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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마 27:57-66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마 27:57-66 / [무덤에 묻히시다;막15:42-47,눅23:50-56,요19:38-42] 날이 저물자 아리마대 사람인 한 부자가 찾아왔다. 그는 예수를 따르던 요셉이었다. 58)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달라고 청하자 빌라도는 내주라고 명령하였다. 59)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 깨끗하고 고운 베로 싼후 60) 바위를 파서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시고 큰 돌을 굴려다가 무덤 입구를 막아 놓고 갔다. 61) 그때에 무덤 맞은편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서 지켜 보고 있었다. 62)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 이튿날, 곧 예비일 다음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63) `각하, 저 거짓말쟁이가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64) 그러니 각하께서 사흘 동안은 무덤을 단단히 지키도록 명령을 내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 놓고 백성에게는 다시 살아났다고 떠들어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처음보다 더 심한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65) 빌라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들의 성전 경비병을 쓰시오. 그들이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이오.' 66) 그래서 그들은 가서 그 돌에다가 봉인을 하고 경비병을 세워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하였다.
신명기에 의하면 십자가는 저주받아 죽은 죽음입니다(신 21:22-23). 로마에 반역하다가 처형당한 죽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57-60)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였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후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자신을 위해 마련해 놓은 새 무덤에 장사를 지냅니다.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합니다(막 15:43).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알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고 했습니다(눅 23:53). 그런데 기대했던 메시야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당한 험악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장사지낸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61-66)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 앉아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여자들입니다. 여자에게는 증인으로서의 자격도 없는 시대에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여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61).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 안식일입니다. 그것도 유월절과 무교절이 연결되는 큰 안식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찾아와서 군인을 보내어 무덤을 봉하고 지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일한다고 비방한 자들이 안식일에 일하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일 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진짜 주님은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죽이고 빌라도를 주라고 부르면서 “저 속이던 자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 했기 때문에 시신을 도둑질해서 예수님이 살아났다 말하면 속임이 더 클 것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사흘 동안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62-64). 그러자 빌라도가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습니다.
적용: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한 알의 밀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당신은 밀알의 열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밀알이 되시겠습니까?
어느 날 링컨이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성공과 존경을 받는 삶의 비결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야 다른 사람들보다 실패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지요. 나는 실패할 때마다 실패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배웠고 그것을 징검다리로 활용했습니다. 사탄은 내가 실패할 때마다 ‘이제 너는 끝장이다’라고 속삭였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실패할 때마다 이번 실패를 거울삼아 더 큰일에 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사탄의 속임수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지요” 하나님을 향한 링컨의 믿음을 볼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 설 교 >
예수님의 부활, 사실인가
마 27:57-28:10 / 최영기목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독선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천국은 현세에서부터 맛보는 곳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죽은 후에 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죽은 후에 어떻게 될지는 죽어본 사람만이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 창시자들, 즉 공자님이나 석가모니, 마호멧 같은 분들이 나름대로 위대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지만 이들도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분들의 가르침은 현세를 사는 데에 도움이 죌 수는 있지만 천국을 보장해 주시 못합니다. 죽었다가 영원히 죽지 않을 몸으로 살아난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에 부활을 예고하셨고 이것이 당신만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고하신 대로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생전에 하신 말씀과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다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의 기초는 부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고전 15:14, 17).
오늘 본문에는 이 중요한 부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Ⅰ. 본받고 싶은 아리마대 요셉
성경을 읽다 보면 꼭 본받고 싶은 욕심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였을 뿐만이 아니라 지체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회 의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공회원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남에게 알리지 않고 숨어서 예수님을 흠모하고 따르는 제자였습니다(요 19:38). 그랬던 사람이 공개적으로 자신이 제자인 것을 선포하고 예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재판 받을 때에 남들의 조소를 각오하고 예수님의 재판의 부당성을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이 숨지었을 때에는 빌라도에게 가서 허락을 받고 예수님을 자신을 위해 준비한 무덤에 묻어 장사지내었습니다.
1. 주님의 필요를 적시에 채워드렸다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은 제자들의 행동과 비교되어 더 아름답게 부각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같이 깨어 기도해달라는 간곡한 당부도 못 들여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에는 다 도망쳐 버렸고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침내는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평소에는 예수님을 들어내놓고 쫓지 못했던 숨은 제자였지만 꼭 필요할 때에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공포하고 예수님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청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 내어 주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동료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공회원 직도 박탈 당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믿던 사람이 가장 필요할 때에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번 연수오신 허 요나단 목사님은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목회하고 계십니다. 허 목사님이 목회 하시는 새생명 침례 교회와 더불어 3교회가 형제처럼 지내며 가정 교회도 같이 시작하고 가정 교회 세미나도 공동으로 개최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교회가 황은철 목사님이 섬기시는 상파울로 동양 선교 교회인데 황목사님 사모님 도은미 사모님은 가정 교회 사역자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에 자기가 아는 교회를 하나 소개하고 담임 목사님이 쓰신 책을 하나 소개해 주었는데 제목이 '평신도는 없다'입니다. 평신도 모두가 다 사역자이기 때문에 평신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 교회도 꽤 큰 교회인데 부목사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돌아오자마자 구입해서 제 아내가 먼저 읽고 있는데 읽은 내용 중의 하나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지역에서 시작한 교회인데 교회가 부흥하면서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교수 의사 등이 몰려들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교인 숫자가 늘어서 교회 건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20억을 예산했는데 30억쯤 소요가 되었습니다. 건축을 시작하면서 IMF가 시작되어서 무척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건축하느라고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지니까 의사 와 교수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남아서 건축을 끝내었습니다.
인간은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을 안겨주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토사구팽이라는 말도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 관계에서 의리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종종 기도를 드립니다. 특별히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고 아리마대 요셉처럼 하나님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죽으나 사나 주님에게 영광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저의 희생을 필요로 하다고 하실 때에 물러나지 말고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지 못하는 용기 없는 사람이었는지 모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필요하다고 하실 때에 아리마대 요셉처럼 희생을 감수하고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릴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을 위해 적절하게 재물을 사용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루살렘 근처에 새 무덤을 미리 장만할 정도면 꽤 부자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도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준비한 무덤을 예수님을 위하여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또한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희생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금전적인 희생도 감수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암벽 지대이기 때문에 무덤을 만들 때에 돌을 깨서 굴처럼 파서 만듭니다. 그리고 무덤 하나에 선반 같은 것을 여러 개 두어서 가족 여럿이 한 무덤에 묻힐 수가 있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무덤을 범죄로 인하여 처형 받은 사람을 묻었기 때문에 이 무덤은 더럽혀진 무덤이 되었고 자신도 가족들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무덤 하나를 날린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아리마대 요셉이 부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아리마대 요셉 같은 부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몇 주전에 말씀드렸지만 재물은 하나님처럼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범상한 사람은 부자가 되려말고 가진 것으로 만족하여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재물을 갖고 주님과 교회를 섬기도록 은사를 허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돈 버는 법이 눈에 보이고, 돈이 따르고, 또 돈을 벌어서 써야 할 주님의 사역이 보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이 몇몇 생겨서 주님이 필요하다고 하실 때에 아리마대 요셉처럼 멋지게 번 돈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해서 자신의 무덤에 묻은 것을 안 유대인 지도자들은 불안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이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가 감추어놓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어서 총독에 가서 군대를 배치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봉인을 했습니다. 봉인을 하면 봉인을 한 사람과 허락을 받은 사람 외에는 절대 열어 볼 수가 없습니다. 황제가 왕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 봉인을 하면 황제 자신과 편지를 받는 사람 외에는 절대 편지를 열어볼 수가 없습니다. 열어보면 사형에 처합니다. 이처럼 아무도 무덤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하였습니다.
Ⅱ.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러나 무덤이 예수님을 잡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태 28:1-10에는 부활의 사건이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을 목격한 사람 중의 하나로 등장하는데 그로부터 7 귀신을 예수님이 쫓아내어 주었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6:9). 또 다른 마리아는 수난의 사건을 기하여 등장하는 여성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쯤에 돌아가셨으니까 제대로 장례를 치를 여가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후 6시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니까 모든 것을 그전에 마쳐야 하는데 아리마대 요셉 요셉이 빌라도에가 가서 시신을 내려서 장례 지낼 허가를 받아내는 데에도 시간이 소요되었고 충분한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정식으로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고 방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갔을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여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했을 때에는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고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앞서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그 순간이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덤이 비어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왜 무덤이 비어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을 상기시킵니다. 부활할 것이라는 약속과 부활한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겠다는 약속입니다(마26:32). 이 말을 듣고 여인들이 기쁘게 가다가 실제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에 예수님도 똑같이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 전서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인 500명에게 동시에 나타나셨다고 했는데(고전15:6) 성경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갈릴리에서 있었던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데 복음서를 쓰신 분들은 너무나도 짧게 간단하게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에는 부활을 목격한 산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에 관하여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다릅니다. 부활 자체에 회의를 표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회의의 근거가 희박합니다. 어떤 분은 여자들이 예수님이 묻힌 무덤이 아니고 다른 빈 무덤을 찾아간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묻히는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27:61). 또 엉뚱한 무덤을 찾아가 놓고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떠들어댔다면 이들의 입을 막기 위하여서는 진짜 묻히신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보이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법석을 떠는 제자들의 입을 막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숨이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가하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인 숨지신 다음에 군인들이 창으로 심장을 찔러서 죽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 만일 숨이 완전히 넘어간 것이 아니더라도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혼자 힘으로 열고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고학자에 의하여 발굴된 1세기 무덤을 보면 그 막는 돌은 직경이 13 feet 2 inch이고 두께가 2 feet입니다. 이렇게 무거운 돌로 막는 것은 도굴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몇 명이 달려들어도 움직이기 힘든 무덤을 막은 돌을 죽지 않았다 할지라도 매에 맞고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린 예수님이 안에서 혼자 열고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음 주일에 상고하겠지만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설명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인들이 철통처럼 지키고 있고 무덤은 봉인이 되어있는데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또 당시의 제자들의 마음가짐을 볼 때에 시신을 훔쳐갈 만한 용기도 없었고 또 시신을 훔쳐 갔다고 할 때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이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Ⅲ.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습니다(롬5:12). 인간이 누구라 할 수 없이 다 죽는 이유는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무덤이 잡아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공자님이나 석가모니도 나름대로 위대한 삶을 살았겠지만 죽어서 살아나지 못했다는 것이 이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는 다 같다느니 예수님은 4대 성인 중의 하나라느니 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성인은 문자 그대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실 수가 있습니다.
2.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나무에 달려 죽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신 21:23). 죄 없는 분이 왜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죄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빚을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기를 원하는데 돈이 없어서 사채를 갖다 썼습니다. 곧 갚은 줄 알았는데 사업이 예상만큼 잘 되지가 않습니다. 이자가 눈송이 불듯이 불고 이자조차 못 갚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조직 폭력배로부터 돈 갚으라는 독촉이 옵니다. 새벽 1시, 2시, 3시,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오고 가게에 와서 의자를 부수고 유리창을 깨기도 합니다. 이럴 때에 어떤 착한 분이 내 대신 그 빚을 갚아주겠다고 하면 우리는 즉시 그 분의 도움을 받아 빚 문제를 처리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에게는 인과응보의 원칙이 있습니다. 죄 값은 반드시 치르어야합니다. 속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서 죄의 대가와 능력에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우리는 죄로 인한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요 5:24).
3. 우리도 부활한다
저는 천국 갈 날을 고대하기 때문에 나이 먹은 것은 상관 않습니다만 늙어가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은 슬픕니다. 늙으면서 주름살이 생기고 이곳 저곳이 생기고 성인 병으로 고생하기 시작하면서 젊었던 날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분에게는 죽음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52). 부활할 때에는 우리는 가장 힘이 좋았던 때보다 더 힘찬 모습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때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 몸의 모든 질병과 장애가 다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고전 15:42-44). 천국의 삶에 합당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연세드신 어른들은 이러한 소망을 가지시고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마시고 기쁨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의 아리마대 요셉
마 27:57-61 / 김정호목사
어떤 남자가 너무 괴롭다며 정신과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침대 밑에 누가 있는 것 같아 신경이 쓰여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침대 밑으로 내려가면 이번에는 침대 위에 누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얼른 침대 위로 올라갑니다. 밤새도록 올라갔다 내려갔다 잠을 잘 수가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며 좋겠습니까?” “음, 증상이 심각하네요. 적어도 1년은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에 꼭 오십시오.” “치료비는 얼마나 듭니까?” “한 번 오실 때마다 30만원씩입니다.” “생각보다 비싸네요. 한번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병원비가 부담이 된 그는 고민을 하다가 집 근처 교회에 찾아가 목사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의 고민을 돈 한 푼 안 받고 10분 만에 해결해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톱을 가지고 그 사람의 집에 가서 침대의 다리를 모두 잘라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리마대의 요셉은 참으로 경건하고 매력 있는 인물입니다. 평범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예수님을 위하여 한 몫 하는 믿음직하고 든든한 제자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성도가 많아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피하고 몸을 사리고 이유와 변명이 많은 힘이 되지 않는 허약한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유익하고 존경 받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톱으로 잘라 버려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베어 버려야 합니다.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를 빼앗겨서는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하여 영적 거장, 달인,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과 신앙과 삶을 잘 관리하여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어려운 일을 잘 감당한 아리마대의 요셉과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의로운 사람입니다
본문 57절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마가와 요한은 요셉을 산헤드린 공의회의 요직을 맡은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누가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 으로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산헤드린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15:43, 눅23:50~51). 마태는 요셉을 부자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지방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근처에 자기 무덤이 있었던 것은 재물이 넉넉한 부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태는 요셉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비록 요셉이 은밀하게 예수님을 따랐다고는 하나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 분명합니다. 부자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로 산 것은 균형과 조화를 이룬 경건한 사람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믿는 정도의 신앙이 아닌 제자로서의 신앙이었습니다. 참으로 의로운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크롬웰은 1599년 독실한 청교도 부모님들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청교도적인 신앙훈련을 받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항상 다음 같이 말하였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편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편에서 일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후에 그는 반국왕파인 청교도들로 구성된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크롬웰은 전쟁터에서도 틈만 나면 기도하였고 쉴 참에는 성경을 읽곤 하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전쟁터 한복판에서 그는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말에서 떨어지면서 그는 “이제 마지막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후에 그에겐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참 이상한 일이로구나”하며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총탄이 상의 호주머니에 넣어둔 성경에 박혀 있었습니다. 총알이 박힌 자리는 구약성경의 전도서 12장 1절 말씀의 부분이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크롬웰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를 철저한 신앙과 규율로 훈련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이 먼저 철저한 경건생활을 실천하면서 부하들에게 본을 보였기에 그의 군대는 규율이 일사불란하였습니다. 그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군인들은 규율을 지켰고 상인들은 약속을 지켰으며 노동자들은 부지런하였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이 별 볼 일 없던 나라 영국을 강대국으로 발전시키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이나 교인, 이웃과 불신자들에게 아리마대 요셉처럼 ‘의로운 사람’ ‘예수님의 제자’ 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비관하거나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탄은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줍니다. 우리는 반드시 지금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고 경건하게 살면 됩니다.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고 기뻐하시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의로운 요셉이 되기를 바라고 의로운 요셉으로 가득한 우리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58-59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지금껏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던 요셉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담대히 떨쳐버리고 예수님과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죄수의 시체 관리 책임자인 빌라도 총독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급히 총독 관저로 나아갔습니다. 당돌하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인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그 상황을 결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참신앙의 용기를 보였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에 따라 십자가 형장의 관리자인 백부장에게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 시체를 내주었습니다. 이처럼 까다로운 절차 없이 시체를 내어준 사실은 적어도 예수님은 반역자로 처형된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여배우하면 마릴린 먼로가 떠오릅니다. 그는 미모 때문에 수많은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끝내 그는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무대 공포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답답한 일을 당하고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의 인생은 파장하여 문 닫은 해수욕장과 같다.” 무엇도 부족함이 없었던 그의 인생은 결국 파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오베랑 목사님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성도를 찾아가서 보석 두 개를 보여 주면서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어느 보석이 더 빛나게 보이나요?” 그 성도는 더 빛나는 보석을 가리켰습니다. 같은 보석인데 한 보석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오베랑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이 보석은 8번 깎았지만 이 빛나는 보석은 80번 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실수록 더욱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련을 받은 사람일수록 더욱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구 역사상 가장 글을 잘 쓴 사람은 세익스피어입니다. 그는 너무나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생활이 되지 않았습니다. 절박함 속에서 먹을 것을 벌려고 글을 썼습니다. 잘 써야 돈을 버니까 궁여지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도전하는 사람이 일류 인생입니다. 자연산 고기가 왜 맛이 있는 것일까요? 왜 영양이 더 좋은 것일까요? 양식의 환경은 평안합니다. 그래서 고기도 순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자란 고기들은 세찬 파도 속에서 자랐습니다. 양식은 온도를 맞추어 주어서 쾌적한 환경에서 자라지만 자연산은 기온차가 엄청난 곳을 오가며 살기 때문입니다. 버린바 된 것 같은 환경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결코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무지개를 보려면 비가 와야 합니다. 서리가 알곡을 만드는 법입니다. 미국에서 사업을 잘 하고 있는 인투이트 회사가 있습니다. 컴퓨터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잘 나가는 회사입니다. 그들은 제품을 만들어 놓고 실패하였으면 전 직원들이 모여서 <실패 파티>를 열었습니다. 사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실패작을 내놓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실패다.” 실패하였다고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잘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 우는 사람은 3류 인생입니다. 용기로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인생이 1류 인생입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평소에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처럼 장담하고 맹세하던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섭고 긴장되는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고 시체를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정성껏 장례를 한 요셉의 용기는 대단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손해나 불이익도 계산하지 않는 아리마대의 요셉처럼 예수님을 위해 용기 있게 섬기는 성도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본문 60-61절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자기 새 무덤’은 아직 죽음의 영향력이 그 공간을 침범치 못한 곳으로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을 가지신 예수님의 시체를 안치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부활 곧 ‘새 생명’을 준비하는 예수님의 휴식처였습니다.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된 사람을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연속성을 대표하는 무덤에 장례하는 것은 유대법에 어긋납니다. 더욱이 산헤드린 결정에 의해 사형을 받은 시체를 산헤드린 공회원이 장사지냈다는 것은 형언 할 수 없이 진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실 바로 그때 그곳에 주님 곁에 있을 수 있는 신앙인이 참 신앙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내 새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쁜 것이나 쓰던 것은 드릴 수 있으나 새 것을 드리는 것은 놀라운 헌신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나의 것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주님위해 쓰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어떤 분이 옷가게를 새로 열기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목 좋은 자리에 인테리어도 세련되게 하고 눈에 확 들어오면서도 거슬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간판도 만들고 가게 앞에 지나가는 사람들 잠시 앉아 쉬어 가라고 나무 의자도 만들고 열심히 준비를 했습니다. “어때? 이만하면 잘 될 것 같지? 만일에 대비해서 3개월 정도 버틸 수 있는 여유자금도 이미 만들어 두었지. 준비는 완벽한 것 같아.” “그래. 완벽하다. 잘 될 것 같아. 두 가지만 더 준비하면.” “그래? 아직도 준비해야 할 것이 더 있단 말이야? 그게 뭔데?” “첫째, 물건을 실컷 구경만하고 그냥 가게를 나가는 사람을 보고도 무심(無心)! 아무렇지 않은 마음을 꼭 준비할 것! 절대 뒤통수에 대고 찌-직 전기를 보내면 안 돼. 그 사람 마음에 드는 물건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해.” “또 한 가지는?” “웃는 얼굴!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장사를 하지 말라는 중국 속담도 있지. 이 두 가지는 장사로 성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준비물이야. 다른 것들을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한다 해도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사람을 상대하는 장사로 성공하기는 힘들어.”
주님의 일을 하면서 어떠한 경우라도 비난하거나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 물질, 은사, 귀중한 것을 드리고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다투는 것은 아직 다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것은 죽은 송아지가 아니라 살아있는 좋은 소입니다. 드리고 기뻐하고 웃을 수 있어야 다 드린 것입니다. 자기의 새 무덤을 예수님을 위해 드린 요셉처럼 헌신적인 삶을 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리마대의 요셉은 의로운 사람, 용기 있는 사람,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살고 우리 교회에 요셉이 가득하기를 축원드립니다.
부활의 삶을 사는 길
마 27:57-66 / 이한규목사
< 하나님의 사명을 앞세우라 >
고려 26대 충선왕 때 A라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었다. 그즈음에 원나라가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려는 입성책동을 꾀하자 A는 원나라 황제에게 주청해 그 계획을 무산시켜서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28대 충혜왕 때 정승에 올랐고 31대 공민왕 때는 오늘날의 총리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점차 그의 가문은 가세가 올라서 그의 아들은 병조판서를 지냈고 그의 손자는 고려의 마지막 34대 왕인 공양왕 때 왕의 교육, 외교문서 작성, 과거 관장, 서적 편찬을 맡은 한림학사를 지냈다.
그 후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망하자 한림학사였던 A의 손자는 두 왕을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이 살던 집을 불사르고 자손들을 낙향시킨 후 자신은 관과 옷을 찢고 개성 두문동(杜門洞) 서원에 들어가 바깥세상으로 나오지 않고 조선의 모든 벼슬을 거절했다. 그래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단어가 생겼다.
자신이 충절을 내세워 두문불출하는 것까지 좋지만 그 한림학사는 후손들에게 지나친 유지를 내렸다. 조선 왕조에서는 절대 과거를 보지 말라는 유지였다. 충절 가문이란 명예를 중시한 후손들에게 그 유지는 무서운 족쇄였다. 결국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A 가문의 후손들은 학문이 높았어도 한 명도 과거를 치지 못했고 그저 선비로서 시골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몽교관 등을 하며 특출한 인물도 배출하지 못했다.
조선왕조 개국 5백 년쯤 지났을 때 A 가문 출신의 한 소년이 부친에게 말했다. “아버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나라가 위태한데 시골에서 학문만 쌓고 있으면 됩니까? 세상을 위해 쓰임 받지 못하는 학문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조선 왕조에서 과거를 보지 말라는 조상의 유지를 받드는 것보다 과거에 급제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되는 것이 더 소중한 대의일 것입니다. 과거를 보게 해 주십시오.”
옛날에는 가문에서 쫓겨날 불충이었지만 평소에 그 부친도 같은 생각을 가졌기에 결국 아들에게 과거를 보도록 허락했다. 마침내 그 소년은 17세 때인 고종 28년(1891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조선왕조 개국 499년 만에 A 가문에서 배출된 첫 과거 급제자였다. 그런데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의 꿈이 얼마 후 일제의 침략으로 꺾였다. 결국 그 소년 등과자도 오래 전 선조처럼 두 나라에 충성할 수 없다면서 두문불출에 들어갔다.
다만 그 등과자는 오래 전 선조와는 달리 아들들에게 나라를 잃었다고 은둔한 채 지내지 말고 잘 준비된 후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되라는 유지를 남겼다. 그중의 한 아들이 부친의 뜻을 받들어 일제 강점기 때 북한에서 최고 고등교육을 받고 해방 후 남하해서 인물의 꿈을 펼쳤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아들 목사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되라고 당부했다.
그 후 아들 목사는 수시로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특출한 능력도 없고 이재에도 밝지 않고 마음이 약해 남을 잘 부리지도 못하고 세상 변화에 대한 적응도 느린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됩니까?” 그때 하나님이 마음속에 이런 음성을 주시는 것 같았다. “네 사명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의 꿈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마음이 평안해졌다. 어떤 자리를 말없이 지키는 것만은 비교적 잘했기 때문이다. 그 후 열심히 자기 자리를 지켜 쓰임 받는 인생으로 준비될 수 있었다.
후대에게 시대의 변화를 무시한 완고한 유지나 의를 빙자한 미움을 남겨서 후대의 인물의 꿈에 대못을 박지 말고 부활의 믿음을 남겨서 복의 문을 열어 주라. 세상에 실망했으면 더 배우고 정진한 후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되라. 나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사명을 앞세우라. 선거 후에 내가 원하지 않는 리더가 세워졌어도 두문불출하지 말고 더 준비한 후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인물 성도가 되라.
< 부활의 삶을 사는 길 >
세상이 어둡다고 세상과 담을 쌓지 말고 잘 준비된 후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부활의 삶을 살라. 그처럼 내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예비하고 세상에서 부활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은밀하게 제자로 준비되라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금요일 저녁 6시쯤 안식일이 막 시작될 때 갑자기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57절). 그는 오늘날의 국회의원인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막 15:43). 그는 예수님의 숨겨진 인물 제자로서 소리 없이 예수님을 후원했고 선하고 의로운 공회원으로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산헤드린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다(눅 23:50-51).
거의 모든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그는 예수님을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당연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한 예정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때 자신을 지키려고 은밀하게 애썼던 그에게 고마워하면서도 세력 과시를 위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같은 공회원들도 내 제자다.”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커밍아웃을 할 때까지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었다.
아리마대 요셉 같은 은밀한 예수 제자의 꿈을 품고 음지에서 천국 확장에 일조하라. 소리 내고 헌신해도 되지만 소리 없이 헌신하면 더욱 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이뤄진다. 그처럼 소리 없이 헌신하는 인물이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서 힘과 영향력을 키우라. 아리마대 요셉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준비된 것처럼 준비된 인물 제자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준비되고 인생과 세상과 사역에 부활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사역도 지금까지 소리 없는 후원자로 인해 지속될 수 있었다. 요즘 경제난으로 발행 비용은 늘고 후원은 줄어드는 이중고의 상황이 <월새기> 사역에도 닥쳤다. 지금까지 그런 위기가 몇 번 있었다. 이번의 위기도 잘 극복될 것이다. 더 나아가 아리마대 요셉 같은 인물 후원자가 등장하면 <월새기 영어판> 사역도 시작될 것이다. 그런 극적인 반전의 역사를 통한 보람과 기쁨은 소리 없는 헌신자의 것이다.
2. 제자임을 세상에 드러내라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아리마대 요셉은 계속 음지에서 예수님을 후원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의 반대 세력이 겁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꼭 필요로 하는 결정적인 때에 자신을 과감히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였다. 그때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신기하게도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체를 내 주라고 명령했다.
빌라도의 허락 명령이 떨어지자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다(59-60절).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람을 신분 높은 부자 공회원이 자신의 새 무덤에 장사하는 모습은 당시 주변인들에게 신비함 경외감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처럼 은밀하게 잘 준비된 후 때가 되어 하나님이 부르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변화의 역사와 부활의 역사를 감동적으로 이끌라.
잘 준비되지도 않고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면 대개 영광스러운 삶보다 오히려 수치스러운 삶이 펼쳐진다. 자랑과 과시를 삼가라. 자랑하고 과시하면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도 멀어지지만 은밀한 선행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기억해 주시고 냉수 한 그릇의 대접까지 기억해 주신다. 또한 은밀한 기도도 하나님은 다 듣고 최선의 응답을 내려주신다.
3.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라
예수님이 장사된 다음 날인 안식일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와서 요청했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았을 때 사흘 후 다시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도록 명령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 가서 백성에게 그가 부활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더 크게 속을 것입니다(63-64절).”
그 요청을 듣고 빌라도가 말했다.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그러자 교권주의자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다(66절). 그런 엄중한 경비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그 부활이 제자들이 꾸며낸 소문이 아닌 확실한 사실임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확실히 부활하셨다. 그 부활을 확신하면 내 인생에도 부활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도 확신하면서 삶에 놀라운 여유가 생긴다. 그때 미움도 사라진다. 즉 의인에겐 영생의 부활이 있고 악인에겐 영벌의 부활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악인과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오히려 불쌍하게 보이는 사고의 대전환이 이뤄진다. 그렇게 미움과 상처가 극복되면 모든 면에서 회복의 역사가 이뤄진다. 그때 건강과 가정도 회복되고 관계와 사명도 회복되기에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 순종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왜 헛된 미신에 빠지는가?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더 죽을 일만 생기고 불행의 사자가 신나게 찾아온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부활의 영광을 믿고 기뻐하면 죽음과 불행의 사자가 범접하지 못한다. 결국 인생의 궁극적인 복과 행복의 최대 원천은 부활의 확신이다. 죽음의 문제를 애써 외면하지 말고 직면하라. 그와 동시에 부활의 확신을 가짐으로써 죽음을 영생으로 통하는 웜홀로 삼으라.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 부활을 확신하고 성도의 부활도 확신하면서 늘 성도답게 자신감 있고 멋지게 살아가라.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
마 27:57-61 / 박상훈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 사이에 되어진 일입니다. 흔히들 예수님의 십자가는 깊이 묵상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도 많이 묵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냥 지나쳐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는 이 가운데서 놀라운 영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라 함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섭리(providence)는 이적(miracle)과는 다릅니다. 이적이라 함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가 세우신 자연 법칙을 잠시 깨뜨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태양이 중천에 머무르면서 내려오지도 아니하고, 또는 쇠도끼가 물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와는 달리 섭리라 함은 하나님이 자연 법칙을 그대로 유지하시면서, 그 배후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적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은 성찬식이 있습니다. 이 뜻깊은 날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57~58절).
마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저물었을 때에.”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이 저물었을 때를 가리킵니다. 막15:25을 보면, 예수님은 그 날 제삼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유대인의 제삼시는 우리 식으로는 오전 9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막15:34~37을 보면, 예수님은 그 날 제구시에 숨지셨습니다. 유대인의 제구시는 우리의 오후 3시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같은 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요19:31을 보면, 이 날은 준비일로서 그 다음 날인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오늘날의 토요일입니다. 따라서 그 준비일은 금요일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금요일 오후 3시에 숨지셨습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 해질 무렵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 날 저녁 해질 무렵에 끝납니다. 따라서 그 날 오후 6시경이 되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특별히 그 안식일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기간에 있는 큰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참고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유대인들은 언제나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아무튼 그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시체들을 치워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해서, 금방 죽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개는 이삼일 정도 고통을 당하다가, 그 후에 숨을 거둡니다. 그래서 사정이 있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빨리 죽게 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다리를 꺾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야구 방망이와 같은 나무 망치로 정강이를 후려칩니다. 그러면 다리뼈가 으스러지면서,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몸이 아래로 쳐지더라도,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숨을 쉴 수 없으니까, 결국은 질식해서 곧 죽게 됩니다.
아무튼 요19:32 말씀과 같이,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대로 빌라도는 군인들을 보냈습니다. 군인들은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숨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19:33~34 말씀과 같이, 군인들은 이미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고,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심장을 겨냥하고 찔렀을 것입니다.
물론 로마의 군인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19:36~37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시34:20을 보면,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로마의 군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출12:46을 보면, 유월절 양의 뼈는 꺾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고전5:7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더라도, 그의 다리가 꺾어지면 안 되었습니다.
그 대신 슥12:10을 보면,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로마의 군인들로 하여금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금요일에는 반드시 무덤에 장사되셔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12:40에서 말씀하시기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날짜를 계산할 때, 어떤 날의 한 부분이라도 그것을 하루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금요일에는 반드시 무덤에 장사되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금요일, 토요일, 주일 해서, 사흘 동안을 땅 속에 계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었습니다. 눅23:51을 보면, 아리마대는 유대인의 동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갈릴리도 이방의 동네라고 불렸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는 유대에 위치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자기의 새 무덤을 예루살렘에 준비해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라는 동네는 분명 예루살렘에서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부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53:5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그 곳 사53:9을 보면,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무덤은 악인들과 함께 해야 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부자의 무덤에 장사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본시는 그의 시체가 악인들이 던져지는 웅덩이에 던져져서 불태워지든지, 아니면 새나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신 후에, 부자와 함께 있도록 예언되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이 응하여지도록, 하나님은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눅23:50~51을 보면, 그는 본시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공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결정을 내린 유대교의 최고 기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공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행한 결의와 행사에는 찬성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오늘 본문 57절 끝 부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19:38 말씀과 같이, 그는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그 사실을 숨겼습니다. 만일 그 사실이 밝혀지면, 그는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누리던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의 생업에도 지장이 있어, 부를 잃게 될 것입니다.
마27: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그리고는 당돌히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도 숨겼던 그가 어떻게 이와 같이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무엇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습니까?
아마도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여러 가지의 이적들이 일어난 것을 자기의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과,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된 것과,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진 것과, 무덤들이 열린 것 등을 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하시며,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죄수를 구원하시는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것들이 그의 마음을 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무튼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은 예수님의 친인척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전연 없었습니다.
또한 빌라도도 그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주어야 할 이유가 전연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죄수들이 던져지는 구덩이에 던져버리라고 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체를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에게 내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유대인들과, 로마의 군인들과,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과,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다 쓰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쓰임을 받은 도구들에 불과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모든 주권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이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범사에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말씀의 성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59~60절).
마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막15:46 말씀과 같이, 요셉은 그의 손으로 직접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렸습니다. 물론 이 때 요19:39 말씀이 밝히고 있듯이, 그의 곁에서 니고데모가 함께 그 일을 거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한 사람은 요셉이었을 것입니다.
먼저 요셉은 니고데모의 도움을 받아서, 땅위에 서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심스럽게 내려서 땅바닥에 반듯하게 눕혀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예수님의 머리에 씌운 가시 면류관을 벗겼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을 최대한 부드럽게 못 밖으로 잡아당겨서,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떼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몸에서 흐르는 피와 땀, 그리고 예수님의 몸에 묻은 먼지들을 깨끗하게 닦아내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요셉은 그가 사온 깨끗한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체를 쌌습니다. 그 때 요19:40 말씀과 같이, 니고데모가 준비해온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함께 세마포로 쌌습니다. 이것들은 시체가 썩을 때 풍기는 악취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27: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바위 속에 판 자기의 무덤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 무덤은 아직까지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의 나이가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그의 가족 중 아무도 그 무덤에 묻히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19:42 말씀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 무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서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장사는 준비일, 곧 금요일에 다 끝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끝낸 요셉은 큰 돌을 굴려서 무덤 문에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있던 골고다 언덕 아래에는 큰 바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 곳에 있는 큰 바위를 파고서, 작은 동굴 모양의 가족묘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덤 입구에 도랑을 만들고, 그 위로 큰 돌을 굴려서 무덤을 열고 닫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을 열어 놓은 채로 둬두면, 도둑이 세마포나 향품을 훔쳐 갈 수도 있었습니다. 또는 들짐승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대적들이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훼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무도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무덤의 입구를 큰 돌로 막았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끝낸 후, 요셉은 돌아갔습니다. 니고데모도 돌아갔습니다. 눅23:54 말씀처럼, 이 때는 아직 준비일로서 안식일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장사에 대하여 예언된 말씀들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먼저 사53:9에 예언된 말씀, 곧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는 성경이 응하여졌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또한 마12:40에서 예수님이 친히 예언하신 말씀, 곧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신 성경도 응하여졌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금요일부터 주일까지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성경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두 여자의 헌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61절).
마27: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여기에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둘 다 똑같은 마리아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한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여자를 그저 다른 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아리마대가 동네의 이름인 것처럼, 막달라도 역시 동네의 이름입니다. 참고로 배신자 가룟 유다의 경우도 가룟은 동네의 이름입니다. 성경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나오기 때문에, 서로를 구별하기 위하여 동네의 이름을 덧붙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막달라는 갈릴리 바다 서안에 위치한 자그마한 해변 마을입니다. 눅8:2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본시 일곱 귀신이 들렸었는데 예수님이 그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27:56을 보면, 그를 가리켜서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막15:40에 의하면, 이 때의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 곧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른 마리아는 알패오의 아내인 셈입니다. 그런데 요19:25을 보면, 이 마리아를 가리켜서 글로바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글로바의 별명이 알패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마27:55 말씀과 같이, 이들 두 마리아는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밝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장사가 끝난 후에도 한 동안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앉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한 후,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은 돌아갔습니다. 니고데모도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로잡히실 때, 이미 다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이들 두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앉아있었습니다.
그 후 마28:1과 9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이들 두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결과 이들 두 여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으로 목격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증언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와 같은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이들의 믿음에, 이들의 헌신에, 이들의 사랑에 보상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헌신과 사랑을 잊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아름다운 것으로 보상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을 잊지 아니하시고 상 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수고는 주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말씀의 성취를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힘있게 의지합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합시다. 예수님을 위하여 기쁨으로 헌신합시다. 그리해서 우리도 예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도록 합시다.
부활의 권세와 그 참여자
마 27:62 / 최종천목사
오늘 2010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자녀임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부활의 능력이 우리 가슴속에 이미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본성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지경을 헤매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고 주님의 의로움과 생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의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우리를 옮기셨습니다.
흑암의 세계에서 은총과 빛의 세계로 우리를 옮겨주신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들에게 의와 생명을 허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그리스도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어두움과 죄악의 시장을 방황하는 곤핍한 영혼들이 아닙니다. 의와 평강과 기쁨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정지되었던 호흡이 다시 시작되고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는 물리적 재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장례 치른 지 사흘 되었고 물과 뼈가 말라버린, 다시 말하자면 이전으로의 복귀가 아닌 새로운 재탄생,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형체로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처럼 큰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등장하여 돌을 굴려내는 새로운 생명에로의 진입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작동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부활의 첫 번째 열매가 되셨고 죽음을 깨고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신 것은 지상에서 인간세계의 죽음을 능가하는 새로운 세계가 도래했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성도들에게 더 이상 죽음은 공포가 아닙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이제는 누구든지 담대한 생명으로 환희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담대히 선언합니다.
‘사망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깨뜨리고 승리자 되신 예수그리스도 그 보혈로 인하여 동일한 생명을 품은 우리들은 2010년도 부활절을 맞이하여 오늘 말씀을 묵상함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 속에 임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하는 것은 부활에 대한 목격자의 느낌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 체험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서움과 동시에 다가오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처음 체험했을 때 다가오는 느낌은 무서움과 큰 기쁨의 동시적인 역사였습니다. 도대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왜 무서움으로 다가왔을까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서 친히 가르치셨어도 이들은 믿지 못하니 알지 못했고, 알지 못하니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흘러 지나쳐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딸을 살리셨고 그와 절친한 친구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귀담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그가 말씀하신대로 인간은 예측하지 못해도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지식이 짧고 하나님의 뜻을 미처 간파하지 못해서 예측하지 못해도 주님의 권능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역사를 보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측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아닌 것처럼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권능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해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권능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니 예상 못했던 이들에게 놀라운 일로 다가오시니 그들에게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권능의 사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파도를 잔잔케 하며 자연을 정복하신 예수님, 야이로의 딸을, 그리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이셨지만 적어도 그 일은 예수님이 지상에 있었을 때에 하셨던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상황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있다면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어. 라고 눈으로 본 사람은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났으니 예수님이 세상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신이 죽으셨기에 그 죽음 자체를 가지고 본인 스스로를 살리시는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 예수님은 그 권능자체로 스스로를 일으킬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했던 인간들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 앞에 우리 인간들은 왜소하고 초라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은총의 역사 앞에 인간들은 환호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나약하고 범죄한 모습 속에는 좌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떨 수밖에 없습니다. 기적 앞에 환호할 뿐 아니라 두려움으로 전율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첫 번째 목격한 사람들은 이렇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체험을 통해 자기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측하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했던 역사가 이들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이 무서워하는 마음과 더불어 큰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예상하던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기쁨이 그들의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예측도 못했던 기쁨을 그들은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이라도 부어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 곁에 있어보기라도 해 보고 싶었어요. 아니면 예수님의 무덤 곁에서 예수님의 체취라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속에 그들의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예수님 곁에 갔지만 그들은 그 예상을 뛰어넘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 쫓아다녔던 사람,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던 사람, 예수님만이 유일한 그의 삶의 목표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어졌으니 삶의 목표도, 소망도, 길도 없는 공허한 삶이 되었습니다. 쟁기를 든 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셔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세상에서 주님이 없어지셨으니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죠. 이런 낙심의 지경에서라도 그들은 예수의 시신이라도 한 번 섬겨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신이라도 거두고 싶은 심정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기쁨이 이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그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를 믿을 때 우리 마음에 계획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우리마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요. 아파서 병 고치러 왔는데 병보다 더 큰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환란과 곤고를 해결하러 왔는데 환란과 곤고를 능가하는 예수그리스도의 권능을 소유하게 됩니다. 기대하지 못했던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고 그들의 모든 욕구가 일거에 해결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푯대가 생긴 것이에요. 예기치 못했던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 그 어려움을 다 해결해 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갈 때의 심정은 조마조마한 심정이고 조그만 위안이라도 얻기 위해 나갔지만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목표를 새롭게 삶의 의미를 새롭게 주신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슬픔과 비감을,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의 곤고를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그들의 생활보다 더 큰 은혜요 힘입니다. 그들의 삶을 바꿀 삶 자체보다 더 큰 힘이요, 변화의 능력입니다.
부활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보다 더 큰 것입니다. 예수 믿고 생명을 얻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느낌이나 생각보다 더 큰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모든 것을 일시에 바꿔버릴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끌어요.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 쳐요. 그렇지만 그 힘이 더 세면 우리는 아무리 버티어도 끌려갑니다.
내 생활은 너무 곤고해. 너무 고통스러워. 나에겐 기쁨이 없어. 눈물밖에 없어라고 가슴아파하려고 작정을 해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셨으면 우리는 그런 슬픔과 고통가운데 빠져있을 수가 없고 우리도 모르게 마음에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세상에 다시 기쁨은 없어. 내 인생에 행복은 없어. 나는 절대 웃지 않을 거야. 라고 다짐했던 사람들조차도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면 이제 그 삶의 의미가 재구성되고 새로운 능력으로 주 앞에 기쁨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십자가를 눈물로 따라갔던 여인들, 주님의 십자가에 고통과 아픔을 구슬픈 눈망울로 바라봤던 여인들, 가슴에 눈물을 품고 주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 그러나 그 슬픔보다 더 큰 기쁨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으니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입니다. 이들은 두려움과 더불어 큰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처럼 두려움, 무서움과 더불어 큰 기쁨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활의 힘과 우리입니다.
도대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활의 힘은 무엇일까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은 부활을 전하라는 지시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주의 뜻을 즉각적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순종하는 힘을 통해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니 ‘갈릴리로 가시니 너희가 거기서 주님을 볼 수 있으리라 빨리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랬더니 이들은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이렇게 말씀했을 때 여인들은 뒤도 안돌아 봤어요. 무슨 말이죠?
가슴이 너무 뜨거워 벅차 견딜 수가 없어서 내 자신의 현재의 모습, 위치, 여건 생각하지 말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뜨거운 가슴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때는 어떤 때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때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때입니다. 살기위해서 그들의 살던 곳으로 가던 때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살기위해서 급급하던 이와 같은 시대입니다. 이와 같은 살풍경한 시대에 이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변의 여건도, 사람도, 일도,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이 이들의 마음에는 뜨거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달려가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주님의 부활의 은총과 감격이 체험되면 주님만을 위해서 주님의 말씀이라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주님의 뜻이라면 나는 순종을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에 의하여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능력을 소유하고 죽은 가운데 다시 살아난 주님의 권세가 소유되는 한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이해관계도 능가하는 주님 때문에 감격하고 기뻐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의 마음에 색깔까지도 바꿉니다. 무덤에 예수그리스도의 시신이라도 거두려고 왔던 여인들, 이들은 걱정 근심 어두운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사실을 안 이들의 마음상태를 표현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빨리 떠나 달음질할새’
설렘과 기대와 부품과 가슴 가득한 소망의 마음, 바로 이와 같은 밝은 색깔로 이들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람은 슬픔의 색깔에서 기쁨의 색깔로, 소망의 색깔로 바뀝니다. 낙심한 사람, 소망을 잃은 사람, 가슴 답답한 사람, 새로운 기대를 할 힘조차 없는 사람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구원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면 마음의 색깔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가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듯이 인생에는 낙망과 좌절과 지루함과 번뇌와 고통의 늪 속에서 새로운 소망을 향하여 무덤의 문을 열고 일어난 것처럼 새로운 기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예수 믿고 달라지는 것 있죠.
마음의 색깔이 달라져요. 부정적인 생각이 보다 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고요, 불가능속에서 가능의 빛이 보여요. 멀리서 보면 길이 없어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확연한 길이 눈에 보입니다. 막힌 담 가운데 헤쳐 나갈 틈과 길이 보여요. 높은 산도 헤쳐 나갈 용기가 생깁니다.
근본적으로 예수 믿으면 마음의 확신과 자신감과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우리 한 번 따라서 해 봅시다.
“마지막에는 주님이 해결하시겠지. 결국 죽도록 남겨두시겠나? 결국은 해결해 주실 거야.”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기본적인 영성입니다.
주님이 그냥 놔두시겠나? 결국 그냥 두시겠나? 결국은 해결해 주실 거야.
삶에는 어려움의 언덕이 있죠. 슬픔의 골짜기 있어요.
깊은 늪 속에 허우적거릴 때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냥 놔두시지 않고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권세와 생명의 권세를 소유한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야곱의 족속들이 세겜족속들과 잘못된 전투를 일으켰어요.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족속의 땅을 나들이하다가 그들에게 능욕을 당했고 야곱의 아들들이 화가 나서 그들에게 한 가지 거짓 전술을 세우죠. 너희가 할례를 받으면 우리 자매 디나와 결혼하게 하겠다. 그래서 그들이 할례를 받았을 때 가서 그들을 죽였어요. 수가 많은 세겜족속들이 화가 나서 야곱의 일파를 죽이려고 쫓아오죠.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께 회개하며 식솔들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의 일파들을 쫓습니다. 그들은 다 죽게 될 지경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일파를 추적하던 세겜족속의 마음에 추적하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바꿔놓았어요. 그들이 다시 길을 돌아가서 자기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늘 이렇게 기도해요.
“하나님, 우리 성도들을 괴롭히던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 성도들을 돕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슬픔과 아픔 끼친 자들이 기쁨과 즐거움을 끼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 우리 성도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기쁨거리가 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바꿔놓은 겁니다. 우리의 마음도 바꾸고 주변의 마음도 바꾸는 겁니다. 광야의 백성들을 보면 ‘가다보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지.’하는 마음이 있으니 40년을 가고 또 간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들은 ‘싸우다보면 정복할거야.’라고 믿었으니까 그 수년의 정복의 전쟁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오늘 다시 한 번 합시다.
“끝까지 감당합니다.”
이렇게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의 힘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아름다운 능력과 소망을 근거로 삼는 백성에게는 이와 같은 인내와 기대와 소망의 힘이 주어지는 겁니다.
우리의 슬픔의 색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 소망의 색깔로 바뀌어져 가는 것이죠.
오늘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에서 오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부활을 목격하고 그 권능과 권세에 동참했을까요?
오늘 부활을 목격한 이 여인들은 끊임없는 충성과 변함없는 헌신의 사람들이었어요.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거두고 싶어 했고 예수님 아니면 아무런 할 일도 없고 소망도 푯대도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왜 이런 내용이 중요합니까?
이 여인들의 모습,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챙긴다고 해도 아무 소망이 없는 상태, 좋아질 것이 없는 상태였어요. 예수님이 기적 행하고 능력을 행하고 병고치고 기적의 떡을 먹이고 자연을 정복하고 물위를 걷고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때는 예수님을 쫓는 사람이 많았어요. 예수님의 나라가 올 때 그들은 무엇인가 영광에 동참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이제는 소망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 예수님을 좋아해서 나의 구주로 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예수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헌신하고 충성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어떤 동기 속에서 이루어집니까?
누구랄 것 없이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우리의 필요와 소용에 의해서 주님 앞에 나올 수가 있습니다. 애절하고 간절한 소원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은혜 받고나니 믿음의 성숙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니 우리는 점차적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가 살아지는 겁니다.
이런 글 있어서 메모해두고 종종 봅니다.
내가 돈을 셀 때 하나님은 내가 졌던 십자가를 세신다.
내가 내 소득을 헤아릴 때 하나님은 내가 희생하신 것을 헤아리신다.
내가 세상에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셀 때 주님은 내가 주님을 위하여 받은 상처를 세어보신다.
내가 소위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열매를 헤아릴 때 하나님은 내가 주님께 바친 순종이 몇 번인가 헤아리신다.
신앙과 불신앙은 간단하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불신앙이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길이 신앙이다.
괴로워도 순종하는 길 그것이 신앙의 길이다.
끊임없는 충성, 변함없는 충성, 기대할 수 없음에도 하는 충성, 정말 예수님이 좋고 감사해서 이루어지는 성의와 충성이지요.
더욱이 부활을 목격한 부활의 참여자들은 오늘 보니까 재미있는 장면이 나와요. 달려가는 이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신 거예요. 이들은 주님이 안 나타나셔도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가서 전했을 겁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갈릴리로 가라 내가 거기 나타날 것이다. 제자들에게 말하라.”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뭣이냐면 주의 뜻을 이루기위해서 달려가는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마음에 더 큰 확신을 주셨습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의 일하면 주님께서 우리 옆에 오셔서 더 큰 기쁨 주실 줄로 믿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살아계시다, 살아계시다, 무덤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도 주님은 살아계시다.”라고 외치고 그의 어려운 사역을 계속 진행했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봄이 와 있어요. 이제 봄꽃이 만발할 것입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내 마음이 아름다워서예요. 만약에 내 마음이 슬프고 우울하다면 꽃을 보면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그 아름다움이 슬픔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으로 우리마음을 채색해야 돼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이 좀 살만한 세상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비관적인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온 세상이 살만한 세상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합니다.
겨우내 숨죽였던 나뭇가지들을 보면 그 가운데 죽은 가지도 있고 산가지도 있어요. 겉으로 보면 구별이 안 돼요. 그러나 봄이 되면 알 수 있어요. 죽은 가지에서는 나무 싹이 안나요. 잎사귀 안나요. 산가지에서는 잎사귀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져요. 죽은 가지는 만지면 바삭 하고 충격을 주면 부서져요. 산가지는 그 가운데서 부서지지 않고 계속해서 싹이 나고 잎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되는 거죠. 예수님의 부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면 비슷해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부활이 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전혀 달라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의 실제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와 영원히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2010년 부활절, 한 잎 피었다 지는 꽃 같지 않고 영원히 피어있어 우리 가슴속에 생명의 유구함을 이루는 아름다운 꽃 예수그리스도 그 부활의 아름다움, 단어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절기에 우리는 주의 살아계신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는 주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 이 민족 온 세계만방의 백성 되기를 소원합니다.
<시편 24편 7-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실지어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문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문을 들어 열어야 합니다. 잠가두었던 우리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영광의 왕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은총이 우리 가슴에 우리의 삶에 우리의 생활에 임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고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부활의 은총과 부활의 능력, 부활의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부활, 진리의 승리
마 27:62-28:10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다음 이틀간에 있었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둘째 날에 일어난 사건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사건이며 천지창조 이래로 가장 큰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요새 말로 하면 하나의 엄청난 정치 스캔들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정치음모였을 것입니다. 그 음모의 내용은 예수라는 한 사람의 대중적 영웅을 죽여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죄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많은 진리를 가르쳤고 숱한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이 기껏 찾아 내세운 죄목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마26:61),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요5:2-9),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다는 것(요5:18)이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진짜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시기였음을 마27:18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즉 빌라도가) 그들의 시기로(즉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 그런데 그런 분을 제거하려는 불의한 음모에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참여했습니다. 평소에는 사이가 좋지 않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도 예수님을 없애는 데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음모에는 정치권력도 연루되었습니다. 서로 알력과 불편한 관계 속에 있던 헤롯가의 왕과 로마제국의 대리자인 총독도 그 일을 위해서는 결국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그 목적과 동기에 있어서도 나빴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도 악랄했습니다. 마26:4에 따르면 그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했다고 합니다. 또 마26:59에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허위사실의 조작도 서슴치 않은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어야 할 범죄자이기는커녕 죽었던 사람도 살리시는 능력의 주이시라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살인까지 시도했습니다. 요12:10-11은 이렇게 전합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 하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그들은 그들이 꾀하는 일의 성사를 위해서는 사람을 매수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를 매수하기도 했고, 사람들을 풀어 엄청난 돈으로 대중을 매수하여 거짓선전을 하게 하고 극렬시위를 벌이도록 사주했습니다. 군대도 동원했으며 고문과 폭력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진짜 위험한 흉악범은 오히려 살려주는 해프닝까지 곁들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신앙과 국민적 자존심과 지도자로서의 품위마저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쳤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한지 불가한지 물어 만일 가하다고 답하시면 민족반역자로 몰아 죽이려고 했던 대제사장들 자신이 빌라도 앞에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며 예수님을 죽이라고 집요하게 외쳐댔습니다(요19:15).
그들은 결국 그들의 뜻대로 예수님을 처형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만으로 마음이 놓이질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말이 계속 그들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누인 무덤을 커다란 바윗돌로 굳게 막고 철저히 지켰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조작되고 위장된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선한 인간이 흉악한 범죄자로 몰려 그가 지녔던 의와 진리와 함께 바위굴 속에 밀폐되고 역사로부터 영원히 파묻혀 잊혀지고 말게 된 하나의 거대한 조직적 범죄였습니다. 이것은 의가 패배하고 불의가 승리한 사건이었습니다. 진리가 패배하고 거짓이 승리한 사건이었습니다. 선한 약자는 완전히 짓밟히고 악한 강자는 더욱 확고히 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악과 불의와 거짓의 승리를 영구화하려던 자들의 모든 노력은 이틀만에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승패의 대역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본문 마28:1-4를 다시 봅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무덤 속에 죽어있던 사람 예수는 살아나고, 그의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오히려 죽은 사람과 같이 된 것입니다. 혼비백산한 파수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대제사장들에게 자초지종을 알리자 그들은 모여서 의논 끝에 많은 돈으로 군병들을 매수하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을 뿐이라고 거짓으로 증언하게 하고 허위사실을 퍼뜨리게 함으로써 진실을 은폐하려는 마지막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간을 계시며 몇 차례나 많은 증거로 그의 부활을 보여주셨고, 그 부활의 증인들은 그 후 전세계를 향해 그의 부활을 증거했으며,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그의 부활하심뿐 아니라 그의 부활을 은폐하려 했던 자들의 계략까지도 함께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를 억누르고 가두고 사멸시키려했던 음모가 허사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거짓이 승리할 수 없으며, 불의가 승리할 수 없고, 이 악한 세상이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오늘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부활의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나 무력하고 약한 듯이 보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최후승리에 대한 보증과 확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거짓과 불의와 악한 세상이 승리하고, 우리는 무참하고 철저하게 짓밟히며 패배하고, 진리는 영원히 땅 속에 파묻혀 버리는 듯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불안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감추시거나 계시를 유보하시려고 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감출 수도 막을 수도 이길 수도 없앨 수도 없음을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한 것입니다. 진리는 바로 진리라는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들이 아무리 철저히 막으려 하고 완벽하게 막았다고 생각해도 어딘가에서 무엇을 통해서든 반드시 머리를 들고 터져나오기 마련입니다. 대제사장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죽어야 할 자라고 외치며 진리를 압살하는 데에 성공한 것 같았으나 예수님께서 숨지시자마자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고 막15:39는 전하고 있습니다. 또 마27:54에는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자들도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 거대한 세상의 음모에 힘없이 죽는 듯 했으나 다시 사셔서 최후의 승리, 참된 승리, 영원한 승리, 우리의 승리가 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불의가 버젓이 판치고 의가 힘없이 짓밟히는 일이 너무나 많은 세상입니다. 악한 강자는 더욱 더 부귀영화를 누리고 선한 약자는 한없이 고통받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것 같고 악이 지배하는 세상 같습니다. 거짓이 진리로 인식되고, 진리는 마치 거대한 바윗돌에 의해 꼼짝달싹할 수 없게 철저히 은폐되며 매몰되곤 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원통하며 질식할 것 같이 고통스러운 세상입니다. 시기와 흉계와 중상모략과 거짓증언과 허위사실유포와 매수와 권력과의 결탁에 의하여 온갖 모욕과 위협과 유린과 희생을 당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사는 세상이며 지금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일상 당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맙시다. 용기를 잃지 맙시다. 자포자기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주님께서 죽은 것 같고 패배한 것 같았으나 다시 살아나셔서 승리하셨듯이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며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주는 기쁨은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지킬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진리의 세계는 일시적인 거짓과 맞서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써 참 진리이심과, 진리의 승리를 증명해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오늘의 삶을 변함없이 진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이 세상의 악과 불의에 대해 흔들리지 않고 싸워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신앙을 길게 증거한 고전15장의 끝을 이렇게 매듭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이번 부활절을 통해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려는 의지가 새로워지며, 의와 진리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되살아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희망과 평강과 희락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승리"라고 하는 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온 세상을 향하여 바르고 힘있게 증거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마 27:62-28:15 / 이정선목사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한 가지는 그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 보이고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이라도,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지 못한다면 아직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이고, 그것은 예수께서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5:19).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처럼 다시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어 죽거나 늙어 죽으면 그렇게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고 그렇게 죽는 것으로 끝난다면 예수를 믿고 소망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우리 구원의 결과가 바로 우리가 부활해서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구원받은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여부, 즉 구원받은 사람의 여부를 구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비단 오늘 현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실 때마다 늘 다시 살아나실 것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비로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임을 당한 후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고 했어요(마 16:21). 그런데 이상하게도 베드로의 반응은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반응만 있을 뿐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반응은 없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 반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했던 베드로의 말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지요.
그 후에도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17:22-23)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심히 근심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그렇게 심히 근심하지 않았겠지요. 예수님은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시는데, 이상하게도 듣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 귀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라서 다른 말은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들의 경험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부활에 관한 가르침은 수용이 되지 않고 다 빠져나가버리는 것인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관과 경험이라는 선입관에 의해 어떤 것만을 취사선택해서 듣고 수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지요.
제가 지난 주간에 우리 캠프갈 장소를 찾아갔다가 한참 헤맸습니다. 나중에 물어서 겨우 찾아갔더니 바로 타운 입구에 아주 찾기 쉬운 곳이었습니다. 관리인이 하는 말이 “내가 전화로 언덕 내려와서 300미터만 오면 된다고 했잖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저는 그곳에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언덕이 어디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 역시 자신들의 사전지식과 경험세계에 없는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냥 흘려버렸고,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그만 놓쳐버린 것이지요.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던 사람들은 우습게도 그를 잡아 죽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마 27:63-64).
그러나 정작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있었겠어요?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렸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귀담아 들었고, 그래서 제삼일에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이 부활하실 시간에 맞추어 무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열었겠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었을 제자들마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못했고 그래서 믿지 못했다면,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많다는 것, 심지어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문자 그대로 믿지 못하고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이 잘하는 일은 아니지요. 믿고 믿지 못하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예수님이 부활하신 시간 가까이 그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입니다. 물론 이 마리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서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을 귀담아 듣지 못했고 그래서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마침 예수님의 부활 시간에 거의 맞춰 무덤을 찾아온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무덤에 온 것은 살아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사는 매우 급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시체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한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금요일 오후였는데, 곧바로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전에 급하게 서둘러 장사를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동안에는 무덤에 갈 수가 없었고, 안식일이 끝나는 것은 토요일 저녁 해가 질 때입니다. 그러나 밤에는 캄캄해서 무덤에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니까 이 여인들은 안식일이 끝나고 밤이 지난 후, 즉 일요일 새벽에 동이 틈과 동시에,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각에 향품을 들고 무덤으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의 행위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이제는 그 죽음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행위였지요.
그래도 이 여인들은 돌아가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정성이 지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살아나실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 그 믿음과 사랑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손님 대접하기를 강조하면서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를 영접한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히 13:2). 만일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린 사람이 있었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다리지 못했다면, 동이 트기 무섭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갈 만큼 주님을 사랑했던 이 여인들에게 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어요?
이 여인들이 무덤에 와서 만난 것은 예수님의 시체가 아니라 천사였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접한 이들은 당장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귀담아 듣지 못하고 믿지 못했지만, 이처럼 확실한 증거 앞에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살아나겠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당시에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기가 막힌 일을 겪고 상심해 있다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제자들 역시 전에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확인되면서 부활을 확실히 믿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증거를 확인한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일하게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말씀에 신경을 썼던 대제사장들, 장로들도 주님이 정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보고받았습니다. 그것도 무덤을 지키던 현장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 앞 돌을 굴려내는 것을 직접 목격한 군인들로부터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어요? 그렇다고 그 장로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나요? 물론 이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믿지는 않았습니다. 즉 자신들의 개인적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실을 왜곡하고 덮어버리려고 술수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군인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들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운이 좋은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밤새 무덤을 지키다 부활의 현장을 현재진행형으로 목격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까? 크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고 죽어서 무덤 속에 장사된 사람이 살아났다는 사실만은 이들이 확실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일 뿐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가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직접 그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도 믿지 못했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군인들을 매수해서 거짓 소문을 내게 했던 대제사장들은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로 믿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과학적이지 않고 증거가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스스로 거절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과 제자들처럼 처음에는 비록 합리적이지 않게 생각되어 믿지 못하다가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실 때 감격과 기쁨으로 그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더 배우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될 때, 우리 역시 마음 문이 열리고 이 놀라운 주님의 부활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런 상관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일인가요?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부활을 담보하는 실존적 사건인가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완성하셨고 또한 여러분 자신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부활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충만히 임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주간 - 토요일
마 27:62-66 / 연제원목사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배신당하시고 고통받으시고 능욕받으실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때만해도 종려가지나무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날저녁 베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가셔서 하루를 묵으시고 고난주간 첫째날 월요일 이른 아침 일찍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들어가시면서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면서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들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열매맺지 못하는 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동전을 바꾸고 비둘기 파는 장사치들에게 분노하시면서 채찍으로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주간 둘째날
예수님은 유대지도자들과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실랑이를 벌이신 이후
- 그리스도인들은 세금을 어떻게 바쳐야 하는지?(19-26절)
-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벌이셨고(27-40절)
- 종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21장)
그래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함께 도전을 받았습니다.
고난주간 셋째날은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 사역 중에서 그 행적을 찾기가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수요일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성경에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셋째날을 "침묵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학자들이 추측컨대 아마도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계시면서 제자들과 조용히 하루를 조용히 보내셨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침묵의 은혜를 누리자고 했습니다.
고난주간 넷째날은
고난 주간에서도 참 의미 있는 아주 중요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셨고,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게 될것을 말씀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예라고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주님의 사랑인것입니다.
저녁시간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하나님께 슬피우시며 씨름하는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순종하는 주님의 인성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주간 넷째날 끌려가셔서 다음날 고난주간 다섯째날 주님은 직전 대제사장 안나스 집에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그리고 분봉와 헤롯에게서 또 총독 빌라도 에게로 여기 저기로 끌려다니시고 심문받으시고 고문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빌라도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결정을 받고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신 것이 바로 오늘 아침까지 연속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시간으로 오전 9시경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정오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3시경에 운명을 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많고 허물많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시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무덤에 장사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자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가르쳐 주는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27:63절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나아와서 요청하기를 저 유혹하던 저 사람이 살았을 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는데 혹시 다시 살아나면 이후에 유혹이 더 커지니까? 무덤을 지켜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빌라도는 너희에게 군사가 있으니 너희가 알아서 지켜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서 파수꾼도 세우고 인봉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오늘 본문은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 가고서 부활했다고 할까 봐 미리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한다고 한들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 이단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1) 기절설 - 예수가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2) 도적설 -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 갔다.
3) 가현설 - 죽은 것은 육신이 아니고 영혼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신뢰할 수 없는 헛된 주장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히 돌아가셨습니다.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무덤에 갇히신 주님은 부활을 준비하셨고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잠시 무덤에 머물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주님은 주일 아침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사셨습니다.
절망가운데 있었던 우리에게 새힘을 주시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신앙을 믿는 자들입니다.
부활신앙 때문에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것입니다.
고난주간 고통가운데 계셨지만 다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루셨던 것처럼 여러분과 저 또한 그 약속의 말씀 따라 늘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