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0. 12. 13. 일요일. 맑다.
그간 내 컴퓨터는 지난 6월 말부터 말썽을 부렸고, 그 뒤로도 숱하게 고장나더니만 아예 멈춰버렸다.
내 재주로는 어쩌지 못하고...
컴퓨터 시스템 개발업에 종사하는 큰아들한테 부탁했고... 마우스를 교체하는 것만으로 작동되었다가... 아예 멈췄고... 마우스 문제인가 싶어서...
컴퓨터 없이 2주일 정도 지냈다. 덕분에 종이 위에 글 쓰는 일이 부쩍 늘었다.
충남 보령지방의 내 선산에서 조상들의 묘지, 비석, 조상들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생각을 깊이 하면서 많은 글감을 얻었다.
오늘에서야 잠실에서 사는 큰아들이 와서 내 컴퓨터를 교체했다.
오늘 오후부터 컴퓨터가 작동되기에 그간 컴에 저장되었던 내 글을 꺼냈다.
이런 글을 다시 꺼내서 읽을 수 있다니...
오래 전에 써 둔 글 하나를 실험삼아서 여기에도 올린다.
돌을 가슴에 얹고
나는 미관말직으로 서울 용산구 삼각지 직장에서 근무했다.
나는 그냥 직장생활에만 충실했고 주말이면 결혼식장이나 또는 시골로 내려가기에도 바빴다. 이 시기에 아이들한테는 아버지의 존재가 필요했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연년생 자식을 넷이나 둔 가장인데도 박봉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자식들에게 별다르게 해 준 것이 없었다.
또 내 아버지가 1982년 6월, 예순여섯 살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가 벌려놓은 민사소송에 휘말려서 여기에만 오랫동안 전전긍긍했다. 대전 지방법원을 거쳐서, 서울에서는 고등법원과 대법원으로 송사를 이어가야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가족들과 함께 지낸 시간은 거의 없었다.
시골에서 홀로 사는 어머니를 격주마다 뵈러 가야 했다. 년간 한두 차례 신청할 수 있는 정기휴가도 마찬가지였다. 여름철 휴가에는 식구들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내려가야 할 절박한 이유는 있었다.
수십 년 전. 대학교 2학년 때인 1969년 여름철.
나는 쌍둥이 형이다. 쌍둥이-동생이 서울에서 고향집으로 내려왔다가 밤중에 울안 변소칸 앞에서 뱀에 물렸고, 다음날인 8월 10일에 대천시내 병원에서 죽었다.
그 이후로는 여름철이면 눈물을 짜는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동생의 제사를 지낸다는 이유로 나는 오로지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결혼을 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처자식들을 데리고 외지로 휴가를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들에게 빚을 진 게 많았다. 구구한 이야기는 다 쓸 수는 없다.
내 자식들은 어렸을 적부터 나한테는 무엇을 해 달라고 특별히 요구한 적은 없었다. 성장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얘들은 제 어머니와 상의를 했을 터. 아내가 판단해서 아이들의 요구와 고민을 해결했을 게다. 아내는 아이들의 문제를 나한테 별로 알려주지 않았다.
먼 훗날에서야 아이들이 아내한테 조금은 기죽고 살았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큰딸은 미술에 소질이 있었는데도 어머니가 말렸다는 듯한 말을 내가 얼핏 들었다. 미술학원에 다니고 미술학과를 선택하려면 아무래도 돈이 더 들어간다는 이유로 포기하라는 말을 했을 게다. 막내아들은 힙합 재즈에 재능이 있다며 이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을 게다. 그러나 아내는 현실적으로, 긍정적인 말보다는 부정적인 말을 했을 게다. 아이들이 주눅들었다고 본다.
나는 민간인과는 접촉이 거의 없는 특이한 직장, 그 알량한 조직에서만 맴돌았다. 기획과 정책만을 수립하여 하부기관에 하달하는 중앙부처이기에 비리와 이권과는 전혀 무관하게, 박봉인 채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했다. 이러하니 내가 무슨 뒷돈을 챙겼을 리가 전혀 없었다.
이제는 퇴직한 지도 오래되었다. 직장 다닐 때의 급여, 퇴직한 뒤의 연금은 지금도 아내가 수령해서 관리한다. 나한테는 직장에 다니면서 직장조합에 가입했던 정기예금 이외에는 별도로 모아놓은 돈은 없다는 뜻이다. 이것조차도 모두 인출해서 아이들 셋이나 결혼시켰으니 현재 내 수중에는 빈-털털이다.
나는 요즘의 TV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너무나도 잘났고, 잘사는 상류사회 졸부들의 이야기가 딴-세상처럼 여겨졌다. 재벌, 준재벌, 사장, 부유층의 가족사를 소재로 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 뻔한 스토리에 식상했다. 나이가 새파란 아들과 애송이 딸한테도 회사의 중역 직위나 사장 자리에 앉히고, '회사와 거대한 빌딩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너 가져‘ 하는 식으로 증여하는 그런 재력을 지닌 드라마 속의 거부들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싶다.
이와는 달리 현실 속의 나는? 나는 아버지로서의 최소한 자질과 자격은 함량 미달이다. 아버지의 존재감이나 가치조차도 의문스럽다.
얼마 전 큰딸은 해외 오퍼상과 첫 무역거래를 튼다면서 최소한의 돈이 있어야만 현지 상품을 선약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을 흘려보내듯이 말했으나 나는 아뭇말도 보태지 않았다. 초기 사업자금을 전혀 보태주지 못해서 속으로도 은근히 자괴심에 빠졌던 요즘이었다.
내가 국가공무원이 되지 않고, 내 아버지처럼 노동자이면서 영세 사업주라도 되었더라면 돈은 조금은 더 많이 벌었을까? 그랬더라면 원망을 덜 들었을까? 하면서 무능한 나를 비웃어야 했다.
박봉으로 생활비가 적어서, 예능에 끼가 있던 자식들의 기대와 희망을 은연중에 꺾어버린 못난 아비였다는 사실에 지금도 비애를 느낀다. 언제 기회가 되면 자식들에게 변명하듯이 말해야겠다.
‘나는 너희들한테 받을 거 벌써 다 받았다. 너희가 네 어미 뱃속에 들어있는 순간부터 나는 행복했고, 너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었을 때에도 행복했다. 너희들이 자라고, 학교에 다니고, 결혼하는 과정들 모두가 나한테는 분에 넘치는 축복이었다. 이런 행운과 축복은 벌써 다 받았으니 앞으로는 나한테 더 이상 잘하려고는 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잘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이다. 아이들이 무탈하게 잘 커주어서, 어느 정도껏의 공부를 마치고, 제 짝을 찾아서 결혼한 것도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이제 막내아들 하나만 짝 채워주면 내 짐이 한결 가벼울 게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의 일에만 신경을 써야겠다. 내가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는 시골 땅을 헐값이라도 처분해야겠다. 서해안 벽촌의 산 말랭이 '화망마을'에 있는 땅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것이라도 처분했으면 싶다.
‘옛다. 이것이라도 받아라. 지금이라도 너희들이 하고 싶은 거 있다면 해 봐라.’
하면서 뒤늦게나마 예금통장을 내밀었으면 좋겠다. 돈 조금씩이라도 넘겨주었으면 싶다. 자식이 넷이니 이것마저도 푼돈이 될 게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았으면 싶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비인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더 남았는가를 곰곰이 더 따져보아야겠다.
나는 부모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떼를 쓰면서 요구한 것 같지는 않다. 부모가 너무나 엄격했기에 말조차 잘 꺼내지도 못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무엇을 안 해 주었다고 부모한테 원망한 적은 없다고 기억한다.
나는
나는 무학의 아버지와 시골아낙에 불과한 어머니한테서 많은 것을 받았다. 내가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어린 시절(초등학교 5학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60년 봄)에는 쌍둥이-동생과 함께 객지인 대전으로 전학 갔고,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취직시험에 전념할 수 있었고,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면서 결혼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노동자 출신의 부모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일은 어버이날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애벌레처럼 변모하여 모든 행동이 굼뜨고, 말이 없어진 어머니한테 요즘 몇 마디 물어보는 게 고작이다.
‘엄니, 내가 누구에요?“
‘내 아들.’
‘엄니, 엄니 이름은요?’
‘이천동.’
‘어디에서 살아요?’
‘... 웅천 ...’
이게 요즘 어머니와 내가 나누는 대화의 전부다.
이제는 집주소(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 화망마을)조차도 망각해버린 어머니(아흔여섯 살, 1920년 1월 생)라도 나는 감사해야겠다. 내가 아무것도 요구할 수도 없는 상태로 쇠진한 어머니일지라도,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고마워한다.
‘내게 해 준 거 무엇 있어요?’
화두(話頭)가 되어서 내 생전 내내 씁쓸한 회한과 반성으로 남겠구나. 내 가슴에 돌을 얹고 살아야겠구나.
정말로 미안하구나. 아버지인 내가 이토록 무능할 줄이야.
정말로 미안하구려. 남편인 내가 이렇게 무기력할 줄이야.
나는 아내한테도 잘해 준 게 없기에...
2014. 5. 7. 수요일.
첫댓글 '돌을 가슴에 얹고' 라는 제목을 보고 걱정스레 읽어 보았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베풀고 베풀어 줘도 모자라다는 생각으로 자책하게 되나 봅니다. 별로 뒷받침 못해 줘도 올곧게 자라 성인이 되었으면 효도라 생각하고 고맙게 여기며 살아 가야지요. 컴퓨터 고장 나서 카페도 못 열어 보셨겠군요. 늘상 카페에 글 올리던 분이 안 보여서 내심 걱정했습니다. 다행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지난 6월부터 말썽을 피우던 컴...
11월 말경에는 아예 멈췄지요.
자식들의 심성은 올곧게 자랐지요.
뚜렷한 능력은 없어도 심성은 곧아서.. 그럭저럭 사회생활을 잘하대요.
저도 욕심을 내지 않고는.. 그냥 저냥 살지요.
최윤환 선생님
제목 : 돌을 가슴에 얹고
부모로써
선생님 자녀들에게
뒷바라지 못하신 것 같다는 성찰
글
또한
선생님에 대한 다양한
정보 그리고 고운 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
세
요
고맙습니다.
글 읽어주셨고...
또 제 글에서 잘못되고 틀린 부분을 지적해 주셨군요.
덕분에 얼른 고쳤습니다.
고장 나더니만... 고맙습니다.
가슴이 찡해 집니다
저도 아버지께 원망을 했던 어린시절이 떠올라 저절로 송구한 마음이 드네요
시골 농사꾼인 아버지는 딸들에게
혼수를 많이 해주시지 않으셨지요
그래서일까요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네요
?
전남 순천지방에서 방앗간을 운영한 부친이 아니던가요?
방앗간집 딸은 부자였을 터.
조 선생님의 아버지는 여러 가지를 계산했을 겁니다.
돈 쓸 데가 많았을 터...
학교 보내주고...
결혼비용 대 준 것만으로 감사해야겠지요.
저는 아버지한테 빚 갚은 거 없지요.
아버지한테 첫손자 안겨 준 것 밖에는..
아버지는 중앙종친회 ...
족보발간위원장... 족보 16권.
책으로 인쇄되었는데도 손자를 보았다?
배부하기 직전에 손자를 보았다!
족보 가운데 (내 가족에 관한 책)을 모조리 폐기조치하고는 손자의 이름을 넣었다고 하시대요.
그거 전국으로 배포되는 대량의 책인데도... 그리고는 얼마 뒤에 돌아가셨지요.
그 손자가 또 자식(아들)을 낳아서 지금 여섯 살이지요.
이 글은 오래 전에 써 둔 일기...
국보문학에 내려고...
먼저 글 다듬으려고 여기에 올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