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에세이
결핍과 충족 사이
/구자명
단오가 지나자 녹음이 차르르 짙어지며 습도 섞인 공기의 밀도가 다르다. 내가 생활의 터전을 일부. 강릉으로 옮겨 높은 산과 너른 바다를 수시로 마주하게 된 지도 어느덧 한 해가 흘렀다. 연초부터 오랜 지병의 여파인지 호흡 기능이 부진해지고 근력도 부쩍 딸려 모종의 요양이 필요했다. 그러니 자주와 지내게 된 동해안의 거처가 더 이상 유용할 수가 없다. 새로 처한 생활환경을 나름 최대한 활용해 보려 시작한 건강법이 바닷가 맨발 걷기이다. 이른바 어싱(earthing)이라 하여, 자연 지면을 밟아 지구의 자유 전자自由電子를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활성 산소를 중화하고 염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자연치유법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코와 가슴이 확 뚫리는 바닷가에서 보슬보슬한 모래밭 걷기를 하고 사니 어찌 고맙지 않으랴.
지난 여러 달 동안 수많은 나날을 일상의 루틴처럼 바닷가를 걷고 또 걸었다.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두 눈을 찌를 듯이 쨍한 남청빛 바다,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사람의 마음을 헐렁하게 비워주는 느낌의 고즈넉한 바다, 바람이 센 날은 후아 후아 거친 호흡으로 야수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오는 듯한 바다... 그 바다 옆구리에 넉넉한 방풍림을 이루며 연이어 펼쳐진 푸른 소나무 숲은 내가 하루에 소화하는 십리 길 남짓 내내 정다운 동반자가 돼준다. 도시에선 군중 속에서도 느닷없이 덮쳐들곤 했던 외로움 따위를 모른다. 한마디로 오감 대만족, 충만 그 자체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 벤치에 앉아 한껏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데 문득 낯선 감정이 찾아들었다. 예상치 못한 복병이다. 이거 너무 좋은 거 아냐? 나 혼자 맨날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이 좋음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이 꽉 찬 느낌의 오감 만족은 머지않아 익숙해지고 범상해져 더 이상 환희롭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단계로 나아가 결국 심드렁해지는 게 아닐까? 이 모든 축복스런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연에, 하늘에 고마워할 줄도 모르게 되는 게 아닐까 ᆢ.
인간은 결핍과 충족의 줄다리기를 끊임없이 하며 자기 실존의 상태를 확인하는 존재이다. '나는 내 삶의 목표에 얼마나 도달했을까?' '나는 너무 결핍되어 더는 생을 이어가기 힘든 상태가 아닌가?' '나는 무엇을 더 채워야 내가 필요한 충족의 상태에 이르는 걸까?' '너와 나는 서로의 필요를 얼마나 채워주는 존재인가?' 등등.
솔바람이 쾌적하게 몸에 감겨드는 한적한 바닷가 벤치에 앉아 내 마음은 뜻밖에도 석연치 않은 자의식의 회오리바람을 맞게 되었다.... 그렇다면 결핍의 느낌이 완전히 없어진 이 상태를 마냥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이런 류의 충족에는 뭔가 대가가 뒤따르는 게 아닐까! 최고나 최선의 것을 최고나 최선으로 더는 여기지 않게끔 되는 '결핍의 결여'가 생겨나는 게 아닐까!
결핍의 결여 ... 결국 이것이 가장 충만한 시간을 누리는 중에 찾아든 내 불안의 핵심임이 자각되기 시작했다. 이 인식에 대한 정보들을 좀 얻어볼 셈으로 나는 AI 얩에 '결핍의 결여는 철학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올려보았다. 그 결과 대략 다음과 같은 파악에 이르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동서고금의 철학적 견해들은 대체로 결필과 충족을 인간 존재의 이분법적 조건으로 설정하지 않고 있었다.
현대 정신분석철학의 대명사인 라캉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핍의 존재라고 규정하면서 결핍이 완전히 없어진다면 인간 주체 자체가 성립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고 했다. 헤겔은 결핍과 총족을 대립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의 변증법적 운동으로서 결핍이 사라진 절대정신은 모든 대립을 자기 안에서 화해한 상태라고 보았다. 들뢰즈는 욕망을 결핍으로 설명하려는 전통을 비판하며 욕망은 없는 것을 메우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힘이기에 결핍의 결여는 충만한 생성이라고 말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17세기 유럽 철학의 대표 주자인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은 결핍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힘 자체로 살아가므로 결핍의 결여는 정적인 완성이 아니라 생성적 충만함으로 보아야 할 무엇이다.
동양 철학에서도 결핍과 충족은 우리가 통상 생각해 온 대립적 개념들이 아니다. 인도의 용수(나가르주나) 사상에서 출발한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결핍과 충족이라는 구분 자체를 집착의 산물로 본다. 깨달음은 결핍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결핍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결핍의 결여는 완전한 층족이라기보다 결핍이라는 분별이 소멸한 상태에 가깝다고 여긴다.
이에 더하여 과학과 철학을 통섭하며 첨단 철학의 총아로 등장한 현대 정보철학의 시각은 다음과 같은 경향을 지닌다. 우선 결핍을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차이, 불확실성, 생성 가능성으로 이해하며 제거해야 할 빈자리라기보다 새로운 정보와 질서가 생성되는 조건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결핍의 결여는 부정적 의미로는 차이와 정보 생성이 사라진 정지 상태를 말하는 한편, 긍정적 의미로는 더 이상 부족함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 끊임없이 열리는 충만한 생성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의 또 다른 활로가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인지하는 이 충족감은 결핍의 결여일 순 있되 결코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내가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 누리게 된 충족일지언정, 또 그것이 지속성이 없는 것일지도 모를지언정. 그리고 더불어 누군가와 나누지 않고 홀로 누리는 거여서 이기적일지언정 타인에게 미안해야 할 나쁜 일은 아니지 않는가. 우크라니아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레바논에서 포성이 이어지고 온갖 불평등과 폭력과 빈곤의 불우가 끝 모르게 이어지고 있는 이 지구촌. 그 야만적 환경 속에서 홀로 다행하고 충만한 시간을 누리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렇다고 당장 '가진 것을 모두 팔아'(마태복음 13:44~46) 하늘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 나서는. 이태준 신부나 슈바이처 박사 같은 인물이 될 깜냥이 못 됨을 너무도 잘 알기에 늘 충족과 결핍 사이 모종의 억눌린 감정에 시달려 온 나. 이제 그 '나'를 해방시켜 얄 때가 아닐까? 충족도 결핍도 온전하 게 담아내지 못하는 나에서 해방되자. 근간에 바닷가에서 누리게 된 이 '결핍의 결여'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생성의 시간으로 받아들이자. 그 빈 자리에서 무언가 새로운 미래를 향한 눈이 열리리라 믿고 기대해 보자.
리히퉁(Lichtung)이라고 했던가...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이란 저서에서 이 개념을 처음 등장시켰다. 간벌되어 밝게 열린 '숲속의 빈 터'를 뜻하는 리히퉁은 단순히 빈터가 아닌 존재의 열린 터를 의미하며 거기에서 가시적인 세계 너머 진리의 장場으로 향하는 출구가 열린다고 했다. 그래, 그럴 것이야. 이 축복처럼 내려진 충족의 시간이 그 숲속의 빈터로 결핍의 존재인 나를 이끌어 줄 거라고 믿자.
엷은 분홍빛 노을이 비끼기 시작한 바다를 뒤로하며 솔숲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데 사람을 겁내지 않고 주위에서 오락가락 하는 청설모들이 눈에 띄었다. 산책을 나온 어느 가족 가운데서 꼬마 아이가 멈춰서더니 호주머니에서 땅콩을 꺼내 그중 한 마리에게 주었다. 놀랍게도 청설모 녀석은 날름 받아 문 땅콩을 바로 먹지 않고 몇 미터 뛰어가더니 땅을 파고 그것을 파묻었다. 다람쥐과 동물의 생태에 대해 좀 들어보긴 했는데 직접 보니 신기했다. 필시 나중에 먹이가 부족할 때를 대비해서 숨겨 비축하는 것, 결핍을 대비하는 충족의 유보가 아니겠는가. 여름날 바닷가 소나무 숲에서 나는 청설모한테 새삼 한 수 배웠다. 존재자에게는 그 자신의 의지에 따라 충족의 결여도 결핍의 결여도 다 가능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