왜 면회도 안 오냐”는 비아냥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구치소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것이 수면제다.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많아 아예 매일 배급한다. 특히 주말에는 약국이 일을 하지 않으므로 금요일에는 사흘치를 한꺼번에 몰아준다. 안 먹은 애들에게 달라고 하면 아무도 아끼지 않고 한 알씩 내준다. 금방 수십 알이 모인다. 나는 마르티니크에서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그 가운데 가장 위험했던 것은 2005년 5월이었다. 대사관 관계자가 면회를 다녀간 직후였다. 4시30분이면 면회가 끝나는데, 대사관 관계자는 4시에 와서 남자 두 명을 포함해 세 사람을 면회한다고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10분뿐이었다. 그는 국선변호사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싶어 내가 형량을 얼마나 받을 것 같냐고 물었다. 대사관 관계자는 10년을 말했다. 그 순간 든 생각은 오로지 죽음뿐이었다. 여기서 10년을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남편에게 나는 죽는다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편지를 썼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뒤코스에는 의사가 없어 수감자가 자살을 시도하면 응급차로 바깥에 있는 병원으로 실어나른다. 이틀이 지났다고 했다. 온몸이 뒤틀릴 정도로 우울했다. 왜 또 깨어났을까.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 생각이 났다. 울었다. 희망이 없었다. 한 달쯤 후 4개월마다 한 번씩 열리는 구속적부심에 나갔다. 변호인에게 “당신이 대사관에 10년이라고 얘기했느냐”고 물었다. 자기는 그런 얘기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길어봐야 1년6개월일 거라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냥 해보는 소리일까. 그럼 도대체 10년이라는 얘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뒤로 프랑스 법무부 관계자, 판사를 만날수록 조금씩 희망이 생겼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고생해라, 그런 말이 이어지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뒤코스 구치소 생활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내 친구 얄카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적응력이라는 건 무서운 것이다. 편지쓰기 외에는 다른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책이라고는 모두 프랑스어로 된 것뿐인 그런 곳에서도 적응하면 다 할 일이 보인다. 나는 화장지로 학과 꽃을 접는 일에 취미를 붙였다. 다른 재소자들에게 나눠주니 모두 아이처럼 좋아했다.
한 남자가 요트여행을 가자고 졸랐다. 돈을 준다니 따라나섰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해경을 만났고, 요트에서 코카인이 발견됐다. 남자는 혼자 요트를 모는 사람을 특히 의심하는 해경의 단속을 피해볼 요량으로 얄카를 데리고 간 것이었다. 몰랐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죄를 면할 수는 없다. 바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얄카는 처음 만났을 때 수감생활 갓 1년을 넘긴 상태였다. 마약운반으로 체포되면 다른 이들을 붙잡는 데 얼마나 협조하느냐에 따라 형기가 달라지는 듯했다. 밖에서 아무리 친하던 사람이라도 일단 잡히면 배신하는 것이 상례라고 했다. 그러나 얄카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남자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법보다 조직의 보복이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얄카의 형기도 덩달아 길어졌다. 뒤코스의 수감자들은 둘로 나뉜다. 돈이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 나는 두세 달에 한 번씩 남편으로부터 송금을 받았으니 그나마 좀 여유가 있었다. 음식이나 우표를 조금씩 나눠주면 어린 친구들은 금방 감동한다. 갇혀 있으면 사람은 단순해진다. 얄카는 기본적인 영어도 못했기 때문에 거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돈 없는 애들은 그런 얄카를 반기지 않았지만, 나는 함께 방을 쓰겠다고 했다. 얄카는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얄카처럼 젊은 아가씨들은 남자 재소자들과 ‘연애’를 하곤 했다. 연애라고 해봐야 우스운 장난이다. 남녀 구치소는 분리되어 있지만 운동장은 높다란 벽을 사이에 두고 나눠 쓴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남녀가 고함을 질러가며 얘기를 나누고 “너 나랑 사귈래?” 그렇게 되는 것이다. 간혹 병원에 갈 때나 재판정에 갈 때면 남자측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그럼 자기 ‘남자친구’가 누구인지 비로소 얼굴을 힐끔 쳐다볼 수 있다. 모두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처럼 보였다. 2006년 2월, 구속적부심에 나갔다. 판사는 “서울에서 공범의 재판이 끝났다는데 왜 판결문이 도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알 수 없었다. 대사관이 보내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변호사도 갑갑해할 뿐 못 받았다고 했다. 판사는 “단순가담자라서 1년이 지났으니 풀어주긴 하겠는데, 다만 마르티니크를 떠날 수는 없다”고 했다. 보호감찰이었다. 구치소를 나가라는 도장이 쾅 떨어졌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변호사는 한 달에 240유로의 방값을 내야 하는 수용센터를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밥값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 법적으로는 일을 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말도 안 통하는 보호감찰대상자를 써줄 직장이 있을 리 없다. 여권이 없으니 은행카드도 못 만들고 전화도 놓을 수 없었다. 봉사단체에서 알선해준 방에서 그렇게 6개월을 다시 하염없이 보냈다. 동네를 오가던 도둑고양이가 유일한 친구였다. ‘나비’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함께 지내다보니 몇 달 사이 새끼를 두 번이나 낳았다. 한번은 네 마리, 또 한번은 다섯 마리. 지난 십수 개월 사이에 내게 일어난 일 중 가장 기쁜 일이었다. 한국 언론을 통해 내 얘기가 알려졌다. 남편이 방송국 카메라맨과 함께 마르티니크로 날아왔다. ‘이렇게 보려고 안 죽었구나.’ 그냥 그 자리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원래 눈물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는데, 평생 울 것을 그날 다 운 것 같았다. 언론보도가 이어지고, 인터넷에 카페가 생기고, 사람들이 힘내라는 편지를 보내줬다. 편지를 쓸 사람이 많아졌다. 그 역시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일이었다. 언론이 관심을 갖고 많은 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보호감찰관이나 판사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묘한 일이었다. 감찰관이 하루에 한 번씩 찾아왔다. 한국에서 진행된 재판결과가 법정에 도착했다. 대사관에서는 벌써 몇 달 전에 부쳤는데, 마르티니크법원에서 못 받았다고 하자 4개월 만에 다시 보냈다고 했다. 2006년 11월 열린 구속적부심에서 판사는 “한국 판결문이 일찌감치 도착했으면 더 일찍 집에 보내줄 수 있었다”며 징역1년을 선고했다. 이미 구치소에서 1년 이상을 보냈기 때문에 바로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판결문이 늦게 도착한 것은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이후 외교통상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2005년 11월24일 판결문을 송부한 것으로 파일되어 있으나 등기로 송부하지 않아 프랑스측이 접수했는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증빙이 어렵다’고 밝혔다-편집자). 원래는 검찰의 항소여부를 지켜보며 보름쯤 기다려야 하지만 판사는 자기 책임하에 이틀 만에 여권을 내줬다. 서울로 돌아갔던 남편이 귀국소식을 취재하기 위해 방송국 사람들과 함께 다시 마르티니크로 왔다. 아이도 데리고 왔다. 마르티니크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2년 만에 아이의 얼굴을 직접 봤을 때는…. 이게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엄마인 줄은 알지만 워낙 오랜만에 만난 터라 낯설었던 아이는 내게 선뜻 안기지 못하고 뒤로 뺐다. 세 살 때 헤어졌다가 다섯 살이 되어 만나는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한테 정말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집으로 가는 길 마르티니크를 떠나려고 비행기를 탔다. 구치소에서 다들 그렇게 얘기하곤 했다. 이곳을 떠날 때는 공항에서 침을 뱉겠노라고. 내가 죄를 지었고, 마르티니크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고생스러웠으니까. 파리를 들러 한국행 비행기로 갈아탈 때가 되자 갑자기 한국 사람이 늘었다. 한국 사람을 많이 보면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보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죄송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자격도 없는 사람이 너무 큰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비상구’라는 세 글자였다. 그 단어 하나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 정말 왔구나, 진짜 왔구나. 집에 왔지만, 그러나 잠은 계속 오지 않았다. 며칠간 수면제를 먹었지만 듣지 않았다.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은 채 계속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티니크에서는 늘 집에서 잠을 깨는 꿈을 꾸곤 했다. 혹시 내가 지금 구치소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마다 혼란스러웠다. 가까스로 잠이 들면 이번에는 마르티니크에 있는 꿈을 꾼다. 구치소 운동장 땡볕 아래 다른 재소자들과 나란히 앉아있는 나. 멀리서 보면 흡사 원숭이들이 이를 잡는 것처럼 보인다며 깔깔대던 그 모습이다. 가끔씩 환청도 들린다. 가장 듣기 싫던 그 소리…문을 잠그는 소리다. 자물쇠 네 개가 딱딱딱딱 닫힌다. 현관문을 잠글 때마다 몸서리치게 놀란다. 교도관들은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쇠몽둥이로 쇠창살을 드르륵 긁고 지나간다. 혹시 톱질을 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 소리도 환청의 고정 레퍼토리다. 내가 보낸 편지를 집에서 다시 보니 기분이 정말 묘했다. 세어보니 200통이 넘었다. 이틀에 한 번 이상 쓴 셈이다. 일주일 내내, 하루 24시간 TV를 봤다. 원래는 TV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특히 일기예보를 보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한국 지도와 낯익은 지명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현실감이 뚝뚝 묻어났다. 그랬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나는 한국사람이었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62&aid=000000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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