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342) / 그리스
델포이 고고 유적(Archaeological Site of Delphi; 1987)
기원전 6세기 아폴로의 신탁을 들을 수 있는 델포이 신전[sanctuary of Delphi]은 포키스 주[Prefecture of Phokis]에 속하며, 그리스와 그 주변 국가들에게도 성소로 여겨졌던 곳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델포이를 ‘세상의 배꼽[navel of the world]’이라는 뜻의 옴팔로스(omphalos)라는 돌을 세웠다. 뛰어난 풍광과 조화를 이룬 성소인 델포이 유적은 진정한 종교의 중심지이자 고대 그리스 세계 통일적 상징이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델포이 파르나수스(Parnassus) 산에는 테라스・신전・재산고(財産庫) 같은 많은 기념물이 있으며, 이 기념물들의 물리적・도덕적 가치가 파르나수스 풍광과 결합되어 마술 같은 경관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거의 손상되지 않은 탁월한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하는 델포이는 위대한 범그리스 적인 신전의 탁월한 사례이다. 미케네 문명 시기에 작은 마을 델포이에서는 대지의 여신이 숭배의 대상이었다. 기원전 8세기에 아폴로 숭배가 확립되면서 신전과 신탁이 발달하게 되었다. 1차 신성 전쟁[First Sacred War] 이후, 근린 동맹의 관리와 보호 아래 지속적으로 자율성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범그리스 차원의 종교적・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아폴로를 기념하여 4년마다 개최되는 피시아 경기[Pythian Games]가 재편성되었으며, 훌륭한 건물들과 동상, 그리고 공물들로 채워져 신전은 확대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아이톨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이후 기원전 191년에 로마 인들에게 정복당했다. 로마 제국 시기에는 때때로 약탈을 당하기도 했으나 몇몇 황제들은 이곳에 애정을 갖기도 했다. 기독교가 확산되자 신전은 종교적 의미를 잃었으며, 테오도시우스 대제[Theodosius the Great]에 의해 마침내 폐쇄되었다.
유적지의 중요한 기념물은 다음과 같다. 아폴로 신전[Temple of Apollo]: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기원전 6세기에 지어졌던 원래의 신전 유적 바로 위에 세워졌다. 내부에는 델포이 신탁의 중심이자 피시아 경기의 좌석인 지성소[adyton]가 있다. 아테네 인의 재산고[Treasury of the Athenians]: 기원전 6세기 말엽에 아테네 인들이 아폴로에게 바치는 제물을 보관하기 위해 건축한 도리아 식의 작은 건물이다. 정면의 주랑이 벽 끝의 두 기둥 사이에 있으며, 풍부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키오스의 제단[Altar of the Chians]: 아폴로 신전 전면에 있는 커다란 제단이다. 비문에 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에 키오스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흰색 대리석 토대 위에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코니스(cornice)는 다시 흰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인상적인 색의 대비를 보여 준다. 아테네 인의 스토아[Stoa of the Athenians]: 각각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진 홈 있는 기둥 7개가 있는 이오니아 식 건물이다. 기단에 새겨진 글에 따르면 기원전 478년 아테네 인들이 페르시아와의 해전에서 승리한 후 가져온 전리품을 보관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극장[Theatre]: 원래 기원전 4세기에 세워졌다고 하나 지금 남아 있는 유적들은 로마 제국 시대의 것들이다. 돌로 만든 35열의 관람석과 분장실과 무대를 겸비한 스케네(skene)는 포장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극장은 주로 대제전 기간 동안의 연극을 공연하는 데 사용되었다. 경기장[Stadium]: 기원전 5세기에 건설되었고, AD 2세기에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의 재정 지원으로 재건축되었다. 이때 석재 관람석과 아치형 기념물 출입구가 추가로 세워졌다. 이 경기장에서 범헬레니즘 피시아 경기가 개최되었다. 카스탈리아 우물[Castalian Spring]: 페드리아데스 계곡에 있는 우물로부터 물을 받았던 분수로 지금은 두 개의 샘이 남아 있다. 건축 시기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대의 것은 바위를 잘라 만든 것으로 절벽 높은 곳에 자른 틈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서 카스탈리아 요정에게 제물을 바쳤으리라 추정된다. 톨로스(Tholos): 기원전 380년에 세워진 도리아 식 원형 건물이다. 건물의 용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세공이 섬세하고, 수준 높은 부조로 장식되어 있는 것들로 미루어 중요한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각형 축대[Polygonal Wall]: 기원전 548년 구 아폴로 신전이 파괴된 뒤에 새로 세우게 될 신전의 테라스를 지지하기 위해 세워졌다. 축대를 쌓은 돌이 다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돌의 끝부분이 완벽하게 서로 들어맞는다. 축대를 쌓은 돌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은 노예 해방과 관련된 글들이다.
등재 기준 / 기준 (ⅰ) : 델포이의 유적은 마추픽추(Machu Picchu; 1983년에 세계유산에 등재)와 어깨를 겨루는 독특한 예술적 성과물이다. 파르나수스 산에는 테라스・신전・재산고 같은 많은 기념물이 있으며, 이 기념물들의 물리적・도덕적 가치가 파르나수스 풍광과 결합되어 마술 같은 경관을 표현하고 있다. 기준 (ⅱ) : 델포이는 고대 세계 전체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6세기에는 리디아의 왕들이 귀한 선물을 신전에 보내 왔고, 기원전 548년 아폴로 신전이 파괴되었을 때에는 외국의 후원자들이 재건을 위해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기원전 481년에 시라큐스의 겔론[Gelon of Syracuse]의 삼지창이 카르타고에 대한 그리스의 승리를 기념하고, 기원전 478년에는 아테네 게이트가 크레르크세스 함대를 격퇴한 승리에 대한 증거를 남기는 등 기원전 5세기에 있었던 주요 전쟁들도 델포이에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에는 국제적이 되었다. 아탈레의 스토아,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스를 위해 지은 기념물, 페르가뭄의 왕 에우메네스 2세의 동상 등은 2세기의 왕조들이 델포이에 보여 주었던 관심을 증명하고 있다. 이후 125년에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동상을 델포이에 세웠다. 위대한 관용의 이상이자 광범위한 영향들이 집중된 델포이의 신전은 고대 세계 전체에 걸쳐 차례로 모방작을 만들어 냈다. 그것의 영향력은 알렉산더 대왕이 아시아를 정복하면서 멀리 박트리아까지 퍼졌다. 심지어 델포이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던 네로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약탈마저도 델포이의 예술적 영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기준 (ⅲ) : 델포이는 고대 그리스의 종교와 문명에 대한 독특한 증거물이다. 델포이의 신탁을 둘러싸고 네 번의 신성한 전쟁이 일어났었는데 이 전쟁들은 그리스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4년마다 피시아 경기가 열렸던 극장과 경기장은 위대한 헬레니즘을 반영하는 공동체 축제의 중심지였다. 기준 (ⅳ) :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탁월한 자연 경관에 위치하고 있는 델포이는 위대한 범그리스 신전의 탁월한 사례이다. 기준 (ⅵ) : 고대인들에게 아폴로 신전은 ‘세상의 배꼽’을 뜻하는 옴팔로스이다. 이러한 신성한 의미가 충만한 기원전 6세기의 델포이 유적은 진정한 종교의 중심지이자 고대 그리스 세계의 통일적의 상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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