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와 누나, 나에게 하나씩 주라고 하더니 <이제부터 한마디 물어봐서 말 안하면 한사람이 3대씩 힘껏 때리라> 고 하였습니다.
저도 3번이나 9대를 아버지를 때렸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는 그런 걸 모른다. 나는 당에 떳떳하다> 하면서 겨우겨우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들은 <이 새끼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 어머니와 누나를 발가벗기더니 마당에 광산에서 쓰는 광차가 4개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꼴뚝 ( 가득)채워 둔 것이 얼어서 곡괭이로 깨더니 (까더니)그 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울면서 발악하니까 선생들이 얼음 속에다 엄마와 누나를 넣고 나오지 못하게 꼭대기에서 발로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앞에 다시세우고 아버지의 죄를 불게하면 <너희는 집에 갈수 있다> 하면서 시켰습니다, 제대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꽁꽁 언 어머니와 누나의 온몸을 군관 혁띠로 때렸습니다.
또 다른 선생한명은 우리어머니의 두 다리 사이를 벌리게 하고 <이년 까치둥지 멋있다>하면서 엄마의 아랫도리 털을 당기면서 뽑았습니다, 다른 선생은 누나에게 <야, 너 대학 다닐 때 아 새끼들과 (청년들)몇 판 했나?>하고 물으니까 누나가 울면서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니까 거짓말한다면서 <벌려라 보자, 검열 하겠다>하면서 맨땅바닥에 눕게 하더니 다리를 하늘공중에 벌리라고 하더니 신발 신은채로 누나의 아랫도리를 후벼대며 그리고는 각자 몽둥이로 비비면서 <쌍년 많이 놀아 봤구먼 그래도 거짓말이야> 하더니 <거짓말 한 대가다, 너 처벌이다> 하더니 가스라이터를 크게 올리더니 <움직이면 밟아 죽인다.> 하면서 소리치며 누나의 밑에 불을 달아 놓았습니다.
누나가 악! 소리치며 비트니까 선생들은 와하고 재밌다고 하면서 고아댔습니다.
그날 우리가족은 모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기절한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때에야 조사가 끝났습니다, 그 후 10일이 지나서 또 가족이 모여 조사를 받았는데 저녁때까지 하다가 생활총화 한다면서 (북한에서는 한 주일에 한 번씩 당 생활총화, 청년동맹 생활총화. 지맹원 총화등을 한다) 다른 선생들은 다 가고 두 명이 남아서 아버지는 기둥에 묶어놓고 어머니는 나무 무지에다가 밧줄로 두 손을 묶어놓은 다음 나는 어머니와 함께 묶어놓더니 누나를 보면서 <이년은 이안에 온지 1년 돼 오는데두 아직 고기 좀 붙어 있구나, 뭘 도적질해 먹구 고기 안 빠졌나?> 하더니 누나에게 <네년 이상하다.
왜 고기가 안 빠지는지 검열해 봐야겠다. 하면서 억지로 옷을 벗겼습니다.
아버지가 묶이운 곳에 가마니와 갈대로 만든 나래가 있었는데 (갈대를 엮어서 두루마리처럼 한 것임)선생들이 그걸 끌어다가 누나에게 그 우에 누우라고 하더니 한 선생이 <이 간나 때 호미루 긁을 지경이다.
더러워서 못 보겠다. 하더니 지하족을 벗고 발 사개 하나를 주면서 광차 속에 있는 물에 적셔서 밑을 깨끗이 닦으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새 발 사개를 품에서 꺼내 갈아 신었다고 함) 누나가 발 사개를 적셔서 닦고 또 닦자 시뻘겋게 되였습니다.
누나가 접어드는 두 선생에게 반항하자 누나를 몇 대 때리더니 다른 한 선생은 말아 피우던 독초꽁초를 (북한군은 권연이 없어 잎담배를 신문지로 말아 피움 )누나의 젖꼭지에 비벼대며 죽여 버린다고 하면서 누나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누나의 얼굴 우에 엉뎅이를 대고 눌러앉아 두 손을 발로 눌렀습니다, 그래도 누나가 발버둥치자 손과 발을 따로따로 묶였습니다.
발하나는 아버지가 묶인 기둥에 묶고 다른 발 하나는 어머니의 몸과 나무 무지에 묶고 두 손은 기둥과 광차 손잡이에 묶어 놓더니 <네 간나, 오늘 걸레 만들겠다. > 하면서 강간했습니다.
그리고는 엄마와 나에게 다른 선생들에게 말하면 너희는 그 시간부터 이 세상에 없을 줄 알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이래도 불지 않느냐 하면서 이런 독종새끼니까 안기부 밀정한다면서 아버지를 풀어 얼음물에 잠그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순간에 아버지는 최대의 힘을 다하여 한 선생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총창을 비틀어 잡고 자기 배에 힘껏 찔러 자살했습니다.
군대들 자동보총에 칼 꽂는 것을 혁띠에 매달아서 옆구리에 달고 다닙니다.
칼집채로 박히다보니 아버지 주변에 피가 숱해 흘렀습니다.
(북한군 AK 자동소총에는 육박전을 위한 총창이 있는데 혁띠에 차게끔 되어있다. ) 선생들이 급해서 연락해서 의사들이 와서 담가에 싣고 가는데 그때까지는 아버지가 숨이 붙어 있다가 가는 도중에 사망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또 기절하면서 신경이 돌아 다음날 정신병자 병동에 들어가 있다가 어느 날 변소 칸에서 인분을 세 사발 되게 먹고 죽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하여 처녀를 강간했던 군인 두 명은 강직 처벌 되여 다른 부대로 갔다고 함. 그 문제로 하여 우에서 검열까지 내려 왔으며 관리소 내 군인들 사상투쟁회의도 있었다고 함) 누나도 잡병이 많이 와서 계속 앓았는데 아버지, 엄마가 죽은 후 머리가 돌아 정신이 들락날락 했습니다, 나는 하나 남은 누나를 살려보려고 내게 나오는 음식을 몰래 몰래 숨겨 제재소에 심부름 갈 때 마다 누나의 호실에 던져 넣었습니다.
매일저녁 사상개조 회의를 했는데 남자들 따로, 여자들 따로 앉히고 공부시키다보니 누나와 나는 마주보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누나는 점점 약해져서 정말 귀신처럼 되었습니다.
머리도 뜯어먹개처럼(마구 헝클어짐) 깎아 놔서 어떨 때는 누나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평양에 있을 때 우리누나는 너무 고와서 (예뻐서) 화보에도 (잡지)나고 청년문학에도 나고 하였습니다.
아빠트 사람들이 정말 영화배우감이라고 (북한에서는 예쁜 여성들을 영화 배우감으로 비유하여 표현한다) 하면서 성격도 조용하고 말이 적고 례절이(예의)밝아서 대학에서랑 누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온 후 별의별 고생을 다 당하고 별의별일을 다 당하면서 누나는 병신이 되고 페짝이 (페인, 식물인간 이름)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8월 달이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관리소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서 죄수들에게 주었습니다.
감자 캐는 건 녀자들이 호미로 감자를 캐놓으면 남자들이 삼태기에 담아 선생이 지키는 곳에 가져다 모아놓으면 소달구지가 와서 실어 갔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여 선생들이 모여앉아 감자구워 먹는다고 경비 서던 선생까지 불더미에 간 사이 남자죄수 3명이 누나에게 달려들어 강간하는데 누나가 저 혼자 죽었습니다.
계속 앓는데다가 며칠 동안 먹지 못하고 있다 보니 감자 캐러 나와서 경비선생의 눈을 피해 생감자를 정신없이 먹었는데 그게 탈이 난데다가 남자들이 달려드니 너무 혼이나가 정신발작까지 일으킨 것입니다.
선생들이 달려와서는 뻔히 기색을 알면서도 <도적질해 먹으니까 죄 만나 죽지>하면서 감자 캔 줄기로 덮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죄수 3명은 호송선생들이 데려갔습니다.
그때 나는 감자 캐는데 없고 산나물 다듬는 조에서 일하다보니 누나가 죽은 줄 몰랐습니다.
계속 안보이기에 선생들에게 누나를 찾아달라고 하면 머리를 때리면서 모른다고만 했습니다.
나와 친한 영수가 알려주어서야 나는 누나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사람이 없어지면 관리소가 야단 칠 텐데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며칠 동안 비가 계속 오니 밖에 내보내지 않고 감방 안에 가둬두기만 하다 보니 소식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8월 10일 전인데 20일이 다 되여서야 다시 감자 캐기가 시작되면서 나도 감자 캐는데 나갔습니다.
밭에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밭 정리하면서 누나의 시체를 찾았습니다.
관리소에서는 10일 그 때 죽은걸 처리해야겠으나 그사이 비가 계속 오니까 다시 감자 캐기 할 때 가서 날라다 처리하려 한 것이었는데 우리 담당선생이 그걸 모르고 나를 그만 감자 캐기에 내보낸 것입니다.
나는 울면서 선생들에게 우리 누나 묻어달라고 했지만 선생들은 가마니에 둘둘 말아 죄수들보고 들라하더니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날 화장터에 갔다가 화장해 버렸습니다.
관리소 안에 화장터가 있는데 한 달에 10명이 넘게 화장했습니다.
누나의 시체를 보니 한손에는 감자줄기가 썩어 있었고 다른 손에는 흙이 있었습니다.
입안에는 감자 썩은 것이 흙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입안의 흙과 썩은 감자를 파내면서 누나를 안고 우는데 선생들이 달려와 나를 때리면서 반장에게 소리쳐 나를 데려가라 하더니 가마니에 말아서 누나를 가져갔습니다.
나는 며칠을 몰래 울며 보냈습니다.
우는 것이 선생들에게 들키면 반혁명분자를 동정한다하면서 사상투쟁무대에 세우기 때문에 우는 것이 들키지 말아야 했습니다.
나와 제일 친한 애가 영수인데 내보다 두 살 더 먹었는데 <남자새끼 그만한 건 참고 견뎌내라. 그리구 잊어버려라. 어떻게 하나 살아야 한다, 통일되면 무슨 일이 오겠지> 하면서 나를 생각했습니다.
영수네는 할아버지가 전쟁 때 악질 치안대로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데 월남 한 것이 들켜 가족이 모두 중국에 가서 숨어 있었는데 3년 만에 잡혀서 여기 온지 4년 되었고 아버지는 그때 인차 죽고 어머니는 2년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형과 누나는 소식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누나가 중국에 있다고 하면서 자기네가 중국에 있을 때 못 먹어 본 것이 없다하면서 중국자랑을 많이 했습니다.
9월부터 버섯 뜯는 조를 만들었는데 나도 거기에 뽑히게 되었습니다.
아직 버섯이 나지 않아 먼저 산나물을 뜯기 시작했는데 한사람이 하루에 두 배낭을 꽉 채워야 했습니다, 영수도 함께 다니게 되었는데 그 애는 자꾸만 도망가자고 했습니다.
무섭기도 하고 길도 모르고 선생들이 총을 들고 지키는데 어떻게 도망치겠는가고 하자 고사리 뜯는 체 하면서 저산만 넘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3년 넘게 여기를 다녀서 잘 아는데 어디에 철조망 있고 어디에 구뎅이가 있고 어디에 지뢰 묻은 것까지 다 안다고 했습니다.
산나물 뜯으러 8일 다녔는데 풀이라도 실큰 먹으니 힘이 좀 났습니다.
우리가 도망치기 전날인데 그날 영수는 큰 뱀을 잡았습니다.
대가리만 뜯어버리고 절반을 돌로 끊어버리더니 손가락을 배에 넣고 밸을 쏟아버리고 껍질 채로 우리는 풀 뜯는 흉내 내면서 씹어 먹었는데 가죽이 너무 질겨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가죽을 버리고 몸뚱이만 꿀꺽꿀꺽 넘기였습니다.
영수는 래일은 꼭 뛰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보슬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선생들은 비옷을 쓰고 사회 사람들이 물건들을 들고 와 산나물과 바꾸는데 술과 바꾸어서 저희들끼리 몰켜 서서 마시였습니다.
감시조장들이 사방에서 보고 있지만 우리는 대담하게 봐둔 곳으로 기여 나갔습니다.
때마침 저쪽에서 지키던 감시조장 한명이 나무꼭대기 올라가 지키다가 비에 나무가 젖어 미끄러지면서 떨어 졌는데 그 바람에 선생들이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거기로 몰켜 갔습니다.
그사이 영수와 나는 철조망을 나뭇가지로 받치고 그 밑으로 넘어가 반대 켠 산꼭대기로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영수가 미리 한말이 몇 사람이 이렇게 도망치면서 아래로 뛰는 바람에 잡혀 총에 맞았다고 하면서 산꼭대기에는 관리소 보초들이 보이기 때문에 거기로 도망갈 생각을 못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쪼끄만 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고 보슬비가 내리면서 안개가 껴 쌍안경으로도 잘 안보일거라 하면서 등잔 밑이 어둡다면서 거기로 가자고 했습니다.
산꼭대기 거의 올라갔는데 총소리가 여러 번 낫습니다.
우리가 없어진걸 알고 찾기 시작한 거 같습니다.
영수와 나는 죽을힘을 다하여 뛰고 또 뛰어 산 2개를 넘었습니다.
골짜기에 물이 흘렀는데 영수는 개들이 혹시 냄새 맡을 수 있으니 물속에 숨자면서 물에서 우리 둘은 저녁 어두워질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대들이나 개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영수는 저 산만 넘어가면 화성 역전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에야 여기가 함경북도 화성군인걸 알았습니다.
관리소에서 칠보 산이 가깝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살고 있는 데가 어데 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면서 산나물 뜯는 사람들이나 소토지(산에 일군 땅에서 부업 일하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멀리 피해서 마을까지 와서 밤이 된 다음 영수와 나는 유치원을 습격했습니다.
거기서 속도전가루 한중태기와 강냉이 쌀 3키로 되게 훔쳐가지고 나와서 한집을 또 털어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 집에는 먹을 것이 없고 배를 삶아서 식장 안에 둔 것이 있었는데 우린 영수와 둘이서 다 먹어버렸습니다.
영수는 기차타면 안된다고 하면서 길로 가지 말고 철길을 따라가자고 했습니다.
세상에 나서 함경북도에는 처음 왔는데 청진까지 오는데 정말 무섭구 힘들었습니다.
걸어서 생기령 이라는 곳에까지 왔다가 화물방통 타고 청진수성에 갔는데 거기서 철이 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중국에 같이 온 청진내기 아이 18살) 철이 형은 자기 혼자서 중국에 7번이나 갔다 왔고 중국에 친척이랑 아는 사람이랑 많다고 하면서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장마당에서 영수와 싸웠는데 영수가 이겼고 또 영수가 먼저 철이 형에게 친구하자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3명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철이 형이 남양교두에서 기다리다가 중국 들어가는 석탄 방통에 붙자고 했습니다.
나와 영수는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두만강물이 깊은데 빠지면 죽는다고 하면서 정광이(광석 1차 가공 분말가루, 무산광산에서 캔 쇠돌 가루 내여 청진제철소에서 철 생산하는 원료임) 중국에 많이 들어가는데 이제 정광방통이 남양 역에 들어오면 거기에 동굴을 파고 숨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먼저 온성에 갔다 오자고 했습니다.
돈을 만들자면 장마당 큰데 가서 한탕 해야 되는데 철이와 영수는 그런 도적질에 펄펄 날았습니다.
온성 주원 장마당 옆 다리 밑에서 자면서 3일 동안 장마당에서 쓰리(소매치기)한 돈이 3만원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정광방통 들어오면 검사원에게 돈을 주고 우리가 파고 들어간 데는 쇠꼬챙이로 찌르지 않게끔 약속한답니다.
먼저 남양군당학교 뒤 산에 올라 중국 쪽을 보았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면 결핵병원인지 간염병원인지 있었는데 거기로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우리는 위험해도 벼랑 끝에다가 나무로 벋치고 그날 밤 거기서 잤는데 영수가 태질하면서 그 기둥을 차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 아래에는 철길이 지나가고 군대들의 잠복초소도 있었는데 악! 소리치며 영수가 떨어지자 사방에서 전짓불(후래시) 들이 달려오더니 왁작왁작 했습니다.
철이 형은 내입을 틀어막으며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면서 나를 끌고 반대 켠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나는 울면서 영수를 찾지 못한 체 도망쳐야 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나는 영수를 부르고 또 부르며 울었습니다.
억울하게 아버지, 어머니, 누나를 관리소에서 빼앗기고 죽으려고 할 때도 영수가 없었으면 나도 죽었을 것인데 지금까지 영수 때문에 살아남았는데 이제는 내 친형이고 형제인 영수마저 죽었으니 어떻게 합니까. 불쌍한 영수는 이렇게 두만강을 앞에 놓고 죽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영수가 죽은 주변의 불룩한 웅덩이와 묘지는 다 뒤져 보았지만 끝내 영수의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4일이 지나서 철이형과 나는 중국 들어오는 정광방통에 숨어서 10월 5일 날 중국안 도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안도에 있는 철이형 친척은 돈 350원 주더니 집에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뻐스를 태워 줬는데 목단강 나가는 차라고 했습니다.
철이형과 나는 목단강에 7일날 도착 했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철이 형이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천진에 오게 되었습니다.
북경에서는 위험하기 때문에 천진에서 기차를 타던지 버스를 타라고 그래서 먼데 안쪽으로 들어가라면서 철이형이 아는 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조선사람 식당에서 밥 먹고 나오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온 기자 삼춘을 만나게 되였습니다.
지금도 눈앞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나, 영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이팝에 고기를 배불리 먹고 있습니다.
먹으면서 항상 생각합니다.
나는 크면 꼭 복수하고야 말겠습니다.
아직은 내가 어려서 잘 모르지만 중국에 와서 남조선 영화도 많이 보았고 남조선사람도 보았습니다.
기자 삼춘이랑 여기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크면 꼭 죽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영수의 복수를 할 것입니다 기자 삼춘이 편지를 쓰라고 해서 지금 쓰는 이편지가 남조선 사람들에게 전달된다고 하니 아버지, 엄마, 누나생각이 더 나면서 울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은혜를 잊지 않고 꼭 갚겠습니다.
[중도와 균형을 표방하는 신문-업코리아(upkorea.net)]