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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 2012년 6월6일[수]현충일
어디를 : 지리산둘레길 4구간
얼만큼 : 대략 12km이내(30리쯤)
누구와 : 따가운 햇살과 바람,구름,숲들을 벗 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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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덥지끈한 유월초 한나절 숲 속을 거닐며 맺힌 땀방울을 싱그런 골바람 한자락으로 씻기우고...
땡볕 언덕을 넘어서서 강바람 한보따리 쓸어 안고서 쉰내를 날려 보낸다.
오디와 산딸기 따먹느라 손바닥과 입가에는 보라빛 물이 들고...
지리산골 아낙네가 만든 촌두부에 묵은 김치 감아서 시원한 탁배기 한잔 들이키고서
약간은 몽롱한 취기로 타박타박 걷는 걸음에 흥얼흥얼 콧노래도 나온다.
엄천강가에서 벗님네와 시원하게 멱감고 푸른하늘 쳐다보며 웃음한번 머금는다.
지리산길(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16개읍면 80여개 마을을
잇는 300여km의 장거리 도보길. 2011년까지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하고 있다.
또한,지리산 둘레를 잇는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길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를 잇는 11.5 km의 지리산둘레길...
의탄교-벽송사-서암정사-의탄교-의중마을-세동마을-운서마을-동강
먼저 벽송사로 가는 길에 탐스런 열매들...
길목에 자리를 지키는 장승의 표정이 좀...
무슨 꽃일까?...아름답기만 하다.
만고풍상의 세월을 업고 드러누운 은행나무위에 승복을 보니 스님도 더운갑다.
벽송사(碧松寺)는 조계종 12교구인 해인사의 말사로,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碧松智嚴)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에서 보면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회암정혜, 경암용윤, 서룡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겸수한 대 종장들을 109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千峰萬壑)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芙蓉:연꽃) 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芙蓉滿開),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靑鶴抱卵)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
고인이 “운거천상(雲居千上: 구름 위 하늘 세계) 별유천지(別有千地: 인간 세상 밖에 따로 있는),
부용정토(芙蓉淨土:연꽃이 활짝 핀 극락정토에) 조인만대(祖印萬代:조사의 깨달음을 만대에 이어지리)”라는
말로 표현 하였듯이 벽송사는 만고에 수려한 풍광 속에 자리하고 있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선사는 태고보우, 벽계정심 선사로부터 내려오는
심인(心印)을 전해받아 조계정문(曹溪正門)의 정통조사가 되었다.
부용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산문의 제3대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 하게 된다.
한국 선문의 거장 청허휴정이 벽송조정의 제3대조사라는 사실은 벽송사 사적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서산대사 문하에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 병송사에서 오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부용영관의 다른 한 사람의 수법제자인 부휴선수선사 또한 벽송사에서 도를 깨닫고
벽송산문의 조사가 되어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행화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 출가스님의 모두가 서산문파와 부휴문파에 속한다.
서산과 부휴 양대조사가 모두 벽송사 출신이라는 사실은 벽송사가 조선불교의 종가(宗家)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벽송사를 가리켜서, “조계조정(曹溪朝庭), 벽송총림(碧松叢林), 선교겸수(禪敎兼修), 간화도량(看話道場)”이라고 불렀다. 1704년(숙종30년)에 환성지안(환성지안)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 때에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동의 전각이 즐비하였으며, 상주하는 스님이 300여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10여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알고 싶은데...
특히 벽송사 강원의 마지막 강주를 역임한 초월동조(初月東照)대사는 일제 강점기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제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불교 최고의 조정인 벽송사의 사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철쭉이라도 좀 다른 느낌이 든다.너무나 곱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지리산 빨치산들의 암약(당시 벽송사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됨)으로 말마암아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구한원응(久閒元應)대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옛날 선종의 최고 조정에 벽송선원을 낙성하여 을유년(2005년) 하안거에 개원하여
눈푸른 납자들이 수선정진할 수 있는 선찰종가(禪刹宗家)로 거듭나게 되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 석탑(보물 제 474호)과 경남 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2회인 목장승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특히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선방뒤 탑전앞에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 있는“도인송(道人松)”과 “미인송(美人松)”의 전설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하면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유래없이 많이 나와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조선 선불교 최괴의 종가인 벽소사를 참배하여 묵은 업장을 소멸하고 청복(靑福)을 담아 성불인연을 가꾸어보자.
아울러 벽송사 목장승과 도인송, 미인송의 기운을 받아 건강과 소원을 성취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벽송사 옆에 자리한 서암정사는 만년도량(萬年道場) 의 성지(聖地 )임을 확신하고 산승(山僧)이 도량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 사람이 일부러 깍아놓은 듯한 거암, 즉 지금의 석굴법당 전면(前面)에 다다른 순간 몸과 시선이 굳어진 듯 멈추었다.
"여기로구나, 아! 좋구나...."
조용히 눈을 감고 부처님의 영산회상, 그리고 아미타상을 상상했다. 지극한 마음으로 한없이 기도하면서
염원(念願)의 심층에서 떠오르는 어떤 영상(影像)을 느끼니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세계(世界)로다.
전쟁의 참화(慘禍)로 이 주변 지리산에서 희생된 무수한 원혼(寃魂) 들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남북의 첨예한 대립의 벽을 허물고,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人類)가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 광명 안에서
평화로운 이상사회(理想社會)가 실현되기를 발원(發願)하면서 부처님을 조성하게 된다.
서암정사는 대자연의 섭리가 빚어낸 조화로 준비된 장소에 여러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공덕이 보태지면서 비로서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30여년 전 불사(佛事)를 시작한 이래 적지 않은 난관과 고초를 겪었지만 좌절하지않고 장엄한 사찰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불보살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주 들의 정성어린 물심양면 공덕과 더불어 석공들의 공덕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홍덕회, 이종원,이승재, 이금원, 이인호, 맹갑옥 석공은 지극한 정성과 노력으로 한치의 흘림 없이 조각을 완성했다.
다시 둘레길의 초입인 금계리 의탄교를 건너서 숲 길로 접어든다.
엄천을 가로지르는 의탄교를 건너면 의평동,의중동 등이 있는 의탄마을이다.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인데다
경관이 빼어나 일찍이 500년전 지리산 등정에 나섰던 점필재,김종직은 이곳을 무릉도원으로 표현했다.
구양천 위로 학바위인 석산(石山)을 깎아서 불교의 도량을 만드는 중인갑다.바위에 부처를 조각하는게 보인다.
꼭 저렇게 해야만 부처님의 마음인가?...
추성리쪽 칠선계곡으로 가는 의탄교 건너 초입에서 포장도로 삼거리에서 좌측인 의중마을로 접어든다.
숲속에 가려있는 의중(義仲)마을을 지나고...중말/중마을
경남 함안군 마천면 의탄리이다.고려시대 의탄소가 있었던 지역으로 추성리 칠선계곡 입구이다.
선조때부터 함양박씨,경주정씨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정조때는 경주이씨가 입촌 정착해오고 있으며,
본마을 출신인 은계 이진우 선생은 1897년에 태어나 친석지기를 한 향토교육가로서 사유재산 일백두락을 저당하여,
마천초교를 설립 공헌하였고, 현재 도계공원에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마천면민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으며,
그의 후손들 생가를 보존하고 있다.
금대산인 갑다.십수년전에 9부능선쯤에 있는 안국사에 초대 받아서 가 본 적이 있어 한번 쳐다 본다.허당스님은 아직 있으려나?...
의중마을에서 자라서 사진 분의 흔적이 갑다.
흘러간 800여년의 세월만큼 높고 우람한 고느티나무...매년 음력7월7일에는 당산제를 모신단다.
땅심은 푸르게 기운을 돋우고...
어느것 하나 이뻐지 않을수가 있으랴!~
불교성지로 만드나 보다.이젠 도량(道場)도 탈색된 듯하고 문화와 역사의 교육장이 아니라 사업의 장인 갑다.
멀리 북쪽에 뾰족이 고개를 들고있는 삼봉산이 보인다.
한 땀 한 땀 수놓듯 이어가는 지리산 둘레길을 통해 만나는 사람,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야생화,
텃밭에서 땅심으로 자라는 채소들과 논에 갓 심기운 파릇한 모들...모든 생명들의 속삭임을 귀 기울려 들어 본다.
시장하던차에 탐스럽고 너무나 달콤해서 가던 길도 잊은채 한참동안 오디를 따먹는다.
누구든 떠나갈때는
-류 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는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속에
잊을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지리산 고운동계곡에 이어 용유담이 사라지면...용유담 전경[펌]
90년대 초,지리산 양수발전댐 건설을 위해 고운동 계곡이 사라졌다.가수 한돌은 고운동 계곡의 달빛 풍광을
"마음의 옷을 벗고 달빛으로 몸 씻으니,설익은 외로움이 예쁜 꽃이 되는구나.
해맑은 꽃내음을 한사발 마시고 나니 물젖은 눈가에 달빛이 내려앉는구나"라고 읊조렸다.
이어,"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라는
노랫말로 양수발전댐으로 수장된 고운동 계곡의 아픔을 노래했다.그리고 20년이 지나 또다시 지리산에 댐이 들언다고 한다.
지리산댐이 들어서면 용유담과 반달가슴곰의 이동통로는 물론 칠선계곡까지 영향을 미치고,실상사 바로 앞까지 물이 차오르게
된다.정부는 홍수조절용 댐이라고 하지만 연중 9만톤 이상을 저수할 계획이라 다목적댐이라는 것이다.참고로 홍수조절 전용 댐인
평화의 댐과 한탄강 댐의 경우 자연 유하량을 제외하고는 평상시에 담수하지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댐을 평상시
담수 형태로 계획하는 것은 꼼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남강댐의 부족분을 채워 부산으로 공급하려는 것은
4대강 사업이 실패한 것을 감추려는 술수일 뿐이다?...환경운동연합,지리산생명연대 및 지역주민들은 매일 촛불 문화제를
통해 댐의 부당성을 알리면서 지리산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참고로,댐폭이 869m에 높이가 141m란다.[펌]
하늘을 보면 하늘이 마음에 펼쳐지고
꽃을 보면 꽃이 내 안에서 피어난다
바람을 안은 이 새가 허공을 날고
구름은 이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신다.
저렇게 탐스럽고 이쁜데 뱀딸기란다.
길가 나무에 열린 매실이 앙증스럽고 향기롭다.
걷다가 포장길옆의 민가 평상에 잠시 걸터 앉는다.쥔장 아주머니가 손수 채취한 고사리란다.
언제까지 임 모습이 남아 있을려나?...댐이 생기면 아련한 기억속으로 사라지겠지...
흙탕물에서도 제몸을 더럽히지 않는 蓮인라서 그런지 은은한게 품위가 있어 보인다.
외따로 떨어져 지내며 이제나 저제나 사람의 제취를 느끼고 싶어 동구 밖을 하염없이 바라 보시는 할머니.소로 이랑을 갈며 한 해, 한 철 농사를 이어가는 농부. 한 때는 좌, 우로 나뉘어 낮과 밤을 달리 살아야 했던 아픈 상처도 지리산 길은 품고 있다.
송전마을 둘레길 아래로는 다랭이 논들이 모내기에 한창이고 엄천강이 손끝시린 강물은 구월이면 힘찬 물소리에 귀가 멍하다.
모심기가 한창이다.
아마도 조만간에 밤늦도록 개구리들의 합창소리가 골짜기로 울려 퍼지겠다.
화사한 석류꽃이다.
밤나무도 하얗게 꽃을 피우고...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가만히 놔둬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선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무리 향기롭다한들 소음에 불과할 터...
하늘까지 번진 푸르름 속에서 구름은 구름끼리 껴안게 하고,바람은 바람끼리 입맞추게 하라.
그래서 하늘과 땅과 수목마저도 모두들 술렁거려 온 산이 바다의 너울처럼 일렁거리게 하라.
우리 모두 스스럼없이 서로 손잡게 만들고 누군가 지쳤다면 아무나의 어깨위에 살며시 지친마음 내려놓게 하라.
아마도 여기쯤에 댐이 건설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재넘으면 바로 정자쉼터라잠시 쉬어간다.풀섶 뒤로는 물이 찬 개울이 있어 세수하고나면 개운하다.가재가 있으려나?...ㅎㅎㅎ
구시락재에서 내려다 본 평온한 동강마을 전경...
나무 사이로 보이는 동강마을 엄천교가 보인다.그 곳은 레프팅을 즐기는 출발점으로 둘레길4구간 총착지다.
김종직이 저술한 유두류록에 나오는 당산쉼터에는 오랜세월만큼 하늘을 벗삼아 지켜온 고목이 말없이 서 있다.
조선 성종때 뒷산이 연꽃봉오리를 닮았다하여 화암(花巖)이라 불리었던 당산쉼터...
사진은 시간을 멈추게 한다.그 아름다웠던 순간을 또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