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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17
6월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9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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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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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brFc-AIwiWw&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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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런 메시아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와 관련해 한 가지 큰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윗가문에서 출생한 메시아, 힘과 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의 메시아, 결국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들을 해방시켜줄 해결사로서의 메시아,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는 정복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 메시아는 꼬질꼬질한 이 세상의 현실을 한 단계 뛰어넘는 메시아, 보통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초인(超人) 메시아, 이 부조리한 세상을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의 메시아, 오랜 인간의 소원을 넘치도록 충족시켜줄 기적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허무맹랑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트리셨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에 정면으로 반박하셨습니다. 당신은 철저하게도 비폭력주의자로 처신하셨습니다. 완벽한 평화주의자로 살아가셨습니다.
유다인들 입장에서 막상 눈앞에 드러난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기대 밖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초라했습니다. 범인들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밥 같은 것 안 먹어도 되는 메시아, 화장실도 안가는 고상한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들은 동네잔치 상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예수님,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포도주잔을 기울이는 예수님의 모습에 엄청 실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메시아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인간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참된 메시아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하는 왕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실 왕 중의 왕이십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지나갈 이 현세에 기반을 둔 왕이 아니라 영원한 도성,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기반을 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왕,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그런 왕이 절대 아니셨습니다. 거듭되는 폭력과 압제, 비인간화 앞에서도 끝까지 견뎌내며, 끝까지 용서하며, 박해자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은 사랑의 왕이셨습니다.
유다인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사적인 욕구를 상시적으로 채워주는 개인 비서,
해결사,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키고 만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 마술사로 격하시키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메시아 상은 어떠한지 진지하게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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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기득권과 민중이 대립한다면 진리는 어느 편일까?>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JTiDC74TWmo
제가 일반 대학교 입학하여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데모’였습니다. 저는 그런 정치적인 것에 끼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멋모르고 들어갔던 가톨릭학생회 동아리가 알고 보니 데모 주도 모임이었습니다. 데모를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아리에 머물기 위해서는 화염병 정도는 날라주어야 했습니다. 백골단에 끌려갔던 선배가 눈이 함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며 다른 이들은 분노했지만, 저는 저 때문에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뒤로 숨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시청 앞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어떤 모르는 여학생이 손바닥에 무언가 써 주었습니다.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는데 저는 예쁜 여학생이 손을 잡고 써 주니까 그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뭐라고 쓰는 거냐고 물으니 그 여학생은 짜증을 내며 “집회가 명동성당으로 바뀌었다고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데군데 사복경찰들이 섞여 있어서 시청 앞에서 데모한다고 했다가 그곳으로 병력이 집중하니까 급하게 명동성당으로 장소를 바꾼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각자 명동성당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저는 그 혼란을 틈타 집에 와 버렸습니다. 물론 동아리 선배들은 명동성당에 갇혀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TV로 보는데 그 많은 병력이 명동성당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 무슨 이유로 데모를 한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강경대라고 하는 한 학생이 경찰이 휘두른 봉에 맞아 죽은 이유로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로 여러 명의 학생이 죽었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렇지만 명동성당이 공권력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민주화의 성지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것은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단호함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987년 6월 명동성당 공권력 행사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들 위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라고 하시며 공권력에 맞서 학생들을 옹호하였습니다. 이후로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때도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철옹성이었습니다.
만약 기득권과 민중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이야기를 잘 들어보고 누가 옳은지 분별해서 선택해야 할까요?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은 누가 옳고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무조건 약자이자 권력을 갖지 못한 민중들 편에 서셨습니다.
김 추기경이 동성학교에 다닐 때, 시험에 황국 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학생 김수환은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라고 써서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를 맞았었다고 합니다. 장면 박사가 아니었으면 퇴학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법을 지키라며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한 전태일의 영화가 나오자 가장 먼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일까,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가장 오랜 시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계셨습니다.
왜 항상 기득권들보다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는 것이 옳을까요? 그 이유는 기득권들은 이미 생각이 세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진리까지 왜곡합니다. ‘진리’를 왜곡시켜서라도 세속적으로 자신들이 소유한 것을 지키기에 급급합니다. 이는 지금이나 예수님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요 며칠 동안 예수님은 당시 기득권인 사제들, 부자들인 바리사이들, 지식층인 율법학자들, 정치인들인 사두가이들에게 공격을 당하셨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싸잡아서 공격하십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여겼습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면 누가 좋을까요? 기득권이 좋습니다. 로마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신들이 지닌 것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기 힘든 사람들이라면 메시아는 자신들의 배고픔만을 충족시켜주고 천국을 약속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기득권은 그런 메시아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다윗도 메시아를 두고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겠냐고 했을 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분명 기득권들은 싫어할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만들어 독립운동을 일으켜 자신들의 이익을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왕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기득권과 민중이 다투고 있다면 민중 편에 서는 것이 맞습니다. 기득권은 세속적인 것은 원하지만 가난한 민중은 구원을 원합니다. ‘민중의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말이 있듯이, 진리는 가난한 군중 속에 머뭅니다. 가정에서도, 본당에서도, 나라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음을 잊지 말고 항상 가진 것이 없는 다수의 편에 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진리를 잘 분별하며 살아왔다고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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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35-37 :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다윗은 시편 110에서 장차 자신의 후손으로 나타나실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했는데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했는가?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으며 당신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시라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시대적 의미이다. 이 호칭 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가득히 들어있다. 왜냐하면 정복당해 고통을 겪고 있던 그들은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지상 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메시아의 개념을 빼버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전해주며 사람들을 천상 아버지께 인도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랬던 것이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주님이시다. 하느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분이 어머니이신 여인을 통하여 오셨다. 세상의 주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니 마리아의 주님이시다.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니 마리아의 창조자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마리아의 주님이시며 마리아의 아들이시며, 마리아의 창조자이시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이셨기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린 것이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며,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다.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 여길 뿐, 다윗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올바로 고쳐주고 계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메시아를 찾는 우리의 믿음의 자세는 어떤가? 당시의 유대인들이 정복자들에 의해 시달리고 고통당하는 속에서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해방해 주고 지상 천국을 건설해 줄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리듯이 나는 내 생활 속에서 나의 현세적인 편안함과 바라는 일의 성취 또는 자기 생활의 안락만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진정 자신에게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를 더 잘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는지? 나는 내 생활에서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 것,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생활하는지? 우리 각자 자신의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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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이었던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됩니다. 그러고서 줄곧 여러 강대국의 식민지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에서 위대한 임금이 탄생하여 예전의 영화를 다시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임금을 두고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마르코 복음 10장을 보면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10,47)이라고 부릅니다. 또 1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11,10) 하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처럼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고, 그분을 통하여 다윗의 나라가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메시아를 예언하며 불렀던 시편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십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 말씀에서 “내 주님”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시편을 노래하는 다윗이 메시아를 두고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다윗은 다가오는 메시아를 자신의 후손으로 하대하지 않고, 자기보다 위대하신 분으로 여기며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메시아께서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시고 천상적이고 신적인 분이심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크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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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메시아, 메시아의 나라>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5-37)
여기서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는 “하느님께서 메시아께 말씀하셨다.”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라는 말씀은, “메시아께서는 적대자들을 굴복시키고 세상의 통치권을 장악할 것이며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라는 뜻의 예언입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라는 말씀은, 메시아는 인간적인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에는, 다윗이 예언한 메시아는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지상적인 왕이 아니라 초월적인 왕이며, 그 왕국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진정한 신원을 말씀하신 것은, 메시아로서 당신이 하시는 일은 다윗 왕실의 복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다윗 왕실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고, 그래서 기뻐했습니다.(마르 12,37)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왕실을 복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율법학자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 백성 입장에서는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다윗 왕실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해도, 기득권층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득권을 누리고 소외계층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외된 채로 살아간다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메시아 나라는) 기득권층도 없고 소외계층도 없는 나라, 그 어떤 차별도, 억압도 없는 나라, 모든 사람이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한 군중도 바로 그런 나라를 희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메시아의 신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백성들에게는 또 하나의 복음(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목자이신 분입니다.(루카 15,4) 아흔아홉을 잘 지키기 위해서 하나는 그냥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은 세속의 사고방식입니다. 단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과 하나의 가치를 비교하지 않고 백 마리 양 전부를 하나하나 모두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라는 말은,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하나를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를 반대합니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복음 정신을 거스르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소중하게 여기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함께 행복해지는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전체주의 사상과 공동체 정신은 분명히 다릅니다. ‘희생’이란 남에게 시키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자기는 할 생각도 없으면서 남에게만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는 자본주의도,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잘난 사람들의 개인주의도 복음 정신과 공동체 정신을 거스르는 사고방식입니다. 공동체 정신은 남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앞서 가지 않고, 남보다 조금 능력이 모자라서 뒤처지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려고 기다려 주는 정신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최후의 심판’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이 말씀들을 간단하게 줄이면,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이 바로 나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겨야 한다.”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겨야 한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베들레헴 마을 밖 외양간에서 태어나서 구유에 누워 계셨던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예수님의 모습도,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어떤 백인대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 말은,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다.” 라는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힘없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도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메시아의 사랑’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은 ‘가장 낮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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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좋은 점이 있습니다. 바둑판처럼 길이 나있어서 길 찾기가 수월합니다. 주소만 알면 쉽게 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산보하다가 길을 잃어도 곧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길의 번호를 따라가면 됩니다. 설명할 때도 편합니다. 길의 번호만 알려 주면 됩니다. 주변에 공원이 많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도 공원이 여럿 있습니다. 요즘 자주 가는 공원은 ‘Little Bay Park'입니다. 공원은 바닷가 근처에 있고, 멋진 다리(Throgs Neck Bridge)가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뉴저지입니다. 바닷가에서 거위 가족이 나들이 가는 것도 봅니다. 같은 다리인데 날씨에 따라서 다리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비가 내리는 날의 다리는 왠지 슬퍼 보입니다. 화창한 날의 다리는 씩씩해 보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인생의 길에서 방황할 때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고독에서 위안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다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고 합니다.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모든 사제는 서품성구를 정합니다. 저는 시편 126장 5절의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는 말씀을 서품성구로 정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알아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원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력했음에도 결과가 없다면 기다리면 됩니다. 노력하지 않고 결실을 원했다면 뉘우치면 됩니다. 힘들고 어려웠을 때 제게 큰 위로를 준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욥기 1장 21절의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는 말씀입니다. 서운했던 일도, 속상했던 일도, 가슴 아팠던 일도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면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등대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메시아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중에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열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꽃이 피어나서 좋은 것은 보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태어나서 좋은 것은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다윗도, 구약의 권위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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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과 나>
마르코 12,35-37 (다윗의 자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빛과 나>
빛 안에
있으니
밝다
빛에게
빛이 되겠다고
빛 밖으로
나오니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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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구약 성경의 전통에 따라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며, 다윗 왕조 자체를 재건하러 오실 것이라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도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혈연적 계보는 예수님을 어떤 특정한 지역, 또는 특정한 문화나 사고방식에 국한된 구세주로 폄하할 위험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온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방법은 매우 구체적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들의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하느님의 존재가 한 지역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에 매우 구체적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개입으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온 세상에 펼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인간적 위대함 안에서 인간들의 모든 기대에 응답하시지만, 또한 이런 인간적인 기대를 초월하십니다.
인간적 사고 안에 꿰어 묶이지 않는 분이시며, 인간적인 기준 안에 분류되는 분도 아니십니다.
이처럼 하느님이시고, 인류의 창조주이시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를 마지막까지 아시는 분이시기에,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인간’이시고, 완전한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과 정체성을 알려 주십니다. 인간의 사고는 자꾸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 사고의 틀 안으로 가져오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생각의 틀을 깨고 우리의 지평을 하느님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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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이봉하 디모테오 수사님]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수도생활을 하고부터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행을 할 때 저도 모르게 이 구절을 흥얼거리며 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평소 복음 묵상을 할 때 시작기도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수도생활의 나이가 더해지면서 자칫 틀에 갇히고 무디어 갈 수 있는 여러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못된 성질과 마음이 이 구절을 통해 저절로 부드러워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쁜 세상살이 안에서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에 맛 들여간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성경을 읽기보다는 일반 서적 읽기를 더 좋아하고, 영혼에 기쁨이 되는 모임보다는 육신의 만족을 위한 모임이나 강의 등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 주님을 따르고 영성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단 한 구절의 시편이나 복음 말씀에 맛 들여갈 수 있도록 스승이신 예수님께 가르침을 청하는 예수 성심 성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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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한 아이와 짝을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매우 지저분했고 공부도 못했습니다. 여기에 얼굴에는 거부감이 들 정도의 큰 흉터가 있었지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억지로 짝을 지어주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울면서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선생님은 “이 친구와 짝이 될 사람?”이라며 지원자를 찾으셨습니다. 모두가 싫었는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지요. 그때 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짝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놓인 이 친구가 안타까웠고, 내가 구해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지저분하고 냄새도 많이 났으며, 공부도 못하는 이 친구와 함께하기가 점점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면 다른 자리의 친구와 놀았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괴롭힌 것은 아니었지만, 무시했던 것입니다. 철이 들면서 이때의 생각을 하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 당시 이 친구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겉모습만 보고서 나의 행동을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철없을 때의 일이 이렇게 40년이 넘었음에도 후회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과 반대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은 소위 성경에 대해서는 ‘박사’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어떻게 태어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앎은 인간의 앎일 뿐이었습니다.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앎을 주님께서는 지적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지만, 다윗 스스로가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곧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주님을 육에 따라 다윗의 후손으로만 여길 뿐 다윗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보지 못하고, 인성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일조를 하게 되지요.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다른 이에 대한 섣부른 판단과 단죄는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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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웅>
미국의 영화 배우 매튜 맥커너히는 오스카상 수상 당시 10대 때부터 변하지 않은 자신의 영웅에 대해 말했습니다.
“매월, 매주, 매월 그리고 매년 제 영웅은 항상 저로부터 십 년이나 멀어져 있습니다. 아마 전 절대로 그 영웅이 되지 못할 겁니다. 갖지도 못하겠죠.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니까요.”
그가 말하는 자신의 영웅은 10년 뒤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미래의 다른 삶을 지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영웅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특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영웅을 생각하면서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 거리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희망을 간직하는 삶, 어렵고 힘들다고만 외치는 삶이 아니라 희망이 있기에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오십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서도 한 줄기 빛으로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 주님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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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
-풍요로운 영적 삶-
“주님은 나의 힘, 내 기쁨이시로다.”
"주님,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가 넘치나이다."
아침성무일도 독서후 응송의 고백이,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해마다 반복하여 거기 그 자리 때되면 피고 지는 다양한 꽃들입니다. 단조롭고 따분한 반복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찾을 때 늘 거룩한 반복, 새로운 반복입니다. 아침이 늘 새롭듯 우리 역시 늘 새로워야 합니다. 바로 영적전투의 요체입니다.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40여년 수도생활을 통해 한결같이 강조해온 주제가 영적전쟁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들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기와 싸워야 하는, 늘 새롭게 영적전투에 임해야 하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객사, 사고사, 병사가 아닌 영적전투중에 전사戰死해야 비로소 전사戰士라는 제 지론이며 소망입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8세기 치열하게 독일 지역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성 보니파시오 주교님 또한 빛나는 주님의 전사였습니다. 사실 성서의 인물들은 물론 교회의 인물들 모두가 한결같이 치열한 영적전투에 영적 승리를 성취했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였습니다. 얼마전 치열하게 배밭 농장에서 적과摘果하고 있는 젊은 수도형제를 보면서 새롭게 부각된 영적전투입니다.
“치열한 영적전투의 현장!”
사진과 더불어 형제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담쟁이’ 시가 생각납니다. 영적전투를 상징하는 시입니다. 지금도 거기 그 자리 수도원 담벽엔 여전히 초록빛 열정으로 빛나는 담쟁이가 한창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꼭 22년전 이때쯤 썼던 시인데 그동안 한결같이 담쟁이처럼 하루하루, ‘하루살이’ 주님의 전사로 살아 온 영적 삶임을 깨닫습니다.
영적 전쟁에 필수 무기가 성경공부입니다.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풍요로운 영적 삶은 물론 영적전쟁의 승리를 보장합니다. ‘독서-묵상-기도-관상-실행’에 이르는 렉시오 디비나의 수행은 비단 신구약 성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성경, 삶의 성경에도 해당됩니다. 제 지론은 자연도, 우리 믿는 각자의 삶도 성경책이라는 것입니다. 윗 담쟁이 시는 자연성경을 렉시오 디비나한 결과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렉시오 디비나의 우선적 대상은 신구약 성경입니다. 오늘 제1독서 ‘티모테오 2서’에 주인공들인 바오로와 티모테오 역시 빛나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내가 어떠한 박해를 견디어 냈는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구해주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주님의 전사 바오로 사도는 이어 티모테오에게 성경공부에 충실할 것을 신신당부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영적 삶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물론 성모 마리아와 모든 교부들과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성경 렉시오 디비나를 생활화하여 늘 성경을 읽었고 성경은 이들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복음에서 예로들은 다윗이나 또 이 성서를 편집했던 초대교회 신자들, 모두 제가 보기엔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들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임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주님’이심은 참으로 깊은 렉시오 디비나의 묵상의 열매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도움으로 시편110장 1절을 렉시오 디비나 한 결과 이미 먼 후대 메시아 예수님의 도래까지 예견하여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 또한 다윗과 함께 이 시편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자신의 신원을, 즉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주님이심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으니 바로 예수님이 다윗은 물론 자신들의 주님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주님일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시편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시편뿐 아니라 신구약 성경이든, 자연성경이든, 내 삶의 성경이든 렉시오 디비나 궁극의 목표는 파스카의 예수 그리스도님을 내 주님으로 깨달아 내 삶의 중심에 모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이시며 인도자이십니다. 참으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신 당신과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제 행복기도중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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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식한 무지>
우리는 자기의 고유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다른 것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만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문을 열어 놓아야 더 풍요로워집니다. 특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 유식한 무지를 속히 버려야 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으로서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고 하느님과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서 일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다윗 가문의 출신으로만 국한시켜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사명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놓을 때까지”(마르12,36).하고 말하였는데 첫 번의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야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내 주님께’의 ‘내’는 다윗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주님’은 예수님시대의 율법학자뿐 아니라 유다교의 각 종파에서는 모두 메시아, 곧 왕으로 오실 다윗의 후손으로 이해하였습니다.(2사무7,12-16. 22,51; 호세3,5; 예레30,9)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다윗의 메시아인 예수님께 당신의 오른쪽에 앉게 하여 모든 권능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게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하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는 메시아는 ‘위대한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자손’ 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핏줄과 족보에 따른 메시아, 다윗의 왕정이념에 따른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그를 뛰어넘어선 권위 있는 메시아이십니다. 참된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하고 갈망하던 잘 먹고 잘사는 평화로운 세상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는 마침내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학자들이 망신을 당해서? 아니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시고 새로운 눈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끌려서? 아니면 미래에 대한 새 비전을 갖게 되어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바람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원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 하느님에 대한 상을 살펴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 무엇일가요? 메시아의 사명과 왕조의 연결고리,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로 세습되는 식, 소위 낙하산식의 고리를 끊으려는 것입니다. 특권내지 권력과 결부시켜 메시아를 인식하려는 ‘전통’비판하십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다윗의 후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권력의 상층부와 연결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낙하산, 부자세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보다 먼저 태어났느냐 나중에 태어났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깨달음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참된 깨달음 안에는 나이의 앞뒤가 없습니다. 인생은 살아온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느냐? 로 기억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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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경의 권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성경과 역사에 근거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서 나오리라 믿었습니다.
일찌기 성조 야곱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고 축복하며 통치권이 유다 가문에서 나오리라 예언하였지요.
이어 주님께서 유다의 자손인 다윗 임금에게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되리라"(2사무 7,16)고 하신 바 있습니다.
또 미카 예언자는 다윗의 고을인 베들레헴을 두고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고 예언하면서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1-4)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서 나실 메시아는 유다 가문, 다윗의 자손이 맞습니다. 인간적 계보가 그렇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신적인 계보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기름부음받은이, 메시아를 정치적 현세적 인물로 국한해 생각하는 이스라엘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겁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마르 12,37)...
예수님은 다윗의 노래라 불리는 시편의 고백을 들어 메시아의 신적, 초월적 신원을 밝히십니다. 이 역시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입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마르 12,36)
"성령의 도움"은 곧 성령의 영감으로 씌여진 성경을 가리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2티모 3,16)라 말하며 이를 뒷받침하지요.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실 구원자, 메시아가 완전한 하느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기도 한,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존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의식의 대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는 신비니까요.
하지만 그 실마리가 성경 안에 없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고 하셨으니까요. 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성경을 알되 선택적으로 알게 되면 하느님의 진심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율법 학자들처럼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계보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고, 신적 계보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니 과연 구약 성경의 예언이 그분을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이 놀라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없으니 안타깝지요.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2티모 3,15)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으며 신약을 준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이 그토록 확신하는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을 완성하는 분이시지요. 그런데 성경에 대한 거시적이면서 심오한 통찰은 말씀을 사유화하거나, 제 이익을 위해 도구화하거나, 또 말씀을 인간의 편협한 사고 안에 정형화하는 이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은총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나 종교 지배층처럼 하나는 알되 둘은 모르는 우매한 현학자가 되지 않으려면, 말씀 앞에 겸손과 사랑으로 서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 앞에서 무지하고 무감할 따름이니까요.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 넘치고 그들 앞에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나이다."(화답송)
우리가 말씀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또 훈장처럼 과시할 이수 과정 레벨이나 통독 횟수도 아니지요.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좀 더 갖추게 해 주신다면(2티모 3,17) 그땐 우리 자신이 복음이 되고 말씀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깊이 만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분은 우리 얕은 지식과 사고를 초월하는 분이시니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겸손과 사랑으로 그분 앞에 머물러 기다립시다. 그러면 은총으로 말씀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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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감사가 사라진 곳에서는 인간성도 사라진다.
현대인은 예전보다 감사드리는 일을 어렵게 생각하며 아무것도 거저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권리를 가진 것만 받으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가 끝나면 “의료보험이 모든 경비를 지불한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가방을 싸들고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떠난다. 누구한테서 떠나는가? 자신의 인간성에서 떠난다. 감사가 사라진 곳에서는 인간성도 사라진다.
-「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에서
♣우리는 무엇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가? 아침 식사 때 먹는 꿀 한 숟가락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꿀 한 숟가락, 이를 위해 하느님은 몇 천 마리 벌을 몇 천 시간 동안 날아다니게 하셨다. 그분은 몇 천 가지 꽃들은 피게 하셨고 태양을 비추셨다. 비가 오면 벌들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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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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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답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정체를 깨우쳐주시기 위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십니다.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한 이들로서, 율법을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왔던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강대국을 갖추고, 종교,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약 4,000명으로 이루어진 합창단과 합주단을 조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다윗은 민족의 희망이었고, 민족 자긍심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로마 통치 아래에 있던 당신의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나온다는 성경 말씀을 근거(2사무 7,12;이사 9,2-7;11,1;12, 23;15,22 등)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곧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곧 새로운 다윗왕조, 새 예루살렘의 지상 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곧 메시아를 인격적으로 다윗에 종속되며, 장소적으로 이스라엘에 한정된 메시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인식 자아인식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곧 당신 자신을 스스로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신 메시아로 밝히십니다. 이는 당신의 메시아적 신성을 계시하는 것으로,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라는 <시편 110,1>을 인용하시면서 선언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혈육으로는 다윗 가문에 태어났지만, 실제로는 다윗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오히려 ‘다윗의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인격은 다윗에 종속되지 않으며, 메시아로서의 구원사업도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를 믿고 있는가요?
다윗의 주님이신 메시아를 믿고 있는가요?
물론 우리의 구원자를 당시 강대국의 다윗 임금같은 오늘 날의 트럼프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혹 지상의 왕국을 꿈꾸며, 자신의 건강과 번영, 안정과 보전을 꿈꾸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 인간적 관계와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하느님과의 관계와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또 율법학자들처럼 지식의 세계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믿음의 세계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여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그분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갈라 4,4) 놓이셨고,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로마 1,3). 그러나 그분께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면서 마리아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면서도 마리아의 창조자이십니다. 육신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이시되 위엄으로는 마리아의 주님이시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시되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며, 세상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습니다.”(마르 12,27).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 참된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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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주님!
다윗을 만드셨듯이, 저를 만드소서.
다윗을 통로로 오셨듯이, 저를 통로로 삼으소서.
다윗에게와 같이,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소서!
당신께서는 다윗의 주님이시듯,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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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9pCJ6KI7e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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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 37)
너나없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강생의 뜻을
모르기에 다윗의
자손으로만
예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느님을 묶어도
결코 하느님을
묶을 수는
없습니다.
다윗도 하느님
안에서 태어나고
하느님 안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다윗을
기다려주시고
지켜주셨던
하느님을
기억합시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갈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신앙의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그 길을
묵묵히 다시
걸어가십니다.
모든 힘
모든 가능성의
중심에는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언젠가
어떻게든
하느님께로
가게 될 우리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역사
하느님의 손길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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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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