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만난 금아 선생님
최민자 (jasmincmj1208@daum.net)
진초록 나무들이 터널을 이룬 반포천 옆 산책로. 청동 좌상으로 앉아계신 선생 곁에 가만히 다가가 걸터앉는다.
‘선생님, 날이 너무 덥지요?’
선생은 말없이 웃고 계시지만 이런저런 일로 격조했던 나를 에둘러 질책할 말을 찾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왕자의 별에 갔다 왔어?”
문안할 때가 되었다 싶은데도 일상의 여러 일에 떠밀려서, 또는 반세기 가까이 나이 차가 나는 노老스승께 딱히 드릴 말씀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미욱한 내 주변머리 때문에 찾아뵙는 일을 미루고 있다 보면 영락없이 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일 도와주는 아주머니에게서 “선생님 바꿔 드릴게요”라는 말을 듣고서야 송구스러워 쩔쩔매는 내게 꾸중 대신 늘 하시던 말씀.
“어디 멀리, 어린 왕자의 별에 다녀왔어?”
전에는 그리 물으셨으나 이젠 진즉 선생께서 그 별에 가 계시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선생은 화를 내거나 거친 말씀을 하거나 정색하고 허물을 탓하는 분이 아니었다. 먼저 말하기보다는 상대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분, 십오 도쯤 갸웃한 얼굴에 입꼬리를 귀밑까지 올려붙이고는 마음에 드는 말이 나오면 아이처럼 함빡 웃던 분, 앞줄에 서기보다 뒤편에 물러앉기를 좋아하신 분이었다. 물론 다소 엘리트 의식이 있고 그 나이쯤의 노인답게 귀에 단 찬사를 즐기시는 듯하였지만, 동네 아주머니들이 인사를 하면 소년처럼 조금 부끄러워하시던, 겸양과 염치가 몸에 밴 어른이셨다.
처음 뵈었을 때가 첫 책 《흰 꽃 향기》를 펴낸 다음이었으니 2002년 봄이나 여름쯤으로 기억한다. 어찌어찌 내 책을 읽은 선생께서 몇 마디 칭찬과 함께 한 번 보기를 청하셨을 때,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수필'이나 '인연' '플루트 플레이어' 같은 글이 좋아 문맥이 막힐 때마다 펼쳐놓고 여운에 취하던 때였으니 선생과 상면이 어찌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 아니랴. 소심하고 숫기 없는 내가 대학 초년, 사범대 교수실로 선생을 뵈러 갔던 일이 있고 보면 내 추앙과 흠모는 글을 쓰기 훨씬 전, 젊은 날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을지는 모르지만, 몇 달 전 퇴직을 하셨다 하여 아쉬워하며 돌아 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러구러 이십여 년, 수필 새내기로 첫 책을 내고 선생을 뵙게 되었으니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 게 인연이라는 건가. 쓰기의 방편으로 수필을 택한 것도 선생 ‘수필’이 풍겨내는 장르적 정체성이 내 취향과 맞아서였을 것이다.
L 호텔 양식당에서 선생을 처음 뵙고, 돌아가실 때까지 얼추 5년쯤을 간간이 뵈었다. 진즉 구순을 넘긴 나이지만, 선생은 여전히 유명세를 치르는 현역이어서 보내온 책들을 읽고 전화를 하거나 방문객과 환담을 하시는 등 심심할 사이가 없어 보이는데도 어쭙잖은 후학을 ‘마지막 제자’라 추켜 주시며 격의 없는 말벗으로 대해 주곤 하셨다. 말주변이 없고 어른 대하는 일이 어렵기만 했던 나는 영문과 출신에 글 스승이셨던 ㅇ 선생과 함께 뵐 때가 많았는데 지적이면서도 무겁지 않은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오가는 분위기가 좋았다. 두 분 다 소식(小食)이어서 음식에는 취미가 없었지만, ‘아침은 alone, 점심은 friend, 저녁은 enemy와 먹어야’ 한다며 티키타카의 진수를 보여주곤 하여 때맞춰 추임새도 못 하는 나는 비싼 밥이나 축내며 관전의 특전을 공으로 누리곤 했다. 수필 이야기가 길어지면 ‘문학은 argument가 아니야’라고 손사래를 치다가도 늙은 남자는 ‘salong or silence’ - 살롱에 나가 술이나 마시든가 아니면 입 닫고 침묵해야 한다며 슬그머니 한 발 무르곤 하셨다. 하버드 체류 시절 로버트 프루스트를 찾아갔던 이야기를 하실 때는 그날의 감격이 되살아나신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빠리에 부친 편지’ 나 ‘유순이’, 풍문 속 여인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말꼬리를 슬쩍 흐리셨다. 국대안 사건으로 곤궁했던 시절과 정지용 시인을 따라 월북할 뻔하다가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아 아슬아슬 모면했던 이야기도 하셨는데 별 관심이 없어 귀담아듣지 않았던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약속 시각보다 늘 먼저 도착해 계시던 선생은 숙녀들은 돈을 내는 법이 아니라며 밥값을 미리 계산하는가 하면 샘터사에서 발간한 《인연》이 인세가 많게 들어오니 적은 돈을 쓰는 즐거움을 막지 말라며 차가 없는 일행을 위해 택시비를 쥐여 주기도 하셨다. 물론 이건 숙녀들의 경우, 남자들에게도 그렇게 후했는지는 모르겠다. 후에 모란공원 추모식에서 영문과 출신 제자들이 ‘선생님은 여학생만 예뻐하셨다’라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으니.
바깥출입이 어려워진 뒤에는 댁으로 종종 호출하셨다. 문안이 좀 뜸하다 싶으면 “요새는 작품 안 쓰나? 새로 쓴 거 있으면 갖고 와 읽어봐…….” 하는 말씀으로 넌지시 종용하셨는데 한창 손 가는 아이들과 병환 중인 시어른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던 나는 마음만큼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글이란 것이 누에가 실 뽑듯 늘 고른 것도 아닌 데다 말 많은 세간에 무슨 후광이라도 입으려 알짱거리는 모습으로 비칠까 삼가는 마음도 컸을 것이다. 물러앉아 계셨지만, 여전히 큰 어른이다 보니 일상적 덕담으로 건네진 말이 특별한 상찬으로 통용되기도 하여서 곤혹스럽다는 소문도 있던 때였다. 하여 아주 완벽히 섭섭해하지 않으실 만큼만, 어쩌다 한 번씩 시답잖은 글이라도 갖고 가 읽어드리곤 했는데 “좋아, 아주 좋아, A 플러스!”하며 손뼉을 치거나 “괜찮아, A 제로!” 하다가 “그건 그저 그래. 85점!” 하고 웃곤 하셨다. 반세기 가까이 나이 차가 나는 문하(門下)에다 같은 장르를 쓰는 후배인지라 특별히 점수에 후하셨겠지만, 그런 격려와 칭찬이 당시에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오래 곤 국물을 삭히고 가라앉혀 맑은 웃국만 떠내는 듯, 방대한 온축(蘊蓄)의 한 귀퉁이만 내보이는 절제의 미덕으로 미학 수필의 경지에 이른 선생께서 하룻강아지의 불각기양(不覺技痒)을 가상히 여기시는 게 조경의 흐려진 분별심 때문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컸다. 기실 그즈음 다른 여성의 사인이 들어있는 편지 칼이나 쥘부채, 홍삼 꿀 같은 것을 예사로 건네주기도 하실 만큼 시력도 아주 어두우셨으니.
당시 선생은 책 읽어주는 여대생을 곁에 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 책을 다시 읽혀 듣다가 “근데 왜 책 제목을 ‘흰 꽃 향기’라 그랬어? 그냥 '꽃향기'라 하지. 흰색은 느낌이 안 좋은데…… ”라며 떨떠름해 하셨다. 직관적 상상이 유발하는 그런 결벽성(?)은 이후에도 종종 목격되었는데 그즈음 잡지에 실린 내 글 <두드러기>를 읽을 때도 그랬다. “그만, 그만 읽어. 그거는 별로 안 좋아!” 하시며 황급하게 손을 내저으셨다. 너무 놀라 의아해진 학생이 “왜요, 선생님?” 하고 여쭈니 “난 두드러기 싫어. 투실투실하고 간질간질해서 기분이 좋지 않아….”라며 몸서리까지 부르르 치시는 거 아닌가. 불결하고 불순한 어떤 기운이 금방이라도 살갗을 침투해 영혼까지 잠식해버릴 듯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무구한 어린아이 같던 선생의 그런 모습은 그 뒤에도 나를 놀라게 했다. 당시 선생은 “나는 캠퍼스 병에 걸려 있어요.”라고 하실 만큼 젊은 학생들의 활기로 충만한 관악캠퍼스 나들이를 좋아하셨는데 잡지사 특별기획으로 인터뷰를 맡으신 ㅅ 선생님 일행과 캠퍼스 관내에 있는 중국식당 금룡에 갔을 때도 그랬다. 코스요리에 딸려 나온 자장면을 가위로 조금 잘라 드리니 바라만 보시던 선생께서 딱 한 젓가락쯤 입에 올리셨다. 그리고서 하신 말씀.
“나 오늘 자장면 처음 먹어 봐….”
“네? 자장면을, 일생 한 번도 안 드셨다고요? 왜요?”
일행이 다 놀라서 물었다.
“음식 빛깔이… 마땅치 않아서….”
맛이 아니라 빛깔이 못마땅해 먹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더라 하셨다. 그날 댁에 모시고 가자마자 “아주머이, 아주머이, 나 오늘 자장면도 먹었어!”라고 문 열러 나온 아주머니에게 신발도 벗기 전에 자랑하는 모습이 칭찬 거리에 신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 자장면이나 두드러기를 입에 올리는 일마저 께름해서 하실 만큼 정갈하고 무구한 어른이었으니 인형의 낯을 씻기거나 곰 인형에 안대를 씌워 흔들의자에 뉘어 놓는, 다소 이해 못 할 기행(?)들도 작위적인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봄날 아파트 마당의 벚꽃 구경을 나가려던 선생이 건넌방에 잠들어있는 곰 세 마리를 보여주셨다. 곰들이 안대를 하고 있었다. 햇볕이 밝아 낮잠을 재우는 중이라 하셨다.
“말 못 하는 사물도 자꾸 정성을 들이니 정이 드는 것 같아.”
현관에서 선생은 아주머니에게 곰들이 저녁에 잘 잠들 수 있도록 조금 있다 안대를 벗겨 놓으라 이르셨다.
해마다 오월이 되면 ‘금방 찬물로 세수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처럼 선생이 매번 소환되었어도 말년의 선생은 외로워 보였다. 따르는 사람은 많아도 허물없는 말벗 찾기는 어려우셨을까. 외롭지 않은 노년이 어디 있으랴만 선생은 특히 어머니를 일찍 여읜 상실감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앓으며 일생 구원의 여상(女像)을 찾아 헤매다 가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 같은 애인을 갖고 싶었다.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라고, 작품 <엄마>에서 피력하셨듯이.
2005년인가, 상해에 다녀오시던 때가 생각난다. 백수가 멀지 않으셨음에도 오랜만의 해외 나들이를 앞둔 선생은 소년처럼 부풀어 보였다. 이번에 가면 대학 시절 연모하던 여학생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며 책갈피 사이에 칠십 년 넘게 간직해 온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하얀 블라우스에 머리핀을 단정히 꽂은 사진 속 처자는 단아해 보였다. 악수 몇 번 하고 뺨에 입 맞춘 게 전부였어도 가슴 속에 오래 남아 있다고 하셨다. 노환을 염려해 의사까지 대동하는 마당에 만남이 성사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는 하지 않았다. 대신 듣기 좋은 말씀을 드렸다. 선생은 여러모로 유복하셨지만, 남자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여복(女福)일 거라고. 선생은 웃으셨다.
“내 여복이라는 것은… 남이 보기에만 좋을 뿐이야.”
남이 보기에만….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일생을 젖은 집단 태우듯 흘려보냈다’라는 문장처럼 이러저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뜨거운 불놀이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인연>이 많이 읽힐수록 작가로서 명성은 높아지겠지만, 이미 별이 된 노 수필가를 추앙의 대상 아닌 연모의 상대로 여길 간 큰 여인이 과연 있었을까. ‘싱싱하면서도 애련하고 명랑하면서도 어딘가 애수를 깃들이고 있는’, ‘원숙하면서도 앳된 데를 지니고 지성과 함께 어수룩한 데가 있는’ ‘성급하면서도 기다릴 줄 알고,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수줍어할 때가 있고, 양보를 아니 하다가도 밑질 줄 아는’, ’차를 끓일 줄 알며 향취를 감별할 줄 알며 이 빠진 접시를 버릴 줄 아는’ 선생의 이상형을 만족시킬 대상 또한 흔하지 않았을 테고.
상해에 다녀오신 선생은 ‘그분’을 만나셨느냐는 내 물음에 쓸쓸하게 웃으셨다. 대신 며칠 전에 쓰셨다는 <소망>이라는 시를 보여주며 나한테 한 번 읊어보라 하셨다.
내겐 버릴 수 없는 소망이 있다
먼발치로라도 그를 보고 싶은
-피천득 詩 ‘소망’ 전문
선생의 문학을 추동해 온 동력이 마음 깊은 곳 저 아련한 그리움 같은, 불가능한 로맨스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이 시에서 요점은 바로 ‘그’야. 그가 누구인지, 무엇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거든. 한용운 시에서 님처럼 말이지. 그것을 simply duplicity라고 하지. duplicate가 ‘이중적, 중의적…’ 이라는 뜻이 있거든. 쉬운 단어 같지만 많은 뜻을 감추고 있단 말이야….”
그 상황에서도 선생은 ‘그’에 대해 상상하게 될 세간의 추측들이 즐거우신 것 같았다. 그 연세에도 팬들, 특히 여성 팬들의 관심이 신경 쓰일 만큼 대중 스타였으니.
그날 돌아와 잠깐 잠든 사이 ‘핑크빛은 시들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베갯머리 꿈결에 툭, 떨어졌다. 그렇게 짧은 수필 하나를 건졌다. 선생의 핑크빛이 강한 분홍빛 체리 핑크가 아닌 연분홍 백분홍에 그쳤을지라도 그게 무슨 대수일 것인가.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라고 수필 <만년>에 쓴 것처럼 핑크빛은 늦도록 시들지 않는데. 늙지도 않고 사위지도 않는데.
따스한 커피 한 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못 한 것
포근하고 아늑한 장갑 한 짝만 못 한 것
잠깐 들렀던 도시와 같이 어쩌다 생각나는 것
-피천득 詩 <연정> 전문
따스한 커피 한 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못 한, 포근하고 아늑한 장갑 한 짝만 못 한, 소소한 추억들을 이따금 돌아보며 쓸쓸해 하셨을 선생을 생각한다. 말년에 뵌 여러 모습이 나이가 들수록 더 잘 이해되고 과분한 상찬으로 기를 살려주던 선생을 감사함으로 돌아보는 시간이 많다. 선생이 계셨기에 수필을 사랑했고 나름의 소신과 열정으로 수필의 변방이라도 지킬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가시고 난 뒤 선생님 동네 가까이 이사를 와 ‘피천득 산책로’를 조석으로 오가며 눈인사라도 드릴 수 있는 것 또한 우연찮은 인연인가 싶기도 하다.
- 최민자 수필가
서울대학교 가정대학 졸업
에세이문학등단(1998), 현대수필문학(2003), 국제펜문학상(2012), 윤오영수필문학(2014), 조경희수필문학대상(2020),
현대수필문학대상(2024)
수필집:⟪손바닥 수필⟫⟪꿈꾸는 보라⟫⟪사이에 대하여⟫ 外.
수필선집: ⟪낙타 이야기⟫⟪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外
현재 (사)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금아피천득선생기념사업회 이사
금아 소식지 가을호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