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9일 주는 만큼, 대하는 대로
엘리뇨, 라니냐는 이제 더 이상 기상학자들만의 전문용어가 아니다. 우리나라 반대편 나라 앞바다 수온 1-2도 변화가 우리나라 여름 겨울 날씨에 영향을 미침을 알게 됐다. 가장 멀리 있는 곳의 변화가 지금 여기 나와 관계가 있다면 나에게 가까운 것들은 얼마나 더 그럴까. 혼자 사는 사람은 있어도 세상사와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낯선 곳에 가면 조심한다. 물건 하나, 개천의 돌 하나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거기에 그렇게 있는 이유가 다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더욱 그렇다. 눈에 보이는 건 그 사람 전체, 특히 내면생활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니 아예 그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심판과 단죄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그에게 사랑해야 할 의무만 있다, 그가 원수라도 말이다. 엘리뇨처럼 그의 변화가 나에게 영향을 준다. 그가 좋으면 나도 좋고,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 내가 그에게 주는 그 되만큼 받는다. 그를 사랑하면 나도 사랑받는다. 그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사랑받음을 알게 된다.
기도는 말을 길게 많이 하는 게 아니다. 기도는 많이 사랑하는 거라고 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다. 기도가 대화라는 정의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내가 어떻게 하느님과 말을 주고받겠나. 하느님과 나는 절대적 수직 관계다. 그분은 내 생명의 주인이시다. 친구 같은 아버지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하느님이 아무리 낮아지시고 사람이 되셨어도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아무런 권한도 권리도 없다. 단지 의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의무가 나를 구원한다. 사랑해야 하는 의무다. 좋아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과 세상 모든 피조물을 사랑해야 한다. 내 주위 모든 것에게 내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잘 대하고, 아픈 상처를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내 마음을 어루만지듯이 사랑스럽게 대해야 한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는 성전에서 혼잣말로 기도했다(루카 18,11). 그는 하느님 앞에서 혼자 말한 거다. 그가 한 거룩한? 말은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니 자기 자랑만 하고 이웃을 판단 심판했다. 하느님과 대화했어도 그렇게 말했을까? 반면 그 세리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는 주님 얼굴을 올려다볼 수도 없습니다. 용서를 청할 자격도 없습니다. 혹시 주님이 이 불쌍한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지 않을까 기대하며 이렇게 기다리고 있습니다.’(루카 18,13) 내가 믿는 하느님은 지체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그가 하느님께 내민 되에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그의 품에 담아주신다(루카 6,38). 나의 되는 내가 이웃과 모든 피조물을 대하는 마음이다. 마음을 더 넓게 쓰고 더 깊게 이해하면 하느님께 받는 게 그만큼 많아진다. 나는 그 세리여야 한다.
예수님, 한 닢에 팔리는 참새도 하느님은 끝까지 돌보십니다(마태 10,29). 제가 사람과 사물을 귀하게 대하는 만큼 하느님이 저를 그렇게 대하시는 줄 깨닫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거 같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는 아빠도 엄마도 될 수 없지만, 어머니가 도와주시면 어머니 아버지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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