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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 60,1-6
제2독서 : 에페 3,2.3ㄴ.5-6
복 음 : 마태 2,1-12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삶의 맛, 삶의 향기
-삶의 렉시오 디비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좋은 술 일수록 맛과 향기가 좋습니다.
술만 그런게 아니라 삶도, 글도, 말도 좋을수록 맛과 향기가 좋습니다.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합니다.
성인들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해보면 다 고유의 맛좋고 향기로운 삶, 관상적 삶이었음을 담박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의 삶도 맛있고 향기로워 보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맛과 향기를 닮았습니다.
과연 하느님이 보실 때 내 삶의 맛과 향기는 어떨런지요. 몇 가지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1일 대축일 저녁식사 후 마신 술 맛이 좋고 향기로웠지만
저는 미쳐 몰랐고 옆자리의 마티아 수사님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
"술은 이렇게 코로 향기를 맡으면서 서서히 음미하며 마시는 것입니다. 단 번에 훌쩍 마시면 안 됩니다.“
수사님은 서서히 향기를 맡고 맛을 음미하며 얼마 동안 시범을 보여줬고, 이어 저의 즉각적인 언급입니다.
"아, 바로 그것이 렉시오 디비나의 원리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술과 같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서서히 맛보고 향기를 맡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너무나 확실히 깨달아 각인된 렉시오 디비나의 원리입니다.
술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삶에 두루 적용되어야 할 렉시오 디비나의 원리요,
이래야 비로소 관상적 삶, 영적 삶의 성취입니다. '삶의 렉시오 디비나'가 참으로 심오합니다.
어제 수도원 묘지를 방문했을 때 한 눈에 들어 온 묘비마다의 생몰연대 였습니다.
90세 이상 사신 분이 거의 없고 그 생몰 연대가 다 달랐습니다.
한 평생 삶이 어떠했을까 잠시 상상으로 렉시오 디비나 했습니다.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 어떤 성인도 다 죽는 다는 사실이 새삼 위로가 됩니다.
예외 없이 탄생 날짜가 있으면 임종 날자가 있습니다.
평생 살 것처럼 죽음을 잊고 지내지만 실상 얼마 남지 않은 삶임을 깨닫습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으로 압축하면 내 인생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요.
죽음 있어 삶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알게 됩니다.
죽음을 통해 분명해 지는 삶의 감격과 고마움, 기쁨입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눈'으로, 내 '삶의 문장'에 주어를 하느님으로 하여 내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하게 됩니다.
여기 수도원 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늘 그 삶을 되새기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1950년, 그가 수도원 입회 전 6.25 사변 시 흥남 철수 작전 때,
선장으로 있던 그의 배로 14000명의 피난민을 구조한 마리너스 수사님(1914-2001)입니다.
수사님의 묘비 앞에 휘날리는 2개의 미국 성조기가 수사님의 영웅적 행위를 기리고 있습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에 와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마리너스 수사님을 새롭게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정부가 훈장을 주기 위해 그의 속명을 찾아 여기에 왔을 때야
비로소 그가 전쟁의 영웅인 것을 수도원 사람들이 알았어요.
그가 너무 말이 없었기에 우리는 신문을 통해 그의 활약상을 알 수 있었죠.“
인터뷰 기사 중 죠엘 아빠스님의 답변입니다.
수사님은 옛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47년 수도여정 중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았으며,
휴가 때 역시 수도원에 머무르며 언제나 기도하고 자기의 소임을 다했다 합니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권72-83쪽 참조).
얼마나 매력적인 숨겨진 겸손한 삶인지요!
한권의 '살아있는 성경' 처럼 깊고 아름다운 삶이기에
묘지를 방문할 때 마다 수사님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하게 됩니다.
이제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의 최고의 조연(물론 주인공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이심)인
동방박사들에 대한 본격적 렉시오 디비나로 세 측면에 걸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동방박사들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샘솟았던 하느님을, 진리를 찾는 불굴의 열정입니다.
구도자의 우선적 기본조건이,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 바로 열정입니다.
주님은, 삶의 이정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객관적 실재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진리를 찾는 백절불굴의 열정이, 갈망이 있을 때
눈이 열려 발견되는 선물이 주님이요 삶의 이정표입니다.
열정이 없어 눈이 열리지 않으면 눈 먼 맹인일 뿐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과연 하느님만을 찾는 열정의 구도자들로
우리 수도승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귀감입니다.
둘째, 삶의 이정표입니다.
진리를 찾는 열정에 눈이 열린 동방박사들에 은혜로이 계시 된 주님의 별, 삶의 이정표였습니다.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 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암흑의 동토(凍土)에 살고 있는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하며, 우리의 내면을 환히 밝혀줍니다.
바로 동방박사들처럼 눈이 열릴 때 계시되는 주님의 영광이요 주님의 별, 이정표임을 깨닫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그 멀리 떨어져 있던, 진리를 찾는 열망에 깨어 눈이 열렸던
동방의 현자들에게만 계시된 영광의 별, 주님의 별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오로의 고백처럼 계시를 통해 신비를 깨달아 안 이방의 동방박사들입니다.
지척에 있었지만 영적으로 잠들어 있던 그 박학의 종교인들, 신학자들
아무도 발견치 못한 주님의 별, 삶의 이정표였습니다.
셋째로 도반들입니다.
혼자가 아닌 셋의 도반들이 함께 했기에 성공적인 순례여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진리의 도반, 사랑의 도반입니다. 혼자라면 십중팔구 도중하차 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별, 진리의 별, 희망의 별, 삶의 이정표 따라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한
동방박사들의 최종 봉헌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탄생한 아기 예수님과 구도자 동방박사들간의 아름답고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동방박사들과 함께 믿음과 희망, 사랑의 세 보물 모두를 주님께 봉헌하며
이 거룩한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시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진정 최고의 도반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영안으로 볼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마지막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2,12).
동방박사들의 성공적 순례 여정을 가능케 했던 수훈갑의 최고의 도반은 바로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주님보다 더 가깝고 더 좋은 도반은 세상에 없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은 동방박사들과 함께 하셨고,
또 제 산티야고 순례는 물론 지금 뉴튼수도원의 내적 순례여정에도 함께 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찾는 순례여정에 항구할 때 내 삶 역시 '맛있고 향기로운 관상적 삶'에 '살아있는 성경'이 됩니다.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내 고유의 아름다운 '삶의 성경'을 쓰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에는 산타클로스가 누구이며 어디에 사는지가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만화 영화를 보면 눈이 펄펄 내리는 추운 북극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하지만 언젠가 핀란드에 산타클로스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산타클로스는 핀란드에 사는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 버린 지금은 그 역시 아니었음을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가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중국이요!”
그 이유를 물으면, 글쎄 받은 선물들이 모두 중국산(made in china)이라고 하네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중국에 살기 때문에 모든 선물의 생산지가 중국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선물의 생산지가 중국이라는 표시가 거짓일까요?
따라서 산타클로스는 중국에서 산다고 확신 지을 수 있을까요?
위의 이야기가 비약적인 비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리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진리일 수도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눈에 본 모든 것만이 진리라고,
자신이 직접 듣고 체험한 것만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자신의 몸으로 체험한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을 때는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밝은 태양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태양이 어디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공기를 직접 볼 수도 또 소리도 듣지는 못하지만, 공기가 있음은 분명히 압니다.
왜냐하면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을 때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물며 세상의 모든 것을 지어내신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이,
자신의 체험을 통해 주님을 느끼고 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도 아닌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알아 뵐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단순히 별의 움직임에 따라?
아닙니다. 그들이 보이는 진리를 쫓은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진리를 쫓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만나겠다는 강렬한 소망이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만을 중시하는 눈에 보이는 진리만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직접 볼 수 없듯이, 세상 안에 계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만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열린 마음이 그토록 소망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이 아름다운 건 하느님을 찾아 앞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희망과 모든 기쁨은 오직 하느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길이 실은 새 길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경배는 우선 먼저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며
가난한 하느님의 외침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배는 생각 속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가는 도중에 온갖 기쁨과 온갖 슬픔들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우리들에게 주님 공현 대축일은
다시금 주님을 향해 가도록 용기를 우리에게 건넵니다.
사랑의 가장 먼 곳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입니다.
우리의 가슴 안에 탄생하신 주님을 경배하는 길은
주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따뜻한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어떤 마음과 실천으로 우리의 걸음을 시작할지를
동방박사들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하는 기쁨으로 모두가 아름다워지는 한 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품은 별
전삼용 요셉 신부
며칠 전 주교님의 교구청 사목방문이 있었습니다.
각자 하고 있는 일들을 발표하는데, 교도소 사목을 담당하는 사제가
현재 교도소 수감자 중 가톨릭 신자 비율이 5%도 안 되는 소수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은 거의 없고
많은 수가 교도소 안에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10% 정도가 가톨릭 신자라고 하는데
그만큼 가톨릭 신자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대형 종교에서는 모두 사랑과 자비와 용서 등을 가르치며
이웃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왜 가톨릭 신자들이 유독 다른 종교의 사람들보다 범죄율이 낮고
또 이웃을 위한 봉사나 자선의 양도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영화감독 스티븐 앨런 스필버그는 흥행의 마법사, 천재적 감독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 E.T., 주라기 공원, 쉰들러 리스트 등 세계인의 사랑받는 영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스필버그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표창장 한 번 받지 못한 학생이었답니다.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대학 시절에도 평균 C 학점을 받았답니다.
그에게는 부모의 이혼과 유대인이라는 열등감과 상처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습니다.
잦은 이사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의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면
혼자 공상에 빠지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습니다.
이런 그였지만 그를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성공시킨 원동력은 어머니 레아 아들러였답니다.
레아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들을 무시하거나 야단치지도 않았고,
아들대신 동네 친구들을 징벌하러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들의 우월성을 발견하고 저렴한 무비카메라를 선물해 주었고
스티븐은 독학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괴롭힘을 많이 당해 결석을 자주 하였지만
그는 집에서 영화에 대한 공상을 하고 영화를 찍으러 밖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영화는 혼자 찍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에 흥미 있는 친구들을 모아 영화 제작에 동참시켰습니다.
어머니는 스티븐이 친구들과 어울려서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스티븐의 어머니는 매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레아는 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고,
아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알아보고 아들에 대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레아의 어머니 즉 스티븐의 외할머니는 딸 레아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말을 잘 새겨둬라. 이 아이는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칠 아이다.”
레아는 아들을 볼 때 마다 어머니의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기대를 하였으며 결국 그 기대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기대에 맞게 행동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향을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과 기대를 스스로 실행함으로써 그 예언을 성취시키는 경향입니다.
[출처: 햇볕 같은 이야기, 김필곤, 기대의 힘]
그런데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을 충족시켜 주려는 마음이 들까요?
아닙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기대만이 상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개들을 봅시다. 개들이 누구나에게 그렇게 친절합니까,
아니면 밥을 주는 주인에게만 잘 보이려고 꼬리를 흔듭니까?
자신에게 음식을 주는 주인에게 고맙기 때문에 주인에게 잘 하려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음식을 해 주는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려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당신 뜻과 함께 당신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내어주시며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되어 그분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도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성체성사를 간직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이
그만큼 그리스도의 삶과 가깝게 변화되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객관적인 자료로도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2. 10. 28일자 1188호에
‘가톨릭 신자들 나눔 활동 으뜸!’이라는 제목으로 기분 좋은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종교인·비종교인을 통틀어 기부와 자원봉사 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름다운재단(이사장 예종석)이 1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제12회 국제 기부문화 심포지엄에서 강철희(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는
'누가 이웃을 돌보는가?' 발표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기부 참여율은 68%(2011년)로,
개신교(61%)ㆍ불교(60%) 신자보다 높다’고 밝혔다.
강 교수에 따르면, 1인당 기부금액 또한 천주교 신자는 37만 1100원으로,
개신교(21만 3400원)와 불교(10만 6000원)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또 천주교 신자의 자원봉사 참여율은 49%로, 기독교(34%)·불교(27%) 신자보다 높았다.
자원봉사 시간 역시 천주교 신자들은 36.5시간으로,
타 종교 신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객관적 현실이 이런데도 사회 사람들은 천주교보다 개신교가 더 많은 자선과 봉사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2013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국 교회의 사회 봉사활동이 전체 종교기관 중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인다고 하여 현실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개신교가 한 조사에서도 개신교인들을 빼놓고 비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로마 가톨릭(47.0%), 불교(38.0%) 순이었고, 개신교는 12.5%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종교들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 어디서나 우리는 가톨릭 신자라는 이름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 종파에서 아무리 선교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선교의 방법은 바로 우리들의 참 그리스도를 믿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분이 어떤 분임을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고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보고 그 보이지 않는 부모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본적 삶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 하는 모든 선교는 단기적인 성과를 낸다고 하더라도
거시적이고 장기적으로는 신자 수가 줄어듦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증거 하는 가장 완전한 방식이 그분의 가르침과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대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동방박사들이 보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바로 그 별이 지금도 떠 있는데
그 별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밝은 별이 되기 위해 우리가 더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더 먹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먹으면 그 먹는 것이 바로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해 주는 밥을 먹으면 어머니의 기대대로 살게 되어 어머니를 내 안에 품게 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말씀과 성체를 통해 그만큼 그 분을 더 먹으면 그분이 우리 삶을 통해 나타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먹는 것이 각자를 만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씀과 성체를 통해 먹고 자신도 모르게 그분의 기대대로 살며 세상의 빛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장미란 선수가 역도를 들어 올리며 금메달을 확정짓는 순간 우리 모두는 울컥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장미란 선수가 고생을 했는지를 봅니다.
김연아 선수도 그렇고 모든 위대한 일을 이루어놓은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순간이 짧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 짧은 순간에도 우리를 만들어 주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주는 동방의 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빛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해를 품은 달처럼 그리스도를 먹고 품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박병규 신부
시작기도
일깨움의 성령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귀를 저에게 허락하소서.
세밀한 독서
동방박사의 방문은 낯설다.
예루살렘이 깜짝 놀랄 만큼 낯설고, 모든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일 만큼 충격적이다.
별을 보고 걸어온 길은 임금을 만나는 길이었다.
동방박사들이 바라본 별은 유다 사회가 바라본 별과는 다르다.
누구에게 임금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누구에겐 원수가 되는 게 인간사다.
동방박사는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를 보고 더없이 기뻐했지만,
헤로데 자신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임금은 메시아였다.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고을은 다윗의 고을이었고,
임금은 이 세상을 뒤집을 만큼의 힘을 지닌 영광스런 메시아였다.
작은 고을의 이미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아기의 이미지와 닮아있다.
힘없는 아이에 대해 기뻐하는 일, 그것은 세상의 권력을 움켜쥔 임금에 대한 감정은 아닐 테다.
세상 모든 사람이 모여들어 머리를 맞대고 찾아보아도, 오시는 하느님은 낯설다.
낯선 이를 따라나서지 않은 헤로데는 백성의 지도자들,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모은 채 저 멀리 작은 고을, 성모님 품의 아기를 낯선 채로 그냥 둘 뿐이다.
묵상
인간은 참 어려운 동물인 것 같다.
그 속이 우주와 같아, 진실을 맹세하다가도 언제든지 뒤집어 버릴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인간의 속셈은 대개 자신의 이익과 결부된다.
해라도 입을 양이면 급히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수단을 찾게 되고, 그러다 지치면 생을 포기할 만큼 독해진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우주이되 다른 우주와 철저히 단절된 외로운 섬이기도 하다.
자신에 대한 집중이 타 존재에 대한 단절로 이어지는 외로운 섬이다.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 때문에 타인을 아프게 하는 모진 존재다.
주님의 공현을 두고, 나는 왜 기뻐할까?
밝히 드러난 그분은 낯선 이인데, 나는 왜 기뻐할까?
그분을 두고 나의 욕망과 원의를 채우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분은 과연 나에게 낯선 분일까, 아니면 내가 규정한 너무나도 익숙한 분일까?
마침기도
주님, 낯선 것에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그곳에 주님이 계심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