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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에서 공자와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곳을 공부(孔府)라 하고 바로 옆에 공사의 사당인 공묘(孔廟)가 있다. 그리고 성밖에 공자 집안무덤인 공림(孔林)이 있는데 시간이 없어 가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공묘를 설명할 때 전체입구부터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 데 나는 틀린방식이라 생각한다. 후대를 가며 계속 확장되며 문이 추가되었기에 원래 공묘인 大成殿부터 설명하는 것이 맞다 생각한다.
일단 먼저 선수친 황제가 공자사당을 만들고 자기이름을 걸었는데 후세에도 줄서서 자기이름을 걸고 싶은 황제는 그앞에 새로 문을 하나 더 만드는 방식이다.이러다 보니 계속 문이 추가되며 앞으로 길어진다. 먼저 위의 그림에서 보듯 중앙의 大成殿과 大成門이 원래 공자의 사당이며 오른쪽에 원래살던 故宅이 붙어 있다.
(그림설명 ) 그리고 아래부터 원래 대성문 입구, 大成門,大成殿의 사진을 첨부하였다. 특이한 점은 용이 새겨진 돌기둥은 중국에서 황제급 대우를 의미한다.
대성전안에 공사의 초상이 있고 위에 "萬世師表"(세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스승의 표상)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한국은 공자를 위대한 성인에 황제처럼 모시는 경향이 있는데 중국친구들에게 물어보면 한마디로 " 교사"라고 잘라 말한다. 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세상을 경영한 안영이나 관중이 목표이며, 김연아를 존경하지 김연아의 선생은 선생이라는 이야기다.
이어서 후에 공자에 줄서서 이름을 남기고 싶은 황제들이 계속 문을 만들어 확장을 하며 한마디씩 현판에 붙였다.
전체를 살펴보니 특별히 청나라의 황제들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이전 왕조 황제들은 겨우 구석에 비석으로나 남아있고 새로 수리하고, 새로 건립하고, 중심의 비석은 청나라 황제들의 글이라는 아이러니는 청나라가 한족들의 마음을 잡기위해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나타낸다. 공자는 만주족 황제들의 완전한 포로가 되어 공자를 참배하기위해서는 만주족 황제들의 표시마다 절을 해야만 하게 된거지. 또 기록내용을 읽어보면 만주족 황제들의 투자는 건륭제 초기로 끝이 난다. 이후에는 이미 알아서 기기에 한족의 마음을 잡기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건륭제이후의 내용은 없고 청나라 일반왕족의 기부로 격도 떨어지고 수리도 안되어 낡아보인다.
다음은 공자집안(孔府)입구의 사진이다. 유교가 중국의 정치이념이 된 후 공자의 후손에게는 주변의 땅을 주어 제사를 지내게 했고 직계후손에게는 연성공(衍聖公: 성인에서 파생된 의 뜻))이라는 세습작위를 주고 여러 위패를 보내 주변을 지휘하게 했다. 예를 들어 집안이나 주변에 문제가 있으면 "황제의 명령(欽命)" 이라는 위패를 세워 권위를 나타내고, "숙정"(엄숙할 것)이나 "회피"(물렀거라!)등은 관의 권위를 나타낸다. 또 여러 무기도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이렇게 약 2000년을 대가 끊기지않고 유지해온 집안은 중국에도 공자세가밖에는 없다. 중국 공산화이후 정통 종손은 대만으로 이주했으나, 대륙에서도 공자집안은 계속 전통이 유지되었고 非林非孔운동이 한참이던 문화혁명기간에도 훼손의 흔적은 없다.
지금은 원래의 성채를 복원하고 곡부 전체 시가지를 새로 단장하였으며 공자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끊임없이 나오며 공자를 다시 뛰워올리는 분위기다. 아마 중국공산당도 이제는 혁명기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며 왕도가 필요한 시기라 생각하는가 보다.
그쪽으로 시집간 중국인 여자가 안내를 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먹고사냐고 자문을 구하더군. 이에 아마 중국이 이전과 달리 곡부를 最高의 聖地로 띄울테니 지금 孔廟근처에 가게를 사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친구에게 부탁하여 음식을 잘하는 농가를 소개받아 한상 벌렸다. 토종닭, 민물고기 요리, 두부조림, 돼지고기 요리등은 중국 어디나 비슷한데, 사진처럼 산동지역은 파, 마늘, 고추등은 한국처럼 날로 먹는다. 또 옥수수를 갈아 죽을 만든 후 김처럼 만들어 접어서 여러 반찬을 싸서 먹는 것이 특이하다. 우리는 "노란 손수건"이라 불렀으며 산동 어디나 항상 나온다. 또한 이천년을 이어온 공자세가의 집안 술 "孔府家酒"를 한병 비웠지. 한때 일본인들이 좋아하여 대량 수출되며 "공자는 죽어서도 중국을 먹여살린다"는 농담도 있었는데 지금은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돌아오는 길에 황토의 때도 벗어낼 겸 바닷가에 잠간 들렸다. 앞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세월의 흔적!
첫댓글 오히려 요새 개발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공림은 지금도 매장이 이루어지고 있더군요..글 감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유적을 이렇게 지식과 함께 읽는 즐거움이 있습니다.앞으로 사랑방에 지식을 나눠주세요.저는 청구인보다 세계인이란 이름에 더 익숙해져있습니다.
공부가주로 조상의 덕을 좀 봤다가,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경쟁에서 도태되어 시름에 빠져있을 때 마침 딱 맞춘 듯,중앙정부의 공자정신을 살리는 운동으로 관광수입도 좋다고 합니다.
안녕 하세요. 세계인님
2대 통지기로 계셨던 기억이 있으며 다시 뵙게되어서 반갑습니다. - 남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