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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1.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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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1.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20 20:58 2026년 10월 21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멀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2,39-48 어제 이어 ‘깨어 있어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저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모두에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집사(맡은 이)’의 비유로 대답하십니다. 곧 ‘책임을 맡은 이들’에게 특별히 주시는 말씀입니다.
집사에게 맡겨진 일은 단순합니다.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종들에게 내주는 것.’ 사람을 먹이는 일, 곧 돌보는 일입니다. 주인은 그를 믿고 집과 사람을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이 늦어질 때’ 일어납니다. 그 종이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보는 눈이 없다고 여기는 순간, 맡은 권한이 곧바로 ‘폭력’으로 바뀝니다. 그는 하인과 하녀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며 취합니다. 먹이라고 준 손으로 때리고, 나누라고 준 양식을 혼자 삼킨 것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눈으로 보면 여기에 깊은 진실이 있습니다. 폭력은 대개 ‘인내가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기다림이 길어지고, 하느님이 안 계신 듯 느껴지고,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손이 거칠어집니다. 가정에서도, 공동체에서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인내는 소극적인 미덕이 아닙니다. 인내는 곁의 사람을 지켜 주는 울타리이고, 평화를 떠받치는 기둥입니다.
일치의 눈으로 보면 이 말씀은 무엇보다 ‘맡은 이들’을 향합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가 사목자들에게 늘 일깨웠듯, 맡겨진 힘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먹이면 공동체가 하나 되고, 그것으로 사람을 치면 공동체는 갈라집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저울은 상대 평가가 아니라, 저마다에게 맡기신 몫입니다.
그리고 잊지 맙시다. 어제 복음에서 그 ‘주인’은 돌아와 종들에게 시중을 드셨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채찍을 든 폭군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닮은 집사는, 사람을 먹이고 씻기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주인이 늦는다’며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았는가? 나에게 맡겨진 힘과 권한은 누구를 위해 쓰이는가? 나는 곁의 사람을 먹이는가, 상하게 하는가?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충실한가?
주님, 기다림이 길어져도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게 하소서. 맡겨 주신 것으로 사람을 먹이게 하시고, 보는 이 없는 자리에서도 충실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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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1.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20. 16:40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치유의 사명!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구원보다도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가장 큰 은총을 묵상하는 것이 더 온전한 길입니다.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치유의 사명! 2026년 10월 20일 화요일 체로키 신학자 랜디 우들리(Randy Woodley)는 서구 그리스도교가 교리적 구원을 강조하는 것과,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사명을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위계의 정점에 있다고 스스로 믿는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도를 찾게 마련입니다. 교리는 그 목적을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대중에게 천국에서 상급이 기다린다고 설득할 수 있다면, 불안한 군중을 조금 더 잠잠하고 순종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본성적으로 죄인임을 납득시키고, 죄인으로서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단속해야 한다고 믿게 한다면, 권력은 더욱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의 교리는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태어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는 흔히 '원죄 교리'라 불리며, 지배적인 교회가 구원을 베풀거나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권위를 정당화하는 데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죄'라 부르는 것을, 원주민 신앙에서는 흔히 불균형이나 깨진 조화로 설명합니다. 서로 다른 용어이지만, 같은 영적 실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치유를 통해 깨진 조화를 회복하고 균형을 되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의미를 단순히 공식이나 규율, 기도, 신경(信經)의 조항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서구 교회는 본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구원은 돈이나 권력, 혹은 신경의 문구에 대한 단순한 순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 곧 치유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도 훗날 저 세상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지는 치유입니다. 우들리(Woodley)는 예수님께서 개인의 구원보다 공동체적 치유를 베푸신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제국주의의 미국이나 로마의 틀이 아니라, 히브리 전통과 원주민의 이해를 통해 바라볼 때, 그분의 사명은 근본적으로 온전함을 회복하고, 육신을 치유하며, 소외된 이들을 공동체로 다시 불러들이고, 불의한 제도를 도전하며,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는 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치유는 서구 그리스도교가 '구원'이라 부르는 하느님의 더 큰 비전이며, 그 치유는 훗날이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치유'라는 언어가 창조주께서 바라시는 샬롬의 마음을 더 잘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샬롬은 모든 피조물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포괄적 평화와 충만을 뜻합니다. 샬롬과 원주민의 조화의 비전은 단순히 개인 영혼을 넘어, 공동체와 문화, 그리고 땅 자체에까지 미치는 정의와 온전함을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제국주의적 왜곡을 벗겨내고, 정복이 아니라 치유하시는 예수님, 지워버림이 아니라 회복시키시는 예수님, 억누름이 아니라 힘을 북돋우시는 예수님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구원은 본래 그 의미대로, 곧 모든 것을 치유하는 은총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와 마찬가지로 많은 친구와 가족이 부끄러움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염병과도 같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권위주의적 지배자에게 끌리고, 또 하나의 나라 안에서 깊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난 여덟 해 동안 제 안의 부끄러움을 벗겨내는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저의 희망은 모든 이가 부끄러움의 독성을 깨닫고, 내적 평화를 향한 길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Greg I. Reference Randy Woodley, How Western Christianity Got It Wrong: Replacing the God of Fear with a Spirituality of Healing (Broadleaf Books, 2026), 87–88, 97–98, 104–10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오래된 돌들이 서서히 언덕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제국의 구조물들은 사라져 가지만, 땅에 뿌리내린 예수님의 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
261021.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21 03:08
- 두려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주님?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위의 주님 말씀은 뭔가 부적절해 보이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하기까지 합니다. 왜 당신의 오심을 하필 도둑이 오는 것에 비교하실까요? 엄마가 올 것을 기다리듯 기다리라고 하면 좋지 않을까요?
엄마가 아니더라도 아버지나 주인이 오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아니면 신랑이 오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부러 도둑의 침입과 비교하신 거라면 뭔 뜻이 있을까요? 도둑의 침입은 더 잘 깨어 기다리는데 주님께서 오심은 그 기다림이 그만큼 못하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어떤 사람은 도둑을 깨어 기다리는 것은 잘하는데 주님께서 오시는 것은 깨어 기다리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을 때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그런 존재에게 주님은 아무것도 아니고 두려워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기다림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님을 두려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고 기다리지는 않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무신론자가 그럴 것이고, 무신론자가 아니어도 무관심한 사람이나 상관없는 사람이 그럴 것입니다.
이런 사람 중에 제가 자주 얘기하는 사람이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이 없다고 굳이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계셔도 이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에는 소 닭 보듯 아무 상관 없이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와 닭 사이가 딱 그렇습니다.
소 외양간에 닭이 있어도 소는 닭을 사랑하지 않고 닭도 소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다가가거나 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인생 셈’하러 오실 거라고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살았냐? 잘 살았냐? 주님께서 인생 셈을 하러 오신다면 그때 나는 어떨 것 같습니까? 아무 두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에 오신다고 해도 아무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난 주님을 사랑치 않아도 주님이 날 사랑하시니 아무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라고 하시는데 아무 생각이 없이 살기에 아무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도둑은 오는 것이 두려워 올 것을 대비하며 깨어 기다리는데 주님은 도둑이 아니니 오셔도 두렵지 않아 대비할 필요 없고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않으니 기다릴 것도 없는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주님이 도둑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 셈은 하러 오시는 분이라는 것이 오늘 주님의 비유에서 드러났습니다. 슬기로운 동정녀처럼 신랑을 반가이 맞이하지는 않더라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님께 셈 바쳐야 함만은 생각하며 살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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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1.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21. 04:56 나이가 먹어갈수록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집안의 일을 맡아 주인이 없는 동안 다른 종들을 돌보던 관리인(집사)은 사실 종이었습니다. 그의 책임은 다른 종들의 안녕을 살피고, 특히 그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직무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같은 종으로서 다른 종들을 보살펴 주는 "종들의 종"이 바로 집사였던 것입니다. 이 단어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교황의 호칭으로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단어는 교황을 뜻하는 단어인 것은 분명하지만, 집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의무요 권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몇몇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에 대해 집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존재 안에 새겨 주신 은총의 유산을 받습니다. 그것은 삶을 통해 성장시키도록 주어진 능력과 재능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듯이, 이 모든 능력과 생명 자체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개인적이고, 유일하며, 반복될 수 없는 은사로서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어 주는 선물인데, 이 선물은 개인을 위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선물은 계속해서 다른 이들과 나눔으로써 가꾸어지고 성장하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선물을 자기 자신의 에고를 위해서만 사용할 때 그것이 순간적으로는 꽃을 피우는 듯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절대 좋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합니다. 성급한 성격 때문에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들만을 위해 권력을 꿈꾸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다.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2-44)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 "전능하신"이라는 호칭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린 이름입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무력해지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의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정성으로 부축해 주는 겸허함 속에서 드러납니다. 권력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차원의 힘입니다. 성경은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아가 8,6)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2코린 12,10)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무력함"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습니다(1코린 1,25).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움켜쥐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비우심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道)의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 노자는 『도덕경』 제4장(道沖, 도충)에서 "도는 비어 있으나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깊고 깊어 만물의 근원과 같다(道沖,而用之或不盈 似万物之宗)."라고 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지만 도는 언제나 충만함을 유지한다는 역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비워낸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빠른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내야 한다는 정신구조를 뒤바꾸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니 나이를 먹어갈수록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해 주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빨리빨리 무언가를 해야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이것은 우리 에고가 우리 정신에 심어준 착각이요 환상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효과와 효력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차근차근한 정성과 인격적 관계 맺음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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