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 치료는 의사가 아니라 이것이 한다
1974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인턴, 레지던트를 하면서부터 환자 진료를 해왔으니, 올해가 나의 의사 생활 40년째다. 처음 의사가 됐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의사들의 전문성도 높아졌고,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첨단 장비들이 개발돼 진단과 치료에 활용되고 있다. 또 좋은 약들도 많이 나와서 예전에는 치료가 힘들었던 질환을 낫게 하거나,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좋은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좋은 약, 좋은 치료법도 많이 나와 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같은 만성환자들은 더 늘고 있고,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의학 과잉 시대, 건강은 누가 지키나
고혈압 약은 오래 먹는 경우가 많아 부작용의 위험이 항상 따른다. 자신이 먹는 약이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알면 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의학은 넘치고,
건강관리는 부족하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고, 약을 먹는다. 하지만 운동을 하거나, 금연, 절주, 균형잡힌 식사를 하는 등 생활습관을 바꾸라고 하면 잘 듣지 않는다. 심지어 무절제한 식사와 폭음 등으로 몸이 망가진 뒤에 의사한테 고쳐달라고 떼를 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단과 치료를 받고, 필요하면 약을 복용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평소 생활습관을 개선해 질병을 예방하고, 병에 걸린 뒤에는 적극 관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즉 질병 치료에서 의학과 개인의 노력은 적절하게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지금은 의학의 비중이 너무 높고, 개인 노력의 비중이 너무 낮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획기적인 치료약' '주사 한 방으로 낫는 치료법' 등에 혹한다. 고혈압에 좋다는 표현을 못쓰게 하니까 '높은 혈압'이라는 기묘한 문구를 내세운 식품광고들이 신문, 잡지 지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전 세계 고혈압 환자들이 모두 혈압약을 복용하려면 연간 약값이 100조원쯤 든다고 한다. 이 정도 돈을 들여 혈압약을 먹으면 전 세계인의 평균 혈압은 약 3mmHg 낮아진다.
이 정도 혈압을 낮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뇌졸중이 약 절반으로 감소한다. 고혈압 관리에 의학의 효과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혈압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뇌출혈 환자가 감소하는 긍정적인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약 복용에 따른
비용과 부작용을 고려한다면 고혈압이 생긴 이후에 약을 복용하기보다는 아예 고혈압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만약 약을 먹지 않고 운동이나 식습관 개선 등을 통해 혈압을 5mmHg만 낮출 수 있다면 엄청난 혜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은행과 WHO는 1991년 국제 질병부담 프로그램 이라는 연구를 발족했다. '뉴 잉글랜드저널 오브 메디신'이란 권위 있는 학술지에 이 연구 결과를 분석한 논문이 실렸다. 그 곳에 실린 도표는 아래와 같다.
고혈압과
과도한 나트륨 섭취가 수명에 영향을 주는 위험요인 상위 1위와 11위에 올라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고체 연료로 인한 주택 내 공기 오염 문제', ‘어린이 체중미달’ ‘공기 분진 오염 노출’ 등은 대부분 해결된 만큼 이를 제외하면, 한국인의 경우에는 고혈압이 1위, 과도한 나트륨 섭취는 8위로 뛰어 오른다. 고혈압을 잘 관리하고, 고혈압 원인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나트륨 섭취를 줄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 표는 잘 보여준다.
▣의료 권력, 의사에서 환자로 이동 중
고혈압과 같은
만성 질환 치료의 두 가지 요소는 ⊙첫째 생활습관 개선, ⊙둘째가 의학 요소이다. 이중 의학 요소는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의사의 진료를 받고, 필요한 경우 처방을 받아 약물을 복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생활습관 개선은 운동, 식이요법, 체중조절 등을 말한다.
그런데 과거에는 의학적인 요소였지만, 이제는 생활습관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정기적으로 혈압을 재는 일이다. 예전에는 혈압을 재려면 병원에 가서 의사가 수은혈압계와 청진기를 이용해 측정하는 방법이 사실상 유일했다.
하지만 기술 발달로 성능 좋은 자동혈압계가 개발되면서
이제는 집이나 사무실 등에서도 간편하게 혈압을 잴 수 있게 됐다. 이러다보니 혈압 재는 일이 의료의 몫에서 환자의 몫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처럼 질병의 치료와 관리에서 의사의 역할이 줄고, 환자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의료 권력의 이동'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예방의학(preventive medicine)의 비중이 지금보다 더 커질 것이며, 나아가 '선제의학(preemptive)' 개념이 도입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흡연자들을 위한 금연활동이 예방의학이라면,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이 흡연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교육하는 활동이 '선제의학'이다. 이 모두가 의사보다 개개인의 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앞에서 소개한 상위 25개 위험 요인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노력을 통해 개선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의사가 수술이나 특별한 치료법으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요인은 없다.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 만성질환들은 아직 완치법이 없다.
결국 예방이 최선이며, 일단 발병한 뒤에는 생활습관 교정이나 약물복용 등의 노력을 하면서 평생 관리해야 한다. 이 관리의 주체는 환자 자신이며, 의사는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게 발생한 병을 관리하려면 우선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의료진이나 병원이 권하는 실천사항도 잘 지켜야 한다.
고혈압과의 전쟁을 직접 치르는 사람은 환자 자신이며, 의사는 일종의 유엔군이다. 유엔군이 아무리 도와주어도 정작 당사국의 의지와 노력이 없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 정확하게 혈압 재려면...
사람들은 병원에서
의사가 팔에 감은 커프스 안에 청진기를 넣고 공기를 주입해서 수은계가 오르내리는 방식으로 측정하는 혈압은 정확하고, 집이나 사무실 등에서 자동혈압계로 측정하는 혈압은 부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초창기에 나온 자동혈압계는 정확도에 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 FDA승인을 받은 자동혈압계는 무척 정확하다.
또다른 변수도 있다. 바로 '백의(白衣) 고혈압'이다.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 등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 앞에서는 평소보다 10~15 정도 혈압이 높게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병원에서 환자 본인이 자동혈압계를 이용해 혈압을 재는 중간 방식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유럽에서는 올해 가이드 라인을 새로 제정했는데, 집에서 자동혈압계로 측정한 혈압을 그 사람의 정확한 혈압으로 본다고 규정했다. 현재 병원이나 보건소 등에서 사용하는 수은 혈압계는 환경오염 등의 이유로 현재 보유 중인 것만 사용하되, 추가 생산은 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병원에서도 모두 디지털 자동혈압계로 대체될 것이다.
그렇다면 집에서 혈압을 정확하게 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오는 등 10분쯤 가볍게 몸을 움직인 뒤에 책상이나 식탁에 편한 옷차림으로 앉아 5분쯤 있다가 자동혈압계로 재는 것이다.
물론 한번 측정한 수치가 본인의 혈압은 아니며, 여러 번 반복 측정한 기록을 보고 판단한다. 가정에서 자주 혈압을 재고, 그 기록을 병원에 갈 때 가져가서 의사와 상의하면 고혈압 관리를 훨씬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김성권 서울대병원 신장내과 교수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내과 전문의, 의학박사를 받았다. 1982년부터 서울대병원 신장내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병원 진료부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콩팥(신장) 치료에서 국내외에서 손꼽히는 대가이다.
대한신장학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아시아태평양만성콩팥병위원회 한국 대표, 국제신장학회(ISN)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의료정보화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 대한의료정보학회 회장도 지냈다.
저서로는 '새 콩팥과 살아가기'(2006), '평생 가정건강 가이드'(2003)와 같은 일반인들을 위한 책과 '내과학강의록'(2005), '임상내과학'(2004), '내과 키워드'(1999) 등의 전문 서적들이 있다. 아울러 '의료계Y2 문제 해결을 위한 지침서'(1999), 'e-healthcare'(2001), '전자의무기록(EMR)의 개발과 정착'(2001) 등 의료 IT 분야 저서들도 낸 바 있다.
2002년 신지식인상, 2003년 대한민국경영인상(의료IT부문), 2006년 송촌 지석영 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나트륨 섭취 줄이기 운동을 주관하는 '(사)싱겁게먹기실천연구회'의 이사로도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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